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31
신의 일 (1)
늦은 저녁, 클레이오의 기숙사 응접실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기숙사를 같이 쓰는 네보는 응접실의 캔튼 부인 눈치를 슬금슬금 보더니 인사를 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쏙 들어갔다.
네보에 이어 류바 사감이 모자를 벗으며 들어왔다. 동행인 없이 혼자였다.
캔튼 부인은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예의 바르게 물었다.
“다녀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헌데 와 주실 수 있는 마법사가 한 분도 안 계시던가요?”
“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이렇게 되어 유감입니다.”
캔튼 부인이 건넨 기디온의 소개장을 들고 수도방위대 본부에 방문했지만 허사였다. 그 힘센 소개장으로도 없는 마법사를 만들어낼 순 없었다.
므네모시네의 문이 열린 후 기억된 세계가 파훼될 때까지 사흘간, 당장 소집 가능한 알비온의 모든 마법사들은 제베디를 도와 기후 마법을 재생성하는 결계에 에테르를 보탰다.
‘혹한’을 저지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던 터라, 소집 가능한 3레벨 이상 마법사 중에는 성한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학생이라도 레벨이 적합한 아이들은 결계를 유지하는 데 동원됐다. 지금은 에테르가 고갈되어 모두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메이지 마스터인 제베디와 수도방위대 마법단장인 타디우스 예츠켈까지 졸도해 있으니, 그보다 덜 노련한 마법사들이야 오죽할까.
강을 바닥까지 얼려버리는 재난에서 수도를 지켜내는 일은 그토록 지난했다.
사정을 알면서도 캔튼 부인은 마음이 초조하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까 동급생과 후배들이 와서 모두 한 차례씩 클레이오에게 [경감]을 걸어주었다더니, 역시 큰 소용은 없었나 보지요?”
캔튼 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학생들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갓 2레벨 정도 된 어린아이들 마법으론 별다른 차도를 볼 수 없었다.
므네모시네의 문에서 나온 클레이오의 상태는 매우 나빴다.
마법에 조예가 없는 캔튼 부인도 이제는 여러 번 봐온 터라 에테르 고갈의 징후에 대해선 잘 알았다.
하지만 저 증상은 절대로 에테르 고갈이 아니었다.
도련님의 온몸은 불덩이처럼 열이 펄펄 끓었다.
게다가 금빛 도는 먹선이 오른팔 전체의 피부 아래서 뒤엉킨 채 이따금씩 꿈틀댔다. 그럴 때마다 가냘픈 팔에서는 질금질금 피가 묻어났다.
아서와 이시엘은 입을 모아, 기억된 세계의 대마도구가 깃든 흔적이라 말했다.
캔튼 부인은 그런 마도구 따위 내던지고 싶을 뿐이었다. 대단하고 엄청난 물건이면 무엇 할까. 도련님의 몸을 괴사시키고 있는데.
의사를 불러 보아도 마수에게 베인 외상만 치료할 수 있었을 뿐, 문제의 근본 원인을 없애진 못했다.
‘이건 병증이 아니라 마법과 연관된 문제입니다. 의술로는 더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란 말을 남기고 왕진 가방을 챙겼다.
설상가상으로 학교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워서 드러내 치료자를 찾기가 어려웠다.
캔튼 부인은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그녀의 도련님을 둘러싼 움직임 하나하나가 어떻게 와전될지 모를 판이었다.
전대미문의 강추위, 기억된 세계의 폭주, 그리고 마법사들의 활약이 이어진 직후였다.
사건의 한복판에 놓인 수도방위대 학교를 취재하기 위해 기자와 호사가들이 잔뜩 몰려왔다.
다행스럽게도 학교의 입구는 완전히 봉문되어 있었다.
므네모시네의 문이 닫힌 직후, 에테르 고갈로 인해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제베디가 현명하게 처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로사 교수에게 학장 권한을 임시 위임하며 명했다. 모든 방문객을 막고 학교를 봉쇄하기를.
앞날을 내다본 듯한 대처였다.
제베디의 명을 보강해 주듯, 오늘 오전부턴 무려 내무보안국에서도 요원들이 파견되어 숨어드는 자들이 없도록 철통같이 수색을 벌였다.
학교 정문으로 잔뜩 몰려든 인파에, 캔튼 부인조차 앞문으로 못 들어오고 류바 사감의 안내로 식료품 운반용 통로를 이용해 들어올 수 있었다.
달칵.
다시금 현관이 열리고 아서와 이시엘이 들어섰다.
이시엘은 평소와 같이 단정한 교복을 입었고, 아서는 드물게 말쑥한 차림새였다.
차가운 바람을 묻히고 들어온 3왕자는 활기차게 웃으며 방 안의 분위기를 일신했다.
“사감 선생님, 그리고 캔튼 부인. 좋은 소식입니다. 레이를 봐주실 분이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
두 손을 꼭 모으고 있던 캔튼 부인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느 귀하신 분이 와 주시는 건가요?”
“이스토리아 대주교님이십니다.”
창백해진 캔튼 부인은 곧 기절할 것만 같았다.
“잠들어 계신 대주교님이 어떻게…?”
얼른 다가온 아서는 캔튼 부인의 팔을 가볍게 잡으며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어제 깨어나셨습니다. 소식을 전하니 클레이오를 봐주러 친히 이곳으로 행차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분명 나을 테니, 레이가 일어나면 들일 수프라도 데워 놓는 게 어떨까요.”
“감사합니다, 아서 님. 아서 님도 몸이 편치 못하시건만 저희 도련님을 위해….”
“저는 괜찮습니다. 레이 덕에 살아있는 거나 마찬가진데, 정작 친구가 쓰러진 걸 보고만 있으면 면목이 없잖습니까.”
여전히 웃음기 띤 청록빛 눈 안으로 캔튼 부인은 포착하지 못한 깊은 어둠이 스쳐 지나갔다.
.
.
.
클레이오는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수 없었다.
눈꺼풀 안쪽에서 이상한 빛깔이 점멸했다.
열과 아픔 속에서 의식이 깜빡깜빡 꺼졌다.
그렇게 하염없이 암흑 속을 표류하고 있었다.
기나긴 여정은 찬찬히 멈추었다.
언젠가부터 고통이 가셔 있었다.
에테르도 무엇도 감지되지 않는데 온몸을 얽어매던 갖은 아픔이 가벼이 덜어졌다.
마법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몸 깊은 곳에서부터 생명력이 차오르는 듯한 상그러움….
그는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 작은 가스등 하나만 밝혀진 자신의 기숙사 방이었다.
새어 나오는 숨에 비정상적 열기가 줄었다.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고개를 가눌 수 있었다.
갑작스런 호전이 놀라워 클레이오는 어리둥절해졌다.
“이게 뭐지….”
“신성력의 흔적이지.”
방의 주인은, 베개에 고개를 파묻은 채 누워있지 않았더라면 필시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을 만큼 놀랐다.
정말, 초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홑겹의 새하얀 사제복만 입은 레지나 이스토리아 대주교가 기숙사 침대 맡에 책상 의자를 끌어와 앉아있는 모습은.
“여기 어떻게… 아니, 신성력은 사라진 거라고, 어….”
클레이오의 목소리는 끊일 듯 여렸다.
그의 말을 잘 듣기 위해 레지나는 시트 위를 가벼이 짚고서, 클레이오의 곁으로 기대왔다.
“네 친구의 부탁을 들었지.”
“그동안 잠들어 있던 게 아니었어?”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어. 클레이오, 네 덕이란다. 서사개입도가 높이 차올라 나 역시 눈을 뜰 수 있었어.
물론 이 힘은 진신의 신성력이 아니야. 내게 남은 것은 규칙에 대한 희미한 믿음뿐. 이런 걸로라도 네 아픔을 덜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열로 뻑뻑한 머릿속에 스미는 레지나 이스토리아의 목소리는 퍽 다정했다.
1891년 이래 레지나는 깨어나지 않았다. 잠든 모습밖에 보지 못한 지 일 년이 넘었다.
클레이오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첫사랑을 닮은 대주교가 기숙사 침실의 머리맡에 앉아 자신의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있는 꿈이라니.
‘목적과 욕망이 분명한 꿈이긴 하군.’
클레이오의 눈이 몽롱하게 감겨들었다.
고열은 내렸지만 아직 나른함이 남았다. 빈약한 몸이 감당해내지 못할 병증을 겪은 탓이었다.
하지만 그는 잠들지 못했다.
대주교는 더 낮게 고개를 숙였다.
거의 키만큼 기른 새하얀 머리카락이 클레이오의 창백한 뺨으로 드리웠다.
“꿈이 아니란다, 클레이오.”
가지런한 손끝이 클레이오의 뺨에 와 닿았다. 차갑고 건조했다.
그 물리적 실체는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
클레이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거기 있는 건 정말로 레지나 이스토리아 대주교였다.
다시금 그 청정한 기운이 지친 몸을 감싸 왔다.
빛도 에테르의 움직임도 없이 일어나는 치유는 그야말로 기적처럼 느껴졌다.
왼팔의 피부 아래를 갉아대던 마도구의 기색도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똑- 딱.
그리고는—.
벽시계의 추가 멈추었다.
세상이 침묵에 빠져들었다.
창가를 스치던 나뭇가지의 소리, 강 위를 쓰는 물결의 살랑임, 침실 문 너머 응접실에서 도란도란 낮게 들리던 캔튼 부인과 이시엘의 목소리.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인식과 동시에 대주교의 하얀 머리채가 중간에서 후두둑 끊기더니 소멸해버렸다.
마치 육신을 제물로 바쳐 기적을 이룩해내는 것처럼.
클레이오에게 말을 전하기 위해 대주교가 다시금 허리를 숙이자 더 잘 보였다.
등허리 길이로 짧아진 머리카락은 끝이 일직선으로 잘려 남실거렸다.
“지금 내가 쓰는 힘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힘이지. 신이 전능하지 않아 그것이 나는 슬프다.”
당황한 클레이오는 반사적으로 ‘민산’이란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그 말은 혀 아래서 묶여버렸다.
그렇다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스토리아 대주교? 클리오?
그 고민을 알아챈 듯 민산은 조금 웃었다.
“클레이오, 날 레지나라고 불러 주겠니?”
“레지나….”
“그래. 내겐 묻고 싶은 게 많겠지.”
그랬다.
하지만 너무나 갑작스럽고 경황이 없어서 그런지, 모든 의문이 꽉 뭉쳐 목을 막았다.
침대에 앉은 채 몸을 모로 기울인 레지나는 재촉 없이 기다렸다.
힘겹게 목을 가다듬은 클레이오가 어렵게 입을 뗐다.
“…영원한 겨울의 도시는 봉쇄 중인 레닌그라드였어. 이곳의 역사가 아닌 이전 세상의 과거. 다른 모든 기억된 세계들도 다 그랬지. 어째서 이전 세계의 역사가 문 저편에서 반복되는 거지?”
지금의 세계를 쓴 칼리오페가 우리의 세계를 읽었기 때문일 뿐이라기엔 이번의 기억된 세계는 지나치게 생생했다.
읽는 것만으로 그 모든 걸 재현할 수 있나?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의 의문에 레지나는 선선히 답했다.
“그렇지만 클레이오, 너도 가본 적 없는 장소에 대한 글을 읽기만 하고서도 그곳이 어디인지 알아냈잖아.”
“…이곳의 읽기가 이전 세계의 읽기와 같지 않다는 건 네가 일깨워준 사실이지. 하지만 오로지 읽는 것만으로는 포석 하나와 항구의 들풀까지, 그 모든 상세를 빠짐없이 만들어낼 수는 없어.”
평생 지독한 열정으로 글을 읽어왔으나 창작의 재능이 없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이었다.
클레이오는 버려진 저택의 침실에 덩그러니 열려 있던 수트케이스, 이니셜이 새겨진 셔츠, 닫힌 일기장을 떠올린다.
“그 광경이 정말 칼리오페가 들여다본 기록의 재현에 불과한 건가? 신들은 멀리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실제 같은 세상을 만들 수 있어? 그건 정말 칼리오페만의 기억인가?”
레지나는 뭐라 해석할 수 없을 복잡한 표정으로 입꼬리만 끌어올렸다. 미소에는 미달하는 표정이었다.
“네게 무엇을 더 숨길까. 기억된 세계는 사라진 이들의 집단 기억이 응집된 공간, 지난 세계의 과거가 맞아.
칼리오페의 기술 체계 바깥에 있는 곳, 이전 세계와 지금 세계의 사이에 패인 틈이자 유예이지.
그곳은 지나가 버린 과거가 오로지 기억만을 기반으로 재구성되는 장소. 미처 고통이 해소되지 못한 과거, 통일된 해석에 이르지 못한 이견들이 적체된 곳.
그 장소는 엄정한 실재가 아니면서도, 실제보다 더 진실된 공간일 거야.”
기억.
어떠한 집단의 기억은 세상의 모든 역사적 사실이 그러하듯 일정한 공통의 동의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
어떤 기억이 남을 것인가, 남겨진 기억이 어떤 방식으로 정전화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일종의 영구적 분쟁이다.
봉쇄되었던 레닌그라드 역시 분쟁의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영웅적 투쟁의 도시 이상으로, 체제의 실책이 낳은 지린내 나는 고통의 도시로서.
과거의 세계와 현재의 세계를 분리하던 마음의 격벽이 불쾌하게 흔들린다.
클레이오의 목소리 역시 떨린다.
“어째서 그런… 진짜 기억의 장소가 이쪽 세계에선 고작 보물 창고인 환상의 이세계 정도로나 취급되는 거지?”
“아니, 달라. 그곳은 이제 환상의 공간이 아니야. 너희가 들어가 보고 듣고 지나온 장소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이젠 사람들의 기억 속에 경험과 모험담으로서 실재하게 되지. 이곳, 알비온 왕국이 실재인 이상으로 분명하게.”
“그렇다 한들 왜 이렇게 소모적인 형식으로 이전 세계와 여기가 이어져야만 하는 거냐고.”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이미 지나간 역사의 세계가 남긴 기억들이 이곳에서 재현되어야 하는지.
왜 과거는 재난으로 화해 그것과 무관한 현재를 덮쳐오는 것인지.
레지나는 핏대가 선 클레이오의 목을 손등으로 달래듯 쓸어 주었다.
“왜냐하면, 이곳이 마지막 세계이니까.
망각과의 투쟁이야말로 기억의 목적이지 않니.
이계의 과거가 이곳과 연이어 연결되는 건, 이전 세계들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마지막 세계에 적재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야.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사건이 전승될 필요는 없어. 신화는 일어났던 일의 범주를 계승시키는 것으로 그 역할을 다하니까. 어떤 형태로든 마지막 세계로 전승이 이어지면 집단 기억은 반드시 이전돼.
그렇게 과거는 망각되지 않고 이야기 속에서 살아남는 거야. 이곳, 마지막 세계에.”
클레이오는 멍한 머리로 떠올린다.
저것은 신화의 모범적인 역할이었다.
과거의 기억을 후세로 잇도록 만드는 매개체, 역사적 엄정성과 구체성을 잃은 대신 서사적 원형으로 축소되어 오래도록 전해지는 이야기들.
그렇게 이어진 모든 과거의 기억이 도달할 곳은 이곳뿐이라고 클리오는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 세계.
클레이오는 이 세계로 넘어오던 순간에도 그 말을 보았다.
[―약속의 고리는 차원과 차원을 잇습니다. 마지막 세계에 진입하여 ‘약속’의 기본 기능이 개방됩니다.]그는 머릿속에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칼리오페는 지금의 이 세계를 주관한다.
클리오는 클레이오의 영혼이 태어난 세계를 다스렸다.
에라토 역시 한때는 그녀의 세계를 거느렸다.
“마지막 세계… 칼리오페의 세계가 세계 중에서도 마지막 세계라.
레지나, 너는 원래 역사의 세계를 관장했다 했지. 그렇다면 너희 뮤즈들은 본래 각자 자신이 관장하던 세계를 가지고 있었단 건가?”
땀에 젖은 클레이오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넘겨주며 레지나가 말했다.
“그래. 우리 자매는 모두 아홉이고, 우리 각자에게는 각자가 창생(創生)한 세계가 있었지.
사랑의 세계가, 합창의 세계가, 천문의 세계가, 비극과 희극의 세계가, 그리고 서정시와 찬가의 세계가….”
사랑의 뮤즈인 에라토, 합창의 뮤즈인 테프시코레, 천문을 관장하던 우라니아, 비극의 멜포메네, 희극의 탈리아, 에우테르페와 폴리힘니아.
레지나가 언급한 일곱 세계의 이름은 모두 무사 여신이 관장하는 영역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세계는 사라졌다.
레지나의 말에 박힌 진실을 깨달은 클레이오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에라토는 자신의 세계에서 살해당했고, 그에 잇따른 멸망 이후 다른 세계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클리오는 역사의 세계가 아니라 칼리오페의 세계에 와 있다.
클레이오가 말했다.
“뮤즈는 자신이 다스리는 세계에 거하는 법이라며. 그렇다면 네 세계는? 거긴 어떻게 된 거지?”
그 세계.
학살과 전쟁과 식민과 차별로 얼룩진 역사의 세계.
미련이 남은 것도 아니고 사랑한 적도 없는 세계이지만, 흔적만 남긴 채 멸망하기를 바랐던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와 동생이 실제로 살았고 죽었던 세상.
그곳은 그가 태어났고 자랐으며, 진정한 현실로 여겼던 차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