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40
세 명의 리오그난 (4)
클레이오는 요즘 아서의 표현이 어느 수준까지 연출된 것인지 간파하기가 어렵다.
어느새 자라나 완전한 성인기에 접어든 아서는, 속이 잘 들여다보이는 몸집만 커다란 소년이 아니었다.
‘적절성 판단’을 쓴다면 참과 거짓을 쉽게 판별할 수 있겠지만, 클레이오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판별을 해 내서 아서의 번민에 대해 파헤친 뒤에는?
아서가 제 고뇌를 불러일으키는 클레이오의 비밀들에 대해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한단 말인가.
침묵의 구간을 먼저 만든 것은 클레이오 자신이다. 아서라 해서 모든 것을 이쪽에게 보여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래. 근데 더 이상 너희 형 둘이 미친 짓을 안 한다 쳐도, 언약은 어떻게 피할래? 정식 기사가 된다면 언약을 해야 해.”
“서임식을 내버리고 세리카로 도망갈까? 네 아버지가 청년 시절 탔다는 무역선, 그런 배에 숨어서 극동까지 가는 거야!”
클레이오는 아서가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했단 게 기가 막혔다.
뒤처리 담당인 자신도 아니고 왕이 될 본인이 그딴 생각을 하면 어떻게 하냐 싶었다.
“그렇게 둘러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네 환시는 반드시 실현되잖아.”
“문제는, 그게 실현될 때의 내 나이는 나도 모른단 거지.”
“너는 담대하고 느긋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후.”
“너무 고민하지 마, 레이. 어쨌든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지지. 신이 원하신다면 그분께서는 언제든 뜻을 이루시니까.”
“교회도 안 다니는 놈이 말만은 청산유수다.”
클레이오는 더 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서클을 거둬버렸다.
아서는 오랜만에 본 클레이오의 한갓진 마법이 사그라지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이제 마수 토벌을 위한 출동은 일상이었다.
수도방위대가 전국으로 파견되니 정작 광역 룬데인 주변을 지킬 인력이 부족하여 학생들도 자주 소집되었다.
학생들까지 차출될 때는 늘 위급한 상황이었다.
클레이오의 마법 역시 나날이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한 무리의 사람을 동시에 살리기 위한 치유 마법이나, 결계 설정 때의 정교한 빛이 클레이오가 부리는 마법의 특징이 되었다.
고작 숙취 좀 덜어 달라고 서클을 열게 하던 때가 이제는 꽤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아직도 어머니가 살아계시던 때가, 클레이오와 낚시를 하고 술을 훔쳐 마시던 때가 어제처럼 생생한데.
아서는 기억력이 좋았다.
그는 두 발로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라면 자신에게 일어난 대부분의 일을 기억했다.
멜키오르처럼 저주받은 능력은 아니었지만, 평범한 인간의 기억력은 당연히 상회했다.
아서 리오그난이 원한을 모르는가?
과거는 과거에 놓아두고서 현재를 위하여 충성의 망각을 택하기로 했는가?
그렇지 않다.
아서에게도 분노가 있다.
어머니가 살해당한 자식의 분노, 무고한 이들을 고문하고 살해한 형제에 대한 분노, 친우들을 겁박당한 이의 분노, 자신의 팔을 잘라 마법사를 탈취해 가려던 핏줄의 비열함에 대한 분노.
그는 아슬란이 제게 한 일을 잊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멜키오르가 클레이오에게 한 일 역시 하나도 잊지 않았다.
그것은 육신이 아니라 정신에 새겨진 상흔이다.
오지 않은 미래에서 아직 흐르지 않은 피보다 생생한, 실존하는 고통.
아마 지금 아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더라면 멜키오르는 너무나도 기뻐 이날을 축일로 지정했을지도 몰랐다.
이야기의 구조를 이루기 위해 두드림 당하는 신의 나사못 하나가, 이 세상을 받친 축에 원한의 균열을 만들 수 있었다는 데 감격하여.
다만 아서는 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뿐이다.
그는 자신의 진심을 구체화하고 싶지도,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아서가 생각하기에 자신에게는 분노를 내세울 자격이 없었다.
검을 성취했다 하나 아직 소드마스터가 아니고, 민생을 잘 파악했다 하나 실질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바꿀 법안을 통과시켜 줄 권한이 없다.
아직은 아니다. 기다려야만 한다. 가만히 서서가 아니라 온 힘을 다해서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 경주하면서.
그러잖고서는 면목이 없다.
고귀한 목적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은 제 눈앞의 친구조차 지켜낼 수 없는데.
아서가 자신을 주시하는 것도 모른 채, 클레이오는 반쯤 졸며 생각의 늪에 빠져들었다.
침묵이 불편하지 않은 사이다 보니 간혹 말이 없어도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굶었다가 과식을 한 후라 몸이 나른했다. 클레이오는 예의 따위 집어치운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축 늘어졌다.
여러 가지로 머리가 복잡했다.
아서가 왕이 되는 것은 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러나 이 최종적 세계에선 어떤 왕이 될지 역시도 왕이 되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서가 위대한 왕이 되었던 8교를 두고 또다시 세상을 쓸 이유가 없었다.
‘지금 이어지는 유예의 의미라면 역시 기술 발전 쪽 문제려나. 과학이 아니라 마법의 세기가 지속되게 하려는 건 알겠어. 지금까진 성공적이지.’
과학 아카데미가 화재와 탄압으로 어수선해진 뒤, 아카데미에 속해 있던 학문 분과 상당수가 수도방위대 마법단 연구 마법사들의 손으로 넘어왔다.
수도방위대 마법단의 객원 마법사로서 클레이오 역시 광역 방어막 형성을 위해 애쓰고 있었기에 그 변화의 흐름을 잘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이것저것 써볼 수 있는 자원도 많고 저번 던전에서 나온 말라카이트 방패도 거의 완성해 가긴 하지만, 너무 평화가 길면 오히려 불안하다고.’
애초에 마법에 대한 국가의 지원 자체가, 기뻐할 일만은 아니었다.
과학 아카데미의 몰락엔 멜키오르의 수작이 개입되어 있었다.
그 결과, 에테르가 사라진 세계를 재건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던 닥터 하이드-와이트를 사회운동가로 만들어 버렸지 않은가.
이후의 모든 기술 발전이 마법에 기대 있는 상태에서 에테르를 폐한다면 그 여파는 더 커질 것이다.
어떻게든 세상을 크게 망하게 하려는 멜키오르의 용의주도함을 생각하면, 뒷감당의 범위가 얼마나 커질지 짐작도 안 됐다.
아무리 여러 번 다시 썼대도 칼리오페의 서사에는 특징이 있다.
평온 뒤의 긴 추락.
클레이오는 그게 두려웠다.
이미 익숙해진 평온을 잃는 것은 짧은 평화 뒤의 파란보다 더 아픈 법이니까.
이쯤 오면 이런 의문도 든다.
근본적으로 왜 아서가 왕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나머지 두 명의 리오그난을 제대로 다시 써낼 수 있었다면, 그들 역시도 그럭저럭 괜찮은 군주가 될 자질을 가졌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한들, 그래보아야 한 나라의 왕이며 신의 장기말에 불과한 자리.
그 자리를 위하여 저 많은 시험과, 그 시험을 견뎌낼 고결함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답은 나중에는 올지도 모른다.
서사개입도가 더 높아지면, 더 많은 비밀들이 드러나면.
하지만 그때까지 신의 뜻을 알려 애써야 하는 처지가 고달팠다.
솨아아아―
열어놓은 창밖으로 초여름의 바람이 불어왔다.
신선한 공기에는 장미향이 섞여 있었다.
클레이오는 가라앉는 눈꺼풀을 게으르게 떴다.
‘하긴.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생각해서 뭐할까.’
어쩌면 신은 현명하게 처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어날 일을 전부 낱낱이 알았다면 아마 자신은 결코 이 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세계를 이토록 사랑하게 될 줄 알았다면, 애초에 얽혀 엮이기를 기피하여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했겠지.
하지만 여기까지 다다른 이야기에 만일 같은 가정은 없다.
이곳은 마지막 세계니까.
마지막 세계에서도 매년 새로이 장미는 피고, 매년 다른 방식으로 아름답다.
궁의 정원사가 가꾼 정원은 장엄할 정도로 화려했고, 근사한 식사를 마친 뒤의 느긋한 만족감도 좋았다.
클레이오는 표정을 풀고서 아서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바로 학교로 돌아가?”
클레이오가 생각에 빠진 새 방해하지 않고 가만하게 굴던 아서는 어느새 부드러워진 친구의 어조에 안심한다.
그래서였을까?
평소라면 하지 않을 제의를 한 것은.
“그럴 건데, 그 전에 잠시 들를 데가 있어. 혹시 같이 갈래?”
“어디 가는데.”
“아버지 보러.”
클레이오는 눈썹을 조금 치켜올려 놀라움을 표시했다.
필리프 리오그난이라니.
솔직히 말하자면 완전히 잊고 있던 존재였다.
‘어차피 이야기가 전환점을 맞을 때까진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로 침대에서 빌빌대고 있을 인간이니까.’
“어쩐지 네가 순순히 왕성에 들어와 있더라니. 오늘 하루에 일을 다 몰아서 해결하려고 그랬던 거구나.”
“뭐, 아니라곤 할 수 없지. 이런 부담스런 옷 차려입고 왕자 대접받는 건 별로 편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를 내내 한 번도 배알 안 할 순 없잖아.”
“그건 그렇지. 나도 가도 된다면 같이 가든지.”
“힐레이다에게 말하면 돼. 괜찮을 거야.”
.
.
.
아서가 필리프에게 문안 인사를 올릴 때 침실 문 뒤에서 기다리는 정도로는 크게 복잡한 절차를 치르지 않아도 됐다.
클레이오는 응접실 의자에 앉아 침실 안쪽을 흘깃 살폈다.
여러 겹 휘장 너머 필리프는 어제와 작년이 다르지 않게 삭아가는 몸을 누이고 있을 뿐이었다.
숨을 쉰다 뿐 송장과 크게 차이도 없는 자였다. 마법이 없었더라면 기력이 쇠해 진작 죽었을 육신이었다.
기디온과 크게 나이 차이가 나지도 않을 텐데 웅크린 채 얕은 숨을 쉬는 필리프는 거의 노인처럼 보였다.
아서는 한 줌밖에 안 되는 말라붙은 육신, 희게 샌 금발을 베개에 흩트린 자에게 몇 마디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돌이켜보면 처음으로 궁성에 초대되었을 때에도 클레이오를 홀에 남겨둔 채 아서는 필리프를 보러 갔었다.
필리프를 대하는 아서의 태도에 악감정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모든 일의 원흉일지도 모르는 자인데.
‘뭐 무능한 작자긴 하지만, 아서 입장에서 보면 적극적으로 못돼 처먹은 애비는 아니긴 하지.’
좀 더 궁성의 문화에 익숙해진 뒤 평가해 보면, 아서와 테오필라를 유배의 형식으로 변방에 내려보낸 것 역시 아서를 구하려는 방편이기는 했다.
그래서 더더욱, 그가 겪은 8교에서의 운명을 아서에겐 말해줄 수가 없다.
멜키오르의 부친 살해에 관해서는.
‘이번에도 반복될 일일지 어떨지도 모르는데 괜히 그런 소리 해 봐야 뭐해. 최종교의 멜키오르는 오히려 필리프를 살려 놓으려고 제법 애를 쓰고 있고.’
죽을 듯 죽을 듯 안 죽는 국왕의 상태는 때로 급격히 악화되기도 했다.
필리프의 용태가 위중해지면 멜키오르는 수도방위대 마법단장인 타디우스 예츠켈뿐 아니라 제베디까지 불러다가 필리프를 치료하게 했다.
마법이 생명력을 잃은 사람을 쌩쌩하게 살려놓을 순 없어도, 8레벨의 치유 전문 마법사쯤 되면 어떻게든 숨이 안 끊기도록 해 줄 순 있는 모양이었다.
클레이오는 늘 제베디에게 붙어 있는 연구 제자이다 보니 필리프의 치료에 대해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면 신성력이 제일이라지만, 이스토리아 대주교는 다시 잠들었으니.’
지난겨울 클레이오에게 들른 후 이틀간 더 깨어 있던 대주교는,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과 교차하듯 다시금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기력을 차린 후 클레이오가 대주교관을 찾아가 보아도 레지나는 미동조차 없이 눈을 뜨지 않았다.
없는 신성력을 불러내느라 전보다 짧아진 머리카락만이 그날의 만남을 증명해 주었다.
여전히 그녀에게는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그녀는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
클레이오는 새삼 자신이, 신이 응답을 해 주는 세계에 익숙해져 버렸다고 생각한다.
금세 왕의 침전을 나선 아서가 복도 의자에 앉아 있던 클레이오를 일으켰다.
“오래 기다렸지?”
“뭐, 별로.”
드디어 긴 하루의 일정이 모두 끝난 모양이었다.
클레이오는 아서와 함께 복도를 나서면서도 무심결에 꽉 닫힌 침전의 문을 바라보게 된다.
저기 누운 남자로부터 세 명의 리오그난이 태어났고, 또한 저자의 죽음과 함께 이야기는 종결될 것이다.
그토록 거창한 위치를 서사에서 점하고 있으면서도 실체는 사체와 다를 바 없는 비루한 육신이라는 것이 역설적이었다.
필리프는 이 서사에 복속된 자, 더없이 중요하나 스스로의 삶은 없는 ‘장치’였다.
그런 생각은 묘하게 클레이오의 뒷목을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