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95
실현된 예언과 관철된 복권(復權) (5)
아슬란과의 대결은 과거로부터 예정된 것이고, 끝끝내 이뤄져야만 할 과업의 일부이다.
그 앞에서 아서는 두려움보다 피로를 느꼈다.
클레이오를 만난 이후 이 무력감과는 결별한 줄로만 알았다.
그는 이미 수도 없이, 남들이 보건 그렇지 않건 꾸준하게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 왔다.
그런데도 아직 증명해야 할 것이 남았다는 사실이 그는 조금 고달팠다.
스스스슷―
아서는 안타리오 다리의 주탑 맨 위를 디딘 뒤, 몸을 틀어 상대의 얼굴 정면을 향해 한손 찌르기를 시도했다.
아슬란은 검을 아래에서 위로 돌려 베며 아서의 검로를 꺾었다.
예상대로, 이형이 두른 박편의 이창은 미미하게 거슬리기만 할 뿐 아서의 공격엔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
꿀을 녹인 듯한 황금빛과 시린 은빛 에테르가 순식간에 엮였다가 풀리는 합이, 허공 위에서 수십 번 오갔다.
검이 지나간 궤도를 따라 두 색의 에테르 꼬리가 길게 반원을 그리고, 마치 서로를 삼켜대기 위해 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뱀 두 마리가 대치하는 형상 같았다.
두 사람의 발은 거의 땅에 닿아 있지도 않았다.
그 모습은, 멀리서는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경지를 넘어선 두 기사의 전투는 예술의 형식을 닮는다.
물론 실상은 그런 낭만적인 엮임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서는 아슬란의 능력을 면밀히 판단하기 위해 차례로 정석적인 공격을 시도하며 기량을 측정하는 거였다.
출현한 이형은 여럿이고, 정확한 정보가 있어야 다른 놈들의 처치 시간도 단축할 수 있다.
아슬란은 트로모스처럼 검은 역청이 되지도, 히드라의 독을 마신 다른 기사들처럼 붉은 에테르를 쓰지도 않았다. 이전에는 검기에 주홍빛이 비쳤다 하나 그 역시 간데없었다.
지금은 그저 투명하도록 시린 은빛 검기만이 아슬란의 검에 감돌았다.
검고 붉은 분노가 증류되어 마침내 한 방울의 투명한 정수만이 남은 것 같았다.
아서는 별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뭐 와인도 증류하면 브랜디가 되니까.’
브랜디와 와인 중 뭐가 더 좋은지는 취향의 문제이지만 둘 다 술은 술이잖은가.
카가가각! 카아아악!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아서는 기계적으로 기본 공격 한 세트를 모두 마치고, 마지막으로 방패를 들어 올렸다.
쾅!
천둥이 치는 소리가 났다.
아슬란의 반격이 방패의 이음매를 징징 울리게 했다.
곧 마도구는 제가 받은 공격을 그대로 반사해 상대에게 돌려주었다.
처음 접하는 마도구의 반격에 밀려 아슬란은 지상으로 내려섰다.
아서는 기본 공격의 첫 번째 동작으로 돌아가 곧바로 이형의 미간 사이를 꿰뚫었다.
뼈를 베는 감각은 없었다.
이형은 사라질 때 그대로 형체를 잃고 흩어진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슬란의 이형은 곧바로 소멸하지 않았다.
은빛 광채가 서린 붉은 피가 강물의 흐름에 뒤섞였다.
순수한 힘이 폭발적으로 발산되었다.
화아아아아앗―
눈앞에서 혜성이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아서는 주변으로 [강화]를 전도해, 아슬란의 이형이 스러지며 일으킨 폭발의 확산을 막았다.
강변도로와 다리 위에는 자동차와 자전거가 마구 버려져 있기는 해도 다행히 사람들은 없어서, 인명 피해는 경미할 듯싶었다.
그 모습은 얼핏, ‘재와 강의 도시’에서 조그마한 붉은 차를 타고 달리며 보았던 모습을 생각나게 하기도 했다.
강의 폭도 자동차의 모양새도 달랐지만 말이다.
솨아아아아아―
아서가 생각에 빠진 동안에도 그의 에테르는 널리널리 펼쳐졌다.
금은의 에테르가 맞부딪치며 태양이 두 개 떠오른 것 같은 빛을 흩뿌렸다.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전투를 관전하던 이들은 모두 비자발적으로 눈을 감아야만 했다.
비록 에테르의 빛 자체가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지만, 쳐다보면 시력에는 꽤 위협적인 빛이었다.
오로지 아서만이 두 눈을 똑똑히 뜬 채, 방패 너머에서 에테르의 폭발을 관측했다.
아슬란의 이형은 왜 이런 식으로 소멸하는 것인가?
이 발산의 목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서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갖은 경우의 수를 소거해갔다.
마침내 그는 정답에 가까운 결론을 도출해낸다.
‘이 이형은 공격의 목적으로만 만들어진 게 아닐지도 몰라.’
에테르와 섞여 흩뿌려진 피에서는 희미하게 인외 존재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건 무구의 이음매를 삭히고, 검날에 배이던 익숙한 악취 ― 썩어가는 풀냄새였다. 마수의 피와 히드라의 독에서는 비슷한 냄새가 풍겼다.
게다가 기능할 때에는 스스로 공격을 하고, 소멸할 때에는 그 자체로 진격의 원을 상회하는 파괴력을 낸다.
즉, 아슬란의 이형은 소멸 형태가 폭주한 히드라의 독 복용자의 그것을 그대로 따른단 소리였다.
그렇다면 결론은 끔찍하다.
이형을 전부 처치한다 해도 아슬란이 출현한 룬데인의 요지는 모두 거듭 정화를 받아야 할 땅이 될 것이다.
.
.
.
아슬란과의 전투는, 비록 그것이 이형이라 해도 결코 쉽지 않았다.
처음에 첼은 인구 밀집 지역에서 아슬란을 끌어내는 데만 집중했다.
몸이 짜부라질 정도의 중력을 일으켜 아슬란을 콱 눌렀다가, 정신을 차리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들어 올려 들판에 추락시켰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슬란은 스킬의 작용 범위를 파악해 유연하게 첼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발아래에다가 진격의 원을 쏴, 그 반동으로 흐름을 만들어 내 바람에 탄 듯 상처 없이 바닥으로 내려섰다.
소드마스터의 발밑에서는 돋아난 지 얼마 안 된 푸릇푸릇한 밀 이파리가 하나도 눕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저 까마득한 하늘 위에 뜬 첼을 응시했다.
그가 첼을 보았고, 첼도 그를 보았다.
전쟁 이후 처음으로 심은 밀싹 위에 정교한 아름다움을 지닌 자가 서 있다.
늘 속도와 비행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던 비행사는 몹시 분한 마음으로 인정한다.
어떤 종류의 강함은 극한에 이르면 일종의 아름다움을 획득하게 된다. 그것은 선악의 피안에 존재하는 판단이다.
‘더럽게 상대하게 힘든 새끼가 됐네, 저거.’
클레이오 아세르가 직접 제작한 최고급 티플라움 소총 연사도, 중력의 구로 가속도를 붙인 진격의 원도 아슬란을 단번에 쓰러뜨리진 못했다.
결국 마지막에는 레벨의 차이를 무릅쓴 첼레스테스가, 제 바스타드 소드를 양손으로 붙잡은 채 하늘에서 직접 지상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두 레벨이나 차이가 나는 검사끼리 검을 맞댄 결과, 공격은 오히려 공격자인 첼의 오른쪽 어깨를 빼놓고 갈비뼈도 세 대나 부숴버렸다.
하지만 성흔이 있었기에 고작 뼈나 좀 부러지고 소드마스터의 이형을 상대로 승리를 끌어낸 거였다.
제아무리 대단한 힘을 지닌 기사라도 아래에서 위로 공격을 가할 때는 중력과 스킬, 둘 다의 조력을 얻은 자에게 이겨낼 수가 없었다.
아서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검을 맞대며 중력을 이용하는 법을 익혔기에 쓸 수 있었던 수였다.
‘저 망할 망토가 제대로 작동 안 하는 것도 도움이 됐고 말야.’
클레이오가 억울한 듯 분한 듯 입에 달고 다니던 ‘박편의 이창’이 제대로 작동하는 본신이었다면, 이렇게 단시간에 승부를 보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변은 아슬란의 이형을 소멸시킨 직후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덮친 에테르 폭풍 속에서 간발의 차로 [강화]를 끌어올린 첼은, 찌푸린 눈의 한쪽만 간신히 뜨고서 제 검을 지팡이처럼 지지한 채 견뎌냈다.
푸스스스스슷―
천 년처럼 느껴지는 몇 분이 지난 후.
아서가 깨달은 사실을, 첼레스테스 역시 깨달았다.
첼은 믿음직스러운 부하들과 환상의 팀플레이를 벌여 아슬란의 이형 하나를 상대로 승리를 얻어냈다.
하지만 그 결과, 셀바 주 일대의 들판은 핏방울과 에테르로 뒤덮여 그대로 죽음의 땅이 되었다.
하얗게 죽은 밀 이파리 위에 맺힌 은빛 에테르는 서리처럼 서늘하게 잠잠했다. 생명을 고사시키는 빛이었다.
첼레스테스는 탄식한다.
‘이곳이 전부 죽음의 땅이 되었구나. 이 풍요로운 땅이.’
그곳은 바로 3월 공세의 마지막 전투가 일어났던 장소였다.
그때 클레이오가, 제가 흘린 핏속에 누워 죽어갈 정도로 무리한 마법을 써 가며 지켜낸 땅이 또다시 더럽혀졌다.
은빛 땅 위에 내려선 첼레스테스는 제 두 손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몇 초 후 물기 하나 없이 건조한 얼굴을 든 첼은 비행기 기판에 달린 포옹의 반구를 일반 통신 모드로 변경했다.
딸깍.
‘파이’ 버전으로 음성을 전달하는 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같은 모델을 설치한 경우에만 가능하기에, 사령부로 전신을 보내려면 모드를 바꿔 부호를 쳐야 했다.
손톱이 잘 정리된 단정한 손끝이 빠르게 부호를 입력했다.
첼은 왼손이나 오른손이나 쓰임이 똑같이 자유로워, 다행히 신속하게 전신을 보낼 수 있었다.
〔아슬란의 이형은 소멸 시 히드라의 독과 에테르를 폭발시키는 성질을 가짐.
전투 시 유의 요망. 영향 범위는 1km 좌우.
셀바 주 경계 농경 지대 피해 막심. 파종한 밀 고사. 정화 마법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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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피는 바닥에 몸을 바싹 낮춰 아래에서, 레티샤는 역 정문의 구조물을 딛고 위에서 아슬란을 동시에 공격했다.
레티샤가 여신상의 머리를 퍽 걷어차며 도약한 바람에, 조각의 코가 툭 떨어져 버렸다.
그녀는 대충 편하게 생각했다.
‘코 부숴서 미안한데요, 이 상황이면 용서해 줘야지. 아무렴.’
두 사람은의 안젤리움은 한 몸에 팔 네 개와 다리 네 개가 달린 존재처럼 싸웠다.
절묘한 동시 공격에는 사각이 없었다.
서걱.
마침내, 지리한 분투 끝에 리피와 레티샤는 아슬란의 오른쪽 어깨와 왼쪽 발목에 검상을 입힐 수 있었다.
하지만 치명상은 아니다. 그 정도론 상대의 움직임을 둔화시키는 게 기껏이었다.
숨을 몰아쉬는 두 사람과 아슬란의 이형은 팽팽히 대치했다. 전투가 재개되기 전의 탐색이었다.
안젤리움 자매는 피를 너무 쏟아 시야가 흐릿할 만큼 분투했으나, 이건 지키는 쪽에게 너무나도 불리한 싸움이었다.
‘아니, 암거나 다 부숴도 되는 놈이랑, 가능하면 건물도 철도도 부수지 말란 소릴 들은 우리랑 싸우면 불공평하지.’
‘근데 그거 다 부숴도 되면 완전히 이겨 먹을 수 있음?’
먼저 생각을 쏘아 보낸 주제에 할 말이 없는지 레티샤가 눈가의 피를 어깨로 쓱 닦아내며 입을 빼족였다.
아무래도 이긴다는 장담은 못 하겠는 모양이다.
훈련시킨 니네베 연대의 병사들을 진작 민간인 대피에 투입해버려 차라리 다행이었다.
경보를 듣고도 대피하지 않고 화물을 지키려던 일부 상사 직원이나 관리자들을 방공호로 끌고 가는 데 물리력이 필요했던 상황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기껏해야 3~4레벨인 기사들이 이쪽을 돕겠다고 나서기라도 했다간 모두들 뼛조각만 남았을 것이다.
치열한 전투의 결과 룬데인 동역의 정문 부근과 멜키오르 대로의 초입은 폭격이라도 당한 듯 폐허가 되어 있었다.
‘몰라. 해봐야 알겠는데.’
‘야. 레티샤 안젤리움.’
그때였다.
쐐에에에에엑!
세 사람 사이에 당겨졌던 팽팽한 힘의 균형을 깨며, 금빛 에테르에 휘감긴 창이 공기를 갈랐다.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길이의 거창은 아슬란의 머리를 꿰뚫고, 이형을 흐트러트렸다.
그와 동시에 은빛 에테르와 붉은 핏방울의 소용돌이가 리피와 레티샤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강화]를 일으켰지만 힘이 조금 모자랐다.그런 두 사람을 한 품에 끌어안는 팔이 있었다.
“이렇게 어린 아이들이 소드마스터를 상대하여 승기를 잡다니. 미에츠에게 들었노니, 필시 너희가 안젤리움의 자녀들이겠구나. 괜찮은 것이냐? 어찌 단둘이서 저 무서운 이형을 이겨냈는고!”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한 외팔이 노인은 거대한 몸을 기울여, 리피와 레티샤를 은빛 에테르의 폭풍에서 가려주었다.
완전히 닳아빠진 튜닉과 족히 두 세대쯤 과거의 것 같은 낡은 갑옷이 그의 몸에 둘려 있었다.
피를 너무 흘려 정신이 가물가물한 채로도 두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누구지?’
‘아군이 맞겠지, 모.’
‘표식이 없…어, 어…. 레티샤, 정신 차려. 야!’
‘이쯤 하면 됐잖아….’
멀리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부하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죽은 놈은 없는지, 대충 숫자는 다 맞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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