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94
강의 북쪽, 수도의 원관념 (6)
두 젊은이는 실처럼 가는 금도금 반지 한 쌍을 나눠 끼고서, 서로의 손을 꼭 붙들었다.
가지 않은 봄날의 기억이었다.
상점의 반짝이는 창이, 젊음 자체의 선명함으로 인해 단순하게 아름다운 부부를 비춘다.
부부는 식을 못 올렸다. 버스를 타고 종로로 나가 반지를 사고 혼인신고만 했다.
그래도 부친은 하얀 셔츠에 여름 정장 상의를 입어 예의를 차렸다.
하얀 카라가 넓게 달린, 푸른 색 원피스를 차려입은 어머니는 참으로 소녀처럼 보였다. 허리선이 낮은 원피스의 풍성한 치맛단이 무게 없는 걸음걸이에 따라 흔들렸다.
사람을 믿었다 이래저래 돈을 잃었지만 그들은 아직 젊다.
아주 키가 큰 남자는 여자를 향해 고개를 기울여 말한다. 익숙하게 다정한 몸짓이었다.
“명화 씨는 말입니다, 앞날에 애가 생긴다면 어땠으면 좋겠습니까?”
“어떠하다뇨?”
“착했음 좋겠다거나, 건강했음 하든가. 그런 거 말입니다.”
“왜 그런 것을 물어요. 바란다고 되는 일인가요. 그냥요, 우리 아이는 저가 보기에 좋은 것이 있는 세상에서 살았음 해요. 무엇이라도.”
“보기에 좋은 것… 그래요. 내 미처 그런 생각은 못 했어요, 항상 명화 씨가 지혜롭습니다.”
남자는 실없이 귓가를 붉혔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에게서 이 세상에 가장 보기에 좋은 것은 이명화였다.
여전히 희망과 의지를 가지고, 언젠가 얻게 될 자녀와 배우자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는 열망에 불타오르는 청년의 눈가는 낯이 익다.
이전 생의 클레이오가 아침마다 거울 안에서 늘 보던 그 눈매였다.
침울한 인상을 가졌던 자신은, 본래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이를 꼭 닮은 아들이었다.
망부석처럼 선 클레이오는 사람의 물결을 거스르며 이명화를 응시했다.
이명화는 가벼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시대에 뒤떨어진 복색을 한 키 큰 청년과 눈이 마주치자 놀라는 기색도 없이 사르라니 눈가를 휜다.
그것은 이솔트의 미소였고, 레지나의 웃음이었으며, 실제로는 본 적 없는 텔마의 표정이었다.
신들의 웃음. 영원에 걸친 존재들만이 그런 방식으로 표정을 만든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부디, 그리 살아 주렴.’
삐이이이이이이―
이명이 날카롭게 박혀왔다.
간신히 가라앉았던 마음이, 밀어두었던 불안이 다시금 범람했다.
다급히 펼쳐진 「이격」의 제한이 이성의 수몰을 간신히 막아냈다.
어느샌가 두 남녀는 클레이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땀에 젖은 채로 인민군 복장 사내의 손가락질과 양 갈래 머리에 교련복 차림을 한 학생들의 시선을 받으며 클레이오는 자문한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 큰 태풍이 오던 해 사라진 어머니의 시신은 끝끝내 찾지 못했다.
남도에 태풍 경보가 발효된 밤, 열려 있던 병실 창문 너머로 사라지셨다. 침입자도 침입 흔적도 없이.
신발조차 신지 않고 가신 어머니는, 처음엔 실종자가 됐고 나중엔 사망자로 처리 됐다.
신비는, 클레이오로 거듭나기 전 그의 삶에서 가장 거리가 먼 항목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 믿음은 여기에서 붕괴하고, 혼란이 믿음의 자리를 차지한다.
클레이오는 간절해진다.
문밖으로 나가서, 레지나 이스토리아를 만나야 했다.
그는 마법식을 펼쳐, 단숨에 거리를 뛰어넘었다.
시청에 도달한 클레이오는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아직 광장이 되지 않은 시청 앞 열십자형 차도에는 제법 많은 차가 오가고 있어 빵빵거리는 클랙슨 세례까지 받았다.
그런데 시청엔 시계가 없었다. 이 기억의 액자가 담은 연대에는 시청 시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클레이오는 답답한 마음에 자신의 머리를 주먹 윗부분으로 쿵 두드렸다.
‘시청 시계가 언제부터 달린 거지? 분명 흑백 사진에도 전자시계가 붙어있었는데… 젠장!’
클레이오는 조각조각 파묻힌 전생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헤집었다.
단행본, 원고, 기사, 논문, 조각난 인용문들을 「기억」이 종횡무진 누볐다.
그 속도가 눈으로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빨라진 순간.
스으으으읏― 스슷―
그의 주변으로 엄청나게 많은 종잇조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기억」의 이능이 만개하여, 이제는 읽었던 문장이 두루마리에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문장이 쓰여 있던 매체의 물성 자체를 재현하기에 이르렀다.
그 막대한 규모의 아카이브 위로 약속의 고지가 덧씌워졌다.
[귀속 아이템: 클리오의 약속] [―‘약속’의 가동률이 상승하여, 2단계 기능 「기억」의 실체화 요건이 충족됩니다. 여러 페이지를 동시에 볼 수 있으므로 검토의 용이성이 증가합니다.]마법보다도 더 기적 같은 문자의 폭풍 가운데, 마침내 클레이오는 단서가 될 문장을 발견해낸다.
막 한글을 익힌 자신이 또박또박 적어둔 일기였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어느 저녁, 오랜 왕조의 궁성을 가리던 건축물의 첨탑이 철거되는 광경을 어머니와 함께 뉴스로 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기 이야기를 잘 안 하던 어머니가 고구마순 껍질을 벗기던 손을 멈추고 ‘저거 때문에 모두 이 꼴이 났었다.’며 얕은 한숨을 뱉었던 게 마음에 남았다.
뉴스에서는 건축물의 지난 역사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소개했다.
총독부. 중앙청. 중앙박물관. 옛 사진과 영상이 스쳐지나갔다.
그래서 그는 신년에 주인집 할머니에게 선물로 받았던 노트에 들리는 내용을 받아 써 보았다. 뜻도 모르면서 적은 문장이었다.
‘총독부 청사는 콘크리트로 지어진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다.’
건물 외부에는 시계가 부착돼 있지 않았던 데다, 해체 당시 자신은 너무 어려 기억에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장소였다.
그렇지만 뉴스 화면을 스쳐간 자료 사진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기억」은 최종적인 단서를 얄팍한 신문지상 위의 사진 한 장으로 띄워 올렸다.
브라스와 크리스털로 장식한 화려한 샹들리에 너머, 고풍스러운 벽난로 위, 제국의 문장을 떼어낸 자리에 달린 시계의 모습을 담은 기사였다.
‘총독부 대회의실!’
마법사는 또다시 달렸다.
주변에서 삼엄한 경비를 서나 했더니, 꽃을 든 인파가 퍼레이드를 기다리고, 전차의 캐터필러로 인해 파인 바닥이 푹 꺼지다가, 학생들이 재재대며 걸어가던 길을.
마침내 세종로의 끝에 다다랐을 때, 구 총독부 청사가 보였다.
3분의 1쯤은 부서져 북악산의 능선을 드러내는 건물 주변은 먼지가 피어오르고 소란스러웠다.
이번에는 맞았을까?
철거 기사들의 고함 소리, 카메라 렌즈가 이쪽으로 돌려지는 걸 모두 무시하고서 클레이오는 [도약]을 통해 통제선을 뛰어넘었다.
헤르메스를 은유하는 진언 없이도 방아깨비 같은 제 한 몸 띄우는 마법 정돈 가능했다.
후에 단 한 번 보았던 내부의 설계도가 「기억」에 힘입어 떠올랐다. 클레이오는 기력이 모자라 주저앉으려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매끄러운 석조 바닥을 디뎠다.
걸음걸음마다 시대는 다시금 변화했다.
복도엔 개발독재 시대의 천연색 사진이 붙어 있다가, 문을 떨쳐 열면 박물관의 유물들이 남아있었다.
계단을 한 층 오르면 팻말이 영어로 붙었는데, 또 한 층을 더 오르니 한글로 바뀌기도 했다.
그 어지러운 전환을 뚫고, 클레이오는 마침내 3층의 대회의실에 도달했다.
양측으로 금색 주름 커튼이 드리우고, 천장은 흰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홀 아래 벽시계가 있었다.
둥근 원은 무궁화 조각에서 국화로, 국화에서 다시 시계로 변화하는 모습이었다.
클레이오는 발을 질질 끌며 걸어가, 벽난로 아래에서 천장을 향해 [도약]과 [체공]을 함께 썼다.
그는 거울을 양손에 들고서 [체공]식에 에테르를 넣으며 기다렸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부들거리는 손에 들린 청동 거울 앞에 비치는 형상이 시계가 되었다.
거울로부터 흐리게 반사된 빛을 받은 시계는 톡, 가볍게 멈춰 섰다.
그리고 세상의 시간도 멈추었다.
벽과 천장, 호화롭고 화려한 장식 전부에 절로 금이 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손 안의 시계가 금빛으로 빛났다.
촤아아아―
채챙.
도시의 밑바닥에서 새던 큰물이 우르르 위로 차올랐다. 삽시간에 3층까지 급류가 덮쳐 왔다.
급격한 침수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것이 휩쓸렸다.
이 기억된 세계에서, 도시의 역사는 식민의 종식과 함께 완결지어진다.
클레이오는 그러한 내적 논리에는 의문을 지니지 않는다.
신화는 전후를 엄정하게 정렬하지 않는다.
후손이 선대의 어버이가 되며, 자녀가 부모를 낳고, 다음 왕조가 이전 왕조의 토대를 만든다.
이 기억된 세계의 내적 논리가 빚어낸 종말이 이런 형식이라면, 이것이 옳겠지.
멸망은 온전히 판결되었다.
[―‘기억된 세계’의 ‘마스터 클락’이 정지됩니다. ‘영원한 겨울의 도시’가 시간적 동시성을 상실합니다.] [―보상: ‘제천의 거울’―사용자의 간절한 기원을 널리 펼칠 수 있도록 합니다. 기원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최초 사용 후 용도 변경은 불가합니다.]
멸망의 순간을 복기하듯, 지상의 모든 것을 재로 돌리는 흰 빛이 도시를 뒤덮었다.
이 기억된 세계의 이름이 ‘재와 강의 도시’인 이유를 클레이오는 이해하게 된다.
홍수와 폭풍, 풍랑과 붕괴에도 스러지지 않고 버텨냈던 도시를 결정적으로 거꾸러트린 것은 빛과 열이었다.
이제 더 이상 서울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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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므네모시네의 문 앞 풀밭에 나동그라진 건 쌍둥이였다.
뒤이어 클레이오가 축 늘어진 채 문에서 놓여났다.
“괜찮아, 레이? 무슨 일이야?”
리피는 저 역시 축 처진 채 클레이오를 부축했다. 늘 반짝이던 눈이 어두웠다.
하지만 마법사는 어린 동료를 보살필 수 없을 만치 큰 충격을 받은 터라 그 상황을 몰랐다.
“…어머니를 봤어.”
혼잣말처럼 답하는 마법사 앞에서 레티샤도 멍하니 대꾸했다.
“레이도? 나도…. 나도 엄마 봤어. 머리색도 눈색도 다른데, 생전 처음 보는 긴 치마에 리본 달린 짧은 보디스 같은 걸 입고 꾸몄는데… 그치만 엄마 같단 생각이 들었어.”
“나도 레티샤처럼 엄마 봤는데, 첼처럼 입고 있었어. 무슨 기계를 짊어지고 허공을 보고 떠들다가 자꾸 멀어지는데 붙잡을 수가 없어서, 에테르 써서 뛰어올랐음. 근데 웬 불한당들이 잔뜩 나타나서 연기를 쏘고 사람들은 울고 도망가고….”
“맞아. 이상한 제복 입은 놈들이 잔뜩 나와 가지고 되도 않는 실력으로 총검질 하는데, 엄마는 곧 안 보이게 되고. 걱정되고. 사람은 너무 많고.”
이미 던전을 나와 에스톡과 숏소드엔 묻어나는 것도 없건만 연신 검을 떨어내는 쌍둥이들의 행동이 가리키는 일은 명백했다.
거울 안의 배경은 서울이었지만 리피, 레티샤, 클레이오가 제각기 본 풍경과 시대는 완전히 달랐다.
제천의 거울이 일으킨 환상은 사람들의 마음속 소망을 비춘 모습을 보여준 게 분명했다. 제각기 죽은 어머니를 본 이유가 다른 것이라고는 생각키 어려웠다.
아이들의 어조는 담담한데, 외려 클레이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서 놈들을 베었구나.”
레티샤는 침울하게 내뱉었다.
“베어도 베어도 흩어졌다가 다시 재가 뭉치기만 해. 진주의 도시의 나뭇잎 사람들처럼 없어지지도 않고서.”
“나도 그랬어. 너무 화가 나서 난리를 쳤더니 이렇게 됐어. 그러다 내 화에 못 이겨서 엎어졌는데, 레티샤가 있더라. 그래서 나머진 쟤가 다 처리했어.”
클레이오는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아이들이 6레벨 검사가 된 연유가 그를 괴롭게 했다.
평소라면 신이 나 자랑을 해댈 아이들은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깊은 비탄이 서로를 내리눌러 그들은 서로를 돌보지 못했다.
두 안젤리움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게 될지 알고서 제독의 자녀로 자랐고, 기사 예비생으로서 복무 중이었으며, 훗날 자신들의 검에 사람의 피가 묻게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해와 실제가 맞닿을 때 일어나는 충격이 아이들의 내면을 저며 놓은 거였다.
아이들의 머리 위로 ‘약속’이 차가운 금속성의 빛을 띤 칭호를 띄워주었다.
칭호는 아주 기묘했다. 리피의 칭호는 ‘눈물의 칼’, 레티샤의 칭호는 ‘목자의 검’이었다.
본래라면 아이들을 달래고 위로하고 시시한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바꾸었을 클레이오 역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상태였다.
삐쩍 마른 모가지에 걸린 숨이 밭았다. 「이격」이 최대치로 발현되고 있는데도 천둥 같은 기침이 종잇장 같은 몸을 구겨 놨다.
후두로는 피 냄새가 올라왔다. 상급 기사가 된 아이들에게 축하의 말도 제대로 입에 담지 못했다. 호흡이 계속 헛돌았다.
어느샌가 문밖으로 나온 이시엘이 세 친구의 모습에 크게 놀랐다. 늘 평정을 유지하는 기사의 초록빛 눈이 크게 뜨였다.
“리피, 레티샤, 클레이오. 너희는 모두 급히 학장님을 뵈어야겠다. 모두 안색이 새하얗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나?”
이따금씩 경련하는 클레이오를 일으켜 앉혀 호흡을 확보한 뒤, 차갑게 식은 리피와 레티샤의 손을 꽉 마주 잡아주며 이시엘이 소녀들의 올리브색 눈을 들여다봤다.
이제는 쌍둥이들보다 신장이 작아졌는데도 이시엘은 역시 심지 굳은 기사였고, 연장자였다.
꽉 눌린 소리로 레티샤가 간신히 답을 했다.
“…레이, 자기 어머니를 봤다고만.”
“텔마 아세르 부인을?”
헐떡이던 클레이오는 반사적으로 이시엘의 말을 부정하려 했으나,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므네모시네의 문에 달린 경보를 감지하고 달려온 제베디가 커다란 서클을 펼쳐 빛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괜찮으냐?!”
“학장님….”
“저희보다 레이를 봐 주세요.”
“누가 먼저랄 게 어딨느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