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15
외전3. 지극히 사랑받은 (4)
그 생애에선, 아세르 공원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카타리나는 상무장관 베르메가 매입한 오레일스 지구의 부지를 임대해 호텔을 지었다.
그 뒤로도 나는 오래 살았다.
마수 출몰, 전쟁, 또다시 마수 출몰과 폭격, 왕위쟁탈 전쟁, 왕자의 난. 기디온은 아서 왕자에게 은밀히 조력을 보탰으나 보답을 받길 원하진 않았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했다.
마침내 세상의 에테르가 폐한 뒤엔, 지독한 겨울과 굶주림의 봄을 지나쳤다.
사람이 사람의 힘으로 사람을 구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네 번째.
혹은, 이스토리아 대주교의 말씀을 따르자면 아홉 번째일까?
나는 또다시 텔마 라스카로 태어나 텔마 아세르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 생애의 내가 아세르 가문의 여인으로 살 세월은 길지 않겠지.
네가 자랐을 때 나는 아마 없을 거란다.
나는 대가를 바쳤으니. 이스토리아 대주교는 신성이라 부르던 내 안의 생명을 이 염원의 제물로 내놓았다. 계산은 값이 맞아 떨어질 것이다.
네가 움직이는 태동이 느껴지는구나. 너는 아직 눈도 뜨지 못하고, 내 품 안에 있다.
그렇지만, 나는 너의 미래를 안단다.
그래, 알지. 보았고, 겪었으니.
이미 여러 번. 늘 그랬듯.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일들.
열두 살이 된 블라드는 네 내면이 텅 비었다고 말할 거란다.
‘저 앤 영혼이 희미해요. 그냥 아무것도 없어요.’
블라드에게 그건 첨예한 진실일 텐데 누구도 자신의 진실의 받아들여 주지 않아서, 그건 그 애의 마음속 앙심의 핵을 만들 첫 사건이 되겠지.
기디온 그이 역시 우리 첫 아이의 말을 믿지 않지. 큰애의 정서에는 교정할 수 없는 비틀림이 남고 말 거고.
그이의 윤기 어린 갈색 머리카락 아래 도사린 건 이성에 대한 단단한 믿음이고, 그런 점이 그이를 매력적이게 했지만, 너희에게 좋은 부친이 되는 덴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으니 어쩌면 좋으니.
물체의 밝은 면은 환하면 환할수록, 어두운 면을 더욱 어둡게 한다. 그렇듯 명과 암이 교차하며 깊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생애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래서.
일어난다 해서 내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단 법은 없잖니? 신도 그렇게 강제할 순 없지.
나는 편지를 쓴다. 애정을 담은 설득을 한다. 간곡한 사랑을 문자로 남긴다. 블라드와 매일같이 긴 시간을 보낸다. 그 애가 내 진심을 읽을 수 있길 바라면서.
사랑으로 낳은 나의 큰아이는 사랑이 부족하여 굶주릴 테고, 그건 더 살지 못할 나의 책임이기도 하단다.
나는 그 애가 말할 진실을 믿어줄 수 있는데, 그 애는 그걸 알지 못하여 쓸쓸하구나.
더 자라면 블라드는 죄와 속죄에 대해 논할 거야.
‘죄라는 것은 높은 수준의 자기의식 하에서 지각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로서의 자각이 희박한 박약자의 영혼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깨끗합니다. 죄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블라드는 저를 낮잡아보던 동급생들을 압도하고는, 논리와 토론 수업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올 거란다.
그이에게는 언제까지고 블라드의 성취를 북돋우고 칭찬해 주라고 전했는데.
나의 말이 나중까지도 전해질지는 알 수가 없어 슬프구나. 나는 미래를 알지만 미래를 살지는 못하기에.
지금 전하는 내 사랑의 말에 블라드는 기뻐하지만, 훗날에 내가 없으리라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겠지.
방금도 블라드에게 잠자리에 들기 전 입맞춤을 해 주었단다. 매일같이 하는 일이지. 이제는 쑥스럽다고 팔을 빠져나가는데도 꼭 안아주고, 잠자리에서 책을 읽어준다.
더 큰 사랑을, 더 많이 퍼부어 준다면 블라드의 마음속 토양 깊이에 약간은 고이지 않을까?
그 애가 갈급한 결핍 속에서 자라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식이란 말이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항상 귀엽고 애틋한 존재이지. 몇 번이고, 언제라도 나는 블라드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음이 애통하다.
과거의 내가, 그리고 지금 내가 준 사랑은 모두 씻겨 사라질 것이 안타깝구나.
너는 내 말을 이해할 거란다, 클레이오.
그래, 클레이오.
이제는 그런 이름이 되겠지?
여러 번 불러서 내 입에 붙도록 해야지.
역사의 펜이 갈급하게 고대하는 너의 이름, 그러나 내게는 그저 내 둘째 아이를 가리키는 단어일 뿐인 그 이름.
사랑으로 낳은 내 두 번째 아이.
클레이오 너는 블라드가 네게 하는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고하는 법이 없겠지.
아니, 네 바짝 마른 입술은 세상의 그 누구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거야.
네게 다정하든 잔인하든 동정하든 증오하든 간에, 그 어떤 인간도 네 주의를 끌 수는 없을 테니까.
죽음을 기억한다는 건, 그래, 그럴 수 있는 일이지.
어느 여름날, 방학을 맞이해 집으로 돌아온 블라드는 결국 확신하겠지.
클레이오, 너는 어딘가 결핍된 존재라고.
네 가는 머리카락을 제법 단단해진 손가락으로 꽉 붙들고서 네 숨이 끊기기 직전까지 물 아래로 처박아 두고서.
너는 실신한다. 블라드는 갑자기 밀려드는 공포심에 울음을 터트린다.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소년의 잔인함은 앞뒤를 따진 행동이 아니기에 한도를 모르는 것이다.
그때에 이르면, 나는 그 애를 호되게 혼내고, 그런 다음 안아줄 수가 없다.
사람에게 그런 식의 폭력을 가해선 안 된다고, 결코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고, 그리고 동생을 사랑해 주라고 말해줄 수도 없다.
이전 생애에서 블라드는 눈물에 젖은 눈으로 내게 물었다.
‘하지만 어머니 쟤의 눈은 무서워요.’
지난 생애의 나는 그저 블라드를 꼭 안아주기만 했다. 온 힘을 다한 포옹밖에는 해줄 것이 없어서.
너의 아득하게 흐려지는 시선엔 눈앞의 사람을 무정물로 취급하는 초연함이 어려서, 사람의 감정에 섬세했던 첫 아이는 늘 무섬증에 떨었다.
이전의 생애에서도 너는 말이 없는 아이었지. 생과 생의 경계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내게도 말해주지 않았지.
세계가 돌이켜지는 틈새에 영혼이 짓이겨진 자가 인간일 수 있냐고 물은 뒤로, 내내 침묵했던 것을 기억한다. 네가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모르고, 그건 너 홀로 감당한 앎의 고통이었다.
그러나 네 눈물이 기디온과 닮은 눈꼬리를 타고 흐를 때면, 내 가슴에도 불길이 흐르는 것만 같았단다, 내 아이야.
블라드는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손이 안 가는 순한 애였다. 웃음이 많고 잘 잤지. 사람의 표정을 잘 살피고, 늘 나를 기쁘게 만드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지.
맏이는 제 나름의 방식으로 널 안단다. 늘 널 알았지.
앎은 애정의 근거가 될 뿐 아니라 혐오와 증오의 근거도 될 수 있음이 안타까울 뿐.
그 앤 너를 껄끄럽게 여기지?
어린 시절엔 네 침실에 들어오는 것조차 꺼릴 테지.
유아에 불과한 동생이 어둠 속에서는 유령을 보고 빛 속에서는 환시를 본다고 가정교사에게 귓속말로 전하던 아이의 공포는 진짜였을 테니.
기디온이 애를 써 고위 성직자에게 너를 보이거나, 마법사를 뻔질나게 불러들여도 소용은 없겠지. 마법사나 의사들은 기력이 약해 그렇다고만 할 테고.
가정교사를 들여 보아도 번번이 무반응으로, 아무런 의욕이 없을 아이가 너이니.
그런데도 너는 어느 순간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원래 아는 사람처럼 익혀 행동할 것이다. 지극히 내키지 않는 태도로.
아, 신실한 사용인들이 신의를 지켜 주어, 아세르가 차남에 대한 억측이 저잣거리를 나돌지 않으리란 것을 미리 감사하게 여긴다.
때로는 강제력 없는 말이, 평판 따위가 사람을 죽이는 세상이기에.
세월은 흐를 것이다.
클레이오 너는 늘 물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란다.
콜포스의 바다에서도, 채트윈-탈봇 저택의 개울에서도 잠겨서 녹아 사라질 것처럼 조용히 떠 있곤 할 테지.
너는 눈을 감고 지내는 날이 눈을 뜨고 지내는 날들보다 길 것이다.
물속에서는 과거이자 미래의 속삭임들이 먹먹하게 잦아든다고, 이전에 그랬잖니.
모든 소리가 없어지고 물결이 감각을 뒤덮는, 그 평온.
너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물에서 오니까 그렇게 많은 물을 눈으로 흘려낼 수 있는 것일 터이다. 너는 네 죽음들을 기억한다. 분명 너는 죽었다.
지난 생애에서 그토록 오래 망설이고 슬퍼하고 고통 받다가 마침내 낸 용기가 이런 식으로 무화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너는 말했지.
이미 죽음은 선택되었는데 그것이 돌이켜지다니, 그러면 네가 고통 속에서 살아냈던 삶이,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종결이 모두 의미가 없어진다고.
비탄도 분노도 모조리 내면을 향한다. 너는 운다. 너는 너 자신의 의지로 삶을 완결시켰다. 시신조차 남지 않도록 온전한 끝을 마련했다.
신의 안에 있는 한 자유 죽음은 성립될 수 없다는 걸 몰랐기에 가능한 시도였다.
너는 생각한다. 사람의 형상을 한 존재가 모두 사람인 것은 아니다. 네 몸을 이루는 것은 어떠한 의지이다. 강대한 힘의 통로이자 도구.
허물어질 듯 가벼운 육신의 외피 아래엔 무거운 주춧돌이 꾹 눌려 있다. 안간힘을 써 움직이면 몹시도 희미한 에테르가 스며 나온다.
지극히 적은 에테르이건만 일으키면 들불처럼 일어나고, 그 불은 소멸을 예감시킨다.
이제 너는 자살을 시도하지 않는다.
이 가벼운 육신이 소멸하고 나서도 영혼과 의식만이 남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육중한 받침돌을 치우고 스스로 통로를 여는 일 역시 할 수 없다. 그러고 나면 돌이킬 수가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네 영혼은 결코, 힘의 장력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너는 안다.
네게 주어진 육신을 살해하는 일은 몹시도 어렵다.
끼니를 거르고 식사를 몰래 정원에 내버려도 말라갈 뿐 사망에 이르지는 않는다. 마법사와 신녀들이 주기적으로 축복과 은총을 쏟아준 몸이라서일까?
끝없이 이어지는 삶, 결국엔 다시 깨어나 보게 되는 천장을 너는 일종의 안내판이라 여긴다.
너는 쓰게 냉소한다. 바람은 물에 잔잔한 골을 낸다. 네 차가운 눈물과 웃음은 얕은 물굽이에 잠긴다. 나는 바다 냄새를 맡으며, 실체 없는 몸으로 가내 도서관의 책상 앞에 선다.
내가 아끼던 에텐셀 왕조식 책상, 어느 생애에서고 기디온 그이에게 연서를 쓰던 고가구의 표면을 쓰다듬어본다.
내 손은 가구를 스쳐 지나갈 뿐 걸쇠를 열 수가 없겠지만.
나의 생명은 아깝지 않으나, 이 마지막 생애에서 그이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애석할 뿐이지. 그이가 부디 짧게 슬퍼하고 행복의 기억만을 길게 간직하길 바라며, 항상 그날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기디온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이는 나와의 긴 삶을 하나도 기억 못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지. 내가 그이를 알고, 내가 그이를 기억하므로.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아직 피지 않은 부겐빌레아, 수없이 보았던 꽃의 선홍빛을 떠올린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겠지.
클레이오 너는 이 책상 앞에서 처음으로 사람다운 반응을 보이게 될 것이고.
기디온에게 남긴 나의 편지는 네 열여섯 살 생일에 전해주도록 해 두었다.
그이는 늘 그렇듯 나와의 약속을 지키겠지.
네 열여섯 살 생일은 늘 그렇듯 조용히 지나가겠지만 말이다.
설탕으로 빚은 데이지 꽃을 장식한 케이크와 향기로운 술을 준비해본들 너는 만찬실로 내려오지 않을 테니까.
천천히 편지를 다 읽은 너는 요청한다.
“아버지, 저를 템푸스 강가의 수도방위대 학교로 보내주세요.”
그건 이번 인생에서도 너의 유일한 요청, 처음이자 마지막 청원이 되겠지.
기디온은 난색을 표하지만 거절하진 않을 것이다.
네게 에테르를 흘려보냈던 수많은 마법사들도 네 심장에 에테르 그릇이 있다고는 알아채지 못했겠지.
신성은 마법사들의 눈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네게 어떤 힘이 어리게 될지 모른다. 그것은 여신의 일, 내가 미처 다 알지 못할 예정.
그럼에도 기디온은 어떻게든 너를 강가의 숲으로 보내줄 것이다. 그이는 결연하게 수도를 향할 테고, 그가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서 너를 실기시험장에 세워 주겠지.
너는 정말로 한 가닥의 에테르만이라도 내보일 수 있으면 족하고.
이제 종막은 머지않다.
내가 남긴 편지는 온전하게 남지 못하고, 결국 블라드의 손에 불타겠지.
실상 블라드는 너를 이겨본 적이 없고.
도통 어떤 일에도 반응이 없고, 여리게 눕는 풀 같은 동생을 한순간 짓눌러봐야 소용에 닿지 않는 걸 본능적으로 알겠지.
그 앤, 클레이오 너의 내면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하고자 한 거란다.
‘편지는 무슨 뜻일까?
돌아가신 모친의 뜻에 압박을 느꼈을까?
아니다. 그런 것에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런 생각들이 그 애의 뇌리를 스쳐 가겠지.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듯 버거워하던 유령 같은 남동생이 확고한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기 시작한 연유에 대한 답이 명확하지 않아, 블라드의 신경을 갉아놓을지도 모르지.
네가 안식을 얻는다면 안식의 첫 번째 담지자는 블라드가 될 것이다.
나는 그 앎이 큰아이에게 지나친 시험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부디, 그러하기를.
마침내 템푸스 강가에 도달한 너는 내 선물의 실체를 알게 된다.
너는 또다시 울 것이나 그럴 필요가 없다.
내가 시작한 일이니 내가 끝을 내는 것. 신의 도구로써 사용되기 전에, 네게.
네가 원하는 것을, 꼭 반드시 이뤄 줄게.
그런 사랑을 너는 모르겠다고 생각하겠지. 삶의 종결을 완수할 수 있도록 생명을 거는 사랑을.
나는 여신께 나의 생명 모두를 바쳤다. 네가 세계사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지 않도록.
이번엔 정말로 끝이 날 것이다. 이름이 지워질 것이다. 여신의 이름만이 남을 것이다.
네가 내게 물려받은 예지는 단 한 번 맞을 것이다.
이미 여러 번 당도해 보았던 템푸스 강가에 서서, 너는 마침내 네가 그곳에서 죽을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상의 시간이 시작되는 곳에는, 여신의 보석 상자에서 태어난 검은 짐승이 물가를 거닌다. 잃은 아르카디아의 마지막 조각이 거기에 있다.
너는 마지막을 열망하는 소년, 결코 성년이 되지 못하는 세계의 부품이다. 너는 기원하듯 짐승에게 제물을 바치고, 자신의 마지막이 흔적 없기를 바란다.
너는 머릿속에서 계시처럼 떠오른 구절을 물속으로 녹여 보낼 것이다. 때로, 반복되는 생애 사이의 틈으로 흘러드는 전거를 모르는 문장의 한 구절. ‘희망도 두려움도 없이.’
그제야 너는 말의 맥락을 이해한다. 그것은 정복의 구절이다.
삶과 죽음을 정복하는 구절.
네 바람은 이루어진다.
그렇단다. 내 아이야.
내가 낳은, 내가 여러 번 낳은, 그러나 살지 않도록 결정한 아이야.
너의 육신이 그 물 밖으로 다시 나왔을 때에 ‘클레이오 아세르’는 오래전 헤어진 내 자매의 아이가 될 것이고, 결국엔 세상을 구하게 되겠지.
그리하여 너는 명명의 구속을 벗어나 영구한 평화를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