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1
도망친 곳에 천국은 (이하생략) (1)
알비온의 동쪽 변경, 산 속의 휴양지는 공기가 청량하고 시원했다. 방갈로 앞으론 만년설이 쌓인 봉우리가 보였다.
방갈로에 딸린 너른 나무발코니에, 편안한 안락의자를 두고, 차게 식힌 핀토스 와인을 마시니 클레이오는 세상에 더 부러울 게 없었다.
‘그 때 학교 식당에서 나왔던 게 이 핀토스 와인이었구나.’
잡맛 하나 없이 맑고 깔끔해서 여러 잔을 마셔도 좋았다. 곁들인 산지 포도와 산양 치즈도 녹아내릴 듯 맛있었다.
‘이게 사는 맛이지.’
쇠락한 기운이 도는 산지의 휴양지는 적당히 붐비고 적당히 한산했다.
‘사람들이 여럿 내리는 기차역에서 따라 내리길 잘했어.’
귀족들이 이용하는 휴양지가 아니라서 더 몸을 숨기기 좋았다. 등산객이나 요양객을 위한 시설이 빼곡히 모여 있는 핀토스에선 외지인이라도 눈에 뜨일 걱정이 없었다.
게다가 핀토스엔 온천수도 나왔다. 호텔 본관의 욕장에서는 온천욕을 할 수 있었다. 매일 두 번씩 목욕을 했더니 온몸이 매끄럽고 두통도 사라졌다.
간절히 염원하던 대로 그냥 드러누워서 새소리를 듣고, 술 마시고, 풍광이나 봤다.
풍경도 보다 질리면 ‘약속’의 「기억」을 써 옛날에 읽은 책들을 되새겼다.
어제도, 그제도, 사흘 전에도 비슷한 하루를 보냈다. 중간에 도시를 한 번 옮겼을 뿐, 일상은 열흘 내내 비슷했다.
룬데인에서의 나날은 이미 멀고 희미하게 느껴졌다.
‘돈이 있으니까는 이제 뭘 해도 마음이 가볍고.’
편안한 실내복 차림이지만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주머니를, 옷 아래로 툭툭 쳐보았다.
‘수도를 벗어나니 물가가 저렴해서 거의 줄어들지도 않았어.’
앞으로 6주 후에 방학이 끝난다. 그 후 두 달만 버티면, 출석일수가 부족해 제적된다. 술맛이 절로 나는 미래 전망이었다.
‘하, 정말. 이 나이에 뒤늦게 공부를 하고, 운동장 돌고, 징계를 받고 별 짓을 다 했네… 그래도 뭐, 새옹지마인가. 성적 좀 잘 나왔다고 십이억을 다 받고.’
뺑이칠 땐 화났지만 얻은 것도 많았다.
‘돈만 갖고 다녔으면 불안했을 텐데, 이젠 내 한 몸 지킬 정도 마법도 얻었지.’
주머니가 두둑하고, 일신에 괴로움이 없는 상태는 최고였다. 그야말로 꿈꿔왔던 나날.
‘여기서도 나흘 지났으니 이젠 북쪽으로 한 번 가볼까? 거기선 사과 위스키와 캐러멜이 유명하다고? 괜찮아 보이는군.’
안락의자에 누운 채 역 앞에서 산 여행 가이드북을 건성으로 넘겼다. 그러다가도 향이 확 펼쳐진 와인을 한 모금씩 넘기고 있자면 살아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도피행은 도박이었다. 원고가 군데군데 허물어져 저자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는 데에 희망을 걸고, 도피로서 저자의 억지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시험해본 것이다.
그리고 현재까지는 이야기의 흐름이 자신을 연행하러 오지 않았다.
도피 기한이 길어질수록 희망적인 전망이 슬금슬금 자라났다.
앞으로의 전쟁은 동쪽 국경과 수도 주변에서 벌어질 일이다. 시골에 파묻혀 평화로이 보내다보면 난세도 금세 지나가지 않을까?
‘1부에서 끝난 원고이긴 해도, 일단 아서가 왕이 되기만 하면 태평성대가 펼쳐질 것처럼 써놨잖아. 지금 아서는 이전 버전보다 센 것 같으니 더 빨리 왕이 될 수도 있겠지.’
마침내 술병이 다 비었다. 안락의자에서 일어나기도 귀찮아 바닥에 잔을 내려놓고, 반대편으로 뒤집어 누운 클레이오의 입가는 편안하게 풀어져 있었다.
챙그랑―
낮잠을 청하던 클레이오의 귓가에, 유리잔이 넘어져 깨지는 파열음이 끼어들었다.
콰앙― 콰지직―
동시에 두터운 통나무로 만들어진 방갈로 문이 콱 부서져 나갔다.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부서진 문에서 튀어나왔다. 제일 앞서 돌입한 자가 안락의자 위에서 벙 찐 클레이오를 제압했다.
기사의 두텁고 단련된 팔이 종잇장 같은 소년의 몸을 짓눌렀다. 명치가 턱 막히고 숨통이 죄여, 클레이오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사람 살ㄹ―!]”
그건 정말로, 본의가 아니었다.
클레이오에게 위기가 닥치자 ‘약속’은 어김없이 빛을 발했다. 간단한 시동어로 촉발되는 [방어] 마법식이었다.
클레이오를 붙잡고 있던 건장한 기사가 5미터 크기의 서클 밖으로 튕겨 나가, 테라스 너머 덤불에 거꾸로 처박혔다.
‘아, 안 돼!’
클레이오에게서 멀리 서 있던 기사 셋은 에테르 레벨이 높았는지 바닥에 굽 자국을 깊이 남기며 밀려났을 뿐, 난간 밖으로 떼밀리진 않았다.
동료가 다치는 걸 본 세 기사의 눈이 흉흉해졌다. 어린아이라고 얕보다가, 큰 코를 다쳤다. 신고 된 대로, 소년은 전례 없는 힘을 가진 마법사였다.
기사들은 일제히 발도한 후 검기를 뻗쳐냈다. 이글거리는 금빛이 살기로 선뜩했다.
“왕립수도방위대 기사단이다! 소환 불응, 공무집행방해, 에테르 레벨 부정등록으로 마법사 클레이오 아세르를 연행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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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기초 교과서에는, 검사가 에테르를 오용할 때 받을 수 있는 처벌이 맨 앞장에 나열되어 있었다.
이 세계관의 법률은 원래 알던 세계보다 훨씬 엄격하고 가혹했다. 에테르를 사용해, 인간을 뛰어넘는 무력을 내보이는 검사에겐 더더욱.
학교 안에선 모두가 에테르를 쓰니 실감을 못 했던 부분이었다.
생각해보면 에테르 같이 위력이 막강한 힘을 쓰는 사람들이 문명사회에 섞여 사는데, 각종 제재가 있는 게 당연했다.
‘그렇지만 사람이 개도 아닌데 이 LED 개목줄은 뭐냐고.’
이 개목걸이의 이름은 ‘제압구’로서, 바로 그 제베디가 발명한 마도구였다.
본래는 폭주한 검사를 제압하는 용도의 도구로, 에테르 순환을 막는 기능을 가졌다.
제압구는 티플라움이라는 초희귀 광물로만 제작할 수 있어, 그 수가 몇 개 안 됐다.
티플라움은 마석으로도 마광석으로도 분류되지 않는 광물로, 순수한 에테르를 내재하고 있는 물질이었다.
취급이 까다로워 오로지 상급 마법사만 가공이 가능했지만, 한 번 마법을 각인시켜 놓으면 거의 영구적으로 기능했다.
제압구에 걸린 마법은 [정지][차단] 등으로, 다 합쳐서 총 8개.
7레벨까지의 검사라면 자신의 힘으로는 해제할 수 없었고, 이제 알게 되었다시피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27년 전 혁신적인 ‘제압구’를 만들어낸 8레벨 마법사는, 먼 훗날 자신이 가장 아끼게 될 제자가 그걸 차게 될 줄 꿈에도 몰랐겠지만.
마법사들은 대체로 전투 능력이 높지 않았다. 본래라면, 고작 레벨2의 마법사 하나 잡는데 정예의 기사들이 파견돼 제압구를 채울 리 없었다.
클레이오는 내막을 몰랐지만, 오늘 일어난 모든 일이 디오네란 인물의 업적이었다.
17세 소년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아 짜증난 마음과, 남 놀리기 좋아하는 천성이 결합해 대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먼저 아세르 상사의 조사부에서 철도노선을 중심으로 수색을 시작해 실마리를 찾았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디오네가 기사단을 움직였다.
‘우리 도련님은 등록된 레벨보다 높은 성취를 보셨을 겁니다. 퓌시스 학장이 보증한 바, 장래 8레벨 마법사가 될 분이신 걸요. 사춘기 소년이 으레 하는 반항이라 여기실 수 있다는 것 알아요.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위험한 일이 일어날까 싶어 이리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검사와 마법사의 관리 역시 왕립 수도방위대가 관장하는 업무였다. ‘애가 마법 꽤 하는데 튀어서 사고 치면 당신들도 무사 못할 줄 알라.’는 디오네의 호소가 먹혀들었다.
그 결과 연행되어 마을의 유치장에 갇힌 클레이오의 심정은, 황망 그자체일 뿐이었다. 가벼운 실내복 차림에 신발조차 못 신어 맨발이었다.
‘3레벨 올라간 걸 등록 안했다고 사람을 무작정 연행해? 분명 누군가 힘을 쓴 거겠지. 경찰이나 탐정 같이 보이는 자들은 경계했지만, 기사단을 움직일 줄이야!’
저들끼리 말하는 걸 들어보니, 맨 처음 클레이오를 붙잡았던 기사는 올 초에 정식 기사가 된 자로, 내리꽂히면서 다리가 뽀각 부러졌다고 했다.
클레이오를 감시하기 위해 철창 밖에 도사린 기사 역시 눈초리가 곱지 않았다. 불법 구금이 아니냐고 항변했지만 아무도 제대로 된 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소란을 피우자 ‘연행된 상태에서 기물파손을 하면 기소될 수 있다.’는 차가운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
상황이 너무 나빴다.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쓸 수 있는 ‘편집자 권한’만 있었어도… 으으으.’
한편으론 편집자 권한이 있다고 해서, 저자가 이 전개를 물러줄 것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구제불능이라도 저자는 저자고, 무너져가는 글이라도 조역 하나 탈주 못 하게 붙들 강제력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최악의 방식으로.
‘이거, 백수 루트는 꿈도 못 꾸게 됐군. 후우.’
여름이라도 밤이 깊으니 돌바닥 위에선 등이 시렸다. 고작 몇 시간 전만 해도 아늑한 안락의자 위에서 뒹굴고 있었건만.
언제 잠이 들었던 걸까.
불편한 자세로 구겨져 있던 클레이오는 돌바닥을 또각또각 울리는 발소리에 눈을 떴다. 내내 굳건하던 유치장 문이 열리고 있었다.
“도련님!”
이 세상 슬픔과 걱정을 다 담은 얼굴을 하고, 그렇지만 여전히 완벽한 드레스 차림인 디오네가 와락 달려들었다.
잃어버린 남동생 상봉하듯 꼭 껴안고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던 그녀는, 기사들에게 피후견인의 제압구를 풀어 달라 간청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급 연기였다.
레이스 손수건으로 가린 입가가 웃음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걸, 클레이오는 분명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