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95
마지막 앞의 세계 (1)
제베디가 스태프을 크게 휘두르자, 짙은 황금빛 에테르가 무섭도록 밝게 흘러넘쳤다.
치유의 빛은 쌍둥이들의 긴장을 달래고, 이시엘의 어긋난 왼쪽 어깨를 치유하고, 그런 뒤에도 넘쳐흘러 마법사의 양감 없는 몸을 온통 뒤덮었다.
눈꺼풀을 파들거리던 클레이오는 코트의 속주머니에서 작은 청동 거울을 꺼내 제베디에게 건넸다.
“여기… 방어막의 중심에 설치할 제천의 거울입니다. 잘 맡아주십시오….”
“방어막을 생각해낸 것은 너인데, 그걸 내가 왜 맡느냐! 클레이오야! 얘야!”
클레이오는 거울을 믿을 만한 스승에게 맡기고 나서 더는 버티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치유 마법을 통해 몸이 강제로 안정되자 정서적 충격이 배가된 탓이었다.
의식을 잃으며 「이격」이 해제된 신체는, 시차를 가지고 충격의 여파를 드러냈다.
발작하는 마법사를 친구들이 꽉 잡아 눌러 다치지 않도록 애썼다.
수문이 붕괴되듯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숨을 못 쉬는 제자의 숨통을 틔워낸 제베디가 또다시 [경감] 마법을 퍼부었다.
977기 황금 기수의 영광 어린 귀환은 그렇게 실의로 얼룩졌다.
***
이튿날 새벽.
클레이오는 익숙한 침실에서 깨어났다.
이제는 몹시도 친숙하고 편안한 장소인 아세르 저택의 2층이었다.
어젯밤, 뒤이어 밖으로 나왔을 아서와 첼이 나누던 대화는 분절된 채 기억나, 앞뒤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레이는…!’ ‘그러지 마, 아서.’ ‘니야―’ ‘그 애가 말할 때까지 나는 신의를 지킬 거야.’ ‘그렇지만. 언제까지… 이쪽은 시체 잔뜩 걸린 철교를 봤어. 레이에게는 그럼 뭐가 보였을 거라고―’ ‘나는 어머니가 나오셨어. 그저 정정하신 모습으로. 그건 내면을 비춰낸 형상일 뿐이야….’
자신에 관한 말이었던 게 분명한데도, 지금은 별로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쾅쾅댔다. 반지가 끼인 왼손이 뜨거웠다.
“우욱, 큽.”
침대를 빠져나오던 클레이오는 기다란 몸을 움치며 카펫 위로 나동그라졌다.
“커헉.”
지나친 긴장과 경직으로 내장이 비틀리는 것 같았다.
반들반들 쓸어놓은 카펫 위로 위액이 얼룩졌다. 코끝엔 역한 신내가 줄줄 감돌았다.
캔튼 부인이나 다른 사용인들이 알까봐 클레이오는 다급하게 [방음][차폐] 마법을 펼쳤다.
몸이 의지를 벗어나 부들부들 떨렸다. 바닥에 웅크린 채 눈물콧물까지 더럽게 뽑아내다, 더 올릴 것도 없게 되자 발작이 멈추었다.
“허억. 헉….”
빈약한 흉곽이 들썩대며 괴로운 숨에 부풀었다.
클레이오는 사지가 싸늘하게 식도록 한참을 그러고 있다 바닥을 짚고 천천히 일어났다.
욕실에 가 얼굴과 입 안을 씻어냈다. 핼쑥한 턱 끝에 물이 고였다. 머리가 핑 돌았지만 뺨을 두드려 정신을 챙겼다.
걸려 있던 코트 일별하기만 하곤, 입지 않고서 가볍게 발코니 밖으로 몸을 날렸다. 유치한 엇나감이라 해도 할 말이 없지만, 여신의 안배로 주어진 것을 휘감는 데 거부감이 들었다.
그런 마법사의 등 뒤로 검은 고양이의 사뿐한 걸음이 따라붙었다.
사려 깊은 노묘의 걱정을 산 줄도 모르고 마법사는 무서운 속도로 건물과 건물을 뛰어넘었다.
동공이 크게 벌어진 고양이의 눈이 마법의 궤적을 추적했다.
하지만 사람은, 심지어 에테르 감응력이 있는 자라 하더라도 마법사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마법식의 빛까지 숨길 수 있게 된 그에게 잠행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법식의 빛은 [감소]로 꺼트리고, 「지각」을 한계까지 확장하여 사람의 눈을 피했다.
클레이오는 이어진 길과 통로를 낱낱이 아는 대주교관의 경계로 스며들었다. 더 이상 복잡하게 느껴지지 않는 굽이굽이 아홉 문을 스르르 지나쳤다.
그간 아서를 통했던 허가는 요식적인 행위였다.
사실 클레이오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레지나를 보러 올 수 있었다. 그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이 세계에 살기로 결정한 존재로서 세상의 법을 지키려는 그의 뜻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 가운데, 선을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클레이오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습관적으로 넘겼다. 좀처럼 자라지 않는 머리카락의 생기 없는 감촉에 그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레지나 이스토리아의, 다시는 길어나지 않는 머리채를 생각한다.
그녀가 인간의 육신을 입은 것이 역사의 세계가 멸망했음을 증명한다면.
클레이오에겐 해명이 필요했다.
.
.
.
레지나는 한밤에 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불을 밝히지 않았다.
사제와 마법사는 불 없이도 서로의 숨결과 표정을 읽었고, 그것은 사실 인간에게 어울리는 소통 방식은 아니었다.
클레이오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전에 만났을 때 레지나 당신은 사라진 장소, 기억 속의 공간만이 기억된 세계가 된다고 했지. 이번에 내가 본 건 서울이었어.”
레지나는 클레이오가 하려는 말을 미리 알았던 것처럼 답했다.
“마침내 보았구나. 우리 기억 속의 도시를. 또한 이제는 우리의 기억 속에만 남은 도시를. 또한 너의 벗들에게 잊히지 않게 된 장소를.”
기억 속에만 남은 도시.
그가 예감했던 것처럼 그가 태어났던 세계, 그가 성년기를 보낸 도시는 멸망한 것이다.
여신이 한때 거했던 장소, 인간인 자신이 신을 헛되이 열망했던 곳은.
“역사의 세계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단 네 말은 어떻게 해명되지?”
“서울은 사라졌지만 아직 그 나머지 세계가 모두 사라지지는 않았단다.”
그 ‘나머지 세계’라는 것은 얼마만큼의 영토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아직’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단위를 그는 짐작할 수 없었다.
남은 세상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클레이오는 신이 말하는 방식이 아득하다.
그러나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제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이 있었다.
평생 한 번도 스스로에게 하지 않으려 했던 그 질문을, 이제는 해야만 한다.
정말로 참담한 기분이었다.
“도대체, 왜 하필 나였어? 어떻게 너희 신들 중의 하나도 아닌 내가 멸망 속에서 살아남아 다음 세계로 올 수 있었던 거지?”
자신의 생존은 맡은 책무에 대한 보상인가?
클레이오는 알 수 없다.
자신의 생애. 지루하게 비극적인, 범용한 인간의 삶 어디에서 이러한 부름이 개입될 여지가 있었단 말인가.
“내가 너를 연루시킨 것은 오로지 너만이 연루될 수 있는 자였기 때문이야. 왜냐하면 너는 나의 화신이 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 우리의 세계에 남았던 마지막 ∂∧¬√▼∵이기에. 너의 덧쓰임은 피에 의한 것이고, 또한 이것은 그분과의 오래된 약속이었지.”
“날 두고 도대체 누구와, 무슨 약속을 했다는 거야!”
“너를 살게 하겠다는, 네 어머니와의 약속.”
그 말이 들린 것이 스스로도 경이로운 듯 레지나는 깨달음에 다다른 얼굴을 했다.
“아. 드디어 말할 수가 있구나.”
서사 개입도 75%가 부여한 운신의 여지였다.
“어머니? 도대체 어머니가 왜? 네가 어떻게 내 어머니를 아는 거야. 도대체 어머니는 무엇이셨던 거지?”
레지나는 결연하고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 ℃∴▒ ∝√⌒∠.”
그 답은, 클레이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허락된 진실은 여기까지였다.
조금이라도 핵심에 접근할라치면 지독한 억지력이 레지나의 말을 긁어내 검열했다.
피를 삼키던 레지나가 간신히 전할 수 있었던 말은 참으로 난데없는 소리뿐이었다.
“…네 어머니, 졸업식에 오셨잖아. 2월인데 양산을 가져오시고, 학위수여식 동안 연한 수국색 손수건을 꽉 쥐고 계셨는데.”
간신히 끌어낸, 우회된 답은 클레이오를 피로하게 했다. 그는 비틀비틀 의자에 주저앉았다.
깊은 한숨이 폐부 안에서부터 흘러나왔다. 속이 답답하고 머리가 띵했다.
전생에서도, 제대하고 나선 곧 끊었던 담배가 절실했다.
하지만 그렇게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었다. 레지나가 깨어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그녀가 답할 수 없는 것 대신 답할 수 있는 걸 물어야 했다.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한 클레이오는 먼저 해결해야 할 의혹부터 입에 담았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기본적인 전제부터 다시 쌓아야 하는 사안이었다.
“영원한 겨울의 도시에서 나왔을 때 나는 성흔의 후유증에 시달릴 뿐 아니라 에테르 부족 역시 생명을 위협할 만큼 심각했지.
그때, 네가 나를 낫게 해주기 위해 신성력을 쓰느라 희생시킨 머리카락은 다신 복원되지 못했어.
증거는 명백하지. 비록 역사의 세계가 멸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코 온전하지는 않고, 이제 너는 신이 아냐.”
클리오는 여기 마지막 세계에서 다시 태어났다. 고귀하나 한낱 인간인 자로.
세계를 거듭하며 신성은 닳아버리고, 그녀는 오래 살았으나 언젠가 죽을 수 있는 신녀일 뿐.
클레이오는 불안에 목을 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멜키오르는 레지나에 대해 알 것이다. 클레이오가 레지나에 대해 품고 있는 정도 이상의 연연함 역시도.
그러나 그간에는 그리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이 세상을 만든 신인 쌍둥이 자매에게 손을 댈 수 있다면 멜키오르는 진작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거나 그러지 못할 연유가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지금 그 판단은 유효성을 잃고, 클레이오는 여기 창백한 안색을 한 여자의 생명이 아깝고도 두렵다.
세계를 넘어와서도 변함없는 레지나의 흰 옆모습은 그에게 반가웠던 적이 없다. 저 선연(嬋娟)함은 그에게 항상 두려움을 안겼다. 결국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면처럼 고요한 신녀는 차분한 답을 한다. 클레이오의 불안을 다독여주려는 행동이다.
“그래, 시인할게. 나는 결국 필멸인 존재로 거듭났어. 그러나 클레이오, 이 몸은 독과 불과 실혈로 죽는 그러한 육신은 아니지. 기억을 가진 이는 기억을 잃은 이보다 강하니, 신성을 잃은 이의 궤계로 고통받을 처지는 아니란다. 걱정 마렴.”
지난 일곱 세계의 신들은 영원의 시간을 벗어나 다음 세상의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여덟 번째 세계, 마지막 앞의 세계는 여전히 그 여린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클레이오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는 상대의 화법에 휘말리지 않을 만큼 레지나를 알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의 육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멸할 수 있겠지.”
너희 중의 첫째였던 이는 신의 말을 흉내 낼 수 있고, 그가 한 번 더 므네모시네의 문을 닫는다면 너는 무사할 수 있을까?
“내가 에테르 감응력의 한계를 넘어 쓴 마법은 나의 질량을 앗아가고, 그건 레지나 당신에게 일어났던 일과 같다는 걸 앞으로 내내 모르리라 여겼어?”
클레이오는 보란 듯이, 석고 골격 모형처럼 생긴 자신의 두 손을 레지나 앞으로 내밀었다.
비루하게 말라붙어 뼈에 피부만 씌워진 듯한 신체는 좋은 식사와 충분한 수면, 적당한 운동과 정양으로도 상태가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클레이오의 곁에는 현존하는 최고의 치유 마법사가 스승으로 거하고 있었다. 제베디는 제자를 돌보는 데 에테르를 아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늘 병약인과 병자 사이쯤의 몰골인 제자가 걱정되어 [경감]을 걸어주거나 마법으로 병증을 탐색해 보아도, 에테르로 감지되는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그 의문은 천천히 해결되었다.
몇 년간 여러 번 대마법을 시전한 클레이오는 자신의 육신이 지닌 경향성을 경험적으로 알게 됐다.
어디서도 비슷한 기록조차 읽은 적 없는 증상이니, 제베디 교수조차 내막을 파악하기 어려운 게 당연할지 몰랐다.
애초에 토혈에 이를 만큼 에테르를 소진하는 일은 감응자들 사이에서 매우 지양되었고 그나마도 검사들에게서나 실례가 발견됐지 마법사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마법사가 서클을 연다는 것은 결국 신체를 확장하는 것.
레벨을 뛰어넘는 대마법을 극한으로 펼쳐 에테르를 소진한 클레이오의 행동은 대가를 치르는 것이었다.
에테르 부족으로 인한 각혈 뒤엔 체중이 미세하게 줄어들었고, 그런 식으로 손상된 신체는 아주 느리게 복원됐다.
마치 자라지 않는 레지나의 머리카락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