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01
축복, 별리 (5)
당장이라도 멜키오르의 거처인 클라렌던 하우스에 불을 지르고, 태서턴은 피어스를 보내 막도록 하면 아슬란이 일왕자를 죽여 없애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리라 예상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슬란은 그런 폭력적이고 요란한 방식으로 왕자의 난이 시작되었음을 대륙 전체에 알리고 싶지 않은 듯했다.
‘불의 급습과 전쟁 따위로는 멜키오르의 속눈썹 한 가닥도 까딱하게 할 수 없단 걸 아슬란 역시 아니까 안 하는 걸지도 몰라.’
지난 원고에서 일어났던 일을 돌아보자.
아슬란의 붉은 기사들에 비해 한참 역부족인 알비온의 일반 병사들은 멜키오르의 부름에 고무돼 참전한 후, 막대한 길이의 전사자 명단으로만 남게 되었다.
한땐 알비온의 수도를 함락당할 뻔했음에도 멜키오르는 내내 평정하게 미쳐 있었고, 아슬란을 자신의 가장 중대한 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하루는 올바른 전략적 판단을 내렸고, 하루는 자살행위적 전술을 군에 실행시키도록 하는 멜키오르의 명령은 중구난방이었다.
지금이야 그 이유가 광증임을 알지만 8교를 훑어볼 때는 저자가 일종의 순수한 악을 표현하려는 줄 알았을 정도다.
수도를 봉쇄당한 채로 항복을 종용당할 때에도 맨몸으로 진지 앞에 나서 ‘아우야.’라고 말하던 멜키오르의 미소는, 사람이라면 오장 육부가 뒤집히지 않을 수 없긴 했을 것 같다.
그걸 짐작하는 덴 「직독」도 필요 없었다.
이제는 신물 나게 겪은 오장육부 셰이커의 짓인데 오죽했을까.
‘이이제이라고 하잖아. 아슬란이 정확히 뭘 하는지만 알면 성공을 기원해 줄 수도 있는데, 니네베 호수 궁전의 사용인들 말고 좀 주요 정보를 아는 사람 더 없을까?’
거기에 이르러 클레이오는 쥐가 파먹다 만 것 같은 빵조각을 내려놓았다. 푸스스, 허탈한 헛웃음 소리가 샜다.
‘이런 속마음 프란이 들으면 날 완전 경멸하겠는데. 절연으로 모자라 공개 지탄 감이네.’
아슬란은 히드라의 독을 만들기 위해 무고한 인간들을 실험체로 희생시켰다.
그런 자를 앞에 놓고도 클레이오 자신은 오로지 정략적 계산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그는 이 상황과 배경에 순응하는 자신이 조금 부끄럽다.
이건 어느 모로 보아도 그냥 도피였다.
편집자 권한을 굳이 안 쓰더라도 친구들에게 자신의 소재를 알릴 방법은 많았다.
손발을 묶어놓은 것도 아니고 서재엔 종이와 잉크가 넉넉하다.
베헤못의 목에 메모를 걸어서 내보내면 이 현명한 영묘는 얼마든 수도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전차를 타는데 기차를 못 탈까?
하지만 지금처럼 정신이 산란하고 마음이 불안정할 때, 저 따끈하고 다정한 존재가 사라지는 게 너무 아쉬워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시일이 지나치게 흘렀다.
수년간 매일같이 붙어 있던 친구들의 다정함과 우정이, 그 무던한 일상이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래서 더더욱 펜을 들기가 어려웠다.
무슨 얼굴로 그 애들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였다.
보고 싶은데도 그리워만 할 뿐 돌아갈 생각을 않으니 자신의 마음은 모순적이다.
저 문안에서 살았던 한 세상이 완전히 절멸했음을 깨닫고, 성년기를 보낸 도시와 이별하고, 신의 뜻을 알았다.
이제 클레이오는 그 모든 진실과 비밀을 홀로 품고 있기가 버겁다는 걸 인정한다.
그 애들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혹은 아주 적은 조건만을 걸고서 클레이오 자신을 믿었다.
그게 안 되면 이해하려 노력했으며, 여의치 않을 땐 기다려 주었다.
첼레스테스가 전생이 어쩌고 하는 자신의 말을 한마디도 안 믿으면서, 그저 환대의 인사만을 건넸던 것처럼.
만일 대부분의 진실을 밝힌다 하더라도, 그 애들이 자신을 다르게 보거나 지금까지 쌓아온 우정이 변질되진 않을 것이다.
자신의 마법이 신으로부터의 선물이며, 예측의 성흔은 사실은 미래에 올 과거를 읽은 거라 하나하나 알린대도 말이다.
하지만 클레이오는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너희의 삶과 선택 전체가 미리 그러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이며, 자신은 오로지 예정이 이뤄지도록 조력하는 존재임을 밝히는 것만은 불가능하다.
그들의 치열한 의지를 모조리 폄훼해 버리는 고백을 할 순 없었다.
화자가 진실을 ‘어느 정도’까지만 밝히는 건 결국 청자에겐 거짓이나 마찬가지다.
이미 레지나가 자신에게 한 취급으로 충분히 절감한 일이지 않은가.
부분적 진실은 온전한 진실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클레이오는 침묵했다.
해명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이렇게 멀리 떠나 있다.
‘다들 걱정할 텐데.’
지금 주어진 시간은 끝이 머잖은 유예.
어떤 식으로든 아슬란이 계승의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하면, 명목상의 평화마저 산산이 찢겨나가고 전란의 시대가 시작된다.
긴장된 평화 속 팽팽히 당겨진 신경이 따갑고 마음이 불편하다.
그런 동시에, 편안했다.
‘이런 말 하면 너무 미친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감금이란 것도 의외로 겪어볼 만하네.’
몇 년간 무위도식은커녕 과로와 혹사에 시달리던 몸이다.
하지만 일종의 포로 신세로 아무것도 하면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하자 …꽤 좋았다.
이곳에 갇힌 것도 자의가 아니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타의다. 그런 핑계를 댈 수 있다.
아무리 서사 개입도가 높아져도 조바심치는 한국인의 성미는 안 없어지고, 이렇게 누가 어디 가둬라도 놔야 맘 편하게 드러눕는 자신이 한심했다.
솨아아―
늙은 고양이는 창가에서 꼬박꼬박 졸고 흰 성 바깥의 호수는 바닥이 비치도록 맑았다. 마법을 걸어둔 성은 천 년이 지나도 습기에 삭지 않고 이끼에 침식당하지도 않았다.
숨을 들이켜면 물처럼 맑은 공기가 폐부를 채웠다.
‘아무리 석탄의 단점을 최소화시킨 문명이라지만 그래도 대도시와 자연 한가운데가 같을 순 없겠지.’
도처에 널린 아무렇지 않은 아름다움이 무심해서 가슴이 아릿했다.
‘다 좋지. 다 좋은데… 여기는 여름에도 춥네.’
날짜를 헤아려 보면 겨우 팔월인데 동부 산간과 가까운 데다 호수 한복판에 지어져 뭍과 배로 오가야 하는 성은 시원하다 못해 쌀쌀했다.
클레이오는 레지나를 만나러 빠져나온 밤, 괜히 결벽적 감상에 빠져 여름 정원의 케이프 코트를 안 입고 나온 스스로가 바보 같아졌다.
시종이 애써 데워서 가져다준 약간 식은 탕파도 껴안고 있으면 그럭저럭 뜨듯했지만, 루비 장판과 연구실에 있는 마석 난로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 여러 개 든 마석 로즈쿼츠가 몹시 아쉬웠다.
그래도 밤에는 베헤못을 껴안고 자니 걱정이 없었다.
단 하나, 베헤못이 므네모시네의 문에서 너무 멀리 떠나서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했는데, 평소보다 잠이 는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어서 일단은 안심했다.
신문도 전보도 없는 고립된 섬의 나날은 정말이지 염치없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멜키오르는 내가 이렇게 나올 걸 알았을까? 알았을지도 모르지.’
이 모든 게 결국 왕세자측이 흘린 역정보에서 비롯된 결과라 생각하면 절로 혀가 내둘러질 뿐이다.
아슬란과 대면했을 때 피치 못하게 읽은 고문 계획으로 말할 것 같으면, 대마법사에게 전향을 요구하는 의도를 가져서 그리 집요했던 거였다.
‘전향 안 하면 본보기로 죽여서 시체를 매다는 것까지 종합 16세기 세트랄까. 안 그래도 유행이 몇백 년 뒤진 것 같은 구석이 있는 브룬넨인데, 그런 데까지 상궤를 벗어나 있으면 곤란하잖아.’
멜키오르가 어디선가 아슬란 측 사람 머릿속을 뜯어봤다 그 끔찍한 계획안을 발견하고는, 클레이오에게 그런 위해를 가할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했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멜키오르는 아서 반응을 보는 거 좋아하잖아. 그런 맥락이라면 충분히 놈이 할 만한 짓이지.’
어떤 의미에선 교훈이 있는 사건이긴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애들에게 친구를 그런 방식으로 잃는 상실의 경험을 안겨선 안 된다는 경각심이 생겨났다.
‘고작 내 한몸 지키는 데 이렇게 비장한 기분 들게 하다니.’
한동안 멜키오르를 안 봐서 속이 다 편안했는데 아주 정신이 번쩍 드는 카운터였다.
‘천 리 밖에서도 세상을 조종하고, 여기 잠긴 문안에 들어앉은 내 인생까지도 뒤흔드네. 멜키오르가 참… 대단하긴 하다.’
클레이오는 졸음에 겨워 깜빡거리던 눈을 뜨고 열릴 리 없는 문을 흘깃 봤다.
마법을 이용한 봉인은, 애초에 문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것 같았다.
에테르의 기운을 제대로 감지할 수 없기는 하지만 잠금 마법의 구성은 거기서 거기다.
구조를 보건대 원래 안에서 잠그도록 설계된 걸 반사만 시켜 밖에서 잠글 수 있도록 개량한 듯했다.
평범하게, 문을 잠그는 데에도 마법을 쓰는 세계다운 설계였다.
마도구를 쓰는 일에 익숙해진 세월이 새삼스럽고 낯설어서 클레이오는 또 다른 갈래의 생각으로 빠져들었다.
열쇠와 도어락으로 잠가야 하는 현관문과, 창유리를 작게 도려낸 뒤 손을 집어넣어 걸쇠를 내려 열었던 유리 섀시 생각을 조금 했다.
어머니가 신과 무슨 약속을 했는지, 왜 자신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지, 강은 왜 그에게 죽음을 선사하고 바다는 피신처가 되었는지를 알아가야 한다는 피로감이 무거웠다.
이 뜬금없는 납치가 나름의 재충전 기한으로 느껴지는 건 지속된 허위와 기만에, 긴장과 의무감 속에 지쳐버린 탓이다.
생각을 하다 보면 손끝과 발끝이 식어 들어갔다. 그래서 생각을 안 하려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건 감금당한 처지에선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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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포를 어깨에 휘휘 두른 클레이오는 느릿느릿 주변을 살피며 연구실로 넘어갔다.
침실과 주랑으로 연결된 서재 겸 간이 연구실은 잘 관리되어 있었지만, 주인이 없는 방 특유의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장서표에 쓰인 이름은… 어뉴어린. 음. 카르멜라 여왕 남편 맞지?’
이 장서는 삼 대 전의 국서 어뉴어린이 조성한 것인 듯했다.
둘러보니 제법 이름을 들어본 희귀본이나, 세인트 파틴 도서관에서 책등만 슥 지나가며 본 책도 많이 갖춰져 있었다.
즉, 아서의 할아버지는 책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뉴어린은 마법사였다고 했지. 취향 좋은 다독가이기도 했던 것 같네. 하긴 마법사들은 진언 때문에 다들 책을 많이 읽지.’
그쪽까지 생각이 안 미쳤었는데, 카르멜라 여왕의 국서는 원칙에 따라 니네베 호수의 공작이기도 했던 것이다.
머리를 식히고 싶은데 굳이 마법서 같은 걸 읽고 싶지는 않아 건성으로 책등을 토도독 훑고 있자니, 개중 가장 얇고 작은 책이 푹 꺼지듯 손 끝에 걸렸다.
‘오, 이건 좀 쉬워 보이네.’
클레이오는 그대로 얇은 책을 뽑아들고 편한 의자에 앉았다. 처음엔 팔랑팔랑 넘겨보다 어느새 정독하기 시작했다.
‘이거 재밌네. 지금 여기 이 방 자체가 국서를 위해 조성된 객실이었다고?’
소책자는 주변의 지리와 건축에 관해 써 놓은 가벼운 내용이었다.
판권을 보니 정식 출판물도 아니고 몇 권 개인적으로 제작해 주변에 돌린 기념품이었다.
카르멜라 여왕은 여름마다 니네베 호수로 휴식을 취하러 왔는데, 여왕이 즉위한 것은 아주 드문 일이라 국서가 머물 만한 객실이 마땅치 않았다.
어쨌든 그런 연유로 휴가를 온 카르멜라 여왕이 니네베 공작의 침실과 응접실을 취하게 된바, 정작 니네베 공작인 어뉴어린은 연구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졌다.
‘그래서 이 방을 만든 거구나. 여름 동안에도 연구를 계속 할 수 있게 서늘한 북향이고, 머리를 식힐 수 있게 호수의 풍광이 아름답게 보이고.’
이런 보기 드문 내용을 적은 소책자의 저자는 바로, 니네베 성의 개축을 맡은 건축가였다.
건축가는 자신이 니네베 호수로 불려온 연유부터 기묘하게 여겼다. 왕비의 것인 니네베 호수의 성에는 애초에 국왕을 위한 방이 없었던 것이다.
이솔트 여왕과 레오니드 1세의 진실이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건축가는 그 이유에 대해 나름 여러 가지 추측을 해 보았는데, 전부 화끈하게 틀려서 오히려 신선했다.
이 책에 나오는 이들은 현재 시점엔 모두 죽은 사람이건만, 이 저자에게는 카르멜라 국왕 부처가 신선한 새 고객이었던 셈이다.
카르멜라 여왕은 궁전의 품위를 지키는 선에서 국서의 요구와 건축가의 재량에 모든 걸 맡겨 놓았는데, 어뉴어린은 좀 까다로운 클라이언트였다.
일단은 책이 안전해야 한다는 거다. 카르멜라 여왕 즉위 후 니네베 공작으로서 호수 궁전을 받았을 때, 어뉴어린은 으레 요청하는 사파이어나 백금이 아니라 책을 받고 싶어 했던 만큼 서재를 꾸미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게 설왕설래하다 보니 건축가와 국서가 친분을 쌓고 만 거다.
건축가는 어뉴어린과 나이대도 비슷해 두 사람은 곧잘 어울리는 사이가 되었다.
‘어쩐지. 그래서 책이 증정본이었군. 설마 저자 증정본일 줄은 몰랐네.’
책 앞장 면지엔 ‘나의 친구 어뉴어린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내용에도 어뉴어린은 여러 번 언급되었는데, 그를 둔하고 정신 빠진 마법사로 묘사해 놓고 당사자에게 책을 선물하다니 이 건축가는 어지간히 신경줄이 두터운 사람이었지 싶었다.
잡다한 내용의 책을 낄낄대며 읽다 보니 의외로 눈여겨볼 회고가 끼여 있었다.
《어뉴어린은 이렇게 말했다. “광증은 끈기의 뒷면일세. 견디고 버티는 자들이 평안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지.”
왕가의 광증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고 기이하여 하여간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부풀린 장황설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여왕의 국서라도 말이다.》
이를테면 어뉴어린은 리오그난 왕가의 광증을 규명하려는 연구를 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