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3
투자의 정석 (2)
혹시라도 구매자가 안 오면 어쩌나 싶어, 클레이오는 이 도시에서 열릴 공연 목록을 정리해 달라고 호텔 직원에게 부탁했다.
그다음 ‘약속’의 「기억」을 켜 이름을 확인한 뒤, 목록과 대조했다.
‘있다!’
발레계의 혁신가, 프로코러스 백작. 그의 발레단은 시즌 종료 전 마지막 특별무대를, 휴양도시에서 올린다.
악기에도 관심이 많은 백작은 경매에 나올 바이올린을 목표로 왔다가 리라를 구매하게 된다고, 원고에 적혀 있다.
‘경매 마지막 날엔 음악애호가들이 많아서 악기류는 가격이 팍팍 올라가게 된댔지.’
두 입 먹은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클레이오가 디오네에게 말을 걸었다. 접은 침대보 위에 놓아둔 악기에 정신을 빼앗긴 디오네는, 한 박자 늦게 응답했다.
“아, 도련님 불렀나요?”
“그렇게 리라가 마음에 들어요? 제 말도 안 들릴 만큼.”
“악기인 게 문제가 아니라… 성유물이기 때문이죠. 이제와 생각해보면, 당신은 이 리라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던 거군요!”
“그런 셈입니다.”
눈을 가늘게 뜬 디오네는 클레이오를 지그시 쳐다보다 입을 다물었다. 성유물의 가치가 워낙 대단하다보니, 묻는다 하더라도 정보의 출처를 말해주지 않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에 나오는 성유물이란 이름만 들으면 뭔가 대단한 기능이 있을 것 같지만,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썩어 사라지진 않는다는 것 외엔 아무런 특이사항이 없는 물건이 ‘성유물’이라고 분류됐다.
성유물 대다수가 악기였는데, 시장에 나올 때마다 음악애호가나 유물수집가들이 무시무시한 금액으로 구매했다.
‘예술은 잘 모르지만, 가격만 잘 쳐주면 그만이지. 저쪽 세상에 있을 때도 무슨 바이올린 하나에 몇 십억씩 하드만, 그런 거겠지?’
“정말로 도련님은 끝을 모를 사람이네요. 이걸 찾아낸 정보력에다, 리라의 현과 오팔이 구성요소인 줄 알 수 있었던 것… 혹시 ‘분석’이나 ‘예측’ 관련 성흔이라도 있어요?”
그레이어 상회의 후계자이자 연구 마법사인 디오네는 흥분을 못 가라앉혔다. 성유물을 찾아내 복원한 17살의 마법사는, 그녀의 호기심을 무자비하게 자극한 것이다.
“그건 기업비밀입니다. 남보다 조금 나은 정보력과 분석력이 있는 편이라고 해 두죠.”
“어휴! 말해줄 마음 없다 이거죠.”
“지금은 그렇죠.”
“지금은, 이라. 그럼 앞으로 제가 아버님의 사람이 아니게 되면 얘기가 달라질 거란 뜻인가요?
“레이디는 참으로 명석하십니다.”
“파티에 아버님이 참석하는지를 왜 묻나 했더니. 도련님은, 겉보기와 다르게 제법 반골 기질이 있군요.”
“그래서 싫으십니까?”
하늘색 눈동자가 한기를 띠고, 마주한 소년을 탐색한다.
느긋한 자세로 그녀를 응시하는 소년은, 가출 소동을 보냈던 꼬마완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니요, 아주 좋아. 그래서 클레이오 아세르 씨는, 내게 뭘 바라는 거죠?”
디오네는 그들이 알게 된 후 처음으로 ‘도련님’대신 ‘클레이오’란 호칭을 썼다. 아세르 준남작의 차남이 아니라, 클레이오라는 사람으로 본다는 뜻이다.
그녀의 빈 찻잔을 채워주며 클레이오는 말을 이었다.
“이 리라를 경매 마지막 날 출품하고 싶습니다. 순서는 상관없어요. 좋지 않은 시간대라도 미리 연주만 선보일 수 있으면 됩니다.”
“아세르 준남작의 이름을 쓰면 간단하겠지만….”
클레이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버지의 이름 같은 건 전혀 이용할 생각이 없다.
“개인 판매자가 내일 당장 출품하긴 어려울 거예요. 카탈로그에도 싣지 않은 물품이고. 감정에도 시간이 필요해요.”
“복원 과정도 봤고 분석도 끝냈죠? 그럼 디오네 당신이 보증서를 쓸 수 있잖아요. 왕립 수도방위대 학교 졸업생이고, 연구마법사 자격증도 있으니까.”
이번에는 디오네가 뒤통수를 치인 듯한 표정이 됐다.
“레이, 당신은 처음부터 절 이용할 생각이었군요.”
“이용이 아니라 협업이라고 해 둡시다.”
잔을 테이블 위로 돌려놓은 디오네는 더 이상 개인교사가 아니라, 그레이어 상회의 후계자였다.
클레이오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노반테스로 출발하기 전 클레이오 역시 바쁘게 움직였다. 캔튼 부인은 수도의 사정에도 꽤 밝아서, 디오네 그레이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레이디 디오네는 은밀히 이름이 난 수완가였다. 학생일 때부터 가업에 참여해 상회의 실질적인 운영을 맡았고, 사교계에 데뷔하자마자 엄청난 인맥을 쌓았다.
그러니 관직도 맡지 않은 젊은 여성이, 도망간 학생 하날 잡자고 수도방위 기사단까지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붙여준 사람이니 떨어낼까도 생각했지만, 디오네는 오히려 포섭하는 편이 이익이라 판단됐다.
“흐으음, 수수료는 얼마나 생각해뒀나요.”
“감정비는 통상 2,000디나르로 압니다만, 급행발급이니 4,000디나르 어떠십니까.”
경매규칙가이드를 끝까지 읽어둔 클레이오에게 협상은 어렵지 않았다. 디오네는, [수복] 마법이 성공한 순간 이미 클레이오에게 한 발 넘어와 있었다.
“뭐어, 재미있을 거 같긴 한데요.”
“트리니티 경매회사도 본사는 수도에 있죠. 수도상인조합 조합원들끼린 수수료 우대가 있잖아요? 그레이어 상회의 조합원 자격으로 이걸 출품해 주면 낙찰금액의 2%를 수수료로 지급하겠습니다. 이것도 통상금액보다는 높지요.”
부채를 내려놓고서 팔짱을 낀 디오네 역시 앞뒤를 맹렬히 재어보는 중이었다.
‘경매규칙가이드를 가져다준 게 그제인데, 벌써 내용을 다 파악했잖아. 이런 애가 무슨 늦된 차남이라는 거야.’
마침내 디오네 역시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그런데 리라를 연주해줄 사람은 있어요?”
“지금부터 구해야죠.”
“3%, 제가 연주부터 경매목록 추가와 홍보까지 책임져 주죠.”
“되겠습니까?”
“받은 만큼 일하는 게 제 모토에요.”
“그렇다면 계약서 먼저 씁시다.”
“클레이오 씨는, 철저하기도 하군요.”
둘은 간이 계약서를 쓰고 아래에 [확약] 마법식을 손으로 쓴 뒤, 각자 에테르를 불어넣어 각인했다.
마석 수정 가루를 씌운 정식 계약서처럼 ‘죽음’같은 페널티까지 줄 순 없었지만, 금전계약 정도라면 충분히 효력이 있는 계약서였다.
[확약]에 깃든 에테르가 꺼지고 나서, 디오네는 문득 생각난 듯 요구사항을 더했다.“이거와 별개로, 드레스도 한 벌 주문할게요. 그것도 비용으로 달아 줘요.”
“얼마든지요.”
***
디오네 그레이어는 천부적인 바람잡이였다.
옛 여신의 차림처럼 드레이프가 늘어진 흰 드레스에, 머리에는 도금한 월계관까지 쓰고 경매장 무대에 올랐다.
‘어렸을 적 익힌 재주에요. 리라는 흔히 배우는 악기가 아니라서, 급히 연주자를 구하느니 내가 하는 게 나아요.’
클레이오는 반신반의 했지만, 만일 디오네의 연주가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워낙 외모가 뛰어나니 충분히 주의를 끌 거라 여겨 그대로 일을 진행시켰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디오네의 요정 같은 몸짓에 수준급 리라 실력, 청아한 목소리가 더해지니 분위기는 잘 살았다.
리라는 음색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사람의 감정을 휘어잡고, 평범한 노랫말도 최고의 시처럼 들리게 했다.
프로코러스 백작은 눈물을 흘리며 기립박수를 쳤다. 그를 따라 좌중의 모두가 일어나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치열한 접전 끝에, 테르프시코레의 리라는 595만 디나르에 백작에게 낙찰됐다. 원고에서의 본래 낙찰가보다 95만 디나르나 높은 금액이었다.
‘수수료와 출품료를 전부 다 떼어도 550만 디나르군. 다음 일을 진행해도 되겠어.’
대금은 어음이나 수표로 받지 않고, 노반테스에 오기 전 새로이 개설한 아우렐 은행 계좌를 경매회사에 알려주었다. 아버지와 대를 이어 거래했다는 은행과는 거래를 중단했다.
그 날 저녁, 디오네에게도 바로 수수료를 지급했다.
29만 7,500디나르의 입금확인서를 받아든 디오네는 그야말로 작약이 개화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여기, 감정비 4,000디나르는 현금으로 드립니다.”
“클레이오 씨는 도의가 있고 사리에 밝아서 좋군요. 그렇죠, 수수료는 빠른 지급이 이상적이죠.”
“레이디 디오네 같은 고급 인력의 조력을 받았는데 당연한 일 아닙니까.”
머리에 썼던 월계관 장식을 빼내 내려놓은 디오네는, 꽤 진지한 말투가 됐다.
“이제 보니, 당신 정치가나 관료가 되는 건 질색인 거죠? 아버지 뜻대로 하기 싫어서 자금을 모으기 시작한 거잖아요.”
클레이오는 대답 대신 지그시 미소만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출씩이나 해야 했던 이유도, 이해가 가요. 나라도 누가 내 인생에 왈가왈부하면 절대 못 견딜 테니까.”
“이해해주시니 다행입니다. 진작 말씀드렸으면 절 그렇게 엄청난 방식으로 붙잡아오지 않으셨으려나요?”
“아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그때 난 당신을 돌보기로 당신 아버지와 계약을 했으니까. 입금된 만큼의 신의는 지켰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지금은요?”
“아세르 준남작이 제게 지불한 값은 톡톡히 치러드린 것 같네요. 이제 새 계약서를 써도 좋을 때이죠.”
‘됐다. 걸려들었어.’
“솔직히 부친의 꼭두각시가 되어 정치 같은 거 하는 인생에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우리 그냥 돈 벌어요. 마도구의 유통은 댁의 부친도 손 못 대는 영역인 게 매력 있죠?”
디오네 역시 원고에는 없던 존재였다.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는 인물. 그렇지만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었다.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지만.’
“성유물을 찾아낸 일은 결코 우연일 수 없어요. 당신에겐, 내게 밝힐 수 없는 모종의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영광입니다.”
“당신의 정보력과 복원실력을 잘 살릴 수 있게 판을 짜볼까 해요. 우리 상회 창고에도 복원이 안 된 마도구들이 꽤 있는데, 전 마석 가공 전문이라 손을 못 댔거든요. 그걸 하루라도 빨리 상품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아주 애가 탄답니다. 당신이 그걸 손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가능합니다.”
짧고도 확신에 찬 대답에 디오네는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
클레이오로서는 대환영이었다. 그레이어 상회의 창고에 있는 마도구들을 복원시켜 준다면, 상당한 수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대단한 분석 실력 따윈 없었지만, 그걸 대신해 ‘약속’의 2단계 기능 「이해」와 원고에 대한 기억이 있으니까.
원고를 넘겨보니 떠벌이기 좋아하는 바스코는 어떤 식으로 재료를 모아 마도구를 복원했는지 상세히 떠들어 놨다.
그걸 바탕으로 한다면, 해볼 만한 일이었다.
‘이렇게 곧바로 제안을 할 줄은 몰랐어. 이 아가씨는 상회 경영에 열의가 상당한 모양이군.’
“헌데, 레이디 디오네는 풍족하게 자란 귀족 자제답지 않게, 꽤 실질적인 사업 감각을 가지고 계시군요.”
다정한 손길로 4,000 디나르를 핸드백에 집어넣던 디오네가 살짝 턱을 치켜들었다. 묘한 표정이었다.
“풍족하게요? 물정 모르시는 건 도련님이지 제가 아니지요. 가난한 귀족은 가난한 평민보다 더 비참한 법이에요. 사흘을 내리 굶고도 동냥조차 못 나서죠.”
“……!”
“원래 그레이어 자작 작위는 내 아버지에게 있었어요. 평생 1디나르도 벌어본 적 없는 양반이었죠. 그자가 죽지 않았다면, 제가 굶어죽지 않았을까요?”
상상도 못 해본 배경이었다. 디오네는 평생 찻잔보다 무거운 건 들어본 적 없고, 흰 빵만 먹고 산 귀족가의 아가씨처럼만 보이는 사람이었다.
“10년간의 탐험에서 돌아온 작은아버지 바스코가 날 거뒀어요. 교육을 시키고 지원을 해 줬죠. 사람에게 자리를 주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건 무엇보다 돈이랍니다. 어떻게 그걸 등한시 하겠어요?”
“그 점에서 레이디 디오네와 제가 공감하는 부분이 있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아세르 준남작의 자녀가 이런 절박함을 아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지지만요.”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공범자이자 동업자의 미소가 마주 피어났다.
“자세한 사항은 차후에 계약서를 쓰며 제대로 논의하도록 합시다. 저는 석간신문을 좀 사러 가야겠습니다.”
“아침에 신문 보지 않았어요?”
“호텔에선 석간은 준비해주질 않아서요. 피곤하시면 먼저 쉬십시오.”
“쉬긴 뭘 쉬어요, 연회에 갈 준비를 해야죠!”
“아직 9시까진 한참 남았지 않습니까?”
“뭐가 한참이에요. 4시간이면 준비하긴 빠듯해요. 제가 먼저 채비를 하고 있을 테니, 얼른 다녀오세요.”
삼십 분 안에 돌아와야 한다는 디오네의 당부를 뒤로 하고 호텔을 나섰다.
클레이오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이래, 매일 주요 전국지를 사 샅샅이 살폈다. 계속 허탕이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단신까지 꼼꼼히 읽었다.
가판대에서 일간지 5종을 모두 산 뒤 벤치에서 훑어봤다.
마침내 오늘자 석간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예상대로 돌아가는군.’
듀브리스 시 부근 ‘왕의 숲’ 지역의 이상 현상은, 티플라움 광산이 발견될 전조였다. 알고 있던 사실들이 그대로 현실이 되니, 상쾌한 느낌마저 들었다.
‘듀브리스의 티플라움 광산은 앞으로 대륙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지.’
에서 묘사되는 티플라움은 알비온의 군사력을 향상시킬 핵심적 소재다.
‘하지만 광산은 왕실 부지에서 발견돼. 개발도 왕실에서 하고, 운영도 완전히 왕실이 전담할 거라 주식으론 재미를 못 보게 돼 있어.’
돈 나올 구석은 다른 데 있었다.
‘이 세계에서도 부동산은 불패다!’
바로 그 일의 초석을 쌓기 위해, 클레이오는 노반테스에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