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67
부드럽고 가벼운 밤, 인생의 멋진 시간 (1)
둘째 주 토요일인 오늘은 11월 들어 가장 맑은 날이었다.
해가 지고서도 한참이 지났지만 하늘의 남빛은 여전히 선명하고 강가의 불빛은 유독 가깝게 반짝이는 저녁.
템푸스 강을 향해 난 발코니 문을 활짝 열어놓으니, 기숙사 안으로 차갑고 쨍한 가을바람이 상쾌하게 들이쳤다.
한동안 사람이 없어 눅눅했던 응접실의 공기가 가볍게 바뀌었다.
바람결에 날리는 비단 보를 첼이 붙들었다.
“발코니 문 닫을까? 춥지 않아, 엘?”
“공기가 신선하니 놓아두는 게 좋겠다.”
오늘도 빠지지 않고 아서와 함께 검술 연습을 한 이시엘의 체온은 여전히 높았다. 검을 휘두른 여파였다.
“그것도 그러네.”
첼은 미용 가위를 고쳐 들고 이시엘의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여름 방학 실습 후 두 달 만이라 평소보다 꽤 길게 자라나 있었다.
사각. 사각사각.
“길이는 다 맞췄고 이제 장미 향유를 바를게. 끝이 거칠어졌어.”
이시엘은 그런 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첼은 정성을 다해 절친한 친구의 머리를 단장했다.
예쁘고 곱고 향기 나는 걸 좋아하는 친구의 취미를 알기에 이시엘도 첼을 내버려 두었다. 이시엘은 아마 미용 분야에 대해선 아서보다도 더 이해를 못 할 것이다.
‘또 그런 점이 좋은 거지.’
첼은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피로는 미모의 적이라고. 아서 자식 근 두 달 동안 거의 안 잤다며. 넌 걔 곁을 지켰을 테니 역시 제대로 못 잤겠지.”
“처음 며칠 이후엔 야간에 아서 님을 직접 경호할 수 없어서, 네가 생각하는 그런 과로는 없었다.”
첼이 걱정을 해 주니 좋게 말한 것이지, 미술품과 정적, 적의와 미친 공작뿐인 파머 궁의 침실에 아서만 홀로 남겨두고 이시엘이 편히 쉬었으리라곤 믿을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첼은 손끝에 스미는 머리카락의 향기와 감촉을 음미하며 제 속을 휘도는 말들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부드러운 윤기가 어린 붉은 머리는 보석을 녹여놓은 듯 아름다웠다.
첼은 생각한다.
‘돌아왔구나.’
그녀는 모험과 긴장을 즐기는 성미였지만 어쩐지 이때만은 정적인 평화가 비행만큼이나 짜릿하게 느껴진다.
이럴 때에는 순간이 영원하거나, 혹은 반복되기를 바라게 된다.
“첼, 너야말로 연금을 당한 탓에 고생이 컸다.”
“뭐 엄마 집에 끌려간 게 좀 골치 아프긴 했지만 2주일 정도야.”
그 사이 카멜리아 저택의 별관 층계가 두 군데 부서지고, 창문 세 군데가 틀까지 망가져 인부를 불러야 했단 사실은 슬그머니 감추었다.
‘요즘 들어 엄마가 고용하는 경호 하녀들 무술 실력이 점점 엄청나진단 말이지.’
스무 살이 돼서도 여전히 모친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 모친을 잃은 이시엘에게 밝히긴 머쓱했다.
첼이야 진작 학교로 돌아왔지만, 클레이오의 가택 연금은 왕세자가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여 업무로 복귀한 11월 초에나 풀렸다.
클레이오는 졸업까지 겨우 2달을 남겨 놓고 간신히 등교를 시작했다.
기억된 세계에 든 날들은 출석으로 처리되었고, 응시하지 못한 중간시험은 클레이오와 첼이 같이 구두시험을 보았다.
수도방위대 학교의 친구와 교직원들은 모두 977기의 편이었다.
처음 문이 열렸을 때 마법감과 로사 교수를 감금하듯 격리해 놓곤, 학생들만 이끌고 문에 들어간 멜키오르의 결정 자체가 함정이라고 여기는 치들도 있었다.
‘진주의 도시 보고서’로 한층 더 유명해진 첼은 입장의 내막에 관해선 변명도 부연도 않고서 다만 멋진 미소를 흩뿌릴 뿐이었다.
수도방위대 학교의 수많은 재학생들은, 첼레스테스를 볼 날이 두 달도 안 남았다는 데 한탄했다.
지금도 기숙사 응접실에는 꽃과 초콜릿, 향수 뿌린 편지가 엄청나게 쌓인 참이었다. 일단은 복귀 축하라는 구실을 단 선물들이었다.
물론 그 향기로운 뭉텅이는, 여기 앉은 하우스메이트의 10분의 1도 첼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자, 다 됐다.”
삼면경을 내밀었지만 이시엘은 보는 둥 마는 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보기에 좋다면 된 거겠지.”
살짝 쑥스러워하던 첼은 부드러운 무명천으로 이시엘의 목덜미에 남은 머리카락을 쓸어냈다.
자리를 정리한 아마추어 미용사는 이발을 하느라 벗어두었던 연미복 재킷을 도로 꿰입었다. 날씬한 허리를 강조하는 검은 연미복은 첼에게 잘 어울렸다.
이시엘 쪽은 풀 먹인 교복을 옷장에서 꺼내고 석고처럼 새하얗게 세탁한 칼라를 셔츠에 달았다.
코트까지 입은 뒤 마지막으로 첼의 머리에 실크햇을 씌워준 이시엘이 답지 않게 농담을 다 했다.
거의 가사 상태였던 유머 감각이, 첼과 하우스메이트가 된 이후 재활기에 접어든 이시엘이었다.
“이래서는 오늘 무도회에서 네 댄스 카드에 자리가 모자라겠다.”
댄스 카드는 무도회에서 연주할 곡명 옆에 빈칸을 내어 둔 카드였다.
보통은 신사가 레이디의 카드에, 어떤어떤 곡에서 함께 춤추고 싶다고 요청하여 이름을 쓰는 식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오늘은 반대로 남녀를 바꾸어서 레이디 대신에 남성 참가자들에게 댄스 카드를 나누어주기로 규칙을 비틀었다.
오늘 밤 아세르 저택에서 열리는 가장무도회의 비공식 주최자인 다오네의 아이디어였다.
디오네는 ‘이번엔 격식 차린 모임이 아니니, 아가씨들이 사내들을 고르는 즐거움을 가지도록 말이죠.’라며 즐거워했다.
아세르 저택의 식객 지위를 여전히 유지 중인 첼은 디오네의 아이디어를 열렬히 반겼다.
“그럴 리가. 나도 레이디이니 오늘은 댄스 카드가 없을 예정이지.”
“그런가?”
“오늘은 정말로 마음에 드는 상대하고만 출 거거든.”
“너는 세상의 모든 아가씨를 다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중에서도 특별한 레이디 정도는 있다고.”
첼이 무어라 중얼거리든 크게 개의치 않는 이시엘이 조끼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 고급품은 아니지만 학교에 올 때 키시온 자작이 사 주어 꽤 아끼는 시계였다.
“몇 시야?”
“8시. 아직 한 시간쯤 남았군.”
무도회 초대장에 찍힌 시간은 밤 9시였지만 보통 무도회가 다 그렇듯 10시는 되어야 제대로 손님이 모일 것이다.
“좀 이르긴 한데. 마차를 부를까?”
“릴리안과 기젤라도 함께 가나?”
“걔넨 기젤라의 집에서 출발한대. 클라인 저택에서 왕의 정원을 가로지르면 바로 레이네 집이야.”
발코니 창을 닫던 이시엘이 조금 망설이다 물었다.
“그럼 걷는 건 어떤가.”
“좋아. 밤 나들이도 오랜만이네!”
첼레스테스의 들뜬 마음이 옮아간 것처럼 이시엘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지나간 겨울, 열이 나 앓던 첼이 머리맡에서 간호를 해 주던 이시엘에게 말했다.
우리의 목표가 모두 이루어지고 네가 가문을, 내가 정치의 권리를 가지게 될 때에도 때때로 사소한 시간을 함께 보내 주겠냐고.
하지만 이시엘은 자신이 키시온 자작이 되기 전에도, 친구와 등을 밝힌 강가를 걷는 일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달처럼 차갑게 보이지만 해처럼 뜨거운 첼레스테스.
유들유들한 태도 아래 단단한 심지를 가진 동갑내기는, 먼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 동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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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수도의 안젤리움 타운하우스의 제법 잘 갖추어진 드레싱 룸 안.
두 쌍둥이는 스타킹에 슈미즈, 드로저까지만 입은 차림으로 퍼져 앉은 채 고심하고 있었다.
안젤리움 자작이 두 딸들의 입성에 돈을 아끼는 부친은 아니었지만 또 키가 큰 바람에 딱 맞는 야회복이 없었다.
어른들에게 물려받은 옷이 그나마 차선책이었다.
“아, 뭐 입지.”
“어제 정할걸.”
“고모한테 물어볼까?”
“머잖아 어른이 될 나이니까 알아서 하라잖아.”
리피는 내키지 않는 동작으로 일단 면 페티코트 한 겹을 드로저 위에 덧입고 단추를 채웠다.
레티샤는 자연스레 리피를 따라 흰 면 페티코트를 입으려다 손을 조금 틀어 검은 페티코트를 집었다.
“어, 넌 나랑 다르게 입으려고?”
“그러면 어떨까?
“왜 이제까지 그런 생각을 한 번도 못 했을까?”
“그러게?”
리피는 충동적으로, 평소라면 자의로는 택하지 않을 스타일의 이브닝드레스를 구석에서 찾아왔다.
도톰한 흰색 실크에 만발한 여름꽃 자수를 놓은 드레스는 풍성한 오버스커트로 뒷모습도 멋지게 보이도록 연출한 옷이었다. 어머니가 입던 것이지만 관리가 잘 되어있었다.
보디스를 걸치는 건 자매가 거들어줬다. 하녀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은 항상 서로를 도와 옷을 입었다.
리피는 제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보디스 위로 드러난 어깨와 상완은 옛 전사들의 조각상처럼 근육이 가닥졌다. 내심, 멋진 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꽃은 승리의 화환마냥 강자의 강인함과 묘한 조화를 이뤘다. 어쩐지 자신의 모습인데도 낯설게 느껴졌다.
피부 안쪽에 불이 지펴진 듯한 젊은이의 열기, 충동과 열망이 뒤섞이는 표정은 어떤 안료보다도 더 화려하게 리피의 팽팽한 뺨을 채색해 놓았다.
자신 안에서 성숙의 징조를 발견한 기쁨. 그 누구를 매혹 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생기와 힘에 매혹된 표정이었다.
이제 그녀는 스스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성년이었다.
그 사이 레티샤는 아주 단순하게 재단한 스커트를 가볍게 덧입었다.
과감한 넥라인에 검은 진주를 비딩한 보디스의 단추도 혼자 척척 채웠다.
검은 드레스는 미시즈 모르간이 결혼과 사별 이전에 입던 것으로, 10대 소녀에겐 어려운 디자인이었지만 레티샤의 제멋대로이면서도 날카로운 분위기와는 썩 잘 어울렸다.
머리를 땋고 있는 리피보다 먼저 단장을 마친 레티샤는 재빠르게 움직여 서랍에서 훈장을 가져왔다. 철성공로장이었다.
“리피 넌 안 할 거야?”
리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훈장 안 달아. 멜키오르가 준 거 꼴도 보기 싫음. 아버지도 싫어하잖아. 장래의 안젤리움 후작이 될지도 모르는데 지조가 있어야지.”
“헐. 훈장이 무슨 죄라구. 미래는 미래고 지금은 지금임. 난 달 거야. 그리구 네 말 대로 장래 따지자면, 훈장은 모두 왕이 내린 걸로 취급하니까 아서가 왕이 되면 괜찮지 않아?”
아버지와 싸운 이후로는 부쩍 아버지의 방식에 의문을 품게 된 레티샤였다.
“그래라. 그래도 아직은 왕 아니니까.”
“그건 그래.”
몇 분 후, 각자의 드레스 색에 맞추어 긴 장갑까지 낀 소녀들은 이마를 맞대듯 가까이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머리를 풀고 드레스에 무공 훈장을 단 레티샤는 관습에 어긋난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제 모습에 만족했다.
리피로 말할 것 같으면 성장(盛裝)을 한 자신이 유독 어른처럼 보여서 좋았다.
“이러고 있으니깐, 우리 다른 사람 같다. 그치, 레티샤?”
“너는 제법, 아버지가 말하는 번듯한 숙녀 같애.”
“넌 고모 젊었을 때랑 똑같음. 기왕 그걸 입었으니 고모한테 보석도 빌려 달라고 해. 그 블랙 다이아몬드 티아라랑 잘 어울릴 것 같아.”
“리피, 넌?”
어느새 드레싱 룸에 들어와 있던 미시즈 모르간이 대답을 가로챘다.
그녀의 손에는 꽃 한 줌과 티아라가 들려 있었다.
“리피 네 차림엔 국화와 다알리아 꽃, 이거면 충분하지. 잘 골랐네. 맨날 하는 아이비 장식이랑도 어울리고.”
“그래?”
모르간은 조카들의 머리를 정리해 각각 꽃과 티아라로 장식해 주었다.
“고모 보기에두 괜찮아?”
“둘 다 기대 이상인걸. 어떤 놈팡이들이든 감히 너희에게 춤 신청을 하려면 상당한 용기와 배짱이 있어야 할 거다.”
“근데 오늘 레이네 무도회 댄스 카드는 남자들이 갖고 있어.”
“여자들이 누구랑 춤출지 고르는 거래.”
모르간은 내려갔던 외알 안경을 올리며 씩 웃었다.
“허, 거 좋은 아이디어네.”
“그니까 변변한 놈이 없으면 춤은 리피랑 추면 돼.”
“어, 내가 리드 하면 리피 너랑 춤출게.”
“야 내 스커트 안 밟을 자신 있음 그러고. 옷 밟으면 그때부턴 니가 팔로워야. 그럼 갔다 올게, 고모!”
추위를 안 타는 쌍둥이는 코트도 입지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마차를 향해 달려 나갔다.
보디스 위, 검대에 찬 두 자루의 검이 경쾌하게 잘그락거렸다.
저 애들은 벌써 5레벨 검사였다. 비단 구두를 신고 있어도 빠르게 달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사나운 아름다움이다.
모르간의 유모가 말했다.
“아가씨들이 각기 다른 옷을 입고 나가는 건 처음 보네요, 마님.”
“쟤들도 각자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 때가 됐지.”
모르간뿐 아니라 자작의 두 딸들까지 돌봐온 수더분한 유모는 방긋방긋 웃었다.
“아이구, 그러믄요. 아가씨들이 각자 다 큰 아가씨가 된 태가 나고요.”
“그런가? 내가 보기엔 그냥 맹수가 된 것 같은데. 사자와 놀면 사자를 닮게 되는 법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