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69
부드럽고 가벼운 밤, 인생의 멋진 시간 (3)
부채에 맞은 손등이 금세 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디오네~ 힝!”
“누가 허락도 없이 레이디의 드레싱 룸에 들어왔지요?”
“네, 네, 네가아~ 드, 들어와도 된다고 쪽지에 회신을….”
“회신은 회신이고, 도착했으면 먼저 들어와도 되는지 물어보는 게 예의죠!”
“물어봤는데, 물어봤는데! 답도 없고… 네가 너무 안 나와서~.”
“하녀를 먼저 불렀어야죠!”
“하녀 아무도 없던데?”
“정문으로 들어오긴 했고요?”
“헉! 그래야 하는지 몰랐어~.”
디오네는 머리를 짚었다.
미친놈이야 하루이틀 미친 것도 아니었는데, 편지에 집중하느라 주변에 대한 경계가 약해져 있긴 했다.
레이디는 거의 울려고 하는 에즈라를 책하길 그만뒀다. 말해 봐야 입만 아프니까.
대신, 오늘 무도회장까지 그녀를 에스코트할 덜떨어진 신사의 복장을 엄격하게 살폈다.
“자, 입은 싸매고요. 우선 한 바퀴 돌아보세요.”
“응!”
에즈라는 디오네의 어투에서 화가 빠진 걸 알고는 너무 기뻐, 그 자리에서 위아래로 공중제비를 돈 뒤 착 하고 바닥에 착지했다.
디오네의 목소리가 또다시 높아졌다.
“아니 누가 거꾸로 제비 넘기를 하래요?”
“이, 이거 아니었어?”
레이디는 종을 울려 메이드를 불렀다.
“밀라. 여기 와서 이 말썽꾼의 매무새 좀 손봐주련?”
잠시 후.
평정심을 되찾은 디오네는 감정가의 눈으로 에즈라 세르게프를 살폈다.
“흠.”
항상 봉두난발로 북슬북슬하던 상아색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흰 실크 타이를 맨 에즈라는 대가가 깎아낸 대리석 조각처럼 보였다.
하얀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운 뺨의 홍조는 차가운 조각을 사람으로 만드는 유일한 증거였다.
부친의 물건임이 분명한 구식으로 재단한 테일 코트와 웨이스트코트를 걸쳤지만 바로 그래서, 지난 시대가 남긴 예술품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디오네는 고뇌에 찬 침음을 흘렸다.
새삼스럽게 이놈에게 주어진 얼굴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아가리 싸 물고 있으면 껍데기는 그럭저럭인데, 너는 뭐가 문젤까요.”
남의 말을 또 어떻게 비틀어 해석했는지 에즈라의 안면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지, 지금 나 잘생겼다고 해 준 거야? 고마워. 고마워어어. 내가 말해 준 대로 복장 검사 큰형네 집사한테 받았어어어~.”
에즈라의 에스코트를 수락하며 디오네는 많은 조건을 걸었다.
그 조건에는 손톱을 다듬는 모양새와 머리카락 길이, 그리고 옷에 쓸 수 있는 색깔까지 제시돼 있었다.
상식이 안 통하는 놈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안 그러면 재킷 안에 토끼 무늬가 들어간 연자줏빛 조끼 따위를 입고 나타날 놈이었다.
에즈라를 매의 눈으로 체크한 뒤 디오네도 자신의 단장을 마쳤다.
은방울꽃 향수를 뿌리고 실크 장갑을 팔꿈치까지 끌어올린 숙녀가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널 사람 꼴로 만드느라 노먼 집사가 큰 고생을 했겠네요.”
“응응. 노먼이 네 편지에 적힌 게 무슨 말인지 다 알려줬어~. 모자랑 단춧구멍의 꽃도 제대로 갖췄구, 가문 문장 찍힌 사두마차도 타고 왔어. 틀린 거 없지~? 응?”
에즈라는 숙제 검사를 받는 학생처럼 안달했다. 정확히는 그 숙제에 걸린 상에 애처롭도록 연연하는 거였다.
학창 시절 그가 저지른 멍청한 행동도 이쯤 오면 화난다기보다 웃기고 짜증나는 쪽에 가까워졌다.
‘얘는 몇 살이 될 때까지 이 모양 이 꼴일까.’
마법사들의 늦됨을 고려하면 평생 그럴지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밀라가 디오네의 어깨에 흰 모피코트를 걸쳐 주었다.
에즈라는 숫제 취한 것 같은 얼굴로 디오네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놈은 이래 뵈도 역사 깊은 명가의 후예기는 했다.
디오네는 에즈라의 몸단장을 핑계로 그의 큰형인 페텐카 세르게프와 연락을 할 수 있었다.
사교 시즌을 맞이해 수도의 저택에 와 있다는 구실을 들었지만 실제로는 왕실의 신년회 이외의 무도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페텐카였다.
현재 세르게프 가문의 수장인 페텐카 세르게프 제27대 로디언 후작.
변방의 영주이나 시조가 직접 레오니드에게 작위를 받았고, 원탁에 함께 앉았던 고귀한 구귀족,
양해왕 시절 섭정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지 않았던 두 가문 중 하나의 수장.
대리석 생산으로 수 대에 걸쳐 쌓은 막대한 재산까지 물려받은 이가 그였다.
세르게프의 가주는 나라가 흔들리면 나서는 것이 의무라 여겼고, 디오네가 짐작하는 바가 맞다면 알비온은 지금 엄청난 난세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세르게프에는 정치적 실권 없이 명예만 남았기에 오히려 후광을 빌리기 적절했다.
그런 내막으로, 디오네는 에즈라의 유치한 편지에 답장을 해 준 거였다.
에즈라는 그간 오간 자신의 연서 중 한 통에 ‘막내의 부관인 아레미스 한은 내 사람이오. 그가 보고 들은 것이 내가 보고 들은 것이오.’라는 쪽지가 끼여 있었다곤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방식이야 어찌 되었든 환영할 만한 소식이었다.
지지 세력 없이 급작스레 부상해버린 클레이오와 막내 왕자에게는 오래된 이름이 주는 힘이 필요했다.
로디언 후작은 현 상황을 고려하여 동맹에 긍정적인 답을 보낸 것이다. 살아있는 답변서로서 여기 온 에즈라 본인은 결코 모를 이유였다.
이 색조가 희박한 얼굴에 어린 것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열망과 환희뿐이었다.
디오네는 아주 조금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에즈라, 팔 이리 줘봐.”
에즈라는 양팔을 불쑥 내밀었다.
“팔?”
그리고 누그러졌던 레이디의 어투도 금세 다시 딱딱해졌다.
“아니! 에스코트하라고! 너 귀족 가문 아들 맞아요?”
“히, 히잉. 화내지 마아~.”
디오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얜 더러운 계산이 없단 점이 유일한 장점이고 나머진 전부 단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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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르 저택에서 무도회를 주최하는 것은 20년 만이었다.
막바지 준비에 저택의 사용인 모두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
그 와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꽃집에서 캔튼 부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네? 저런, 큰일이네요. 마차는 얼른 수리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렇지요, 사람이 직접 들고 오기엔 너무 크지요.
아, 아니오. 저희가 드린 수반이 워낙 귀한 것이다 보니, 전세 마차 마부에게 맡기기는 어렵겠습니다. 이쪽에서 가지러 가겠어요.”
식탁에 놓을 꽃은 배달이 왔는데 현관 바로 앞에 둘 커다란 꽃 장식이 조금 늦게 완성됐다.
워낙이 어마어마한 장식인 탓이었다.
그런데 하필 지금 꽃집 마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저택에서 꽃을 가지러 가야 했다.
무도회를 몇 시간 앞에 둔 상황에서 손이 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학교에서 검술 연습을 하고 난 뒤 클레이오가 불러 늦은 점심을 함께했던 아서는, 과일 바구니를 가지러 1층으로 내려왔다가 그 전화를 들었다.
아서가 업무 배정을 다시 하려던 캔튼 부인을 불러 세웠다.
“캔튼 부인, 그럼 제가 그 꽃을 받아 오도록 할까요?”
“아니 어떻게 아서 님께 그런 심부름을 시키겠어요. 미라를 보내면 됩니다.”
“미라는 차고를 반짝반짝 닦느라 바쁘던데요. 지금 저택에서 할 일 없는 사람은 저랑 레이뿐이니까, 제가 갔다 올게요. 맛있었던 점심 식사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하하.”
캔튼 부인은 그만 아서의 넉살에 넘어가고 말았다.
2층으로 올라간 아서는 사과를 깨물어 먹으며 상황을 설명했다.
캐비닛 룸을 책임지는 줄리에게 붙들려 머리끝부터 손톱 끝까지 윤이 나도록 다듬어지고 있던 클레이오는 냉큼 아서를 따라서 크림과 향유 냄새 가득한 자신의 침실을 탈출했다.
며칠 과로를 해 눈밑이 까만 줄리에게는 사과라도 먹으며 잠시 쉬라고 하곤 감행한 도주였다.
“으으―, 나오니까 살겠다. 디오네가 얼마나 엄명을 내려놨는지 내 부탁은 들어주지도 않아. 네가 사과라도 갖다 안겨서 빠져나왔다. 자식, 은근히 재주가 있어.”
저택 문을 나설 때까진 점잖은 척하던 아서가, 길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낄낄댔다.
“왜? 이것저것 하니까 머리카락도 윤이 나고 혈색도 좀 있어 보이고 좋네.”
“그러는 넌 국왕 대리 자리 내려오자마자 망나니 꼴이냐.”
“그때야 꾸미는 것도 일이었으니까 그랬지. 오늘의 주인공은 너니까 얼굴 좀 펴. 어째 첫 무도회 때부터 지금까지 그루밍만 좀 했다 하면 표정이 썩냐?”
“몇십 번을 해도 이럴 거다. 꾸미는 건 익숙해지지가 않아.”
“나올 때 줄리가 흘겨보더라. 간신히 꾸며둔 도련님 데려나가서 그런 가봐.”
두 사람은 별 뜻 없는 신소릴 툭툭 던져가며 걸었다.
저택을 나와 ‘왕의 공원’을 가로질러 큰길로 10분쯤 걸으면 번화한 역마차 정류장과 상점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거리가 나왔다.
캔튼 부인이 말한 꽃집을 찾았을 때, 막 꽃다발을 사 나오던 웬 노인과 마주쳤다.
아서를 빤히 쳐다보던 노인은 웬일인가 싶어 기다리던 청년 앞에서 별안간 모자를 벗더니 허리까지 깊게 숙였다.
“노인장은 누구신데 이러십니까? 고개 드십시오.”
“당신은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빚이 있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허리를 펴고 모자를 고쳐 쓴 노인은 머리가 새하얗고 등이 꼿꼿하여 아주 꼬장꼬장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3왕자 당신 덕에 내 손주가 목숨을 구했고, 또 당신이 통과시킨 법안 덕에 삼대를 이어온 금박 장정 사업을 접지 않아도 된 사람이오. 뵙게 되었으니 인사를 했소.”
“절 어떻게 아시고….”
“그럼 당신 같은 사람을 어떻게 못 알아보오?”
‘영혼이 주의를 잡아 뜯어가듯 광채를 내는데.’라는 말은 숨소리처럼 희미하게 덧붙여졌다.
감사를 표하면서도 내키지가 않고 칭찬을 하면서도 기껍지가 않은 듯 묘한 태도로, 상대를 경멸하면서도 법에 따라 무죄를 선고하는 법관 같은 느낌이었다.
할 말을 마친 노인은 빠른 걸음으로 거리의 끝을 향해 사라졌다.
유리창 안에서 그 모습을 본 꽃집 주인이 얼른 가게 문을 열어주었다.
“아세르 저택에서 꽃 찾으러 오신 분들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어휴, 오시게 해서 미안해요. 근데 저 괴팍한 에벤에셀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이기에 노인네가 총각한테 모자를 다 벗어서 인사를 해요?”
“저도 초면인데 말입니다.”
“그래요? 하긴 원래가 좀 특이한 할배에요. 교회도 안 나가면서 막 폭풍우 부는 날 같은 걸 미리 알아서, 다들 할배를 무서워해요.
하여간 괴팍한 노인네가 또 젊을 땐 상대가 귀족이란 이유로 모자를 벗어 인사하진 않겠다고 버티다가….”
“그래서요?”
“마차 바퀴에 깔릴 뻔했지요. 여기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이야기예요.”
꽃 장식을 신속하게 포장하는 꽃집 주인의 입이 손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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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키만 한 거대한 꽃 장식은 아서가 훌쩍 들고, 클레이오는 수반에 달 리본 장식을 챙겨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인적이 드문 왕의 공원으로 접어들자 클레이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야 엄청나다. 왕족이면서, 인민연합당 지역위원장한테 인사를 다 받고.”
“면도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아봤지?”
“왜 나 연금됐을 때 보니까 신문마다 난리가 났던데. 용맹하면서도 지혜로운 국왕 대리님? 네가 그런 심부름꾼 같은 꼴로 수도를 돌아다닌 지 벌써 3년이 넘었는데, 알아보는 사람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지.”
“여긴 너희 집이랑 가깝잖아. 레이, 널 먼저 알아본 거 아냐?”
클레이오는 실내복 위에 대충 걸친 수수한 갈색 체크 트위드 코트를 여미며 말했다.
“너 때문에 알아보는 거 맞거든. 나는 자동차 안 타면 아무도 모른다고.”
여전히 신문과 잡지는 클레이오의 모습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물론 클레이오는 그 상황을 십분 이용하고 있었다.
기력도 존재감도 희박한 그이기에 옷만 수수하게 입고 다니면 대부분의 사람은 ‘대마법사 클레이오 경’과 눈앞의 비실한 청년이 같은 사람이라고 여기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너랑 카르멜라 펍에 갔을 땐 맥줏값을 안 받았지.”
클레이오는 마치 조카의 뛰어난 성적표를 본 삼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서는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몸 둘 바를 모르게 됐다.
그 모든 것은 결국엔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 밤 공표할 말처럼, 자신은 결국 왕관을 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 일에 약간의 손질을 가했다고 칭송을 받아야 하는가?
아서는 이제껏 익숙하다 못해 권태감마저 느끼게 하던 세계와 미래가, 어딘가 명확하지 않게 여겨졌다.
환시가 사라진 자리에서 자라나는 희미한 위화감은 타인에겐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본인조차도 그 모호한 부분의 정체를 모르니, 복잡한 마음과는 다르게 입으로 나오는 말은 그냥 우물쭈물한 얘기뿐이었다.
“내가 술값 낸다고 하는데 주인장이 자꾸 안 받는단 말이야 민망하게.”
“에벤에셀 씨도 카르멜라 펍 주인장도 네가 왕족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야. 네가 한 일 때문에 그렇게 구는 거지.”
“칭호도 없는 덜떨어진 검사에겐 너무 후한 평가인데.”
클레이오가 옆을 돌아보니 아서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척이 없었다.
신이 정당성을 보증한 왕이 연민을 가지길 원한 칼리오페의 바람은 차근차근 이뤄지고 있건만, 정작 주인공은 자신이 얻는 호의와 영향력이 아직도 어색하게 여겨지는 모양이다.
세계의 운명이 자신의 생명과 연동되어 있는 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그러한 상상조차도 하지 않을 놈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점이 주인공의 무지를 이루며, 그를 신의 뜻으로 이끄는 순수의 핵심이 아닌가.
하지만 아서에겐 묘하게 예리한 부분이 있었다.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를 벗어나 신이 그를 이끌고 가는 흐름을 느끼기에 저런 경계심과 위화감을 가지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