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27
끝의 시작 (8)
지금 정국에서 멜키오르가 스킬을 써 무마할 일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왕실자문회의에서도 아슬란의 주요 세력을 거꾸러트리며 힘을 무작스럽게 휘둘러댔으니 이제는 정말로 경감이 절실할 테고.
클레이오는 언제든 이런 날이 오리라 예상은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준비된 단검이 하나는 있었다. 그는 헤스터가 [경감]을 쓰는, 뒤틀린 방식을 이해했다. 클레이오는 이해한 것을 모두 구현할 수 있는 마법사였다.
그는 자신이 거둔 이해를, 과거의 실패한 시도를 되돌리는 데 기꺼이 사용하리라 다짐한다.
그의 죄는 그의 소명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안다.
태서턴은 아무런 대답 없이 클레이오의 어깨를 잡아챘다. 검푸른 망토에 휘감겨 뒤집어 들린 채, 클레이오는 궁성으로 갔다.
사람을 화물처럼 운반할 거라면 가능한 한 깨지는 물건처럼 좀 옮겨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은 이번에도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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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슴푸레한 밤중에 보아도 클라렌던 하우스와 토마스 홀의 파손 정도는 심각했다.
‘무슨 폭탄이라도 터진 줄 알았네. 결계로 보호되는 궁성에서 이게 다 무슨 짓이람.’
클라렌던 하우스로 들어가는 길을 곁눈질하던 클레이오는 이내 전제를 수정했다.
‘왕성 결계도 다 흔들렸군.’
소드마스터와 7레벨 검사의 싸움은 궁성에 이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힌 거다.
한 달이 지났는데도 두 검사의 검이 깊게 베어낸 기둥과 파인 땅을 복구하지 못 했다.
제베디 교수가 주교관과 의회 복구에도 나섰다는 걸 들었는데, 아직 여기까진 여력이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클레이오는 곧 잡상을 모두 떨쳤다.
폐허처럼 보이는 클라렌던 하우스의 입구 너머에 멜키오르가 서 있었다.
길어난 백금발을 늘어뜨리고 긴 잠옷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아름다운 유령이.
클레이오가 먼저 한 생각은 이랬다.
‘뭐야. 침대에 쓰러져 있을 줄 알았는데 나다닐 만한가?’
그동안 멜키오르가 능력을 과용했음은 자명했다. 근사하던 체형은 상당히 여위어, 잠옷만 입고 있으니 늘어뜨려진 천 아래가 빈 공간처럼 느껴졌다.
‘이쪽이 남 말할 때가 아니지만… 저래서는 누가 봐도 병자 아닌가.’
클레이오는 멜키오르의 모습을 살피며 운을 뗐다.
“병환이 위중하다 들었는데, 이리 찬 공기를 쐬셔도 되는지 염려가 됩니다. 오랜만에 인사를 올립니다.”
“내 과히 편히 지내지는 않았지. 여기 문간까지 클레이오 경을 맞이하러 온 것은, 다만, 조급증의 발현이라네.”
“조급증이라니요….”
“왕비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네. 그녀를 봐 주게.”
실내용 가운을 여민 멜키오르는 앞서 클레이오를 이끌었다. 흘긋 뒤를 돌아보니 태서턴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클레이오는 괴괴한 정적이 감도는 클라렌던 하우스의 심처로 나아갔다. 시종 하나 오가지 않는 복도가 어둡고 길게 느껴졌다.
가장 안쪽, 정원으로 작은 창만 하나 난 침실에는 쥴레이카가 누워있었다. 문제의 왕실자문위원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왕비의 안색은 파리했다. 더 가까이 다가가자 흰 시트 아래로 목의 상처가 드러났다.
클레이오는 약간 표정을 굳혔다. 뭉툭한 날에 베인 듯한 목의 상처는 처참하게 덧나고 부풀었다. 고열에 들떠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은 흰 이마에 온통 들러붙어 있었다.
멜키오르가 명령했다.
“이 사람을 살려 놓도록.”
클레이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잠자코 멜키오르가 아슬란으로부터 잡아 놓은 인질을 치료했다.
펼쳐진 서클의 금빛 안에서 진물이 흐르던 상처가 봉합되고, 흔들리던 호흡이 정돈되었다.
쥴레이카는 애처롭고 가냘픈 여인이었다. 이 작고 여린 사람이 아서에게 암살자를 보내고, 아슬란의 일파를 호령하던 실세라는 게 참 허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억류되어 있는 쥴레이카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슬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였다. 무섭도록 강력한 패.
멜키오르와 아슬란이 분쟁을 일으키며 서로의 역량을 소진하는 것은 클레이오에게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구명은 순수하지는 않았지만 정직하기는 했다.
문에 기대서서 클레이오의 치유 마법을 들여다보던 멜키오르는 별 의도 없이 살며시 웃었다.
그 표정이 너무나도 편안하고 무구해서 클레이오의 등에는 식은땀이 좍 뱄다. 손가락에 끼인 약속의 「이격」 역시 격렬하게 작동했다.
“역시 마법이라는 것이 참으로 유용하기는 해.”
멜키오르가 한 발, 한 발 소리도 없이 쥴레이카의 침상으로 다가왔다. 클레이오는 뒷걸음치고 싶은 본능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오랜만이라 그런 걸까? ‘약속’이 있음에도 멜키오르를 똑바로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저 나른한 인상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상처는 옅은 자국만 남기고 완전히 치유됐다. 이제는 혼몽에서 깰 듯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쥴레이카를 들여다본 멜키오르는 또다시 ‘간파의 구조시’를 발동시켰다.
[고유 스킬: ‘간파의 구조시(構造視)’―대상의 본질을 간파하는 눈입니다.
―사용자는 대면한 스킬 적용 대상의 본심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추가 기능으로 내력, 상태, 과거를 볼 수 있습니다.
―사용자는 스킬 적용 대상의 행동에 직접적인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사용자: 멜키오르 리오그난
지속시간: ∞
추가 기능 사용 가능 횟수:
추가 기능 「순종」: ∞ ]
곁눈으로 ‘약속’의 메시지를 확인한 클레이오의 심박이 격하게 튀었다.
멜키오르의 스킬에서 추가 기능의 횟수 제한이 풀려있었다.
치유로 인해 깨어나던 쥴레이카는 또다시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본래 의식이 없는 상대에게 적용되지 않던 스킬의 제한 역시 사라진 모양이었다.
‘뮈토스의 홀 때문인가…? 원래도 사기스킬인데 거기서 더 발전하다니….’
그렇다면 이토록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멜키오르는 무엇을 기다리며 칩거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멜키오르가 비틀거리며 카우치 위로 쓰러졌다. 귀신같이 다가온 태서턴이 그를 부축해 바로 눕혔다.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린 멜키오르가 시녀를 부르는 종을 울렸다. 침실에 모인 시녀들은 멜키오르의 명령에 따라 쥴레이카를 바깥쪽 침실로 옮겼다.
시트에 감싸인 왕비와 일군의 시녀들이 물러나자 멜키오르는 태서턴을 가까이로 불렀다.
“태서턴. 오닉스를.”
아르모리크 공작은 금세 마석을 대령했다. 어울리지 않게도 무척 서두르는 태도였다.
카우치 앞의 의자에 앉은 클레이오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몇 개의 마석을 골라냈다.
지금 멜키오르가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단 사실은 자명했다. 그의 흰 이마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태연함을 가장하는 것도 거기까지였던 모양이다. 주홍 및 눈에서 초점이 풀렸다. 생을 압도하는 고통에 결착된 의식은 불안정해 보였다.
클레이오는 일곱 서클의 [경감]을 일으켰다. 쥴레이카를 치료할 때에도 그리 변치 않던 에테르 감응력의 수위가 급격하게 내려갔다.
태서턴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클레이오와 멜키오르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손은 장검의 그립을 꽉 붙든 채이다. 그가 움직이게 해서는 안 됐다.
마법식에 에테르를 다시 주입하는 타이밍이 곧 살해를 시도할 타이밍이 될 것이다. ‘지각’이라는 예리한 조정 도구를 놀리고 에테르의 흐름을 바꾸어서.
일부러 시간을 길게 끌 필요도 없었다. 겉만 멀쩡하지 안이 다 곯아 만신창이가 된 멜키오르의 상태는 금세 나아질 것 같지가 않다.
클레이오는 시험 삼아 멜키오르를 불러보았다.
“멜키오르 저하, 저하께서는 그믐의 마수에 대해 미리 알고 계셨습니까?”
혹시라도 그의 수가 아니었나, 클라렌던 하우스에 칩거하며 마수를 부르는 방법이라도 익혔나 떠보려는 심산의 질문이었다.
멜키오르는, 주홍빛에 가까운 눈을 간신히 올려 뜨며 말했다.
“그믐을 불러오는 마수는 내 모든 생애를 통틀어서도 처음이었지. 아주 신비로웠어. 이 세상은 어디에서부터 망가진 것일까?”
클레이오는 마수 출몰의 배후가 멜키오르라는 가설을 금세 포기했다.
의외로 멜키오르는 거짓을 말하지는 않는다. 정말 제가 한 짓이라면, 제가 신에게 저지를 일을 알아달라는 것처럼 불쑥 내보이길 좋아하는 작자였다.
‘이게 아니면 다른 델 찔러봐야겠군.’
클레이오는 방향을 바꾸어 멜키오르를 도발했다.
“글쎄요. 어쩌면 아슬란 전하께서 일식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전망 하에서 마수의 원인을 따지는 건 허망한 논의가 아닙니까? 그걸 세상이 망가졌다고 표현하시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불경하기 그지없는 소리로군. 허나 경이 그리 말한다면 너그러이 받아주지 못할 것도 없지. 아슬란이 왕관을 쓴다면 그건 정말로 새로운 전개이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대도 알지 않나. 그 애와 내 쓸모는 그리 안배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아서가 아는 걸 그대가 모를 리 없지. 멋진 연설은 잘 들었어.”
“그러면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지요. 저하께서 이 세상을 전쟁의 업화로 태우고자 하신다면 왜 브룬넨을 먼저 치지 않는 겁니까?
마수가 곳곳에서 출몰하는 데다 양측 다 전쟁 준비가 완전하지 않은 지금 군사적 충돌이 일어난다면 바라시는 대로 이 대륙을 피로 덮는 싸움이 될 텐데.”
“분명 아서라면 그대에게 말했을 텐데. 나로 인하여 무고한 자들의 피가 흐르리라고. 하하. 하지만 그 피는 올바른 때와 장소에서 흘러야 할 것이네. 아서와 아슬란의 전장이 아닌 곳에서.”
도발에 걸려들지 않는 멜키오르는 가쁜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클레이오의 팔목을 붙들었다.
뼈가 으스러질 듯 센 힘이었다. 클레이오는 목 안으로 소리를 눌러 죽였다.
“그러니 클레이오, 내 심장을 멈추려 하지 말게.”
우당탕.
멜키오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클레이오는 등허리를 붙잡힌 채 바닥에 제압되었다. 태서턴의 칼은 이미 클레이오의 목에 날을 대고 있었다.
그런 그를 멜키오르가 만류했다.
“물러나. 클레이오 경에게 무례하게 굴지 마라.”
태서턴의 짙푸른 눈이 검게 어두워졌다.
“저하, 위험합니다.”
“치료엔 위험이 따르는 법. 클레이오 경을 놓게. 그건 그에게 위협이 아니니.”
놀랍게도 클레이오는 [경감] 마법을 끝내지 않았다. 여전한 마법식의 빛이 좁은 침실을 밝히고 있었다.
그 어른거리는 빛을 마치 저주라도 되는 듯 노려보던 태서턴은 결국 멜키오르의 명령에 따랐다.
이번에는 헤스터 때와 달리 망설이지 않았음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클레이오는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여신이 진정으로 멜키오르를 퇴장시키고자 했다면 클레이오는 반드시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거나, 그러지 못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란 건가.’
그러니 편집자 권한 역시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태서턴을 벗어난 클레이오는 옷을 툭툭 털고 다시 방금까지 앉았던 카우치 앞의 의자에 올라앉았다.
직전에 살해당할 뻔한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는 태도였다. 극한까지 발휘된 「이격」의 힘은 클레이오를 죽음에조차 초연한 의지의 인물로 보이게 했다.
멜키오르는 감탄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대는 자신의 목숨이 신에게 바쳐진 거라 여기는군.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저 아르모리크 공 앞에서 내게 그런 짓을 하려 들 리 없지.”
“저하께서 아르모리크 공을 따로이 두시는 경우가 없으니 그의 앞에서 행할 밖에요.”
“나를 죽이고 싶나?”
“해볼 만한 시도 중 하나라 여겼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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