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14
외전3. 지극히 사랑받은 (3)
대주교의 예지대로, 나는 또다시 태어났다.
세 번째 삶.
인지가 불분명한 유아기를 지낸 뒤,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나이가 되었을 때에 이르러서도 나는 대주교님의 말씀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어.
제대로 납득한 건 한 가지뿐이었지.
이 반복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거라는 것. 그러나 한 번만 반복되지도 않을 거라는 것.
헌데 나는 이미 기디온과 결혼을 했지 않겠니?
세상의 모든 바다를 다 가 보았고, 사람이 사는 땅은 전부 밟아 보았지.
생각해 보아도 생에서 더 이상 이루고 싶은 일 같은 건 없었단다.
그렇지만, 참으로 우습게도, 그이를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낡아버린 마음이 다시 두둥실 부풀지 뭐니?
세 번째 생애에서, 너서리 룸을 나와 가정교사와 수업을 하게 된 나이의 나는 한시라도 빨리 기디온을 만나고 싶었지.
하지만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내 부친은 엄한 이였고, 제아무리 어른스럽게 처신해도 어린 여식이 혼자 거리를 쏘다니게 놔두질 않았다.
마침내 혼자 집을 빠져나올 기회가 온 건 열한 살 때의 일이었단다.
카롤링거의 귀족 마리 탕페트 드 네쥬 백작부인이 웬 높으신 분을 모시고 알비온을 주유하다 콜포스에 들렀을 때, 채트윈-탈봇 어르신이 콜포스의 귀족 가문 사람들을 전부 모으는 파티를 열었거든.
그 카롤링거 귀족은 알비온에서 별장으로 쓸 성을 찾고 있다 하던가? 알비온에선 중류 계급이 성장하고, 물려받은 영지를 매각해 자산에 보태려 하는 귀족들이 많던 시절이었지.
부친이 먼저 채트윈-탈봇 저택을 향해 출발하고 나는 갑자기 히스테리를 일으킨 어머니를 달래드리다 조금 늦게 나서게 된 게 기회가 됐단다!
나는 그이가 일하던 상사를 향해 마차를 움직였다. 마부와 경호원에겐 반짝이는 아우룸 금화를 쥐여 주었지.
네 부친이 어린 시절을 보낸 모슬리 상사는 아직 자그마한 상사라, 사무실이 딱 하나이던 때였다.
콜포스의 뒷골목, 앞 건물이 상사 사무실의 창에 늘 그늘을 드리우는 모퉁이에 기디온이 서 있었다.
그 연연하게 아름다운 헤이즐의 눈동자, 쉽게 나풀거리는 머리카락, 험한 일을 도맡아 하는데도 여전히 가늘던 손끝.
너보다도 훨씬 어린 그이라니 수이 상상이 가지 않지?
부모의 어린 시절은 늘 이질적이고 괴상하게 여겨지기 마련이지만, 기디온은 특히나 아이일 적의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는 남자이잖니.
그가 귀족 가문 아이들처럼 어린 시절의 초상화를 가진 것도 아니다 보니, 나는 그의 모습을 처음 본 거나 마찬가지였지.
하지만 금세 알아봤단다.
내 두 번째 아이인 너와 몹시도 비슷한 얼굴이었어. 블라드는 나를 닮았고 너는 기디온을 닮았으니까.
그리하여 나는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 일을 겪었다.
나보다 키가 작고 빼빼 말라서 마치 소녀처럼 고왔던 소년은, 제가 잘못하지도 않은 일로 길거리에서 매를 맞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잘 들어보니 기디온의 계산이 맞고 모슬리 상사에서 삯을 받으려던 선원의 계산이 틀렸는데도, 선원은 이미 화를 내버린 무안함에 어리고 영민한 사환을 때리는 거였단다.
흔한 일이었는지 말리는 사람 하나 없는 그 모습에 나는 눈앞이 새빨갛도록 화가 났다.
기디온을 구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다짜고짜 지위를 앞세워 나서고 말았지.
“길가에서 이 무슨 소란입니까. 나는 라스카 자작의 자녀입니다. 레이디 앞에서 그리 험한 꼴을 계속 보이실 작정인지요?”
나 자신은 비록 열댓 살 먹은 어린애였지만 타고 온 마차엔 가문의 문장이 찍혀있고, 건장한 마부와 검사가 동행한 데다, 제일 좋은 야회복까지 떡하니 차려입었으니 위세가 대단했지.
그 졸렬한 선원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물러나더구나.
그런 종류의 인간들을 상대하는 데는 생애를 걸쳐 도가 텄다. 강한 이에겐 약하고 약한 이에겐 강한 자들.
그들에겐 계산이 맞네 틀리네 가르는 것도 아무 의미 없어. 내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귀족가 여식들이 그러하듯 오만하게 구니, 선원은 모자를 벗어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슬그머니 골목을 벗어나더구나.
나는 얼른 뒤돌아서 손수건을 꺼냈어.
기디온은 입술과 뺨이 온통 다 터져, 낡았지만 단정하게 다려 입은 사환 제복이 피로 얼룩져버렸다.
그러나 그는 내가 내민 손수건을 받지 않았다.
예의 바른 말투로 정중한 감사 인사를 건넸으나 그의 눈 안에 서린 것은 차가운 모멸감이었다.
참혹하고도 일방적인 폭행을 당하던 때에도 담담하던 그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모멸감을 가라앉히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열댓 살짜리 아이가 씹어 삼키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감정이었다.
기디온은 어렸고, 아직 표정이 느슨한 미성년의 얼굴에서 이 모든 사실을 읽어낸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단다.
몸이 어려지면 결국엔 행동도 어린애처럼 되고 만단다. 몇 번을 살아도 나는 그랬어.
서러운 눈물이 뚝뚝 흘러 차려입은 야회복 깃을 적시고, 실크 장갑을 엉망으로 구겨지게 했지.
‘기디온은 날 받아주지 않을 거야.’
기다려야 했는데.
그가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될 때까지.
여신의 세계는 반복되어도 꼭 같지 않고, 일어난 일이라고 대수롭잖게 대처할 수 있는 게 아니었지.
모든 일은 순서와 전후를 맞추어야 올바르게 이루어졌다.
그것이 세계의 규칙.
결국 나는 채트윈-탈봇 저택에 늦게 도착해 아버지에게 크게 꾸짖음을 들었지.
룬데인과 달리 콜포스는 참 좁은 세상이야.
내 경거망동은 부친의 귀에 금세 들어갔다. 수도원으로 보내 독방에 가두고 기도만 하게 하기에 순순히 명령을 들었단다.
나는 여전히 교회에서 부르는 모든 찬가를 다 외우고 있었고, 고향처럼 익숙한 수도원의 검박한 생활도 어려울 것 없었지.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이번엔 이전과 반대로 수도원을 뛰쳐나왔어!
이전 생애엔 일절 관심이 없었던 어머니의 유품을 제대로 챙기기 위해서였단다.
과거엔 어머니 생전에 받은 마석 투어멀린 브로치 하나면 족하다 여겼지만, 이번엔 마음을 다르게 먹었다.
유행이 지났어도 세팅만 다시 하면 빛나게 될 마석과 보석, 부유한 친정에서 보내왔으나 평생 옷으로 지어 입지 못했던 실크와 레이스를 모두 단속해 내가 물려받았지.
십 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동안 그이는 장성하여 모슬리 상사를 거느리게 됐으며, 결국 나는 그이의 사랑을 얻어냈다.
마침내 첸트룸 상행이 다음 날로 다가왔을 때 나는 기디온의 양손을 꽉 붙잡고 말했다.
“있죠, 기디온. 당신은 내게 채트윈-탈봇 저택을 선물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이 해내리라는 걸 알아요. 내 사랑.”
나는 콜포스 사교계의 꽃이라 불렸다.
그런 지위와 허례허식에 일말의 가치도 두지 않았던 과거의 생애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지.
인생을 두 번 살면 말이지, 나처럼 하잘것없는 사람도 대단한 일을 할 수 있게 되더구나.
왜 신녀가 이 반복을 기회라고 했는지 세 번째에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내 스스로는 사업 같은 건 잘 모르던 아녀자라 여겼는데, 그건 오판이었어.
지난 생애 내내 기디온과 함께했고, 마침내는 잘했든 못 했든 상사를 스스로 매각해 보았지 않니.
알고 나면, 세상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보이지. 숫자가 나타내는 정보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은, 문해의 과정과 비슷하단다.
무도회, 신년회, 다과회. 갈 수 있는 곳이라면 모두 가서 더 많은 마석과 투자금이 모슬리 상사로 흘러가도록 부단히 애를 썼지.
그리고 그 분투는 효과가 있었다.
충분한 투자를 얻어 첸트룸 상행을 떠났다 돌아온 기디온은, 내게 결혼 예물로 채트윈-탈봇 저택을 선물해 주었다.
또다시 나를 꼭 닮은 블라드가 태어나고.
너 역시 다시 나에게로 왔지.
그리고 두 번째로 태어난 너의 눈 속에는 회의와 피로가 어려 있었다.
끝이 다시 시작된다는 것, 회귀는 저주이다. 시작과 끝이 맞물리는 영원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너는 세상을 거부했다. 태어난 이래로 내내 침묵했다. 울음도 웃음도 없이, 사람의 눈을 보지 않고 해와 공기를 피하려 들고 그저 무력하게 누워만 있었다.
그건 너 역시 기억하겠지.
너는 다섯 살에야 처음으로 말을 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닌 다른 말, 다섯 살의 목소리를 입기에는 지나치게 고통스런 문장이었지.
‘저는 그만하고 싶습니다.’
삶에 지친 네 목소리는 나를 울게 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그저, 너 역시 내가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태어났음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의 역사는 다른 방식으로 쌓여가게 됐지.
휴가지마다 동생과 같은 원단으로 지은 옷을 입고 서서 웃음 짓는 블라드와 조금 떨어진 그늘 아래서 미소 짓는 자그마한 남동생의 사진 같은 건 이젠 한 장도 없으리란 현실을 나는 받아들였다.
나는 큰 아이인 블라드를 꿀이 떨어질 듯 다정히 대하며 슬하에서 내보내질 않아, 남들에겐 유난한 어미란 말을 많이도 들었지.
아이들은 곧 자라고 생은 짧으니, 나는 내 아이가 나의 아이인 시절을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단다.
그리 유난한 어미이던 내가, 둘째인 네게는 가정교사 하나 붙이지 않고 교회에도 데리고 가질 않으니 참으로 기괴한 억측이 많이도 돌았다.
나는 애도의 값을 치르며 갖은 모함을 감수했다.
학자로 살았던 지난 생을 기억하는 네게는 사람 노릇을 하기 위한 예절과 규칙 같은 걸 가르칠 필요가 없었는데.
또한 너는 내가 불러주는 찬가조차도 원치 않건만, 어찌 여신상 아래에서 기도를 하자 권할 수 있었겠니.
너는 우울하면서도 다정한 아이라서, 사람의 생애를 세계의 도구로 갈음하는 신의 행태도, 네 이름을 역사의 기록에 남겨버린 부모의 집착도 비난하지 않았다.
단지 죽고 싶어 했을 뿐이지.
십육 년간 벌였던 아홉 번의 자살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너는 태어났을 적 콜포스 주교의 축복을 받았고 여러 마법사들의 에테르로 몸을 씻김 받았다.
신의 축복과 은총이 네 죽음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불가능한 생존을 설명하는 사후적 가설이었을 뿐이다.
기어코 끊어지지 않은 숨을 몰아쉬며, 너는 눈물도 없이 말했다.
‘여신은 쓰임이 다하지 않은 자신의 도구를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결코 해방시켜 주지 않습니다, 어머니. 그렇다면 저는 어째서 다시 태어나야 했던 걸까요?’
나는 속절없이, 다른 방도 없이, 이스토리아 대주교의 말을 전했다.
하룻밤 꼬박 생각해보던 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네 부친에게 원하는 것을 요구했다.
템푸스 강가의 수도방위대 학교에 입학시켜 달라는 거였다.
너는 콜포스를 떠나며 처음으로 나를 안아주었다.
내 귓가엔 네 유언이 남았다.
‘어머니 여기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이전에는 제가 잘못 읽었던 구절을 새로이 생각했습니다. 올바른 장소에서 끝을 내려 합니다.’
네 결심은 굳건하고, 네 선택은 단호했다.
나는 네 소원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너를 만류하지 못했다.
너는 열일곱 살이 되는 해에, 이번에는 수도방위대 학교의 지류에서 템푸스 강에 뛰어들어 기어이 생애를 종결시켰다.
여러 번 산 나는 그 어느 때고 네가 태어나서 기뻤으며, 네가 죽어서 슬펐단다.
그러나 그보다 더 슬픈 건, 네가 세계사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신녀의 예언이었다.
또다시 태어나 끝을 향해 가는 세계를 파수하도록 운명 지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살아있음조차 견딜 수 없는 네게 역사의 명령이 주어진다면, 네가 당할 고통은 어떠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네 차가운 관에 기대어 나는 결심했단다.
너의 간절한 원을 들어주기로.
내 무엇을 바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