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63
키시온 제5대 자작 (11)
클레이오는 청금색 잉크가 맺힌 펜을 든다.
하지만 로르샤흐 카드처럼 보이는 암흑, 그 뭉그러진 형상은 단순한 삭제 기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검은 얼룩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클레이오는 문득 새로운 발상을 해낸다.
는 전후와 인과가 존재하는 ‘이야기’이다. 나타난 것을 그냥, 허공에서, 갑작스레 없앨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을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로 축소시킬 가능성은 열려 있다.
지울 수 없다면 해석을 달아서, 이것을 정의하고 명명하여 그 능력을 한정할 수 있지 않을까?
폭력적으로 보일 만치 엉망으로 뻗은 잉크 자국은 아홉 개의 구비를 가졌다.
클레이오는 빈약한 상상력을 동원해 그것이 아홉 개의 심장을 표현한 도판이라 이해하려 한다.
그는 펜을 꽉 쥐고서 잉크 얼룩 주변에 사각의 칸을 치고, 판면의 여백에 줄을 맞추어 작은 글씨로 도판 번호를 달고, 캡션을 적는다.
이게 맞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펜이 움직였다.
[“히드라의 독이 최종적으로 다다른 형태, 마수처럼 보이는 암흑의 본신은 제 몸에 연결된 아홉 심장을 가졌으나, [정화]에 맞닥뜨린 심장은 어느 것 하나 오래 뛰지 못하고 멎는다.이러한 독의 활용은 최초이자 최후의 시도로서, 완벽한 실패로 맺음 지어진다.”]
성공이었다. 청금색 잉크가 검은 얼룩 주변을 정돈해 갔다.
중세 초기의 필사본 중에서도 솜씨 없는 예비 수도사가 처음으로 필사를 맡은 기도문 페이지처럼 볼썽사나운 모습이었지만, 잉크 얼룩은 본래 원고에 삽입되어 있던 삽화처럼 판면에 자리를 얻었다.
판면의 위계 아래 포함된 얼룩은 오류가 아니라 원고의 구성 요소가 된다.
암흑의 능력을 한정시키고, 그것의 종말을 결정한 클레이오는 지체하지 않고 정서(淨書)를 시작했다.
혼란하게 뒤엉킨 원고를 다시 쓴 경험은 과거에도 있다.
주교관에서의 첫 접견 때, 레지나가 제게 허락된 것 이상의 말하기를 감행했을 적에도 이야기는 이렇게 망그러졌었다.
원고는 다시 쓰일 수 있고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 있다. 그럴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잉크 얼룩은 프레임 안에 갇히자 더 이상 판면을 위협하는 초월적인 이상(異常)이 아니게 되었다. 이름 붙이기와 정의하기의 힘이었다.
클레이오는 원고의 문장을 새로이 엮어, 듀브리스를 뒤덮은 어둠을 차곡차곡 걷어낸다.
이전의 그 어떤 때보다도 적극적인 개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쓰는 문장의 투박함을 핑계로 대며 회피하거나, 권한 이상의 개입이 꺼려진다는 변명을 내세울 때가 아니었다.
그는 쉬지 않고 펜을 놀린다.
펜촉은 맨 먼저, 릴리안이 겪는 추락의 여파를 완화한다. 그녀는 미약한 경상만 입고서 깨어나 클레이오를 타박할 것이다. ‘소령님은 그렇게 둔해서는 어디 전장에 나서겠어요?’
카스퍼와 함께 자작저로 무사히 귀환한 기젤라는 절친한 친구의 전사 소식을 듣지 않아도 될 것이다.
수화기를 쥔 사이러스 머천트와 마지막으로 전화 교환국을 지키던 교환수는 멀리서 다가오는 암흑의 파도를 본다.
그러나 암흑은 민활하지 않다.
기능 부전을 겪는 비대한 심장은 진득하게 엉겨 붙은 피를 느리게 뿜고, 촉수들의 증식 역시 지체된다.
비록 어둠이 도시의 관문과 철길을 집어삼키더라도 사람들이 몸을 피할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었다.
듀브리스 사람들은 제 두 발로, 어린아이를 꼭 껴안고, 늙은 부모를 등에 업은 채 도시를 벗어난다.
클레이오는 시민들을, 요새에 잔류한 병사들을 살린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애를 돌이킨다.
여전히 도시의 불빛은 밝다.
이곳의 주민들은 살면서 오늘 겪었던 난리 얘기를 자식과 손자들에게도 몇 번이고 들려줄 것이다. 가족 식사의 지겨운 레퍼토리가 될 때까지.
마침내 클레이오의 펜은 앞장으로 넘어가, 뒷장에 비하자면 정연하게 쓰인 문단 앞에서 멈춘다.
키시온 자작의 사망.
이제껏 거침없던 펜이 머뭇거린다. 편집자는 손을 조금 떤다. 긴장된 숨을 쉰다. 그리고는 단번에 삭제 기호를 적어 넣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카각. 카가각.
무용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클레이오는 몇 번이고, ‘유언 없이 사망한 키시온 제4대 자작’이라는 표현을 긁어내려 든다.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면서도, 헛되게.
판면에서 미끄러진 청금석 빛 잉크가 툭툭 허공으로 샜다.
‘이럴 수는 없어….’
이래서는 아무런 방비 없이 키시온 영지가 습격당했던 8교보다도 더 지독한 결말이 된다.
당시 동북수비군은 괴멸적 피해를 입었고, 중상을 입어 의식이 없던 키시온 자작을 충직한 부하들이 탈출시켰다. 그의 부상은 죽을 때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클레이오는 이시엘이 그런 고통을 다시 겪지 않기를 바라서 이 영지 곳곳을 갖은 마석과 장치로 방비해둔 것이었다.
‘한 줄. 단 한 줄만 더 거슬러 가면 자작을 살릴 수 있는데!’
물론 이시엘은 이미 성흔을 얻었다. 에테르 레벨의 상승과 성흔의 획득은, 한 번도 돌이켜진 적 없는 분기점이었다.
하지만 자작의 죽음은 성흔의 획득보다 한 줄 뒤에 오는 사건이었다.
‘왜 수정이 안 되는 거지?’
이시엘은 클레이오가 부친을 치유해주리라고 굳건히 믿었다. 클레이오는 그 믿음에 보답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대마법사라는 말을 듣는 그조차도 죽은 자를 살려낼 마법은 몰랐다.
어째서일까. 이 순간 클레이오의 뇌리를 울리는 것은 멜키오르의 음성이다.
“이제는 확신한다. 죽어야 하는 이는 간절한 생의 간구 속에서도 죽고, 살아야 하는 자는 죽음 같은 고통 속에서도 결코 눈을 감을 수 없지.”
모든 말을 선언처럼 맺음하는 자의 어조는 기실 왕재가 아니라 예언자의 것이다.
눈이 먼 채 태어난 도성에서 쫓겨날 운명의, 불길한 예언자.
그들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예언만을 한다. 모든 비극에서 예언을 들은 자들은 최후에 가서야 그것의 진실성을 두렵게 깨닫는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행사를.
하여, 이 죽음이 진실로 신의 예정이라면?
클레이오의 갈라지고 거스러미가 인 입술 새에선 짐승 같은 신음이 끓었다.
“내게는 언제나 이 세상 전체가 시차적 관점에서 다시 읽어야만 하는 텍스트였지. 신의 대리인인 자는 신이 한 일을 알아야 해.”
다르게 다시 읽는다면. 그렇다면.
슐리만 키시온의 죽음은 신이 비준한 전개라면. 개인에게는 비극이나 세계에는 적절하다 여겨지는 사건이라면.
키시온 자작은 동북의 국경을 수호하는 애국자였다. 정치 감각이 없고 온건하게 보수적이라 아서의 통치기에는 미묘한 입장 차가 있었으나, 그렇다 해도 이시엘과 아서에게는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지난 원고에서 자작은 부상으로 병약해진 상태기는 하였으나 아서의 즉위 이후까지 살았다. 본래 작위는 전대의 사망 후에 계승되는 것으로, 이 법엔 예외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자작이 사망하면, 멜키오르의 긴급 재가하에 이시엘은 자작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생긴다. 세실 휴잇을 배반자로 처벌할 수 있다면.
원고가 돌이켜지며 여름 궁전 결계에 잔류했던 병사 중 세실의 배신을 목격했던 이들이 생존했다. 그들은 기꺼이 이시엘을 위해 증언할 터였다.
그리하여 이시엘은 새 시대의 상징으로서, 아서의 세력을 대표할 것이다.
하지만 이시엘은 당장 자작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부친을 잇는 정식 후계자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이런 계승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면, 신은….’
이곳에서 희생적으로 브룬넨군을 막아낸 동북수비군의 사령관은 영원의 영광을 얻을 것이다.
그 영광을 이시엘이 독점하고 아서에게 조력할 때, 그의 통치는 굳건한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
이 세계의 운명과 제 안위가 연동된 주인공이 잠들어 있는 새 이 모든 비극이 일어난 것은 우연일 수가 없다.
그 역시 이런 방식으로 주어진 권위를 바라지 않을 것이므로.
툭. 투욱.
청금색 잉크가 가늘게 흘러내려 클레이오의 손을 더럽혔다.
그는 그 고귀한 남자(藍紫)빛 광택을 어둡게 산화한 피의 빛으로 잘못 본다.
착란이었다. 아니, 진실로 착란인가?
그의 두 손은 깨끗하지가 않다.
어느새 번진 경련 때문에 도무지 기호 하나, 글자 한 자도 적어 넣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기록의 개찬을 거부하는 원고 때문인 동시에, 제가 쥔 펜의 무게를 새삼스레 자각한 교정자의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다.
클레이오는 개변의 펜을 놓쳐버린다.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성흔의 산물은, 원고 부근의 허공에 가만히 놓인다.
이것은 필시 역사에 개입하는 일의 참열한 대가였다.
자작을 돕겠답시고 거듭해둔 방비가 오히려 자작을 죽이는 사망의 덫이 되었다.
‘여름 궁전의 결계가 있어서 자작은 버텼던 거고, 그래서 여기서 죽은 거야.
그래. 물론, 등 뒤에 십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가 있는데 결계가 있든 없든 그는 물러날 수 없었겠지.
하지만 애초에 티플라움의 가치가 이토록 높아지지 않았다면 광산 개발이 가속화되지 않았다면, 그래서 듀브리스의 인구가 이전 원고의 수준이었다면….’
시간의 돌이킴이 거부된 순간, 역사에서 가정은 헛되다는 격언은 서사의 세계에서도 유효한 의미를 얻는다.
사건의 인과와 전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전의 역사를 아는 클레이오가 선의로 한 개입은 제 뜻을 벗어난 결과에 가 닿았다.
물론 멜키오르가 지원을 거부한 이상 자작은 두 손과 검 하나만 있었더라도 끝내 버텼을 것이다. 등 뒤에 십만 명이 아니라 열 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적의 진주를 늦추기 위해 목숨을 바쳤을 이이므로. 이전 생애에서 역시 민간인들이 모두 대피한 뒤에야 자작은 의식을 잃었고, 대피는 부하들이 책임졌다.
클레이오는 자신을 과잉해서 탓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것은 진실된 반성이 아니라, 죄책감을 씻으려 드는 자기보신 행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감정은 이성의 지배를 배격한다. 죄책감에 억압된 클레이오의 시야는 좁아지고 생각은 한 방향으로만 미끄러져 내린다. 더럽혀진 두 손과, 그의 죄라는 수렁을 향해.
아직 되살아나지 못한 릴리안의 시신과 불길에 휩싸인 목재 프레임 사이에 주저앉은 클레이오에겐, 그를 빛으로 이끌고 인도할 이가 없다.
아서는 여전히 잠들어 있고, 이 편집의 시간에 클레이오는 지독하게 혼자이다.
공황에 빠진 편집자를 일깨우듯 금빛 글자가 일렁였다.
[―저자가 편집자의 권고를 받아들입니다.]편집자 권한이 종료되었다.
세계는 흘러내리고 재구성된다. 사방이 암흑이었으므로 그 움직임은 선명하게 관찰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가, 갑작스럽게 복원된다.
복원은 세계뿐 아니라 클레이오의 에테르에게도 일어난다.
그의 직무와 의무를 상기시키듯이, 거의 비었던 그릇으로 또다시 에테르가 차오른다.
그는 [정화]를 이 땅에 펼쳐놓아, 저 암흑의 기세를 흩어놓아야 한다.
아무런 기쁨도 성취감도 없이 클레이오는 대양의 조류처럼 느껴지는 에테르가 제 육신을 통과하도록 둔다.
‘이래서는, 테르게스티를 불태웠던 포탄이 들었던 아공간 저장소와 내 에테르 그릇이 크게 다를 바 없군.’
클레이오는 얼어붙은 눈과 흙, 부서진 비행기의 골조 틈에 반쯤 파묻혀 있다.
잠시 기절했다가 끄으으응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릴리안이 이미 일어나 있던 클레이오를 살폈다.
릴리안은 마법사가 무사함을 알자 나쁜 상황을 가볍게 해보려는 듯 발랄한 어조로 농담을 더했다. 공중타격대원들은 하나같이 제 대장에게 나쁜 물이 들었다.
“아니, 선배는 이렇게 둔해서는 어디 전장에 나서겠어요?”
“…릴리안.”
“다친 데 없으시죠? 일어나 봐요. 와! 그 시커먼 촉수 뭐예요? 진짜 간발의 차로 쪼금 피했어요! 진짜 다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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