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77
수도방위대 기사단 예비기사와 마법고문 (4)
일주일 후.
아서는 방패를 졸업시험장에 지참했다.
그다음 날부터 검술 부문 수석으로 졸업하는 3왕자와 그의 방패에 대해 모르는 이가 없어졌다.
그러나 그 주가 지난 뒤로는 누구도 방패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멜키오르 리오그난이 보인 영성(靈性)이 세상의 모든 뉴스를 압도해버린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이제 존재 정의를 통해 스스로가 누구인지, 그리고 신살자가 누구를 죽였는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신의 말과 존재의 증명을 손에 넣은 멜키오르가 법과 규칙에 매일 이유는 없을 터.
클레이오는 이제 이전과는 다르게 경감의 요청을 간절히 기다렸다.
태서턴의 눈을 피할 방도만 찾는다면, 멜키오르가 자신의 서클 안에 들어오는 순간이야말로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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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축제 기간, 다사다난한 한 해를 보내고 연말을 맞이한 룬데인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데르니에 대륙 전체가 마수 출몰의 영향하에 있었지만 알비온은 그나마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마수 카라파스를 막아내 작물의 작황도 좋았고, 티플라움 부품을 활용한 기계 부품과 마도구 수출도 활발했다.
거리 곳곳에 등이 밝혀지고 겨우살이 가지가 걸렸다. 상점마다 쇼윈도 안을 멋지게 꾸며 상품을 돋보이게 했다.
백화점과 상점가는 연말 선물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로열 오페라와 프로코러스 발레극장에서도 겨울 시즌에 걸맞은 작품이 올라갔고, 객석은 관객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저 바깥의 들뜬 연말 분위기와 다르게 멜키오르 리오그난이 국새를 되찾은 왕성의 공기는 싸늘하고 날이 섰다.
처음 왕세자가 되어 내무보안국을 손에 넣은 후 자신의 책봉에 의문을 표하는 자들을 쳐낼 때처럼, 멜키오르는 숙청의 칼날을 휘둘렀다.
이례적으로 선거 전인데 내각을 다시 구성하여 왕실자문위원회의 구성원을 완전히 쇄신했다.
자문위원이던 자의 비위나 병환 같은 이유가 아니라면 통상 5년에 한 번 내각 구성을 새로이 하는 것이 25년 전부터의 관례였다.
하지만 ‘진주의 도시’에서 돌아와 병석에서 일어난 멜키오르는 더 이상 탄원이나 간언 어느 쪽도 듣지 않았다.
왕은 형식적으로 임명을 할 뿐, 실제론 의원 사이의 투표로 선출하는 평민원 의장 벤자민 비튼과 귀족이 선출하는 귀족원 의장 조지프 크뤼엘 공작 외엔 여러 사람의 희비가 엇갈렸다.
멜키오르가 부재하는 동안 사리사욕을 채웠던 상무장관 베르메는 보직을 내려놓고 세무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이슬레이 백작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야 했다.
계산을 통해 멜키오르를 미지근하게 지지하던 자들 중 절반은 공포를 느끼며 몸을 사렸고, 나머지 절반은 광신적인 추종자의 경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자의 대표는 벤자민 비튼 의장이었고, 후자의 기수는 이슬레이 백작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평민원선거가 있는 해였다.
벤자민 비튼이 자신의 지역구에서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기는 해도 선거 결과에 따라 평민원 의장 지위를 내려놓는 일은 얼마든 벌어질 수 있었다.
중심이 되는 인물이 나설 수 없는 처지이니, 멜키오르에게 회의를 가진 이들의 구심점이 생길 수 없었다.
졸업식 날 아침에도 습관처럼 신문을 읽던 클레이오의 감상은 이랬다.
‘자기 없는 동안에 깽판 친 놈들 다 밀어버리고, 그 김에 거슬리는 놈들도 모두 쓸어내는구나.’
클레이오는 어젯밤 제베디 교수에게 아킬레우스의 방패를 다시 선보이던 도중, 학장 연구실로 급히 달려온 비서의 말을 떠올렸다.
졸업식에 참석하기로 했던 귀빈 중 여럿이 갑자기 불참을 알려 자리를 조정해야겠다는 소식이었다.
‘다 연결돼 있었던 거지. 멜키오르의 숙청에 휘말린 인사들은 한가롭게 애들 졸업식 같은 거 보러 올 처지가 아닐 테니까.’
기사를 꼼꼼히 읽은 클레이오는 약간 식은 차를 마시며 지의 1면을 다시 살펴보았다.
빛의 축제 첫날, 광장을 향해 난 테라스에 국왕 대리가 나와 이례적인 연설을 하는 장면이었다.
온갖 재해가 벌어졌던 해의 연말이니, 국왕 대리가 연설로 민심을 어루만지는 일은 그리 특이할 것 없었다.
‘하지만 멜키오르는 그저 연설만 하러 나선 게 아니었던 거야.’
신문 1면의 절반을 차지한 삽화는 크기도 컸지만 그림의 선 하나하나가 생생해 가히 걸작이라 할 만했다. 어제 오후 있었던 멜키오르의 대중 연설 장면이었다.
왕세자가 세 달 만에 광장 위 발코니에 섰을 때 그가 일으킨 기적은 그림으로 옮겨놓아도 더없이 장엄했다.
그나마 사진보다는 그림이 멜키오르의 외견을 옮기는 데 정확도가 높았다. 그 점을 국왕 대리의 공보관도 아는 모양이었다.
‘장난 아니고 진짜 엄청나긴 하군.’
신문의 삽화가 아니라 기적의 광경을 묘사한 성화의 판화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 전날의 광장 풍경은 성스러운 구름과 후광, 성유물과 성인이 함께 등장하는 종교화의 한 장면에 가까웠다.
클레이오는 별로 안 내키는 마음으로 「직독」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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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욱한 겨울 안개 너머 발코니 위에서 양팔을 아래로 내뻗은 멜키오르의 얼굴엔 자애로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이렇게 연설을 마쳤다.
“위기의 시대에 나는 앞장서는 빛이요, 길잡이가 되겠습니다. 신의 영광과 은총이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왼손 위에 새겨진 신의 도구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현현시켰다.
‘저게 뭐야!’
‘어떻게 마법도 아니고 허공에서 빛이….’
‘소문을 들었는데, 신물이라지 뭔가!’
‘세상에!’
뮈토스의 홀은 차가운 겨울 안개를 걷어내고 찬란한 빛을 모두에게 내리쬐었다.
발코니 아래 모인 사람들은 하나둘 울면서 무릎 꿇거나 그 자리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이제 멜키오르의 두 손에는 상처를 눈가림할 그 어떤 물건도 덮여 있지 않았다.
험하게 일그러진 양손을 당당히 드러낸 멜키오르는, 종래의 지극히 합리적이고 인내심 깊기만 한 왕세자가 아니었다.
그 역시 레오니드의 자손이자 용맹한 검사로서 제 무위의 증거로 신물을 손에 얻은 자였다.
어미의 광증에서 기인한 오래된 상흔은 잊혔다. 용기의 증거인 상처가 과거를 덮어씌웠다.
진실?
그에게 진실 따위는 아무 상관없었다.
국왕 대리의 무사 귀환이 기뻐 광장에 모인 순진한 시민들, 자신들이 왕세자의 건강을 가지고 건 도박의 결과가 궁금해 확인하러 온 꾼들, 심부름꾼 아이들, 손을 잡고 나온 조부모와 손자.
그들 모두가 기적을 목격했다.
지난여름 아세르 가문의 마법사가 뿌린 비처럼, 한겨울에 다른 계절의 공기를 흩뿌리는 따스한 빛을.
귀족 중에 맨 처음 무릎 꿇은 이는, 멜키오르의 뒤편에 서서 다음 순서인 빛의 주간 연설을 준비하던 로자문드 르 포어 부주교였다.
그녀를 뒤따라, 신심 깊은 귀족들 역시 하나둘 바닥에 이마를 대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숭고를 마주한 자들의 전율이었다.
뮈토스의 홀이 내는 광휘가 광장과 테라스 전체를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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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로지 신문만을 읽은 클레이오는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날 발코니에 모인 이들 가운데 오로지 단 한 사람, 광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안쪽에 서 멜키오르의 다음 일정을 정리하고 있던 제레미 툴민 비서관만은 열광에 휩쓸리지 않았다.
‘등 뒤’는 신조차도 간과한 구석이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비서관은 기억된 세계에서 돌아온 왕세자에게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다. 어쩌면 광기의 전조라 할 만한 이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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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오는 신문을 덮어 한편으로 밀어두고 딱딱하게 굳은 토스트 반쪽을 차와 함께 조금씩 삼켰다.
샬럿 부인의 솜씨인, 오렌지 과육이 쫀득하게 처리된 마멀레이드를 발라 놓았더니 식어도 먹을 만했다.
‘여기서 밥 먹는 일도 이젠 드물어지겠군.’
이쪽 세상에서 살게 된 이후 가장 많은 끼니를 해결한 곳이자 아서를 처음 만난 강의동 식당이었다.
묘한 감회에 젖은 클레이오는 익숙해진 식당의 안팎 모습을 다시금 눈에 새겼다.
재학생은 방학에 들어가고 졸업생들은 찾아온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기숙사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어제저녁엔 그간 감사했다고 손수건과 브로치를 샬럿 부인에게 선물했다.
눈시울을 붉힌 부인은 앞으로도 연구제자로 계속 연구실을 쓸 테니 얼마든지 밥을 먹으러 오라고 했다.
물론 클레이오는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아세르 집안에서 이 학교에 낸 기부금 규모를 생각하면 밥 정도는 평생 얻어먹어도 도의상 문제없을 것 같다는, 좀 서민적인 감상이었다.
“레이! 기숙사에 없더니 여기 있었어?”
“어어, 리피. 레티샤. 오늘도 기운차네.”
“그래. 넌 오늘도 시들시들 구무적거리고 있고.”
“날씨가 추운데 미리 강당에 가 있을 필요 없잖아.”
근대에 증축한 기숙사 식당은 라디에이터로 난방을 해 공기가 따듯했지만, 왕의 홀 만큼 연대가 오래된 강당 건물은 문화유산답게 제대로 난방이 안 됐다.
조교들이 마법을 써서 냉기를 흩어주기야 하겠지만 그것도 귀빈들이 도착할 즈음에나 시작할 거라 생각해, 클레이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미적거리는 거였다.
“아서랑 이시엘은 가 있는걸. 이시엘이 졸업 연설 연습한대. 첼은 그걸 찍겠다고 사진사까지 불러왔어. 벌써 오십 장은 찍은 거 같음.”
“안 그래도 잘할 텐데. 역시 이시엘은 수석 졸업자답네.”
977기 종합 수석은 예상에 어긋난 바 없이 이시엘이었다. 물론 그녀조차도 검사반의 졸업 토너먼트에서는 아서를 이기지 못했다.
“근데 레이, 너도 남 말할 처지가 아님.”
“마법반 그롤 조교에게 들었는데, 너는 아예 성적 산출 열외로 전공에선 수석이라면서! 천재 마법사!”
이제 마음의 나이가 서른다섯 살에 근접한 그였다.
열여섯 살 먹은 쌍둥이들에게 학교 성적 칭찬 같은 걸 받아봤자 민망할 뿐이었다.
“이제 졸업하면 수도방위대에 들어갈 것도 아니고 여기 연구실서 연구만 할 거니까 사람들 입엔 좀 덜 오르내리겠지.”
그 말에 두 쌍둥이는 서로를 쳐다보며 도르르 눈을 굴렸다.
“과연 그럴까?”
“진짜로?”
“원래 사람의 관심이란 건 생각보다 길게 안 가.”
“또, 또 노인네 같은 소리.”
“게다가 틀렸어.”
“강당은 아직 문 닫아놨는데 벌써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와선, 연병장까지 가득 채우고 있는데, 군중이 몰린 원흉 중 하나가 너인 거 같아.”
“설마. 최초로 학교에 입학한 정복왕의 재림 3왕자 전하의 졸업도 오늘인데, 그게 다 나 때문이겠어?”
“그을세.”
“아무튼 가자! 10시 다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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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왕립 수도방위대 학교는 배움만을 얻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평생을 함께할 친구를 얻은 터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기사의 마음가짐과 검술을 갈고닦았을 뿐 아니라, 우정의 귀중함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삶에서 위기와 곤란을 맞이하였을 때 어려움을 헤쳐 나가게 하는 힘은 신의와 믿음에서 옴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깨달음을 여러분도 앞으로의 인생에서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졸업 가운을 입은 이시엘이 연설을 마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유머는 좀 부족했지만 가슴을 울리는 연설이었다. 화려한 수사가 없기에 오히려 가슴 뭉클한 진심이 느껴졌다.
키가 커서 맨 뒤편에 앉은 아서와 클레이오도 힘껏 박수를 치며 입 모양으로 소감을 나눴다.
‘잘하는데. 감동적인걸.’
‘이시엘은 원래 뭐든 잘하는데 연설은 연습까지 엄청나게 했다고.’
‘쟤가 잘난 건데 왜 아서 네가 뿌듯해하냐?’
‘이시엘과 나는 운명공동체잖아, 어?’
‘허이고.’
‘야야, 봐봐. 키시온 자작은 울기까지 한다. 난 저분이 우는 거 처음 봤어.’
이시엘과 꼭 같은 붉은 머리를 한 자작은 연단의 옆쪽 아래에 앉아 있었다.
변경백이자 기사인 중년의 사내가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은 많았지만 결국 훌륭한 기사예비생으로 졸업하니, 자랑스러우시겠지.’
‘그 옆옆옆엔 네 아버지도 있는데?’
‘뭐?’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쭉 기대고 다리를 꼰 채 척추 건강에 나쁜 자세를 하고 있던 클레이오가 퍼뜩 허리를 세웠다.
아서의 말이 맞았다.
차갑고 무심한 표정의 기디온 아세르가 강단 옆 귀빈석 한편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온단 말 없었는데?’
요즘은 졸업 준비를 하네, 아다만티움 방어막 모형을 만드네, 바빠서 예의상의 편지도 뜸하게 보냈다.
가택 연금이 있었던 이후 더욱 연락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들이 이리저리 정치적 파란에 휩쓸리는 게 사업가인 부친에게 뭐가 좋을까 싶어 굳이 나서지 않았었다.
‘너희 집안은 상사 우편망까지 따로 있다면서 왜 그렇게 연락을 안 하는 거냐?’
‘아니 뭐, 다정하게 아침저녁 안부를 물을 사이도 아니고….’
클레이오는 기디온이 단지 자식의 졸업식을 보기 위해 먼 길을 왔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뭔가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