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37
동남 전쟁 (5)
항명했던 수도방위대 기사들은 모두 격전지에 파병되었고, 모두 하나같이 지독한 소명의식을 가진 자들이었다.
의지와 헌신성을 지닌 이들은 최전열에서 가장 먼저 죽어갔다. 처음부터 함께 있었던 동료들은, 이젠 전사와 부상으로 3분의 2가량만 남았다.
그러한 시간이 쌓일수록 한 명도 이탈하지 않은 977기 친위대의 위명은 더더욱 높아졌다.
한 번도 휴가를 얻지 못했고 휴가를 신청하지도 않는 아서의 경우, 본인은 피부로 실감치 못하는 듯했으나 후방에선 거의 군신을 대하는 열광과 숭배가 그의 이름 주변에 떠돌았다.
물론 아서 본인도 페텐카 세르게프와의 긴밀한 연락을 통해 수도에서 자신의 위상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은 알았다.
만사에 소극적으로 굴면서도 군 통수권자로서의 권한 행사는 주저치 않고, 그 와중 고의인지 실수인지 모를 미묘한 오판을 거듭하는 멜키오르는 의원과 기사들 사이에선 이미 깊은 의심을 사는 존재였다.
멜키오르와 가까이 부닥치는 사람들은 보통 시민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국왕 대리를 보게 됐다.
또한 징집 연령 하한선을 낮춘 일로 인하여 어린 자녀를 잃은 부모가 늘어나면서 멜키오르에 대한 믿음 역시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슬란이 명백한 적이 된 지금, 리오그난 왕가의 삼남은 알비온의 유일한 희망이며 대안이었다.
아서는 자신의 입장을 잘 알았기에, 고작 후방의 사령부까지만 찾아와서는 종군기자랍시고 들먹거리는 의 특파원 앞에서도 기대에 걸맞게 처신했다.
늠름하고, 믿음직스럽고, 용맹하며, 건실한 소드마스터, 레오니드의 이름을 물려받은 왕가의 일원으로서.
물론 개전 초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아서를 취재해온 기자는 따로 있었는데, 바로 사회부의 실라 홀링워스였다.
“그래요, 왕자님, 좀 더 웃어 보세요! 음, 역시 웃을 때 사진이 가장 잘 나와요.”
실라는 천편일률적으로 아서의 전공을 나열하는 — 얼마나 많은 적병을 무찔렀나 — 경쟁자들과 달리, ‘스토리’가 있는 기사를 구성하는 데 빼어났다.
군신처럼 용맹하지만, 부하들과는 허물이 없는 지휘관.
투구에 눌리고 밀려 비죽비죽 솟은 금발을 아무렇게나 흩뜨리고 진흙탕으로 엉망인 야전에서 일병, 이병들과 똑같은 검은 빵으로 식사하는 우리의 왕자님.
그녀의 기사를 쭉 따라간 신문 구독자라면, 그녀가 묘사한 ‘아서 리오그난’이라는 인물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오로지 압도적인 무위만을 가진 기사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저 고귀하면서도 다정한 존재.
실라 홀링워스는 맹세의 값을 가볍게 치지 않고 제 믿음대로 꿋꿋이 행동했다.
아서가 가진 인격의 한 측면을 조명하여 소탈하면서도 연민을 아는 ‘왕의 재목’으로 그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하지만 클레이오는 아서가 일부러 가장 낮은 곳에 거하는, 몹시도 고귀한 성기사… 같은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정 정도는 그러한 계산이 없진 않겠지만, 삼백 일이 넘는 시간 동안 극한 상황의 최전선에 머무르며 공연용 인격을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원래도 왕실 예법에 익숙하게 자라질 못했고,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병영에서 유년기 전체를 보낸 탓에 몸에 익은 태도일 뿐.
‘그 멜키오르조차도 지금은 대외적 이미지 관리를 완전히 그만둔 시점인데.’
클레이오는 아서가 여전히 그라서, 하급생조차도 춤 신청을 안 내켜하는 그 사내애라서 조금은 기껍다. 그는 원고가 묘사한, 강인하고 냉정한 군주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막사 안에서 아서는 여전히 아서였다. 동남 전선의 군신이자 영웅은 지금도 바닥에 대충 주저앉아 몇 입 만에 샌드위치를 다 먹고서 입가를 손등으로 쓱쓱 닦는 중이었다.
먹으랴, 변명하랴, 입이 아주 바빴다.
“기억해, 기억해 레이. 근데 진짜 살짝 긁힌 상처뿐이야. 별거 아니지만 걸리적거리니까 손 좀 봐줘.”
“네놈들의 살짝, 조금 어쩌고 표현은 상당히 문제적이라 말이지. 규칙대로 안젤리움 소위에겐 이틀간 휴식을 명한다. 명령이니 불복 시 항명으로 취급해 영창에 처넣겠어.”
“힝, 레이 넘 차가움. 리피가 레이 보고 배운 건가봐.”
“다 스스로가 벌인 일의 결과임을 받아들이지 그래.”
“아세르 소령님 영관 진급 후 너무 세게 나오시는뎅.”
박박 민 옆머리를 긁으며 레티샤가 꺄르르 웃었다.
오른쪽 귀 뒤에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깊은 상처를 입어 더 이상 머리카락이 안 나는 바람에 호구지책으로 택한 헤어스타일은 유행을 한 세기쯤 앞서가는 모양이었다.
그런 헤어스타일을 하고도, 왼쪽 머리 위에 아이비 머리핀은 계속 달고 다닌다는 점이 레티샤 나름의 유머였다.
이제는 그 누구도 리피와 레티샤를 헛갈리는 일이 없는데도.
바지를 선호하는 리피와 달리 레티샤는 제복도 부러 스커트를 챙겨 입곤 했다.
레벨 높은 검사들이야 성별도 연령도 상관없이 엄청난 힘을 낼 수 있지만, 에테르 레벨이 지극히 낮은 일반 병사 중에서 최전선으로 보내진 치는 체력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젊은 남자아이들이 절대 다수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데키마 중대 제3소대에 배치된 신병들은 소대장인 레티샤의 앳된 얼굴과 스커트 아래 드러낸 맨다리를 보고선 딱 기대대로의 멍청한 반응을 했다.
안젤리움 자작의 늘씬한 체형을 닮아 근육질이기는 해도 두드러지게 우락부락한 데가 없는 레티샤가 기사 ‘목자의 검’인 줄 모르고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행태였다.
물론 신병들의 얄궂은 농담은 진지에 도착한 후 딱 오 분이면 그쳤고, 삼십 분이면 입에서 더 이상 사람 소리가 안 나왔다.
레티샤가 멋모르는 신병들을 다루는 약은 하나였다. 검집에서 꺼내지도 않은 검으로 죽도록 두드려 패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대부분의 신병들이 [강화]를 발현시켰다. [강화]를 발현시키지 않으면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는 타격이었기 때문이다.
‘멍청이들을 짐승 몰 듯 후려패서 목자의 검이라더라.’는 소문이 레티샤 뒤로 따라붙었으나, 감히 그녀 면전에서 그런 소릴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일단 부하들 몸에 복종이 새겨지고 나면 그 뒤에는 까다롭게 구는 일이 없는 게 3소대장 레티샤 안젤리움 중위였다.
열아홉 살의 레티샤는 점점 더 첼과 죽이 맞으며 능청스러워졌다.
그러다 보니 첼의 부관인 아이샤 데왈리와 붙어있는 시간도 늘어나, 욕설 사용 빈도 역시 급격히 늘어버렸다.
반면 같은 나이의 리피는 이시엘의 성정을 닮아 가, 지휘의 무게를 아는 장교의 얼굴을 했다.
리피는 수하들을 규율과 규칙에 맞추어 다루는 편이었다. 리피가 지휘하는 2소대에선 유독 영창에 처넣어지는 병사가 많다는 소문이 짜했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면 그들은 모두가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만한 위력을 선보였다.
아서의 등은 항상 불과 대적의 기사가 지켰다.
조용하고 점잖은 이시엘은 일단 검을 뽑으면 마치 화산처럼 압도적으로 적을 쓸어냈다.
아레미스 한 소위가 지휘하는 1소대는 기동력이 최고였다. 기마병들이 기민하게 치고 빠지며 아서와 이시엘의 공격을 보조했다.
눈물의 칼 아래 2소대와 목자의 검 아래 3소대는 통신 도구 없이도 서로의 위치를 교신하여, 놀라운 일사불란함으로 동시 측면 돌파를 감행해내곤 했다.
977기의 정예들은 지난 한 해를 마치 십 년처럼 살아냈다. 그 사이 무수한 삶과 죽음이 교차되었다.
농토는 죽음의 땅으로 변했고, 수원지는 검붉게 썩어갔다. 또한 마수들이, 사람이 사는 땅을 정복하려는 듯 지상을 메웠다.
지금 여기 있는 이들은, 일 년 전 여기 있던 이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변모했다. 전변을 일으키는 외력이 그들의 삶을 압도했기 때문에.
그런데도 일말의 다정만은 남아서 그들의 인간성을 지탱했다.
“아서, 너는 레티샤 데리고 전경화 켜 봐. 둘 다 따듯한 물에 좀 씻고 피도 닦고 나와. 약 정도는 내 부관이 발라 줄 거야.”
“우리만 씻으려니 좀 미안한데?”
“글게, 레이도 목욕 좋아하는데 [세정] 마법으로밖에 못 씻고.”
아서의 전경화 공간에 있는 작은 오두막과 따스한 목욕통은 동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정작 목욕을 가장 좋아하는 클레이오만은 그곳을 자주 이용할 수 없었다.
전경화는 반드시 시전자가 함께 진입해야 적용됐는데, 니네베 연대에서는 아서와 클레이오 모두가 부재중인 시간이 길지 않을수록 안전했기 때문이다.
연대의 기둥이며 들보인 클레이오와 아서는 심지어 수면 시간도 겹치지 않도록 조정하는 중이었다. 둘 중 한 사람은 깨어있어야만 재난과 급습에 대비할 수 있기에. 그나마 아서가 클레이오보다는 적게 자도 버틸 수 있는 레벨의 기사인 게 다행이었다.
“이제 와서 뭔. 나는 내가 목욕 못 하는 것보다 너네가 다쳐오는 게 더 골치니까 말 돌리지 마.”
클레이오는 곧장 간이침대에 가 모포를 휘감고 엎어지며 손만 살래살래 내저었다. 그 손짓조차 힘이 하나도 없었다.
아서의 눈길이 클레이오의 뾰족한 손끝에 따라붙었다. 왼손이었다.
쥐어 보면 양손 다 차갑기 그지없는데 클레이오는 항상 오른손만 시리다고 했다. 왼손은 홧홧하게 열이 오른다며 모포 밖으로 내놓고 잤다. 저건 그러니까 정말 자려는 거다.
기이한 괴벽 하나쯤 가지지 않은 병사가 드문 전선이었기에, 클레이오의 습관 역시 그리 취급되었지만 아서는 클레이오가 늘 마음에 걸렸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그것뿐이겠냐만은.
어린 시절 흐릿한 꿈속에서 아서는 소드마스터조차 아니고, 마법사도, 비행사도 없이 전장에 내던져졌다.
열악한 전선에서 적병을 베고 또 베며 몇 해를 보내기도 했다. 썩어가는 사체와 쥐떼, 전염병으로 죽어간 사람들을 파묻은 구덩이 위에서 오열하던 과거의 기억은 실제 살아본 삶처럼 생생했다.
그에 비하면 진짜 현실의 자신이 훨씬 처지가 나았다.
아서는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는다. 그는 꿈도 없는 잠을 잔다. 환시는 무용해졌다. 현재는 늘 새롭도록 잔인하다. 이제 그에게 ‘최초’는 과도하리만치 복잡한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최초의 독, 최초의 비행, 최초의 멸절, 최초의 마법사, 최초의… 상실의 예감.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향해, 불확실성 속에서 선택을 거듭하는 인간의 삶.
모든 최초의 시원에 클레이오가 있다.
코트조차 못 벗고 그대로 쓰러진, 얄팍하기가 박엽지 같은 자신의 친우가.
저 존재를 건 헌신은 보답 가능한 것이 아니다. 너는 신의 뜻을 실현하는 자이고, 신에게 속한 이이다.
저러한, 인간의 조건을 초월해버린 희생을 담보로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지위이며 통치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아서는 아직 그 답을 모른다.
클레이오의 식사를 챙길까 고민하던 아서는 차마 그를 깨우지 못했다. 클레이오는 휴식이 더 급해 보였다.
어차피 변변찮은 보급품은 죽지 않으려고 먹는 거지, 먹는 과정이 즐거울 순 없었다.
지금은 저녁 배식도 다 끝난 시간이었고 뭘 구해와 봤자 삼키기 쉬운 건 식은 수프 정도다.
전선으로 배송되는 치즈는 왁스층이 두꺼운 데다 너무 단단했고, 빵 역시 새벽에 구워 지금은 가장자리가 딱딱해진 것이다. 배급되는 적포도주 역시 시큼한 맛이 돌았다.
괴혈병의 우려 때문에 클레이오가 집요하게 요청하여 절인 레몬과 라임 정도가 추가되었을 뿐, 평소엔 뿌리채소가 아닌 신선 식품은 좀처럼 맛보기 어려웠다.
애초에 동남 전선에선 에테르 감응력이 없는 비전투병과 군인이나 군무원을 거의 볼 수가 없었더랬다. 절대적으로 전투원들이 다수인 집단에서 복지와 행정 수준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전선의 교착 상태가 길어지고, 페텐카 세르게프가 상원에서 영향력을 넓혀가며 식량 보급 문제가 개선된 게 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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