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73
부드럽고 가벼운 밤, 인생의 멋진 시간 (7)
홀과 응접실을 가르는 문 뒤, 문 버팀쇠의 장식 사이에 교묘히 떨어져 있던 도청 카메오는 클레이오가 구조를 파악한 뒤 핀 부분을 떨어뜨려 놓아 잠시 기능을 못 하게 했다.
클레이오는 공작의 완드를 꺼내들었다.
가스등 하나만 밝혀둔 어둠 속에서 긴 날개를 펼친 공작이 고고한 빛을 뿌렸다.
부러 완전한 전개로 내보인 마도구였다.
아서의 마법사가 가진 힘을 강렬한 방식으로 각인시키기 위해서.
응접실 안의 모든 사람이 숨을 죽였다.
같은 마법사라고 반응이 다르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법의 원리를 이해하기에 더더욱 압도적인 경이로움을 느낀다.
응접실의 문부터 퇴창까지의 영역을 감싸는 여섯 마법식은 섬광 같은 속도와 판화 같은 정확성을 함께 지녔다.
세 슬롯의 [방음], 두 슬롯의 [차폐], 그도 모자라 더해진 [감소]의 식.
절대로 캐스팅에 실패하지 않는 클레이오 경의 마법은 그 자체로 기적이었고, 기억의 축복이었다.
“[새벽을 전율케 하는
밤의 마지막 반향마저
모두 다시 취해 가려는
침묵의 기다림을 나는 느끼네]1)”
낭랑한 진언을 타고 응접실을 감싸며 타올랐던 에테르의 빛은, 오로지 마법식 안쪽에만 국한되었다.
이제 응접실 안의 소리, 기척, 마법, 그 어느 것도 경계의 바깥으로 퍼지지 못할 것이다.
디오네가 도청 카메오를 서클 바깥쪽에 놓아두는 새, 클레이오는 마석 금을 조금 태워 응접실 안을 이중발진 [탐색]으로 훑어두었다.
안은 깨끗했다.
6레벨이지만 에테르 유량은 메이지 마스터에 필적하는 클레이오가 살폈으니 틀림없었다.
먼지가 내려앉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침묵 가운데 디오네가 입을 열었다.
“자아 그럼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아주 신뢰도 높은 정보원으로부터 들어온 최신 정보를 더하도록 할게요. 외제니아 공녀에 관한 거예요. 이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할 선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 같네요.”
디오네는 외제니아 공녀의 출신, 쥴레이카의 친정에서 혼인 핑계를 대며 막대한 분량의 마석을 매수하고 있는 정황, 아글라오 밀수에 대해 설명했다.
중간중간 빈 논거는 도약을 해 이었음을 전제한 뒤, 그녀는 그녀 나름의 결론을 제시했다.
그 결론은 디오네 자신의 결심을 굳건하게 만든 근거이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죠. 전쟁이 날 거예요. 내전이면서 열전이.”
가벼이 창틀을 짚고 포도주 잔을 든 디오네가 말했다. 노래하는 듯한 어조였다.
“알비온의 왕위 계승 전쟁일지 대 브룬넨 전면전으로 번질지 양상은 모르겠지만, 데르니에 대륙 서안이 전화를 피할 길은 요원해 보여요.”
디오네에 이어 첼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우리 쪽에도 역시 믿을 만한 정보원이 있었습니다. 이젠스 성의 집사라는 그자의 용모와 행동을 들어보니 정체를 알겠군요.
그자의 본명은 트로모스 노트피어. 본래 쥴레이카 왕비의 호수궁전을 감독하는 총집사장이고, 그 전엔 크뤼엘 공작의 뒤처리를 맡던 용병이었습니다.
이젠스 성에서도 약혼을 핑계로 자원을 모아 강력한 무기를 만들던 전적이 있지요. 그 결혼, 참 아주 여러모로 이용을 잘해먹네요.”
“어느새 거기까지… 하긴, 저기 아서 님과 클레이오 도련님이 이젠스 성까지 단지 백포도주를 마시러 간 건 아니었겠지요.”
디오네는 잔에 담긴 와인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달콤한 이젠스 와인이었다.
“어쨌든 내 입장은 분명해요. 나는 클레이오 아세르, 당신 편에 서겠어요. 당신이 무엇을 하든, 무엇이 되든. 당신이 지지하는 인물이 곧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에요.”
가볍게 들리지만 천금보다도 귀중한 맹세였다.
왕비와 왕자가 공작과 결탁하여 자국을 상대로 전투를 준비한다는 엄청난 폭로에, 주변엔 동요가 이는 게 보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역시 기척을 내지 않을 뿐 사정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클레이오가 나설 순서였다.
“이미 여러 해 전, 저는 게하임 징거라는 살인자의 범죄 행각을 파헤치다가 그 가수가 괴물로 변하는 과정에서 잔인한 인체 실험이 자행됐음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학생의 신분으로는 뿌리 깊은 비리를 파헤치기 힘들어 조력이 필요했습니다.
마침, 멜키오르 저하께서 마법사로서 저의 능력을 높이 사주신 덕에 저하와 독대할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클레이오는 잠시 간격을 두어, 사람들이 오페라극장 살인사건을 떠올리기를 기다렸다.
그는 교묘히 ‘히드라의 독’의 정체를 가려 말을 이었다. 아서는 모두 남김없이 말하자고 했지만, 첼과 클레이오는 지금 당장은 그러지 않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세상에 밝히기엔 너무도 참혹하며 위험한 내막이 있었기에, 저는 이 모든 증거를 모아 충심으로 멜키오르 저하께 간언했습니다.
아슬란 왕자는 사람을 대상으로 무도한 실험을 자행했고, 그 결과 광전사를 만드는 독을 만들어냈음을요.
그 독은 전쟁을 위한 준비임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멜키오르 저하께서는 앞날의 파국을 예상하시면서도 형제의 범죄를 용인하고 있었습니다. 제 목숨을 건 간언을 들은 저하께서는 그 일을 그저 ‘아우의 취미’라 일축하셨을 따름입니다.
그 후로도 아무런 재제 없이 아슬란 왕자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집안의 일을 안에서 처리하여 계도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왕세자 저하께서는 그저 정말로 전쟁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클레이오는 지난해 초여름, 키시온 영지 초소 습격 사건이 마무리된 후 궁성의 코티지 정원에서 멜키오르와 나눴던 대화를 그대로 다시 옮겼다.
과거엔 스웨인 템플의 보고서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어 본인을 놀라게 했던 기억의 능력이었다.
무고한 양민의 죽음에 멜키오르는 ‘희생이라. 경은 그들의 죽음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인가?’라고 되물었고,
양심에 대한 호소에는 ‘이 세계의 시간은 순환하는 것이지. 지금 죽은 이들도 이다음 국면에선 다시 살아있게 될 텐데, 그 죽음이 무에가 슬프고 안타깝단 말인가?’라는 광인의 답을 했다.
마수의 피와 아글라오는 그 독의 중요한 원료 중 하나임도 밝혔다.
디오네가 탄식했다.
다량의 진실을 함유한 클레이오의 말에는 기이한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클레이오 자신은 이것이 진실의 일부를 기워 만든, 완전히 다른 형태의 구조물임을 알았다.
그것이 기만인 줄도 알았다.
그러나 마법사는 일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좌중은 경악 속에서 침묵했다. 혼란이 불안과 뒤섞이며 폐색감을 불러일으켰다.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모두, 어느 경로로든 멜키오르나 아슬란의 행보에 의문을 가지게 된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로서도 냉정하나 합리적인 왕세자에게 저런 광기가 도사리고 있음을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혼란이 격해지려던 때, 이제껏 잠자코 서 있던 아서가 눌러놓았던 기세를 풀어놓았다.
그는 그 짙은 청록빛 눈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늘로 물러난 클레이오는 도청 카메오의 핀 부분을 접지시킨 후 끌어다 서클 안에 놓았다.
「지각」에 지극히 희미한 에테르 반응이 잡혔다.
이거였다. 도청을 알았으니 이 역시 이용해 줄 것이다.
‘이걸로 도청한 대화를 그라모폰으로 녹음해봐야 음질도 조악할 거고, 서로에게 껄끄러운 내용이니 유출돼도 상관없어. 자기들도 피를 흘리겠다면 그렇게 하라지.’
아서는 첫마디를 내뱉기 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클레이오는 마음속으로 가만히 초를 셌다.
‘3, 2, 1. 온 에어.’
큰 울림통을 거쳐 나오는 목소리는 정갈하면서도 단호했다. 억양은 수수하고 고전에서 인용한 문장 따위도 없었다. 진실만이 그의 수사(修辞)였다.
“아슬란 왕자의 목적은 브룬넨 황제와 알비온 왕의 관을 함께 쓰고 두 나라의 통치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서의 말은 사람들에게 스며 있던 회의와 의심을 쓸어버리는 폭풍이 되었다.
바로 여기에 세우기 위해 애를 써 연마한 아서의 외견은 강인하고도 아름다웠다.
힘과 예기를 함께 품은 신체, 어두운 가스등 하나만을 밝혀놓아도 낮을 되돌려놓은 듯 눈 부시게 하는 존재감.
그 자체가 근거처럼 기능했다.
“그에겐 그럴 자격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 역시 레오니드 폐하의 자손으로서, 천년의 왕조가 그런 식으로 폐해버리길 원치 않습니다.
저희에겐 영명하신 왕세자 저하가 있으므로, 그 야욕을 쉽게 이루지 못하리라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저는 진실을 알았습니다.
거듭한 탄원을 고사하고, 명백한 증거를 기각하며, 충신의 애국심을 역심으로 뒤집는 그분의 행동을 통해서 말입니다.
멜키오르 왕세자의 목적은 이 왕국의 왕관이 아니라 에테르의 폐지입니다.
그는 이 세상이 영겁하게 반복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는, 세계의 끊임없는 반복을 끝내기 위해 므네모시네의 문을 닫고 에테르를 폐지하며 신의 축복, 선물, 은총 그 모든 연계를 끊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제 아서를 둘러싼 사람들의 얼굴엔 의혹 대신 납득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첼이 낮은 한숨을 토했다. 오히려 두 번째로 들으니 처음보다 강한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며칠 전 처음 이야기를 전했을 때 첼은 놀라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문안에서 마담 리스에게 그렇게 말했던 거군.’라며 납득했다. ‘사람이 한 번 산다 여기지 않기에 그토록 거침없이 죽음을 수단으로 쓰는 거였어.’라는 말도 덧붙였다.
왕세자의 언동이 이상한 것은 알았지만 연유를 모르던 첼과 쌍둥이는 나름의 답을 얻고서 원래의 결심을 더더욱 굳건히 했다.
“그리하여 정의로운 검이 빛을 잃고 치유의 마법에서 효력이 사라지는 세기가 도래하기를 멜키오르 리오그난은 바라는 것입니다.”
연설에 열중한 아서의 윤곽으로 순정하고도 찬란한 에테르가 감돌고 있었다.
아서의 인력에 붙들린 수십 개의 눈동자는 어둠 속의 별처럼, 항성의 빛을 반사하는 행성들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평화롭게 발전된 세계를 가지기를, 레오니드 왕과 이솔트 왕비의 규약이 강자에게 강경하고 약자에게 부드럽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생존 이상의 가치를 위해 선택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번영한 세기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 제겐 온전한 증거도 보장된 보증도 없습니다. 믿음만이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이고, 제가 받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 별들 가운데에는 클레이오의 두 눈동자도 더해졌다.
연습하는 것을 여러 번 듣고 직접 첨삭도 해 준 문장인데도, 아서가 사람들 앞에서 직접 연설로 직조해내는 순간 문자는 찬가의 힘을 입는다.
이 땅에서 신의 힘은 음성으로 들리는 것이고, 너의 목소리에는 에라토의 매혹이나 뮈토스의 홀 없이도 선포하는 힘이 있다.
사람들은 너를 위해 기꺼이 죽고자 할 것이다.
클레이오는 아서의 에테르에 공명하듯 묵직한 빛을 뿌리는 공작의 지팡이를 꽉 쥐어 흔들리는 몸을 지탱했다.
첸트룸의 도서관에서 읽었던 과거가 현재 위로 겹쳐졌다. 아주 작은 부분조차도 망각의 그림자에 가리지 않도록 몇 번이고 다시 새겨지는 깨달음이었다.
유일하게 여신의 문이 남은 알비온 왕국의, 레오니드를 계승하도록 운명 지어진 왕자.
네 권능은 한 나라, 한 시대를 위해 예비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별들은 너를 위해 떠오르고, 천체는 네 뜻에 따라 운행할 것이다. 너는 선한 자들의 굳은 믿음과 충성을 얻을 것이다.
뒤로 물러난 클레이오는 도청 카메오를 슬쩍 서클 밖으로 밀어냈다. 도청자에게 들리도록 응접실 문을 닫는 소리도 냈다.
그리고는 문간에 서서 방 안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아서, 이시엘, 첼, 리피, 레티샤.
아서의 친위기사인 이 애들은 이미 알려진 세력이며 변치 않을 우방이다. 바로 그렇기에 멜키오르의 감시가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엔 중요하지 않았던 인물의 변화를 알아채기 위해서는 멜키오르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클레이오 자신, 사업가 디오네, 마법사 다리아와 세르게프의 사자인 아레미스.
응접실과 이어진 작은 휴게실에 와 있는 게스톤 팔라흐 의원.
첼의 옆에 자리한 제비꽃 클럽의 대의원이자 스위프트 거리 기자 모임의 회장 실라 홀링워스.
의 실라는 여성 기자 중 최초로 사회면 보도를 맡게 된 인물이었다.
누군가는 아서를 위해 말해야 하는 지금, 포커의 강자이기도 한 그녀는 기꺼이 이편에 제 인생을 판돈으로 걸어 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번엔 다리아가 성큼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제게도 소식이 있습니다. 헤스터 워드에 관한 거죠. 레이디 디오네가 논리의 도약이라고 말했던 부분을 명백하게 밝힐 수 있을 것 같군요.”
1) *「Silence」, D. H. Lawrence
행성의 정렬
다리아 이사이의 부친은 ‘박애의 펜’이라는 교육 후원 단체에 기부금을 낼 뿐 아니라, 재능 있는 학생들을 개인적으로도 지원했다.
이사이 가문이 키워낸 학생 중 하나가 장성해서 몇 년 전 주 클라이페다 공관의 2등 서기관으로 부임했다.
서기관은 이사이 후작의 딸 다리아가 탈영병 헤스터를 팔방으로 쫓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임기가 끝나고 룬데인에 돌아온 뒤, 혹시나 새로운 정보가 없을까 만남을 청한 다리아에게 제가 본 일을 개인적 호의로 알려주었다.
다리아는 자신이 들은 정보를 옮겼다.
“여러 채널로 확인한바 도망자 헤스터 워드는 현재 마인라트 공국의 주도 클라이페다에 머무르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노령으로 은퇴한 구스타프 뷔렌 장군의 성이 클라이페다 근교에 있습니다. 장군의 성은 마인라트 기사단이 지금처럼 규모를 늘리기 전 훈련소를 겸했던 만큼 신병을 훈련시키기 좋은 조건의 장소라 하더군요.
헤스터는 바로 그곳에, 훈련 교관으로 머무르고 있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서기관의 말에 따르면, 평민 출신에 주머니 사정이 빠듯한 하급 외교관은 포섭의 대상이 되기 쉽다고 한다.
통상 부문을 담당하여 브룬넨 상계에서도 그럭저럭 얼굴이 알려진 서기관을 부른 뷔렌 장군은, 평민과 말을 섞는 것도 역겹다는 태도로 아글라오라는 약재에 관해 떠봤다.
브룬넨으로 간 뒤 몇 년간 귀국하지 못했던 터라 소식이 어두웠던 서기관이 아글라오에 대해선 정말로 아는 바가 없음을 피력하자, 장군은 입막음 조로 돈을 쥐여준 뒤 뒷문으로 내보내려 들었다.
안내인은 처음부터 장군의 집사뿐이었고, 줄곧 비밀통로를 이용해 하인들 눈에도 띄지 않게 하려는 게 기묘했다.
기지를 발휘해 배탈 핑계를 댄 서기관은 하인용 화장실에서 중정 쪽으로 난 창을 살펴 훈련장을 관찰할 수 있었다.
“… 당시 훈련장에 나와 있던 훈련생은 백여 명 정도였지만, 그 모두가 자로 맞춘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교관에게 복종했다고 하더군요.
낙오된 훈련생이 피를 토하며 구르는데도 동요 없이 붉은 에테르를 흩뿌려 마법을 일으키는 마법사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브룬넨어만 쓰고 있었지만 억양은 분명 알비온식이었고, 체구가 작은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머리색을 검붉게 바꾼 걸로 충분하다 여겼는지 특별히 얼굴은 가리지 않은 게 요행이었습니다.”
서기관은 다리아 집안의 서생으로 신세를 지던 시절, 영애의 절친한 친구인 헤스터를 여러 번 보았다. 어렸을 때 탐정사무소 심부름꾼으로 일하던 과거를 가진 그는 눈썰미가 좋은 편이었다.
헤스터가 동안이라 학창 시절로부터 얼굴이 거의 변하지 않은 덕도 있었다.
클레이오 역시 다리아의 증언에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히드라의 독을 쓰더라도 에테르에 색이 도는 마법사는 쉽게 양산해 낼 수 없었다.
교관은 헤스터 워드였다.
‘멜키오르가 흘려준 헤스터의 소재가, 제법 좋은 이정표가 됐어.’
우연과 우연이 겹쳐 필연을 이루며, 정방향의 바람이 아서의 등 뒤를 떠미는 것만 같았다.
디오네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뷔렌 장군이라는 사람과 헤스터 워드는 임시 협력 관계일 뿐 진정한 우방은 아닌 거군요.”
“맞아요. 뷔렌 장군은 아글라오 밀수의 필요성을 의심하는 것으로 보이고, 헤스터의 지위는 장군이 아니라 그보다 상급자가 보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한참 어린 평민 훈련 교관에게 직접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고 타국 사람을 불러들인 거죠. 제겐 천운이었습니다만.”
다리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 결과 저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조사가 벽에 막힐 때마다 희미하게 나타나는 왕비의 이름을 차마 의심하고 싶지 않았던 유약함은 이제 버리겠습니다.
아서 전하, 신의를 다해 말합니다. 모든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저 다리아 이사이도 당신 뒤에 서겠습니다.”
다리아는 결연한 자세로 아서의 앞에 무릎 끓었다.
“신의를 담아 말한다. 나 아서 리오그난이 다리아 이사이의 뜻을 받아들인다.”
이어 아레미스가 다리아의 곁에 함께 무릎 꿇었다.
“로디언 후작을 대리하여 저 아레미스 한이 신의를 말합니다. 저하께서 정도를 걷는 한, 백광의 검은 당신을 지지할 것입니다.”
이시엘 역시 뒤따라 예를 표했고, 클레이오도 그렇게 했다.
위대한 영웅시의 첫 소절로 걸맞은 순간이었지만, 응접실의 카펫 무늬를 별 뜻 없이 훑는 클레이오의 머릿속은 복잡한 계산으로 뜨거웠다.
다리아와 아레미스를 포섭하고 에즈라를 뺀 것은, 그 성미 때문도 있지만 언약의 유무가 더 크게 작용했다.
‘멜키오르나 아슬란을 적대한다 한들 필리프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되진 않아. 멜키오르가 정식으로 언약을 물려받지 않는 한 다리아는 걱정할 것 없어.’
다리아는 헤스터와 동급생이었지만 마법의 발현이 빨라 명망가인 부친의 영향력을 입고 수도방위대 학교 입학과 동시에 필리프에게 언약했다.
아레미스 한의 경우 세르게프 영지의 사병으로 복무하다, 하사관 시절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나 감응력이 발현한 탓에 특별채용 된 후 어영부영 언약을 미룬 3레벨 마법사였다.
저레벨 마법사에겐 규정이 느슨하게 적용되는 경향을 이용한 게 분명했다.
그가 로디언 후작의 사람이란 정보를 얻은 지금은, 이미 세르게프 후작에게 충성 언약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클레이오는 이야기의 가장자리, 구석진 곳을 뒤져 그들을 찾아내 끌어들였다.
이 이야기는 최종이며 최후의 것.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써, 최선을 다해야 했다.
서약이 끝나고 모두들 몸을 일으키려던 때.
돌연, 레티샤가 아서에게 다가서 무릎을 땅에 댔다. 검은 옷자락 위 두 자루 검은 유독 서늘하게 빛났다.
“내 주군 아서 리오그난에게 [언약]한다. 나 레티샤 안젤리움은 네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그날까지 내 모든 재능과 자질을 네게 바치겠다.”
청량한 레몬빛으로 밝은 레티샤의 에테르가 소용돌이쳐 아서의 전신을 감쌌다. 빛은 잠시간 표면에 머무르며 두 사람을 함께 밝혔다.
그 행위의 뜻을 가장 먼저 이해한 리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레티샤!”
“아, 귓가에서 소리치지 마, 리피. 머리 울림.”
“언약이라니, 나나 아버지에겐 말도 없이!”
당황한 리피와 달리 레티샤는 후련한 얼굴이었다.
“이건 내 선택이니까. 아버지의 승인은 필요 없고, 너는 너대로 네 뜻에 따라 행동해. 하지만 나는 아서에게 미래를 걸겠어. 물론 자작은 안 돼도 좋을 것 같아. 그보단 더 멀리까지 배를 타보고 싶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보고 후계자가 되라고? 나 혼자?”
“굳이 중상을 입으며 싸우지 않아도 결판은 낼 수 있잖아. 그런 건 하고 싶은 사람이 하는 거. 리피, 넌 항상 자작이 되고 싶어 했잖아. 난 너만큼은 아닌 것 같아.”
눈썹을 스윽 늘어뜨린 아서가 양손을 내리 저으며 쌍둥이들을 진정시켰다.
“우선은 레티샤, 나를 믿어줘서 고맙다. 너희에겐 앞으로도 시간이 얼마든 있으니 둘이 마음에 맞는 선택을 할 때까지 이야기해 봐.”
그 말을 들은 리피는 실크 위의 꽃들을 폭풍처럼 꺾으며 아서에게 예를 표하고는 사납게 일어났다.
“나도 신의가 있어, 아서 리오그난.”
묘하게 볼멘 듯한 소리를 들은 아서는 정오처럼 그림자 짧은 웃음을 짓는다. 선명하고 정확한 웃음이다.
“고마워, 리피. 내가 신의를 다하는 한 너도 쭉 함께해 주리라 믿어.”
눈앞의 소란에 슬쩍 눈을 든 클레이오는 아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까지는 친위기사 친구들이 곁에 있는 것을 환시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나 과분한 일이었단 말인가.
환시를 넘어 오로지 현실에서 일어났던 일만으로 판단할 때, 모두를 학교에서 만나게 된 건 지극한 행운이자 기적이었다.
언젠가 쌍둥이들 중 하나는 자작이 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험을 떠날 것이다.
첼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혹은 그보다 더 나아간 정치적 권리를 쟁취할 것이다.
디오네는 클레이오를 택한 걸 후회하지 않고, 여기 클레이오는 최전선에서 물러나 평온한 휴식을 얻을 것이다.
자신은 목표까지 이르는 길을 짧게 하고 수고를 줄이기 위해, 양심에 위배되는 행동을 저지르지는 않으리라 다짐했다.
저들 모두에겐 흠 없는 광영을 안겨야 옳기에.
그 모든 마음을 눌러 담고서 아서가 대답했다.
“알아, 리피 안젤리움. 너는 처음 만났을 때에도 날카로운 검이었다. 네가 나와 함께해준 것을 영광스럽게 여긴다.”
마지막으로 첼이 나섰다.
“자, 그럼 이제 내 차롄가?”
그녀는 천천히 허리만 굽혔다. 존중을 담은 몸짓이었지만 무릎은 땅에 대지 않았다.
“나 첼레스테스 탕페트 드 네쥬가 신의를 담아 말한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나는 너의 뜻에 따라 치는 벼락이며 부는 바람이 되겠다. 과거에 [언약]한대로 내가 네 힘을 온전하게 할 테니, 너는 나의 권리를 온전케 하기를 요청한다.”
“나 아서 리오그난이 [언약]의 상대인 첼레스테스 탕페트 드 네쥬의 신의를 받아들인다. 나는 그대가 정치 참여의 권리를 획득할 수 있도록 전심을 다할 것이다.”
아서의 말이 끝나자 실라 홀링워스 기자도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클레이오는 「이격」의 벽을 둔탁하게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 밤 모든 별들이 너를 위해 정렬되었다.
아서는 왕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멸망해야 하겠지.’
아슬란도 멜키오르도 제 빛을 온전히 드러낸 아서를 결코 살려놓지 않을 것이므로.
.
.
.
손님들이 제각기 부엌 출입문이나 마구간 뒤편 문 혹은 저택 안 침실로 사라진 뒤, 응접실엔 977기 친구들만 남았다.
쌍둥이들은 밤새웠더니 배고프다며 응접실에 장식으로 놓여 있던 과일 바구니를 사이좋게 허물었다.
홀링워스 기자를 배웅하고 온 첼은 타이를 끄르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클레이오는 진작 늘어져 거의 누워 있는 형국이었다.
쭉 눕힌 공작 스태프는 바닥에 대충 굴려 놨고, 누운 탓에 기울어진 브랜디 잔에선 술이 흐를락 말락 하는 형국이었다.
브랜디 잔을 가로채 탁자에 내려놓은 첼이 의아함을 표했다.
“너 완전 물에 적신 손수건 같은데, 왜 아직 마법을 안 끄는 거냐? 손님이 더 남았나?”
답은 클레이오의 핏기 없는 입술 대신 아서에게서 나왔다.
역시 답답한 타이를 풀고 윙칼라를 벌리던 3왕자는 아무도 없는 퇴창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 이제 나오시죠. 그 귀한 얼굴 까먹겠습니다.”
‘은폐의 장막’을 젖히며 미에츠가 모습을 드러냈다.
첼과 쌍둥이들은 꽤 놀랐다.
“내 은신을 알아보다니, 이 스승이 보고 싶어서 목을 빼긴 했구나. 와하하.”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한 아서는 제 할 말만 했다.
클레이오가 보기에 아서 역시 미에츠를 마주하고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장래의 위대한 군주가 아니고 학교 망나니일 적 말투로 돌아갔잖아.’
“목 빼긴 뭘. 겨울인데 어떻게 트리스테인 성을 비웠어요.”
공작이 이끄는 왕세자 근위대가 창설된 후, 트리스테인 영지엔 기사가 열 명도 안 남았다.
미에츠는 영지의 열악한 사정을 보아 넘기지 못하고 두 해나 객원 기사 노릇을 하고 있던 터였다.
스승의 두터운 손이 척 하고 클레이오를 가리켰다.
“어허. 여기 네 물주가 보내준 마석을 방벽에 처발랐고, 라이사가 7레벨로 승격했다. 이제 어지간한 마수는 모롤트에 얼씬도 못 할 거야. 그래서 이 몸도 엉덩이가 좀 가벼워졌지.”
제가 보낸 마석이 뇌물로 잘 기능했다는 부분보다 그 뒤의 정보가 클레이오를 놀라게 했다.
트리스테인 기사단의 부단장 대리 라이사는 8교에선 존재하지 않았던, 알비온의 열두 번째 7레벨 기사가 된 것이다.
미에츠는 그간 남은 트리스테인 기사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거침없이 설명했다.
“로탄은 여전히 아르모리크 공작을 철석같이 믿지만 라이사는 좀 달라. 그들은 사실 리오그난 왕가가 아니라 아르모리크 공작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들이잖냐.”
트리스테인 기사들에겐 어렵게 겨울을 해쳐가는 일이 익숙했다.
최근 그들을 괴롭게 한 건 다른 요소였다.
평생 가족처럼 지내다 수도로 간 동료들의 편지 답장이 끊기고, 그들은 곧 진짜 가족들에게도 연락을 않게 되어 기사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결국 남은 기사단원 모두가, 클레이오가 아세르 상사 연락망을 통해 우회하여 전달한 편지로 키시온 영지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됐다.
“다들 그렇지만 라이사는 특별히 공작을 존경하던 기사였다고. 아르모리크 공이 어째서 그런 기사답지 못한 습격의 주동자가 되었는지 못내 궁금해하며 잠을 못 이루기에, 그럴 때마다 잠 잘 오게 절벽에서도 굴리고 검으로 탈탈 털어주기도 했지.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7레벨이 됐더라? 그럼 등 뒤를 맡기기에 충분하잖아.”
“라이사 경이 속성 지옥 훈련 코스를 제대로 밟았네요. 그러느라 스승님도 뭔가 벽을 뚫은 느낌인데. 거기서 어떻게 더 강해지려고 그래요.”
아서는 장난스레 스승의 팔을 툭 쳤다.
대단한 근육질인 미에츠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아서와 그 곁에 선 이시엘의 어깨를 함께 끌어당겼다.
“그러면 뭐하냐. 미안하다. 그때 내가 키시온에 없었던 게 통탄스럽다.”
이시엘은 자신을 끌어당긴 스승의 팔을, 똑같이 강하게 붙들었다.
“스승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서도 친우와 스승의 팔 위로 제 팔을 겹쳤다.
“언제부터 키시온 영지 수호기사였다고. 그러지 마요, 스승님.”
“그래 알아. 사죄는 그냥 내 자기만족이지. 내가 성벽을 막고 싸워 트리스테인 공작을 격파했던들, 너희가 받을 고난이 적어지지도 않았을 테고. 멜키오르는 그런 자니까. 안 그런가, 프란?”
제비꽃 사탕의 값
이번엔 아서조차도 놀랐다.
미에츠의 은폐에 함께 가려 있던 인물이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왔다.
플랫 캡을 눌러 쓴 작은 키의 인영. 먼 거리를 걸어온 듯 귀 끝이 다 얼었다 녹아 발개진 프란이었다.
“그 점은 동의하지만….”
의외로 동요하지 않은 이시엘은 자신보다 미묘하게 키가 작은 프란을 향해 시선을 내려 맞춘 후 까딱 고갯짓을 했다.
마뜩찮은 기색으로 인사를 되돌린 프란은 불편하단 티를 있는 대로 냈다.
“그렇게 논리를 전개하는 건 목적이 따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군. 시간 낭비할 것 없이 결론을 미리 내 주지. 내게 불가능한 충성을 요구하지 마시오, 검사 미치슬로프 다브로프스키.”
사과를 씹다 만 리피가 작게 속살거렸다.
‘와, 프란은 미에츠 선생의 저 긴 성도 혀 한 번 안 씹고 부르네.’
프란의 이마에 또 핏대가 섰다.
클레이오는 얼른 공작 지팡이를 불러 세운 후, 거기 기대 겨우 일어나 앉았다.
“오해 말아 줘, 프란. 네 조사 결과 공유에 대한 허락을 구할 때 말했던 것처럼, 아슬란의 비밀을 파헤친 장본인에겐 진실을 알 권리가 있으니 와달라고 한 거지, 다른 걸 요구하려던 게 절대 아냐.”
“말로는 잘도 빠져나가는군.”
“그래서 정말 도움이 하나도 안 됐단 거야?”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 들을 건 다 들었으니 난 가겠다. 저기 검사 다브로프스키의 요청은 수락할 테니 그렇게 알아 둬라.”
“뭐? 무슨 요청?”
얼굴을 찌푸린 프란은 어떤 반응도 내어놓기 싫은 것처럼 휑하니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슬슬 날이 밝아 통금 시간이 끝나가기에 클레이오도 굳이 그를 붙잡지 않았다.
어느새 클레이오의 잔을 빼돌려 전부 비운 미에츠는 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별로 개의치 않고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저 프란이란 놈, 기개가 있는 친구로군. 이 가슴 뛰는 영웅담의 서두부에 휩쓸리지 않은 채 제 줏대를 지키고 말야.”
클레이오는 쥐도 새도 모르게 빼앗긴 술잔을 보며 음울하게 웅얼거렸다.
“프란이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내 불초 제자만큼은 아니고.”
빈 잔을 내려놓은 미에츠는 커다란 몸을 일으켜 낮은 테이블을 훅 넘었다.
그에게 익숙하고, 그를 존경하는 이시엘이 반사적으로 검의 그립을 쥘 만큼 패역한 기세였다.
아서를 크게 압도하는 신장의 스승은 불이 타는 듯 강렬한 눈으로 장성한 제자를 쏘아보았다.
아서 역시 형형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검도 없이 숨을 죄는 듯한 싸움이었다.
영원 같은 몇 초가 지난 후.
로브를 젖힌 스승은 칼을 뽑아 내려놓았다.
“나는 네게 충의를 맹세하마, 아서 리오그난.”
미에츠는 심장 위에 오른손을 얹고 한쪽 무릎을 꿇는 자세를 취했다. 왕에게 올리는 기사의 예였다.
“나 미치슬라프 다브로프스키가, ‘신의를 담아 말한다.’ 네가 바른길을 갈 때 나는 함께하고, 네가 가장 어려운 처지에 처했을 때 곁을 지키겠다.”
스르릉―
베그의 검끝으로 미에츠의 어깨를 짚은 아서는 위엄 어린 태도로 답했다.
“‘신의를 담아 말한다.’ 나 아서 리오그난은 미치슬라프 다브로프스키의 맹세를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검을 검집으로 돌려놓은 뒤 제 스승을 손수 일으켜 세웠다.
그의 표정에서 어느샌가 위엄은 사라지고 본연의 발랄함만이 남았다.
“그래도 계속 스승님이라고 부를 건데요.”
“짜식, 그럼 맹세 하나로 나랑 맞먹으려고 들었냐? 천 년은 일러.”
어느새 과일 한 바구니를 흔적만 남기고 다 해치운 쌍둥이가 저들끼리 조잘거렸다.
‘아, 아저씨 방금은 디게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안셀름 기사인 줄.’
‘멋있음이 일 분을 안 가네.’
‘아서가 그것도 자기 스승님 닮았나 봄.’
샐샐 웃는 첼이 쌍둥이들을 아프지 않게 톡톡 쥐어박고는, 짝! 박수를 쳐 판을 접었다.
“큰일 없이 끝나 다행입니다. 밤이 늦은 것이 아니라 새벽이 밝았으니, 이제 일을 마치도록 합시다. 우린 괜찮지만 집주인은 죽을 맛인 게 보이잖아요.”
이시엘도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고쳐 매던 미에츠는 마법식을 접으려던 클레이오를 얼른 붙잡았다.
“어, 어어어. 아. 잠시만, 한마디만 더 하자. 어디보자, 그 아글라오라는 걸 내게도 좀 다오. 비탄의 자수정 조각으로 만들었다는 마도구 시제품도 같이 말이야. 이제 안 쓴다며? 화이트 청년이 그러는데, 클레이오 네가 허락한다면 빌려주겠다네?”
“아글라오에 마도구라뇨.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말씀이군요. 왜 그게 필요한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프란이 처음 본 사람에게 연구 성과를 나눌 만큼 마음을 연 것도 신기했지만, 미에츠 선생이 마도구와 약재에 관심을 두는 건 더 이상했다.
클레이오가 의문을 표하자 몸짓이 풍부한 미에츠는 손짓 발짓을 해가며 설명했다.
“수도에는 사흘 전에 왔는데, 참말 놀라운 소식이 많더군.
근자에 정신이 살짝 돌아온 피어스 클라겐은 히드라의 독에 중독된 상태라며. 클레이오 학생, 네가 알아냈다고 아서가 말해주데?
아까 가 버린 그 조그만 연구자 친구와 사나이 대 사나이로 얘기를 나눴지.
피어스가 정신을 좀 차린 건 아글라오라는 약재와 기존의 에테르를 허무는 독의 기능이 함께 작용한 덕일 거라잖아.”
하느작거리는 공작의 꼬리를 흔들어 바르게 고른 마법사는 방금 머릿속으로 완성된 추측을 검토했다.
프란이 미에츠에게 갑작스런 호의를 보인 것은 언약이라는 ― 왕에게 무력을 보장하는 제도를 부술 실마리를 얻기 위해서인지도 몰랐다.
‘언약의 금제가 극복된다면 더 이상 왕은 기사와 마법사를 수족처럼 부릴 수 없을 테니 말이지.’
아글라오는 경감 마법 시험 대조군으로 쓰겠다고 기디온에게 요청해 정식으로 한 박스를 받아 놨다.
‘사실은 마도구의 항독 기능을 시험하려면 히드라의 독이 있어야 하니까, 독을 만드는 데만 실컷 썼지만.’
그래도 재고는 넉넉했다.
히드라의 독에 대항할 항독 마도구는 나름 순조롭게 개발 진행 중으로, 시제품의 시험 진행을 마치고 본품 개발에 들어간 상태이긴 했다.
미에츠의 청은 들어주는 편이 이익일 듯했다.
‘어차피 이솔트가 만들었던 최초의 언약은 이미 변질된 지 오래야. 본래 그건 개인에 대한 충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를 수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선이었으니까.’
카롤링거에서는 전통적인 충성 선언이 폐지되었고, 기존의 관습은 독재자의 친위대를 만드는 데 악용됐다.
멜키오르는 호시탐탐 아서를 언약시킬 기회를 엿봤고, 정식 기사가 되는 2년 뒤는 그리 먼 훗날도 아니었다.
클레이오는 이미 마음을 정했으면서도 미에츠의 정확한 의도를 귀로 듣기 위해 어깃장을 놓은 것이다.
“둘 다 지극히 희귀한 물건입니다. 어디에 쓰실지 용처를 모르고서야 아서의 스승님이라 해도 그냥 넘겨드릴 순 없습니다.”
“야, 아서야, 네가 동료는 잘 얻었다. 허투루인 데가 없고 깐깐허니 대업을 이루겠다. 작대기 대마법사야 귀 열고 잘 기억해 놔라.
네가 내준 걸 써서 일이 잘 풀리면, 이 몸이 에드워드 왕의 기사를 몇 인도해주마. 다 죽어가는 늙은이들이지만, 정신만 잘 차리면 늙은 말이 또 인내심은 있는 법이거든.”
피로한 무표정에 점령된 멀건 얼굴 아래로 클레이오는 회심의 미소를 숨겼다.
‘역시, 그쪽이었군.’
“일단 줘 봐봐. 되든 안 되든 한번 밀어붙여 보자. 옛 시절 기사들이 젊을 적 기량은 못 되찾는대도, 있으면 없는 것보단 낫겠지.”
아글라오와 항독의 자수정을 써서 언약의 금제 때문에 기억을 잃고 사라져버린 기사들을 아서 아래로 끌어올 수 있다면, 예상외의 전력이 될 것이다.
클레이오는 두 번 망설이지도 않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
무도회의 밤, 드물게 외제니아는 홀로 저택의 침실에 남았다.
샤프롱은 진짜 주인인 쥴레이카 왕비에게 오늘의 행적을 보고하기 위해 사라졌다.
브룬넨 대사 명의로 장기 임대 중인 소버닐 지구의 대저택은 춥고 썰렁했다.
외제니아는 이 저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그 누구라도 낯선 장소에 친밀한 사람 하나 없이 내던져져 있으면 그게 어디가 됐든 정이 붙을 리 없다.
약혼자?
그 남자는 외제니아의 연기에 제법 그럴듯한 장단을 맞추어 주고 단둘이 남을 때에도 예의 바르게 굴지만, 그건 그냥 왕비의 명령에 따르는 데 불과한 행동이었다.
차갑지만 잘생긴 얼굴에 무난하면서 친근한 표정을 얹고 있을 때도 그 검은 눈 안에선 업화가 불탔다.
제 배다른 형제들을 향하는, 연원 모를 오싹한 증오는 그를 움직이는 동력처럼 보였다.
그와의 사이에서 남녀의 감정이 싹트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까지, 외제니아가 짊어진 의무였다.
온 국민의 관심을 받는 왕녀는 실상 말 붙일 친구나 레이디스 메이드 하나 없는 신세였다.
손님을 초대하고 무도회를 열며 약혼자와 티타임을 가지는 저택의 전면과 달리 침실과 드레싱 룸에는 말 못 하는 하녀 둘과 샤프롱만 들어올 수 있었다.
바깥에서 일하는 하녀들은 그저 공녀님이 높은 지위의 귀부인답게 까다로운 성미를 지녀 그런 줄 알지만, 실상은 남들 눈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비밀이 너무 많기에 그런 제한을 둔 것이다.
이런 밤에는 더더욱 처지가 서글펐다.
‘으, 발 다 부었어.’
아세르가의 무도회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늙은 귀머거리 하녀를 자러 가게 한 외제니아는 보디스와 구두, 스타킹과 스커트를 알아서 벗어 놨다.
이 저택의 유일하게 좋은 점은 힘들게 물을 데워 와야 하는 케른트너 영지의 별채완 다르게 수도꼭지만 틀면 온수가 철철 나온다는 부분이다.
‘아참, 하나 더. 라디에이터도 좋아. 티플라움인지 뭔지를 쓴다고? 엄청 따듯해.’
슈미즈 차림이 된 외제니아는 무도회에 참가할 때와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뜨거운 물을 야무지게 대야에 떠 와 의자 아래 놓고, 허리엔 쿠션을 받친 뒤 편하게 기대앉아 탁자 위의 카메오를 관찰했다.
‘들어보다 뭔가 건질 만한 대화가 있으면 전화를 하라고 했지.’
도대체 무슨 신묘한 마법을 쓴 건진 몰라도, 똑같이 생긴 한 쌍의 카메오는 핀을 접지해 놓으면 도로 몇 블록을 뛰어넘어 음성을 전달해 주었다.
브룬넨 대사 명의의 저택이 아세르 저택과 뒷문으로는 꽤 가까운 거리인 게 주효했다. 선명한 음질은 아니지만 귀 기울여 잘 들으면 말뜻은 분간이 갔다.
사실 왕비는 이 일정을 반대했다. 건방지고도 하찮은 아세르가 도령의 무도회 참석을 강행한 건 왕비가 아니라 마법사의 뜻이었다.
하지만 브로치에서 웅웅 울리는 소릴 듣고 있으니 묘하게 마음이 따듯해졌다.
느린 음악, 남녀의 웃음소리,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음, 샴페인의 코르크를 퐁! 하고 따는 경쾌한 소리.
얼마나 오래 기다렸을까.
대야의 물이 식어 한 번 더 갈고, 머리를 다 풀어 잠자기 쉽도록 땋고, 벗은 옷은 옷장에 정리한 뒤에야 아까부터 한참 침묵하던 브로치에서 의미심장한 연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분명 아서 왕자의 목소리였다.
아까 본 ‘춤 되게 사납게 추던 사내애’는 간데없었다. 마도구를 통해 울리는 음성은 확신과 설득력, 그리고 품위를 갖춘 것이었다.
[“아슬란 왕자의 목적은 브룬넨 황제와 알비온 왕의 관을 함께 쓰고 두 나라의 통치자가 되는 것입니다.”]외제니아는 긴장으로 땀에 찬 손을 몇 번이고 잠옷에 닦아 가며 전화를 연결했다.
교환수를 몇 번 거친 뒤 클라이페다의 마법사가 금세 전화를 받았다.
인사는 필요 없었다.
외제니아는 카메오를 들어 수화기를 향해 갖다 대 두었다.
그 뒤는 연이은 폭로였다.
경첩이 삐거덕거리고 탁 하며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심금을 울리는 연설이 끝났다.
외제니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충격적이기도 하고, 기묘한 감상에 심장이 쿵쾅쿵쾅 울리기도 했다.
그 어느 사내의 구애에도 마음 뛰어본 적 없는 그녀이건만, 이 파고가 그러한 달콤한 감정에서 기인하지 않은 것임을 알았다.
알비온의 사정에 완전히 밝지 않은 외국인이라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엄청난 정보였다.
아슬란 왕자와 쥴레이카 왕비가 벌인 짓이라니.
외제니아는 없는 용기를 끌어내 태연한 척 방금 엿들은 말을 복기했다.
“아서 왕자의 가장 큰 조력자는 클레이오 아세르이고, 그들은 멜키오르 왕세자를 모함할 작정인 모양이에요.”
“앞뒤의 말이 더 집음되면 좋으련만, 문 하나에 막혀서 아쉽군. 하지만 얄팍한 인기로 명성을 얻은 3왕자에겐 열광하던 군중이 식어 돌아설 때 얼마나 빠르게 입장을 바꿀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도 좋겠지. 당분간은 느슨히 풀어놓겠지만 감시를 늦추지 마.”
“알겠어요, 헤스터.”
“워드.”
“네, 워드.”
전화는 대답도 없이 끊겼다.
외제니아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헤스터는 늘 저랬다.
몇 년 전, 뱃속에서 어린애보다 큰 종양이 발견된 어머니를 수술해주려는 외과 의사는 아무도 없었다. 영지의 마법사도 이미 죽음이 침식한 어머니를 구해주진 못했다.
하지만 어느 날 나타난 저 헤스터 워드란 마법사는 병을 고치진 못했어도, 어머니를 좀 제정신으로 돌려줄 순 있었다.
붉은 광염의 에테르가 가진 힘이었다.
침입을 막던 병사를 산 채로 말려버리던 괴물의 능력이, 역설적이게도 어머니를 무작스런 고통에서 건져주었다.
엄마는 아무튼 여생 내내 시달리다 죽진 않을 거였다.
그게 쥴레이카 왕비의 사자라는 마법사 헤스터가 케른테스 영지에 와 외제니아에게 해준 약속이었다.
그래서 외제니아는 아슬란 리오그난의 약혼자가 되는 거래를 승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