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
원고 속으로 (2)
“어, 어?! 으아아아악!”
한강의 물살에 휘감겨 미친 듯 허우적거렸다. 전역 이후 물에 들어간 건 처음이었다. 너무 깊은 곳까지 가라앉아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몸이 떠오르지 않았다.
살아서 좋은 것은 없는 인생이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순 없었다. 삶이 고되어서 죽겠다 싶었던 거지, 죽고 싶단 건 아니었다!
그런 게 죽기 전에 본다는 환상일까?
어머니의 얼굴, 동생의 모습, 그리고 대학시절 짝사랑하던 동기 민산의 얼굴까지 스쳐지나갔다.
‘안 돼. 죽기 싫어. 어떻게든―.’
“[살려줘!]”
소리도 되지 않는 말을 뻐끔거리자, 김정진의 왼손에서 빛이 폭발했다. 금빛 반원이 그의 주변을 둘렀다. 빛나는 원 안쪽에서 검은 물이 밀려나갔다.
의식을 잃은 정진의 몸이 빛의 원에 끌려 수면 밖으로 상승했다.
빛을 발견하고 달려온 날씬한 신형이, 강가에 떠오른 정진의 몸을 낚아채 뭍으로 끌어올렸다.
정체불명의 금빛은 정진의 왼손에 끼인 졸업반지 안으로 빨려들듯 사그라졌다.
“정신 차려라, 클레이오 아세르!”
정진은 눈을 떴다.
붉은 머리, 진초록 눈. 엄청나게 인상적인 미모의 소녀가 그의 멱살을 흔들었다.
“흡, 컥”
한참 만에야 물을 토해냈다. 눈코입귀 전부 먹먹하고 아팠다.
“클레이오―!”
“…이, 것… 좀 놓고.”
물을 너무 먹었는지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왔다. 정진은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떴다.
그를 노려보는 사람은 날씬하고 키가 큰 외국인 소녀였다. 눈이 커다래 시원시원한 미모를 가진 소녀는, 정진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밤중에 이런 데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던 거지?!”
“클레이오고 뭐고 왜 갑자기 날….”
동작대교에서 물에 빠진 자신이 왜 낯선 외국인에게 멱살이 잡혀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너 1학년 클레이오 아세르잖냐! 잡아뗄 생각은 마. 네가 연 마법 서클이 번뜩이는 걸 분명 보았다!”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데 소녀는 정진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
다다다 쏟아내는 소녀의 말은 한국어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도 뜻은 이해가 되었다.
뜻이 이해가 간다고 해서 무슨 소린지 알겠단 건 아니었지만.
“무슨 소린지… 누군데 나한테 이래. 이거 놔.”
소녀에게 붙잡혀 마구 뒤흔들리니 골이 울렸다. 정진은 팔을 허우적댔지만 소용에 닿지 않았다.
물에 얼마나 오래 잠겨 있었으면 이렇게 날씬한 소녀하나 떨쳐낼 수 없는지.
정진은 그대로 맥없이 쓰러졌다. 시끄러운 추궁은 조금 더 이어지다 조용해졌다.
뭔가 따듯하고 좋은 향기가 나는 것에 감싸여 몸이 들린 것 같았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
눈을 떴을 땐 희부연 새벽녘이었다.
수십 시간을 잔 것 같기도 했고, 짧은 낮잠을 잔 뒤 일어난 것 같기도 했다.
반쯤 열린 창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지금은 7월, 끈적끈적하게 더워야 할 때에.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오래 앓은 것처럼 나른하고 무거운 몸을 침대에서 일으켰다. 축축 처지고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앉아서 잠시 숨을 고르다 건조한 눈가가 따가워 무심결에 손등으로 비벼 닦던 정진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양 손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학창시절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마디가 굵었던 손, 반품도서 재생시키느라 사포질에 거칠던 손끝. 그랬던 자신의 손이 가늘고 매끈해져 있었다.
갑판병 때 그라인더로 쭉 갈고선 열두 바늘이나 꿰맸던 거창한 상처도 없었다.
오른손 손등에는 상처 대신, 희끗한 선으로 이뤄진 직사각형이 떠올라 있었다. 너무 흐린 선이라 손을 코앞에 대야 식별이 됐다.
‘이게 뭐야. 내 손 아니잖아.’
정진은 급하게 방 안을 살폈다. 문 옆으로 세워진 장식거울이 보였다.
거울 표면엔 피죽도 못 얻어먹은 양 비쩍 마른 소년이 비쳤다. 눈이 길게 처져 힘이 없는 인상이었다.
그런다고 머리가 맑아질 것도 아닌데 고개를 흔들자 거울 속 소년의 푸석푸석한 갈색 머리도 같이 흔들렸다.
‘저게 나냐? 이게 무슨 개꿈이야.’
자신은 취해서 어디 꼬라박혀 있는 건가?
실족? 뇌경색? 가사상태?
어쩌면 이건 병상에 누워 보는 환상인지도 모른다.
‘꿈에서 몸만 다른 사람이 되면 뭐해. 내 반지가 있잖아.’
낯선 소년이 되었지만 정진의 손에는 여전히 대학 졸업반지가 끼여 있었다. 유일하게 애착을 지닌 물건이라 꿈속에까지 나타나는 건지도 몰랐다.
이 졸업반지를 제외하면 정진은 잃어서 아쉬울 물건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졸업 즈음 학과통폐합으로 과가 없어진다고 하자, 민산과 몇몇 학생들이 졸업반지를 기념으로 맞추자고 했다.
그녀의 권유에 이끌려 만들었던 반지. 짝사랑하던 민산과 같은 반지를 낀 게 좋아서 찌질하게도 지금껏 지니고 다닌 것.
‘스물둘도 아니고 서른둘까지 걔를 못 잊고. 뭐하는 짓이야. 거기에 꿈에서까지.’
자기혐오에 휩싸인 정진이 머리를 감싸 쥐었을 때였다.
뎅― 뎅― 뎅―
낯선 종소리가 들려 왔다. 청명하고 멀리 울리는 소리였다. 어느새 밝아진 창밖으로 울창한 숲과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진은 입을 딱 벌렸다.
여긴 서울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울이 아니면 어디란 말인가.
꿈은 기억과 경험의 재배열일 뿐이다. 의식이 깨어나면 흩어져야 옳았다.
정진은 의식은 전혀 몽롱하지 않았다.
감각 역시 전부가 생생했다. 두통, 오래 누워있었을 때의 아픔, 목마름까지.
더 이상 꿈이니 뭐니 회피할 수 없었다.
이런 영화 같은 꿈 따위 꿔본 적도 없었다. 항상 피곤해서 머릴 대면 바로 잠들었고 알람소리에 깨는 생활을 해 왔다.
가본 적도 없는 외국의 풍경은 정진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생각에 빠진 동안, 힘없이 늘어진 손가락이 이따금씩 떨렸다.
원랜 딱 맞던 백금 반지가 검지에서 빠질 듯 휘휘 돌았다. 정진은 빠지려는 졸업 반지를 무심결에 붙들었다.
“으윽.”
반지를 건드리는 순간 가느다란 금속으로부터 엄청난 열이 치솟았다. 빼내려 해도 녹아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빛나는 문자열들이 돌연 정진의 눈앞에 떠올랐다. 눈을 감아도 문장은 사라지지 않은 채, 망막에 들이박혔다.
[귀속 아이템: □□□의 약속―서사 개입도가 낮아 기능사용이 제한됩니다.
―약속의 고리는 차원과 차원을 잇습니다. 마지막 세계에 진입하여 ‘약속’의 기본 기능이 개방됩니다. 사용자에게 무한한 에테르 감응력을 부여합니다.
―‘약속’의 1단계 기능 「기억」이 개방됩니다. 생애 동안 읽었던 모든 텍스트가 「기억」 기능에 힘입어 온전히 기억됩니다.]
증강현실 비슷한 빛나는 글자는 기억에 있었다.
“전언인지 뭔지 그거!”
분명 봤다. 동작대교에서 저자의 눈치 없는 메일을 확인한 직후, 물이 일렁거릴 때 [―전언이 수신완료 되었습니다.]라고 떴었다.
“헛걸 본 줄 알았는데. 뭐냐고.”
정진은 미심쩍은 얼굴로 눈앞에 떠오른 글자를 훑었다.
‘뭔 세계에 진입하여 아이템의 기능이 개방… 거기에 생애 동안 읽었던 텍스트가 온전히 기억됨? 이제껏 읽은 책을 다 되살릴 수 있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 피시식 웃음이 나왔다.
‘이거 너무 고삼 때 하던 망상 같은데? 수학 못해갖고 정석 그냥 들입다 외우던 때.’
아무리 자신의 꿈이고, 망상이라지만 진짜 그런 게 구현이 되겠는가. 그제 저녁에 먹은 메뉴가 된장찌갠지 김치찌갠지도 헷갈리는 판에.
유령은 보는 자의 지능을 넘어서는 말은 못하는 법. 과로에 시달린 삼십대의 기억력은, 저런 설정을 감당하기엔 무리였다.
‘과한 설정이야.’
정진이 납득을 하든 말든 허공엔 다른 내용이 다시금 떠올랐다.
[―‘약속’의 「기억」 작동으로 를 재독할 수 있습니다.]‘아….’
이쯤오니 정진도 짚이는 바가 있었다.
‘그러니까, 여긴 소설 원고 안인 건가?’
출퇴근길에 읽던 웹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소재였다. 읽던 책, 좋아하던 책, 우연히 주운 책 속으로 가는 ‘주인공’들 얘기.
‘책 빙의는 너무 식상하지 않냐고. 게다가 그것들은 출간된 책이기나 했지. 이 소설은 저자가 고쳐 쓴다고 난리인 미완성 원고인데.’
더불어, 원고 속의 인물에게 자신의 영혼이 깃든 거라면 이 손에 대학 졸업반지가 남아있는 건 이상했다.
당황한 정진은 손에 딱 맞아진 반지의 가장자리를 습관처럼 문질렀다.
‘라… 그럼 이 몸이 누군지도 나오려나?’
정진이 가물가물한 원고의 내용을 떠올리려 집중하는 순간 괴상한 감각에 몸이 푹 수그러들었다.
‘이게 「기억」의 작동이야?!’
이마 안쪽이 뜨끈뜨끈해졌다. 머릿속에 종이 두루마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스크롤이 빠르게 감기자 이미 읽은 텍스트가 지금 다시 읽는 것처럼 생생해졌다.
정진은 다시 드러누웠다.
‘약속’을 쓰니 의 재독은 순식간에 끝났다.
‘원고엔 클레이오 아세르란 이름이 안 나와.’
강가의 붉은 머리 소녀는 분명 정진을 ‘클레이오 아세르’라고 불렀다.
‘그 여자앤 얘를 1학년생이라고도 했지. 그걸 아는 걸 보면 같은 학교 학생일 거고’
단 한 군데 짚이는 부분이 있긴 했다.
강에서 실족해 사망한 동급생에 대한 이시엘 키시온의 짧은 언급.
학교 안에서 정체불명의 마법식이 발견되는 사건이 있었다. 혹시 아서를 해치려는 세력의 농간일까 봐 야간순찰을 자주 돌던 이시엘이, 강에서 숨이 끊어진 애를 건져냈다고 아서에게 말을 전하는 부분이었다.
‘맞아! 그 여자애가 이시엘 키시온이었군. 그러고 보면 날 붙잡고 추궁하던 내용도 마법 어쩌고였어. 어쩐지… 예쁜 애가 힘은 또 엄청 세고. 그 새빨간 머리 하며.’
이시엘 키시온은 에서 주인공 아서 리오그난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아서의 첫 번째 기사, 같은 스승에게 검을 배운 검사, 그의 충성스러운 신하.
학창 시절엔 다들 수석입학생 이시엘이, 3왕자 아서의 검술 수련 동문이라는 죄로 문제 학생 수습 담당이 되었다고만 여겼다.
이시엘과 아서가 모두 학생인 시절이라면, 전쟁까지는 5년 이상의 시간이 남아 있다.
마법식 사건은 겨우 원고의 두 번째 페이지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였고, 클레이오 아세르는 거기서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조연이었다.
원고를 읽은들, 답이 없는 게 당연했다. 저자가 써놓질 않았으니까. 그는 아서가 주인공인 에서 하등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클레이오 아세르가 어떤 인생을 살고 왜 죽게 된 것인지 정진은 모른다.
‘근데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괜히 머리를 썼더니 다시 피곤해졌다.
‘다들 그러는 것처럼 기억을 잃었다고 우기면 되잖아. 강에도 빠졌겠다, 딱 좋네.’
알비온 왕국의 수도 룬데인에 위치한 왕립수도방위대 학교는, 나라 최고의 엘리트 학교라고 원고에서 묘사되었다.
능력이 좋든, 가문이 좋든, 재력이 되든, 뭐든 하나는 있는 애들만 다닌단 설정이었다.
‘그렇다면 이 클레이오란 애도 그 중 하나는 갖추고 있겠지.’
뭔들, 정진 자신의 본래 인생보다 못할까.
‘그래. 내가 꾸는 꿈이건, 작가의 창작물이건, 상상된 거라는 점에선 차이가 없지 뭐.’
성인이 된 후 사흘도 제대로 쉬어보지 못했다. 휴가나 연휴엔 외주를 받아서 푼돈이나마 더 벌려고 아등바등 살았다.
남들 다 가는 해외여행 한 번 못 가봤다. 아니 아예 여권도 없었다.
지금도 실상은 중환자실에 누워 호흡기 달고, 간호사가 갈아입힌 환자복의 감촉을 느끼고 있는 걸 수도 있지만.
‘알 게 뭐야. 누워 있자. 10년은 더 잘 수 있을 거 같다.’
정진은 다시금 푹신푹신한 이불로 파고들었다. 구름 속에 파묻힌 것처럼 편안한 이불이었다.
왼손에 끼인 ‘약속’만이 저 혼자 번뜩이며 빛을 발했다. 완전히 잠이 든 정진은 ‘약속’ 위로 떠오른 금빛 글자를 알아채지 못했다.
[―(최종고) 작성이 시작됩니다.] [―저자가 새로운 결말의 단초를 얻습니다.] [―기존의 인물을 다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