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2
무서운 놈, 나쁜 놈, 막나가는 놈 (3)
아슬란은 전제군주 하겠다고 날뛰면서 있는 의회도 없앤다는 꼴통이었고, 왕세자는 왕이 못 될 인물이다….
만에 하나, ‘그 일’이 일어난 후에도 왕이 될 수 있다면 멜키오르는 선한 군주일 수 없겠지.
‘나도 이제 여기서 남은 평생을 살아야 하는데 폭군이 즉위하는 건 곤란해. 근데 선택지가 히틀러, 스탈린과 주인공 중 택일이라면 다른 수가 있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아서가 왕이 되어야 해.’
클레이오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아서를 옹위해야 한다는 결심이 들었다.
이제 수백만 디나르를 퍼부어 등기를 쳐놓은 참이었다. 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전과 같을 수 없었다.
사실, 이시엘만이 아서에게 변혁의 희망을 건 게 아니었다. 아서의 동료들은 모두 대의를 가진 이들이었으니까.
그 앞에서 자신은 정세의 안정에 힘입은 꾸준한 부동산 임대료나 바라고 있으니 좀 민망했지만, 뭐… 멋진 역할은 아서와 동료들이 하도록 놓아두자.
뭐라 해도 자신은, 이 세계관의 용사님이 아니니까. 그저 이야기 전개를 용이하게 하려고, 저자가 투입한 NPC아닌가.
‘에서 성격이나 말투의 변주가 있었다 해도 핵심은 같아. 아서는 정통적인 주인공이고, 이 세계에선 역사를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 영웅이지.’
실제의 역사에서는 ‘옳은 방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사는 영웅들의 것이 아니며, 몇몇 인물의 의지와 실천의 결과 역시 아니다.
당대의 인물은 어떤 선택이 옳은 것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지금 행한 실천의 결과는 동시대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러나 쓰인 이야기 속에서 역사의 판결은 정해져 있다. 저자가 도달하기를 원하는 최종적인 결말로서.
이야기 속의 영웅, 아서는 세계를 이끌도록 예정된 존재이며 그의 선택은 영원히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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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와 클레이오가 각자의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마차는 궁성에 도착했다.
성대하게 불이 밝혀진 진입로엔 각양각색의 가문 문장이 찍힌 마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말에서 내린 이시엘은 말고삐를 마구간지기에게 넘긴 후, 클레이오를 위해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방금 이야기 탓인지 자꾸 이시엘에게로 눈이 갔다. 감각이 예리한 이시엘이 그걸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아서 님과 무슨 얘길 했기에 날 그리 힐끔대나.”
“로사 페히테 교수 이야기…?”
평소에도 태도가 진지하지만, 더더욱 진중한 기색을 띤 이시엘은 마차에서 따라 내린 아서와 가까이 선 클레이오를 번갈아 일별했다.
그것만 듣고도 무슨 소리인지 파악한 모양이었다.
“경칭을 붙이도록 해라. 그분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기사이시다.”
이시엘이 클레이오를 능숙히 에스코트하는 걸 보며 아서는 쑥 뒤로 빠졌다.
“그럼 무도회를 즐기고 와! 난 아버지 뵙고 올게. 나중에 끝날 때쯤 마구간으로 연통을 넣으면, 다시 데리러 올 테니까.”
세 왕자의 복잡한 기류를 생각하면, 아서가 무도회장 따위에 안 들어가려는 것도 이해가 가, 클레이오는 고개만 까딱 했다.
이시엘은 키시온 자작과 합류하기 위해 응접실로 먼저 갔다.
클레이오는 왕실근위병이 늘어선 입구를 지나 복잡한 장식 무늬 카펫이 깔린 복도를 혼자서 가로질렀다.
모든 샹들리에가 휘황하게 빛나는 밤의 왕성은 장엄하고 화려했다.
마침내 중앙홀로 들어서자 클레이오의 얼굴을 확인한 하급 관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런 작위도 달리지 않은 이름은 사람들의 주의를 조금도 끌지 못했다. 디오네와 아서의 말이 맞았다.
‘차려입어야 오히려 눈에 안 띌 거란 게 이 뜻이었군….’
노반테스의 파티는 비견할 게 못 됐다.
어깨가 무거울 정도로 훈장이 달린 군복을 입은 장성부터, 목이 부러지지 않을까 싶은 티아라를 쓴 타국의 왕녀까지.
모두가 한껏 차려입어 공기 중의 향수냄새가 짙었다.
창가에 자리 잡은 오케스트라는 가벼운 춤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홀과 연결된 대기실은 웃음과 소란으로 활기찼다. 몇몇 남녀는 이르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밤은 아직 어렸다.
홀의 가장 안쪽, 높은 단에 마련된 왕과 왕비의 권좌는 비어 있었다. 그보다 한 칸 아래 왕세자를 위한 자리 역시.
클레이오는 시종이 쟁반에 받쳐 서빙하는 샴페인 잔 하나를 집어 들고, 천천히 음미했다.
여름의 끝에 걸맞게, 옅은 색 술에선 엘더 플라워와 감귤류 향이 났다. 딱 좋은 산미가 우아하게 청량한 느낌을 줬다.
‘역시, 왕실에서 주는 술이 다르긴 달라.’
잔에 남은 한 방울의 술까지 아쉬워하며 비운 뒤, 눈을 두 번 깜빡였다.
「지각」을 켜는 순간, 나지막하던 말소리들이 웅변처럼 크게 들렸다. 오케스트라의 음악도, 몸을 죄는 옷의 답답함도 몇 배나 증폭되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불편함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왕세자가 무슨 의도로 초대장을 보냈는진 모르지만, 기왕 왔으니 맨손으로 돌아갈 순 없지.’
이 정도 규모의 무도회라면, 작중 중요 인물들이 총출동 할 게 분명하지 않은가?
아서와 한 배에 탄 이상, 앞으로 얽히게 될 인물들의 인상이라도 알아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지러움을 숨기기 위해 벽에 붙어 선 클레이오는 가만히 홀 전체를 둘러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볼품없는 소년의 춤 신청을 바라는 영애는 하나도 없었으므로,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지각」에 의해 시야가 몇 배나 깨끗해져 반대쪽 벽에 선 사람들의 표정까지 똑똑히 보였다.
머릿속으로 ‘약속’의 「기억」두루마리를 차르르 넘기며 홀 안을 살폈다.
맨 처음 찾아낸 인물은 조지프 크뤼엘 공작이었다. 반백의 머리를 깨끗하게 넘긴 중년 남자는 입술이 가늘고 턱이 단단해 냉혹한 느낌을 줬다.
‘저 앞에서 눈치 없이 건배사 하는 대머리는 램즈데일 백작일 거고, 훈장 잔뜩 달고 풍채 좋은 자가 슐츠 대사인가? 아슬란의 사람들이 먼저 와 있네.’
그 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아슬란 2왕자전하 납시오—!”
아까 클레이오의 이름을 열의 없이 불렀던 하급 관리는, 그 때의 몇 배나 되는 듯한 성량으로 2왕자의 입장을 알렸다.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잦아들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더 커졌다. 입구부터 도미노가 쓰러지듯 사람들은 차례로 고개를 숙였다.
클레이오 역시 고개를 숙이는 시늉을 했다가 남들을 따라 다시 들었다.
마치 왕처럼 당당하게, 2왕자는 홀 가운데를 가로질렀다. 걸음걸이가 절도 있어 옷자락이 차분하게 흩날렸다.
아슬란 리오그난.
스물다섯 살의 2왕자는, 키가 크고 자세가 당당하며 준수한 외모를 한 청년이었다.
이목구비의 생김새 자체는 아서와 비슷했는데, 머리카락과 눈 색 때문인지 인상은 완전히 판이했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칠흑처럼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이 알비온 왕국의 사람들 사이에서 도드라졌다.
그의 모친 쥴레이카는 브룬넨 군주국 카스틸리엔 황가의 공주로서, 현 브룬넨 황제의 사촌이었다.
‘세 형제 중 혼자만 동떨어진 외모인 게 아슬란의 은근한 콤플렉스랬지. 그래서 정복왕 전설에도 연연하고. 아, 그냥 흑발이 우성유전이어서인데. 문과인 나도 아는 걸. 과학적 발견이 시급하다.’
클레이오의 존재조차 모르는 왕자는 오만한 걸음을 옮긴다. 클레이오는 그의 옆모습을 머리에 새겼다.
여전히 어린 낯빛에 결벽한 성정이 느껴지는 저 왕자가 나중에 그 모든 잔인한 일을 벌인다는 것이, 조금은 믿기지 않기도 했다.
아슬란은 곁눈질조차 하지 않고 단상을 향해 갔다. 단 아래엔 2왕자와 3왕자를 위한 자리가 마련돼 있었다.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은 아슬란은 복잡한 감정이 서린 눈으로, 한 단 위 왕세자의 권좌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다음 이 밤에는 채워지지 않을 자신 옆의 의자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각」을 사용 중인 클레이오의 눈에는 아슬란의 기척과 움직임이 모두 똑똑히 보였다.
‘아, 표정이 바뀌니까…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는군.’
검고 검은 눈에 오래된 원한을 담은 왕자는, 악역에 걸맞은 느낌을 줬다. 하지만 홀 안의 몇몇 영애들은 클레이오와 다른 의견을 가진 게 분명했다.
서너 명의 아가씨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아슬란을 흘끔거리며 소곤거리거나 뺨을 붉혔다.
‘그래. 나쁜 남자는 항상 수요가 있지.’
그 상황이 부조리하게 웃겨서, 클레이오는 삐죽삐죽 웃고 말았다.
한창 형편이 궁할 때 건너건너 소개로 교열 본 적 있던 로맨스 소설 내용이 주르륵 떠올랐다.
‘연애 소설에선 대체로 냉랭한 검은머리가 남주인공이던데, 저 놈은 장르를 잘못 타고 나가지고 지 동생한테 열폭하느라 청춘을 낭비하네.’
크뤼엘 공작이 먼저 아슬란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누가 봐도 밀담을 나누는 모습이었다.
‘나한텐 다 들리지만 말이지.’
“왕비님께서는 불참하십니까?”
“어머님은 오늘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시더군.”
“과연… 전하께서 이런 자리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시느니, 저녁은 호젓이 보내시는 게 낫겠지요.”
‘흠, 자기 아들이 멜키오르보다 낮은 의자에 앉는 연회 오기 싫단 뜻인가 보군. 저런 얘길 대놓고 하네.’
정작 홀 안에 멜키오르의 사람이라 할 인물은 없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아슬란 일파를 제외한 모두가 멜키오르를 지지한다고 볼 수도 있었다.
아직 등장하지 않은 왕세자를 기다리며 기대에 찬 말들이 오갔다. 수많은 입술이 동경과 경애를 담아 멜키오르를 언급했다.
친 브룬넨파 귀족의 지지를 업은 아슬란과 달리, 모친이 평민인 멜키오르는 특정한 지지 세력이 있다기보다 신묘한 처세술로 인기와 인망을 얻었다고 했다.
‘그 모친 역시 일찍 죽었다고 하고. 그런데도 왕세자는 재계와 사교계에 인맥이 엄청나댔지. 사람 구워삶는 능력과 비밀정보부를 절묘하게 섞어 써, 정식 책봉도 없이 왕세자가 됐다고. 아, 맞아 말없는 심복도 하나 있었는데… 태서턴 경.’
하지만 원고에 묘사된 태서턴 트리스테인 같은 사내는 안 보였다. 멜키오르 역시, 제법 시간이 늦어도 나타날 기색이 없었다.
‘왕세자는 늦으시는구만. 뭐, 주인공은 늦게 등장하는 법이니까.’
더 이상 소란을 견디기 어려워진 클레이오는, 바람이라도 쐬고 오려고 홀의 곁문으로 나섰다.
아서의 걱정과 달리 멜키오르는 클레이오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초대객이 많은데 학생 하나 따위에게 신경을 쓰겠냐고. 우리 주인공은 이번 버전에서 고생을 많이 해서 너무 과민한 성격이 됐어.’
***
사람 기척이 없는 곳을 찾아 복도를 굽이굽이 돈 게 문제였다.
시종들 역시 모두 무도회장에 집중돼 있어, 어두운 복도에는 인적이 없었다. 경비병이라도 보이면 길을 물을 텐데, 그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았다.
‘무도회장으로 들어갈 땐 1층이었는데, 왜 지금은 2층이지?!’
홀에서 내내 서 있다가 복도를 헤맸더니 슬슬 다리와 허리가 아팠다.
드넓은 중정 반대편으로 창이 모두 열리고 불이 밝혀진 무도회장이 보이는데도, 복도를 돌다 보면 점점 멀어지는 게 미칠 노릇이었다.
‘저 모퉁이가 아까 나온 덴가? 저기까지 가도 길 모르겠으면… 그냥 창밖으로 나가자. 「감속」 마법식을 쓰면 될 거야.’
왕궁 내에선 마법을 쓰면 안 된다고 주의를 들었기에 지금까진 참았지만, 시간이 더 지났다간 집에도 못갈 것 같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복도의 모퉁이를 돌았던 클레이오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긴 복도가 시작되는 벽감에는 실물 크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벽감 양편의 가스등이 그림을 비추었다.
흰 옷을 입고 비스듬히 선 채 이쪽을 돌아보는 여인의 초상.
그녀의 얼굴을 ‘김정진’은 알았다.
‘…민산?!’
민산은 사학과의 마돈나였다.
피부가 희고 눈꼬리가 길게 빠져 냉연한 미모를 한 민산. 인종이 모호한 인상이라 혼혈이라는 소문이 돌던 동기였다.
친근하게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걔가 오묘한 미소를 지으면 심장을 꽉 죄이는 것 같았다.
그림 속 옅은 보라색 눈동자가 클레이오를 내려다본다. 긴 머리채 역시 온통 백색이었지만 키도, 얼굴도, 서 있는 모습도 민산 그 자체였다.
초상화 아래에는 작은 명패가 붙어 있었다.
자신의 무의식에게 삿대질이라도 하고 싶어진 ‘김정진’이었다.
‘내가… 이정도로 찌질한 놈이었나?’
아무리 오래 짝사랑을 했다지만 가상의 인물에 그녀의 얼굴을 맞추어 넣다니.
민산과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민산은 대학 시절에도 종종 ‘김정진’에겐 먼저 말을 붙였지만, 필요한 만큼의 대답만 했다.
민산은 수석 입학에 수석 졸업생이었다. 더더구나 굉장한 집안의 자녀라는 그 애가 가난한 고학생에게 관심을 줄 이유가 없으니까.
괜한 자존심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착각에 젖어 멍청한 행동을 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야. 원래 세상의 뭔가가 나온 건 원고 속에 들어온 후 처음 있는 일이잖아. 민산… 의 초상을 건 게 나일 리가 없어.’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자, 저절로 왼손 검지에 끼인 ‘약속’ 에 눈이 갔다.
왜 원고 속에 졸업반지와 똑같이 생긴 아이템이 있는지, 왜 최종고에 민산을 모델로 한 것 같은 인물이 있는지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