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39
세 명의 리오그난 (3)
이번엔 제법 성의 있게 왕세자를 배웅하며 허리를 숙였다.
멜키오르는 손을 두어 번 내젓고는 밖으로 나섰다.
슬슬 머리를 들어 보니 닫히는 문 바깥으로 태서턴의 근위대 망토 끝자락이 보였다가 다시 사라졌다.
기척이라곤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여전히 왕세자를 수행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전 원고에서 태서턴은 므네모시네의 문을 부수는 주요한 도구 중 하나였다. 소드마스터의 에테르 그릇은 대단히 훌륭한 기폭제였다.
희미했던 미소는 또다시 클레이오의 얼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은밀한 폭정을 펼치고 프란과 아서를 고통받게 한 자이기는 하나… 아직까진 에테르를 폐하지 않아, 무수한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지는 않은 멜키오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
왜 저자의 대리인인 자신이 그를 돕는 형국이 된 것일까?
이번 원고라고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그리 다르지 않을 텐데.
‘어쩌면 멜키오르가 미치는 걸 유예해서, 므네모시네의 문이 닫혀 에테르가 폐하기 전에 나나 아서가 뭔가를 하길 원하는 건가?’
큰 방향은 이해했다 쳐도 세부적인 데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저자의 의도가 클레이오를 짜증나게 했다.
‘그리고 배고파.’
꼬르르르륵.
기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도 못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꼬르륵 소리가 클레이오에게서 났다.
답답한지 정복의 첫 단추를 풀던 아서가 호들갑을 떨었다.
“으아! 레이, 배 많이 고파? 꼬르륵 소리가 엄청난데. 점심 안 먹었어?”
“점심은커녕 아침도 아직이다, 인마.”
아서는 클레이오에게 멜키오르와 무슨 일이 있었냐거나, 왜 궁성에 와 있었냐고는 묻지 않았다.
[경감]의 사정에 대해선 아서 역시 잘 알았다. 클레이오가 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그리고 아서 자신이 막아 줄 수 있는 일도.
그래서 그는 그저 밝게 웃었다. 하트리아 내해를 굳힌 듯한 청록빛 눈을 빛내며.
“아, 형이 또 그랬어? 당황스럽지. 힐레이다에게라도 요깃거리 좀 부탁해볼까.”
“너는 참 마음도 편하다. 여기서 밥이 넘어가냐.”
“뭐, 독 든 것도 아닌데.”
클레이오는 1초쯤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라도 준비해 줘.”
“좋아!”
마차를 타는 곳까지 나가려 해도 궁성은 넓었다.
「이격」을 끄자마자 훅 하고 현기증이 닥쳐온 터였다. 혈당이 너무 떨어져서 심장이 쾅쾅 뛰고 손발에서 식은땀이 나는 상태론 궁을 벗어나기도 전에 저혈당 쇼크로 쓰러질 것 같았다.
드는 생각은 딱 하나였다.
멜키오르 개새끼.
아직도 30% 이상은 한국인인 자신의 밥을 굶기다니.
아니, 서사개입도가 100%라 해도 밥 안 먹이는데 분노하지 않을 순 없을 거다.
.
.
.
클레이오와 아서는 영빈관의 남측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왕족과 공작보다 신분이 낮은 방문자를 위한 건물이었지만, 아서에게는 궁성에 들를 때마다 묵는 곳이라 익숙한 장소였다.
아서는 영빈관 홀과 붙은 대 만찬실 대신 남측 식당에서 식사하는 게 좋다고 했다. 남측 식당은 크기가 작고, 입구에서 멀어 사용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3왕자 역시 검사로서 명성을 얻으며 세인트 파마 궁을 거처로 지정받긴 했다.
그렇지만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오래에다 기본적인 관리만 된, 북문 근처에 위치한 미술품 소장용 궁에 머무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아서는 여전히 영빈관 빈객 신세였다.
클레이오가 코스의 두 번째 접시인 글레니글스 파테 한 조각을 잘라 입에 넣다가 분통을 터트렸다.
“사람 불러다 실컷 들러리로 써먹고는 대접은 뭐 이러냐.”
“에이, 너무 화내지 마. 그리고 영빈관이 밥은 맛있거든. 전 세계의 외교관과 관료들이 알비온 궁성에 들르면 여기서 식사를 하게 되니까, 힐레이다가 제법 신경을 쓴다고.”
꿀꺽.
클레이오는 한 입 넣었던 파테를 우물우물 삼켰다.
아서의 말은 진짜였다.
딜과 버터로 풍미를 더해 곱게 간 연어, 송어, 훈제 고등어를 삼단으로 켜켜이 쌓고, 그 위를 다시 훈제 연어로 감싼 후 편으로 자른 파테는 노동력이 들어간 만큼 일품으로 맛있었다.
“그래도 의전이란 게 있는데, 밥이 맛있다고 넘어갈 문제냐? 어이, 왕자님?”
“지금 그 왕자한테 불경죄에 걸릴 것 같은 소릴 하고 있는 건 클레이오 경인데요.”
“야!”
클레이오가 도끼눈을 뜨자 아서는 또 딴청을 피웠다.
“오, 나온다나온다. 비프웰링턴 저것도 완전 맛있어. 먹어 봐.”
시종이 날라 온 다음 접시는 비프웰링턴.
질 좋은 쇠고기 안심 덩어리에 잘게 썰어 졸인 포르치니 버섯과 페스트리를 감싸 구운 요리였다.
인심 좋게 두 조각씩 잘라 서빙되었는데 단면을 보니 안은 분홍빛, 밖은 파사삿 부스러지는 파이지가 노릇했다.
그것 역시 맛있었다.
곁들인 매시트포테이토와 방울양배추까지도 조리 상태가 완벽했다.
조용한 가운데 두 사람의 커트러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드물게 클레이오도 과식했다.
식사 접시를 싹 비우고 오렌지 수플레가 나온 후에야 대화는 재개되었다.
보들보들 따끈하게 부풀고 고소한 버터에 그랑 마니에르 향이 감도는 수플레는 입에 넣자마자 부드럽게 풀어졌다
클레이오의 은 스푼이 빠르게 그릇을 오가는 걸 보며 아서는 실실거렸다.
“괜찮지?”
“이런 음식이 나오는 궁에서 왜 사람을 굶기는 건지.”
“형은 원래 그런다니까. 만찬 같은 일정 없으면 식사 시간을 잘 못 알아채.”
“그게 원래 그렇다고 할 문제냐? 익숙해져서 비정상성을 못 느끼는 거지.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마수가 나오는 것도 원래 그렇다고 하겠다.”
“응. 사람은 뭐든 금방 익숙해지잖아. 마수도 그래. 에테르 감응력이 없는 사람들도 기사들이 올 때까지 덧문을 닫아걸고 버티는 데 통달하게 됐는걸.”
그건 사실이었다.
마수 출몰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제 나름의 방비를 해 살아가는 법을 익혔다.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이어지는 법이니까.
클레이오는 곰곰이 생각했다.
‘문을 걸어 닫고 기다리면 반드시 기사단 중 한 곳에서 마수를 퇴치하러 와 주는 알비온은 사정이 아주 괜찮은 편이긴 하지.’
아서의 이야기는 부드럽게 이어졌다.
“얼마 전에는 마수 때문에 농지 절반이 뒤집힌 농장주가 상경해선, 마수 피가 흙에 묻어도 문제없다니 내년에 다시 농사를 짓겠다며 대신 한 해만 세금을 면제시켜 달라는 요청을 했어. 평민원은 마수 피해 농민에 대한 법안을 입법해 귀족원까지 넘겼지. 아마 통과될 거야.”
알비온인들은 대개 의지가 강하고 전향적인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그들보다 더 놀라운 것은 아서의 화법이다.
“아서, 넌 무슨 정치가처럼 말을 하는구나.”
“뭐… 본래도 정치는 왕족의 일이잖아. 전례 찾느라 상원 의사록이랑, 왕실 자문위원회 회의록 좀 들춰봤더니 말투가 옮았나봐.”
클레이오가 말한 뜻이 그렇지 않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서 역시 안다.
그러나 어느덧 부드럽게 화제를 전환할 줄 알게 된 아서는 빙긋이 미소 지으며 답을 회피했다.
신이 준 권위로 통치를 하는 자들은 저런 방식으로 정치 행위를 이해하지 않는다.
멜키오르는 신으로부터 통치를 위임받은 왕족이라는 신화를 믿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이용하고, 아슬란은 진심으로 그 명제를 믿으며, 아서는 애초에 자신이 왕족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식으로 각자의 자리를 찾아냈다.
물론 ‘우애 좋은’ 세 왕자 사이에서도 민중에게 친숙하고 깊은 애정을 받는 쪽은 단연 아서였다.
아서는 생활이 소탈하고 모든 계급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한다. 멜키오르나 아슬란처럼 위압감을 흩뿌리며 신과 자신 아래에 있는 신민들을 시혜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서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오로지 사랑일 뿐, 아서를 반드시 왕으로 만들어 줄 순 없다. 신이 왕을 내려주는 제도는 사랑을 계량하지 않는다.
그 체제는 아직 뒤흔들릴 기색이 없었고, 알비온은 세 리오그난의 균형하에 기묘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너무 균형이 완벽하단 거야.’
클레이오는 말없이 서클을 펼쳤다.
[탐색] 마법이 식탁 놓인 방 안쪽을 세세하게 훑어, 말이 새어나갈 만한 벽 뒤의 통로나 뚫린 구멍이 없는지 살폈다.일단은 안전했다. 그래도 방비를 더하는 차원에서 차를 더 따라주러 온 시녀를 물리고 [방음][차폐]에다 [감소]를 함께 엮어 마법식을 펼쳤다.
그렇게 하면 에테르 소모량은 크지만 서클의 빛이 감춰졌다.
클레이오는 그간 묻고 싶었으나 물을 기회가 없었던 질문을 아서에게 했다.
“너는 지금 상황에 만족하는 거냐?”
이 기묘한 균형과 평화에.
마수가 나오는 것 외에는 변화의 조짐이 없는 나라에.
아서는 별달리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음―. 꽤 괜찮지 않아?”
클레이오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자신은 스무 살 하고도 한 달, 아서는 한 달 모자란 스무 살. 둘 모두 6레벨, 상급에 다다른 마법사와 기사이다.
좋은 친구와 스승을 가졌고, 명성이 있고, 장래가 유망하다는 평을 받는다.
만일 클레이오가 그저 아세르 가의 차남이자 룬데인의 대지주이기만 했다면, 지금은 꽤 좋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서 리오그난의 마법사이자 그의 조력자로서는 엄청나게 불만스러운 상황이었다.
아슬란과 멜키오르의 문제는 사라진 게 아니라 폭로가 유예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면 유예는 언제까지 이어지는 거지?’
만일 평생 유예된다면?
멜키오르가 므네모시네의 문을 닫지 않고, 아슬란도 결국엔 제 형제와 무력 충돌을 일으킬 기회를 못 잡는다면?
‘설마 찰스 왕세자처럼 일흔 살 넘었는데 아직도 왕이 아님 이딴 루트를 아서한테 줄 생각은 아니겠지. 말 좀 해 봐요, 칼리오페.’
그건 절대 아니어야 했다.
클레이오는 아서와 아이들을 위해 살기로 마음먹었고 그 애들의 뜻을 이뤄주기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었지만, 그게 앞으로 50년 더 노력․봉사하겠다, 뭐 이런 각오는 아니었다.
‘초반 진행을 엄청나게 빠르게 당겨놨기에 아서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나이에 왕 만들어주려나 했더니, 여기서 차 다 밀려있으면 언제 인터체인지 빠져나가냐고.’
아서가 ‘알비온의 유일한 왕’이 될 때까지로 신의를 약속했던 건 완전 잘못 쓴 계약서일지도 몰랐다.
어떻게 평생 이 짓을 한단 말인가!
이미 지난 일 년간의 마수 토벌과 피눈물 나오는 대학원 생활만으로도 인생에서 써야 할 힘을 다 당겨쓴 기분인 그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만일 이대로 아무것도 폭로되지 않은 채 표면상의 평화가 내내 유지된다면, 아서는 왕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과거는 여전히 건재하다. 청산되지 못한 채 적재돼 있다.
아슬란의 모친이 테오필라를 죽였고, 그것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다. 이제 테오필라는 두 번 다시 살 수 없다.
그렇다면 테오필라의 죽음에 대한 원 갚음은, 부당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정의의 구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실 테오필라 한 명의 죽음 자체는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지.’
이쯤 오면 알 수 있다.
그 누구보다도 신과 가까웠던 신녀 테오필라는 서사의 안배에 의해 죽어갈 때조차도 전혀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테오필라 모살로 인해 고통받은 이는 결국 아서였다.
모친의 피살 장면을 목격한 어린 그.
클레이오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이 그의 생각과 꼭 일치하지는 않았다.
네 어머니의 복수를 잊은 것이냐고는 차마 물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망한 3왕자, 앞으론 군에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거란 기대를 받고. 이대로라면 젊은 나이에 사령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왕족이고. 평생 군문에 뼈를 묻는 거… 그래, 괜찮지.”
“그럼 너도 나랑 평생 같이 일해야겠네. 그거 정말로 나쁘지 않은데. 더 이상 무고한 이들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도 좋아.”
남은 커피를 한 번에 훌쩍 들이켠 아서가 어린애같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은 거의 진실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인지는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