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50
내밀한 기적 (4)
클레이오는 타오르는 듯한 왼손 검지를 입가에 댔다.
‘약속’은 델 것처럼 뜨겁게 여겨지지만 실제로 손가락의 살이 부풀어 오르고 수포가 잡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용도였다.
아픔으로 집중력을 자극한 그는, 집요한 탐색을 이어갔다.
‘외각이 찢기니 잠수정 내부 구조 파악이 더 수월해지는군… 그래, 찾았다.’
잠수정에는 클레이오의 예상대로 왜곡의 돛을 활용한 아공간 저장 장치가 탑재돼 있었다.
수중배수량 29.5톤, 전장 16미터밖에 되지 않는 극소형 잠수정 스물다섯 척에서 어떻게 한 도시를 능히 불태울 만한 분량의 포탄이 발사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이었다.
「지각」이 장치를 포착하자마자, 클레이오는 마석 루비를 내던져 이중 발진한 [발화]를 통해 장치의 입구를 고열로 녹여버렸다.
이어 장전된 모든 포탄의 신관을 태우고 포신을 수숫대처럼 꼬아 꺾어 발사가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클레이오는 오로지 [발열]만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기계를 무력화시켰다.
마치 도시를 불태웠던 행동에, 선행적으로 죄를 묻듯이.
논리적인 행태는 아니었으나, 클레이오는 지금 제 행동의 논리성까지 갖출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격」이 그의 정신을 비끄러매지 않았다면 직무를 수행하기는커녕 진작 실신했을 것이다.
클레이오는 마석 루비와 마석 금을 더 꺼내 이중 발진 마법의 강도를 높였다.
텅, 텅 소리를 내며 잠수정 여기저기가 망가졌다.
뒤틀리는 선체에서 배수 밸브가 뜯기듯 튕겨 나오고, 잠항타와 횡타가 일그러졌으며, 축전지가 뭉그러지고, 헛돌던 엔진이 끝내 가동을 멈추었다.
최신 마도과학기술의 산물이자 위협적인 신무기인 잠수정도 엔진의 티플라움 판을 마법으로 녹여 방어 기능을 돌파하고 선체를 이리저리 내키는 대로 짓눌러놓으니 고철 덩어리나 다름없게 되었다.
알비온의 기사들이 물에서 싸울 수 없듯 브룬넨의 기사들도 물에서만은 싸우지 못한다.
클레이오가 바란 대로, 테르게스티 전투의 종막은 필연하게 두 마법사의 대결로 좁혀질 것이다.
헤스터와는 벌써 세 번째로 맞붙게 되었다.
처음에는 연못의 저택에서였다. 이후엔 호수였고, 교향곡이 주제를 확장하여 반복하듯 이젠 바다에 이르렀다.
반복되는 역사에서 두 번째는 희극인 법이라면, 세 번째는 뭐라 해야 할까. 망령? 잔영?
터엉!
헤스터는 지나간 처음의 말쑥하고 의기양양했던 모습과 달리, 누수로 인해 흠뻑 젖고 이마 한쪽에선 피를 흘리는 모습으로 해치에서 튀어나왔다.
클레이오는 잠수정에 걸었던 [체공] 마법의 강도를 낮췄다. 잠수정들이 일제히 수면에 부딪히며 물보라를 일으켰다. 물보라가 잦아든 뒤엔 수면 위로 아슬아슬하게 함교만을 내민 채 마구 요동쳤다. 잠수정은 부력을 잃은 뒤라 오로지 마법만으로 위치가 유지되는 거였다.
혹여라도 누군가 빠져나오거나 싸움을 방해할까 싶어 그 위로 재빨리 [차폐]를 덧씌웠다. 이 바다에 저들의 피를 흩어 퍼트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공중에 떠 있는 클레이오를 노려보는 헤스터의 눈은 흰자위조차 붉게 물들고 안광은 더더욱 형형해졌다.
민간 상선들을 침몰시켜 전화를 전 대륙으로 확장시키려던 야망이 숙적에 의해 목전에서 꺾였으니 원한으로 불타지 않을 수 없었다.
클레이오와 가까운 쪽 잠수정으로 훌쩍 건너뛴 헤스터는 왼손의 의수를 들어 올렸다. 옷소매가 밀려 올라가며 금속의 예리한 표면이 드러났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한 줌 가득 마석 루비가 쥐여 있었다. 마석을 돌처럼 소모하는 과단성만은 헤스터도 클레이오 못지않았다.
파아아아아앗―!
우우우웅― 우웅―
클레이오의 서클이 펼쳐진 채 짓누르는 압력을 견디며 헤스터 또한 순식간에 붉은 서클을 펼쳐냈다.
이미 둘 모두 7레벨 마법사의 서클 범위는 한참 넘어선 영역을 점유했다. 헤스터는 무시무시한 양의 마석을 소모해가며 기세를 넓혔다.
두 마법사의 서클은 어긋나게 겹쳐져 격렬하게 공명했다.
장맛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수면에서 거친 포말이 튀더니 이내 항구 전체가 뒤흔들렸다. 두 서클이 부닥치며 일으킨 진동이 거세지며 파도를 해일처럼 뒤집었다.
클레이오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는 에테르가 부족하거나, 반응이 느려서 헤스터의 채비를 기다려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전투는 이기기 위한 전투일 뿐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전투이기도 했다. 이토록 경악스런 힘을 쓰는 적이라 할지라도 얼마든 이겨낼 수 있다는 주의주장의 표명이었다.
알비온의 마법사는 헤스터의 최후까지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기로 마음먹는다. 그것이 천사의 행동은 아닐지라도.
그는 헤스터의 과거와 현재를 알고, 그녀의 행동이 가진 연원과 사연을 일부분 안다.
헤스터가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삼은 서사에서는 이쪽이 염치없는 악역일 테고, 앞으로 클레이오 자신은 수많은 이들에게 그렇게 취급받게 될 것이다.
국경의 이쪽과 저쪽에서 모두.
그럼에도 클레이오는 제 잔을 받기로 한다.
자신에게는 심판의 자격이 없다. 그러나 그는 흑적의 마법사가 심판당하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는 있었다.
감히 그 어떤 인간도 다시는 신의 원칙을 거스르지 못하도록. 세계의 순리를 어기지 못하도록.
클레이오는 마석 지갑의 바닥에서 ‘향랑의 첨정석’을 끄집어냈다.
고오오오오오—
이중 발진을 위해 응집된 에테르의 압력이 주변의 공기를 일렁이게 만들었다.
공작의 날개가 파르르 흔들리고, 코트 자락과 머리카락도 모두 나부껴 거꾸로 뒤집혔다.
파아아아아―
마침내.
주조된 금속을 물에 식혀 끄집어내듯, 뜨겁도록 밝은 마법식이 수면으로부터 떠올랐다.
[현현]과 [속성증폭], [추적]을 함께 걸고 [지정자 제외] 마법식을 거꾸로 뒤집어 그린 뒤, [분해][해체]를 덧입힌 복잡한 마법식이었다.6개의 복합 마법식인 것으로도 모자라 그중 한 식은 거꾸로 써 발동시키기까지 했다.
그건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도록 개량한 마법식 조합으로서 책으로 써서 남겨두어도 따라할 마법사가 없을, 기예에 가까운 마법이었다.
클레이오는 그리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찬찬히 진언을 읊었다.
멀리서 대결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이 행동은, 알비온의 마법사가 급습을 획책하던 브룬넨군의 지휘관을 수월하고 손쉽게 제압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신의 피로 그대를 세정할 지어다,
그 붉은 피, 붉은 영혼을 순백색으로 화하게 할지니!]1)”
클레이오와 헤스터를 둘러싸고 솟아오른 에테르의 광풍이 지나치게 눈부셔, 에테르 감응자라고 할지라도 마법식의 형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단 한 사람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라기엔 과도하고도 혹독한 대마법이었다.
첨정석으로부터 증폭된 자홍빛이 도는 불꽃의 가시가 헤스터의 몸을 칭칭 동여맸다.
불의 가시나무는 스스로 생명을 가진 듯 자라났다. 헤스터의 피부가 찢기고 머리끝이 타며 의수가 휘어졌다.
그녀로부터 치솟은 붉은 에테르는 가시나무의 불꽃과 격렬하게 대치했다.
불의 폭풍우가 부는 것만 같았다.
스으으읏― 아드득― 카가각!
가시나무 가지 끄트머리를 가까스로 꺾어낸 헤스터가, 남은 한 손을 간신히 뻗자 검붉은 에테르가 폭발적으로 펼쳐져 클레이오를 덮쳤다.
헤스터 앞에 선 클레이오는 그리 어려운 기색도 없이 황금 공작을 가벼이 흔들어 헤스터의 공격을 비껴냈다.
창에는 창으로, 화살에는 화살로, 질식에는 질식으로.
결국에 불과 물, 창과 화살, 숨을 멎게 하려는 살의 전부가 불꽃의 가시에 묶여 저지되었다.
니네베 호수에서와 달리 클레이오의 공격에는 망설임도 연민도 없었다. 압도적인 힘이 과시하듯 상대를 찢어발겼다.
이 시점에서 클레이오의 마법을 감히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이는 없었으므로, 그가 하는 일이 니네베 연대의 병사들에겐 그리 놀랍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놀란 것은 클레이오가 쓰는 마법의 전시적인 형식과 잔인함이었다. 은총의 마법사가 은총이 배제된 마법을 쓰고 있었다.
클레이오의 머리 위에서, 또한 해안에서, 적군과 아군이, 무수한 목격자들이 내뱉는 단편적인 말과 감탄사, 공포와 경악의 손짓 따위가 극도로 확장된 「지각」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몇몇 민간인들은 뱃전에 주저앉아 차마 아래를 더 내려다보지도 못했다. 그들의 입 안에서 맴도는 단어는 하나였다. ‘괴물’
그것은 결코 헤스터 워드만을 지칭하는 단어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반응은 클레이오의 창백하고 굳은 얼굴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세기처럼 느껴지는 몇 분이 흘렀다.
천 개의 불화살을 받고도 바다는 운무만을 남기고서 다시 고요해졌다. 그들 사이의 모든 공격이 다 지나가고 수면에서는 파도만이 쳤다.
헤스터의 마지막 저항마저 저지되고 나자 가시나무는 한층 더 강하게 그녀를 죄어 맸다.
불의 가시나무가 옭아맨 흑적의 마법사의 몸은 이제 그저 커다란 불덩어리처럼 보였다.
피와 뼈가 모두 살라 먹히는 가운데 드러난 것은 눈 한쪽과 입가 정도였다.
피가래가 끓는 목소리로 헤스터는 간신히 몇 마디를 더 내뱉었다.
“나를 괴물이라 여기나? 그런 너는 괴물이 아닌가? 나는 역사에 남겠지. 너와 마찬가지로. 피로 쓴 역사에!”
“아니. 네가 이룩했다 여기는 업적은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을 거야.”
“감히 그리 말하나? 나는―크, 크엇―!”
마침내 붉은 가시나무는 헤스터의 온몸을 뒤덮어 그녀의 마지막 말조차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녀의 육신은 기능을 잃고, 가시나무 속에서 서서히 스러져 갔다.
클레이오는 오로지 마음으로만 그녀의 이름을 되뇐다.
헤스터 워드.
이 이름은 악인으로도 영웅으로도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본보기의 희생물로 남을 것이다.
그녀가 죽음보다 두려워했을 결말이다.
공중에 떠올랐던 불덩이는 적의 소멸에 따라 물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마법의 불은 헤스터의 육신을 철저하게 흩어놓았다. 재 한 줌조차 남지 않은 완전한 소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죽어 재조차 남기지 못한 헤스터에게 안쓰러움을 느낄 지경이었다.
오로지 눈앞에서 일어난 일 그 자체만을 판단했을 때에는, 전후의 맥락을 보지 않을 때에는 충분히 가능한 생각이었다.
목격자들은 천 년의 테르게스티가 불타는 것을 보지 못했으므로, 클레이오가 하는 일이 일방적이고 잔인한 압살로 여겼다.
지금부터 흑적의 마법사의 부고를 전할 이들은 그녀의 허망한 죽음과 함께 알비온의 대마법사가 불러일으킨 공포를 함께 전할 것이다.
저기서 겁에 질린 채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라에티카의 병사들은 모두 무사히 브룬넨으로 되돌려 보내질 것이고, 저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들이 본 것을 말하게 될 터였다.
클레이오의 눈앞에 익숙한 고지가 떠올랐다.
[—사용자의 서사 개입도가 상승합니다.누적 비율: 85%]
이제는 해가 하늘 가장자리 위로 떠올라 겨울에도 온난한 남쪽 항구의 공기를 데우고 있건만, 클레이오는 서늘한 추위만을 느낄 뿐이다.
서사개입도의 상승과 함께 또 한 차례 에테르가 범람했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헛헛한데도, 에테르는 끝도 없이 차올라 미약한 현기증이 일 정도였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충만해진 에테르가, 또한 이전까지는 상상조차 불가능했던 위력적인 마법을 자아내라 명한다.
여신의 손길이 그의 등 뒤를 스치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 붙들었던 민산의 차갑고 가냘픈 손끝은 힘이 하나도 없었는데, 이 격려인지 강요인지 모를 무언의 명령은 클레이오에게 엄격한 복종을 당연하게 요구한다.
클레이오는 명령을 우회할 방도를 모르기에, 제 소명대로 신의 뜻을 공표한다.
소멸하라.
너희는 본디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오식(誤植)이니.
클레이오는 마석 ‘완화의 진주’를 망설임도 없이 공중으로 내던졌다. 이어서 손을 안주머니에 넣어 마도구 비탄의 정화를 끄집어냈다.
[분해][해체]가 뒤얽힌 식이 수면 위로 떠올라 [차폐]된 채로 비틀어져 있던 모든 잠수정을 뒤덮었다.클레이오는 한 손에 비탄의 정화를, 다른 한 손에는 완드를 들고서 기존의 마법 위로 정화의 식을 한 번 더 겹쳤다.
그 모든 일은 동시에 일어났기에, 히드라의 독을 완전히 무력화시킬 마도구가 있다는 사실을 포로들이 파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새로이 쓰인 글줄 안에선, 이전과 달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흑적의 기사들이 여기에서 모두 사라질 것이다. 허망하게. 흔적도 없이.
마침내 전투를 종결할 진언이 낭송되었다.
“[이 손에서 비롯한 피 광막한 바다를 불그레 물들이고,
저 푸르른 물 선홍빛으로 변하리니]2)”
남빛 바다는 마법사의 진언을 따르듯 일순 붉어졌다. 핏물처럼 보였으나 독은 아니었다. 녹으로 화한 철의 색이었다.
1) 「Holy Sonnets」 IV, John Donne 편역.
2) 『Macbeth』, William Shakespe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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