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62
뮈토스의 홀 (3)
이를테면 인민을 위해 헌신하는 게스톤 팔라흐 의원은 3석을 가진 인민연합당의 대표로, 여당 대표이자 평민원 의장인 벤자민 비튼과는 사이가 나빴다.
때로는 귀족원과 평민원 사이의 대립보다 비튼과 팔라흐 의원의 대립이 더 격렬할 정도였다.
아서가 국왕 대리를 맡은 첫날엔 각료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붉은 벽지가 발린 으리으리한 왕실자문위원회 회의실에서 아서는 바보 취급을 받았다.
평민원에서 다루는 의제와 달리 각료 회의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정보나 자신들끼리 구두로 협의한 사항이 자주 언급됐다.
멜키오르가 없는 새 기회를 얻은 상무장관 베르메가 옛 원한을 갚으려는 듯 아서를 깔아뭉갰고, 아서는 겸손하게 웃기만 했다.
끔찍한 각료 회의가 끝난 후 다리가 불편하다는 핑계로 천천히 회의실을 나서던 벤자민 의장이, 지난 10년간 왕실자문위원회 회의에서 오간 발언들이 가감 없이 다 적힌 회의록의 존재에 대해 귀띔해 주었다.
멜키오르를 지지하는 비튼 의장이지만, 당장은 베르메의 건방진 태도에 신경이 긁힌 탓이었다.
“왕실자문위원회에서 오간 비공식적 발언과 협의 사항이 모두 함께 적힌 회의록입니다. 국새가 있으면 회의록을 보관해둔 국왕 대리 전용 서류함을 열 수 있습니다.”
회의록은 지금 당장 다뤄지는 안건의 바깥뿐 아니라 안쪽의 사정도 알게 해 주는 열쇠였다.
그런 건 왕실자문위원이 아닌 팔라흐 의원은 제공해줄 수 없는 정보였다.
계산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정치라는 배경을 두고, 현기증 나도록 빠른 비상에 의해 시야가 완전히 달라지는 경험.
그 까마득한 고도에 아서는 빠르게 적응해야했다.
다만, 그러는 동안에도 자신의 사람들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은 그 정도의 일밖에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어영부영 국새를 넘겨받은 다음 날.
아서는 여전히 겉도는 왕자의 예복을 입고 수수한 집기가 낡아가는 국왕 집무실에 덩그러니 섰다.
7레벨 검사이니 잠은 거의 자지 않아도 되었다. 아서는 잠자는 시간을 아껴 회의록을 살펴 읽고 최근의 안건과 관련된 사안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하룻밤으로는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것조차 버겁고, 자료는 너무 많았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도 모른 채 남겨진 처지는 우스꽝스러웠다.
온통 낯선 일투성이인데 국새의 무게만은 익숙해 기분이 묘했다.
의자에 앉기에는 어색해, 책상에 기대앉아 캐비닛과 책상의 서류를 팔락 뒤집어 보았다.
많은 글자와 숫자가 적혀 있었지만 맥락을 모르는 채로는 백지나 다름없는 종잇장이다.
멜키오르의 집무실을 찬찬히 살펴본 아서는 ‘긴급’이 붙은 서류들만 한 번 더 훑고 나서 내려놨다.
다음 행동까지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의회 시종을 시켜 제레미 툴민 비서관을 소환했다.
초상화 제작 때마다 늘 시간이 다 되었다며 멜키오르를 찾으러 와, 기다릴 틈도 없이 속사포 같은 보고를 내뱉는 안색 나쁜 비서관이었다.
아서는 그에 관해 서류에 기재된 인적사항밖에 몰랐다.
하지만 이런 경우, 스스로의 역량을 뛰어넘는 일 앞에서 누구에게 조력을 구할지에 대해선 감을 믿었다. 어쩐지 두 번 눈이 가고 익숙한 느낌이 드는 자였다.
‘환시일지도 모르지만, 내 환시는 이루어지니까.’
클레이오가 사라지자 그 앨 만난 후로는 희미해졌던 환시가 되돌아왔다.
아서는 자신의 상태를 숨겼다.
유일하게 속내를 드러낼 수 있을 상대인 이시엘은, 급작스레 키시온 영지에 마수가 출몰한 바람에 발이 붙들려 아직 룬데인에 당도하지 못했다.
완벽히 홀로 된 아서는, 의회 시종에게 청해 받은 제레미 툴민 비서관에 관한 인사 기록을 읽었다.
몇 장 안 되는 서류였다.
평민. 교회에서 키워진 고아. ‘박애의 펜’이라는 귀족 후원 단체의 장학금을 받아 문법 학교를 졸업했다.
성적은 우수했지만 대학 진학은 스스로 고사했다. 대신 어린 나이부토 재무부의 하급 관료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놀라운 업무 능력을 드러내며 차근차근 관료제의 계단을 밟아오다가 이십 대 중반에 승진이 멈추었다.
툴민 비서관의 날카로운 표정, 왕세자를 상대로도 직설적인 어투를 생각해보면 평민으로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게 어려웠을 것이다.
몇 년을 같은 직위에 머무르다 멜키오르의 눈에 들었다. 그 이래 제레미 툴민은 왕세자의 국왕 대리 업무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측근이 되었다.
노골적으로 내키지 않는 기색을 띠고 왕세자 집무실에 들어선 툴민 비서관은, 멜키오르의 자리에 앉은 아서를 보고 떠오른 경멸을 숨기지 못했다.
아서에게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 따윈 없었지만 저 비서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를 수 없었다.
‘자격이 되지 않는 자가 국정을 책임지게 되다니. 어째서 멜키오르 님은···. 그저 동경을 살 뿐인, 무지한 왕자를.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동정심을 가지고 낮고 가난한 자들에게 시혜를 베풀지만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자신보다 못한 자에게 자비롭기는 쉽다.’
‘전설이 후광을 드리워주는 것은 일종의 사기 행각이다.’
아서가 한 생각은 딱 하나였다.
‘이 사람은 좀 프란 같네.’
그리고 아서가 한 말도 딱 한 절이었다.
“내가 감히 국새를 쥐기에 부족하고 어리석음을 압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형님과 그대, 또 그대의 유능한 동료들이 헌신해 온 통치 행위의 일관성을 망쳐놓도록 방기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툴민은 이미 여러 번 보았던 넉살 좋은 3왕자를 마치 처음 보는 인물처럼 올려다보았다.
종교적 믿음이 희박하고 전설에는 가치를 두지 않는 자였으나, 그런 냉담한 계몽주의자조차도 한순간은 ‘레오니드’라는 이름을 떠올리고 만다.
여기 우리의 왕국이 존속하도록 기틀을 닦은 현명한 통치자이자 기사였던 시조를.
정적은 길지 않았다.
콰앙!
이번엔 머리를 틀어 올린 여성이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노크는 생략이었다.
“급보입니다. 아르크 거리의 지하철역 건설 현장에서 마수 출몰로 인한 붕괴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노크를 생략할 만한 상황이었다.
아서가 정중하게 물었다.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아레사 리드 보좌관.”
이름이 불린 것에 놀라 아레사가 순간 말을 멈추자, 제레미가 눈짓을 해 보고를 이어가게 했다.
아레사는 시간 낭비가 아닐까 염려하면서도 따발총처럼 보고했다.
“아르크 역 예정지 아래 7레벨 마수 셉스가 잠들어 있었습니다. 발파 작업 중 공사장과 셉스의 굴이 연결됐습니다. 셉스는 땅을 파고드는 뱀 형태 대형종으로, 공사장 인부 42명이 지하에 매몰됐습니다.
연쇄 지반 붕괴로 근처에 지하 작업장을 가진 인쇄소 여러 곳에서도 피해 보고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사상자 수는 파악 중입니다.”
지금 막 국왕 대리를 맡은 스무 살 청년은 침착했다.
“피어스 경과 예츠켈 단장은 출동했습니까?”
“그게 문젭니다. 기사단장과 마법단장은 금일 04시경 광역 룬데인 경계, 제믈리 영지에서 발생한 마수 카라파스 떼를 처리하기 위해 나가 있습니다.
지금 아르크 거리에 출동한 기사단원은 중하급 기사가 대부분이라 마수의 빠른 사살이 쉽지 않습니다.”
“7레벨이라면 5레벨 기사 다섯 정도가 상대할 수 있을 텐데… 주변에 인쇄소와 지하 작업장이 많아 매몰 위험 때문에 긴 싸움을 벌일 수 없는 거군요.”
아레사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아서의 상황 파악 능력에 놀란 눈치였다.
어쨌거나 중요한 결정 사항은 하나였다.
“제믈리 영지에 나가 있는 단장들을 수도로 불러들이겠습니까?”
카라파스는 농경지에 출몰해 수확물을 뜯어먹는 곤충형 마수였다.
놈은 주먹만 한 크기에다 레벨도 낮지만 한꺼번에 수천 마리가 출몰하여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한 마리만 남아있어도 또다시 동료를 부르는 습성 때문이었다.
마수가 농작물을 해하는 건 영양을 섭취하려는 행위가 아니었고, 카라파스가 삼켰다 뱉은 작물은 재가 되어 흩어질 따름이었다.
카라파스가 토한 재가 묻은 토양은 마법으로 해독해야만 다시 작물을 키울 수 있었다.
작년, 카라파스 초장 대응에 실패한 크라테르 제후국은 식량 사정이 극도로 나빠졌다. 그런 탓에 전 대륙에서 카라파스는 특별히 경계하는 종이었다.
제믈리는 수도에 밀을 공급하는 곡창 지대였다. 마수 카라파스를 완전 소탕하지 못하면 올해뿐 아니라 이후에도 밀가루 공급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기사단장과 마법단장의 자리가 모두 비게 된 것은, 피어스가 정신을 차린 게 발단이었다.
이전 같으면 밀밭에서 곤충 마수를 쫓는 일 따위 아랫것들에게 맡겨놓았을 자가 기사 규약의 화신처럼 처신하며 수도를 비운 새 사고가 터진 것이다.
일반적인 마수 출몰이었다면 기사단장이나 마법단장을 불러들이지 않고 카라파스 토벌을 우선했을 것이다.
하지만 통상적 대응책을 넘어서는 일이 벌어졌기에 국왕 대리의 선택이 중요해졌다.
수도방위대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이는 국새를 가진 자뿐.
아서는 촌각을 다투는 문제에서 결정을 미루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두 단장은 카라파스 대응에 집중하게 둡시다. 지금 현장에 출동한 기사들에겐 마수를 공격하지 말고 경계를 지시합니다.
셉스는 한 번 판 굴을 그보다 멀리 떠나지 않으니, 경찰은 주변 3킬로미터 반경에 저지선을 치고 주민을 대피시키도록 하세요. 주민들을 설득할 땐 마수 피해 보상법 개정안이 적용될 수 있으니 재산에 연연하지 말고 몸부터 빼라고 이르십시오.”
“시간을 벌려는 겁니까? 하지만 셉스의 움직임이 심상찮습니다. 점점 더 피해가 커질 겁니다.”
“그건 내가 나가보지요.”
아서는 집무실에서도 멀리 놓지 않던 베그의 검을 검대에 찼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잠자코 있던 툴민이 냉담하게 반문했다. 소영웅주의 따위에는 감명받지 않는 이였다.
“전하께서 직접 마수를 사살할 생각이십니까?”
아서 역시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이상의 수도 떠오르지 않았다.
셉스라는 놈은 환시에서도 본 적 없는 괴물이었다. 그러나 아서는 수련으로 수천의 밤을 지새운 자신의 검에 싱겁지 않은 믿음이 있었다.
“오로지 나를 지키는 의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저기 아르모리크 공을 제외하면, 지금 수도에서 움직일 수 있는 가장 레벨 높은 검사는 나입니다.”
면전에서 자기 이야길 하는데도 태서턴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태서턴 트리스테인은 아서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아니 명령은커녕 어떤 말도 듣지 않고 대답도 없다. 철저한 무시였다.
‘하물며 날 위해 자기가 전권을 가진 왕세자 근위대를 움직여줄 리도 만무하고.’
움직여준다 한들 트리스테인 기사들 중 가장 고레벨인 부단장과 부단장 대리는 북방에 남았으니, 현재 상황에선 전력이 안 된다.
수도에 남은 또 하나의 소드마스터 로사 페히테 교수는 필리프 왕에게 맞선 과거로 인해 학교 밖에서 검을 뽑아선 안 됐다.
아서 자신이 진짜 국왕 대리라면 로사 교수가 해를 입지 않는 방식으로 조력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현재의 아서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모든 사항을 아서와 동시에 계산한 제레미 툴민이 마지막 한 수를 꺼냈다.
“왕실 마법감은 수도에 있지 않습니까.”
“마수 셉스는 몸의 탄력을 이용해 한순간 제 몸길이의 몇 배 되는 거리를 갑자기 튀어 나갈 수 있습니다. 진언을 외칠 시간이 필요한 마법사에겐 위험한 마수입니다.”
이건 틈틈이 이시엘과 함께 『마수 백과』를 다 뗀 덕에 알게 된 지식이었다.
아서는 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행동에 나섰다.
“그럼 뒷일을 부탁합니다, 제레미 툴민 비서관.”
“아서 전―.”
왕자는 툴민의 대답도 듣지 않고 집무실의 창으로 뛰어내렸다.
마수를 피해 도망치는 인파로 혼잡한 거리는 돌파하기 어렵다. 지붕을 뛰어넘는 편이 훨씬 빨랐다.
아서는 거침없이 움직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룬데인 전역의 길이 속속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 아서의 세 걸음 뒤를 태서턴이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