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03
제 사랑을 죽인 이가 또한 모두 죽는 것은 아니기에 (2)1)
아슬란은 성흔이 생성되는 충격에도 아랑곳 않고 멜키오르를 직시한다.
멜키오르는 홀을 들고서 선언한다.
“내게 가능한 신성함, 내가 복원할 수 있는 신의 힘은 고작 여기에 그치나 너는 적어도 나 이상의 것이 될 수 있겠지.
아주 먼 과거에 내가 마법사였듯, 최초로 태어난 아슬란 리오그난 역시 마법사였단다. 너는 마검으로 알비온의 왕위를 얻을 뻔했지.
미숙한 여신은 세계를 다시 쓰며 네게서 서클 열 능력을 박탈했다. 개연성을 부여하는 대가로 제 신성을 잃어가면서까지 그렇게 했지.
다시 쓰고 다시 쓰는 세계에서 최초의 설정 변경은 서사의 설득력을 약화시키고, 초기의 설계는 미래에 질긴 영향을 미친단다. 아주 먼 뒷장까지도.
지금, 아홉 번 다시 태어난 네가 검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 사랑을 살해해야 했던 건 이러한 다시 쓰임에서 비롯된 뒤틀림이다. 네게 주어졌어야 했을 서클의 영토가 박탈된 것 역시.”
핏물이 한 차례 떨어져 내린 뒤 모습을 드러낸 형태는, 성흔이라기 보다 그것을 긁어낸 흔적에 가깝다.
돋아나자마자 아문 성흔은 아슬란에게도 금빛 글자를 비춰주었다.
[고유 스킬: ‘만물 갱신’―만물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잊힌 지식은 회복되며, 속박된 자는 자유를 얻을 것이다.
사용자: 아슬란 카스틸리엔 리오그난
동시 적용 가능 인원: ∞ ]
아슬란은 그 찬연한 금빛 아래에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피가 그친 뒤에도 여전히 참혹한 성흔의 모양은, 멜키오르의 손에 꼭 맞춘 부드러운 장갑 아래에 있던 것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고통의 성흔.
저기 멜키오르의 정신체에게조차 남겨져 있는 깊은 흔적.
“우리는 이미 지옥의 업화 속에서 아주 오래 불탔지. 충분할 만치.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바로잡고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꾸나. 이 반복의 시간을 끝낼 수 있도록.”
어째서 내가 너의 ‘우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네가 내게 그 어떤 신의와 친애도 가지지 않는다 한들, 너와 나는 같은 서술 방식으로만 역사에 남겨진단다. 각자 개개의 다름은 신의 적자이냐 대적자이냐에 비하자면 사소한 차이가 되어버리지.
신은 우리에게 배신할 자유의지만을 주었고, 우리의 계명은 오로지 파괴에만 귀속되어 있다.
허나, 신의 대적자는 적자만큼이나 세계의 운명에 긴밀히 엮인 자들이다.
너무 잦은 반복으로 인하여 원고의 낱장들이 하나같이 겹쳐진 글자로 오염된 탓에 말이다.
신성의 파편은 거기에 고인 거란다. 신조차도 간과한 구석에.
너는 한순간도 신이었거나 신의 총애를 받은 적이 없지만, 너를 이루는 모든 요소에는 신의 지문과 숨결이 빈틈없이 닿아 있다.
그리하여 신들의 요람이자 신의 사랑을 얻은 인간을 위한 이 정원은 너 역시 받아들이고야 말았지.
신들의 체계가 망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 정원에서 난 월계수 가지를 꺾어 만든 뮈토스의 홀을, 정원은 선택받은 자의 증표로 취급했거든.
이곳에 이르렀기에 나는 신의 축복을, 너는 신의 은총을 모방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를 쓰는 신의 권능은 저 청금빛 물결을 원천으로 삼으니.”
금분 섞인 청금석 색깔 물을 손끝으로 찍어낸 멜키오르가, 이번에는 아슬란의 이마에 몇 방울의 잉크를 떨어뜨린다.
“물은, 어떤 세계에서는 혼탁한 세상을 쓸어냈던 진노의 상징이기도 하지. 자, 만물을 갱신하여라, 선택된 자의 축복이여.”
온도 없는 손에서 흐른 밤하늘 같은 물이 아슬란의 이마에서 흘러내린다.
그와 동시에 아슬란의 손등에서 성흔이 빛나며 그 자신을 감쌌다.
반사적으로 감겼던 검은 눈이 다시 뜨였을 때, 아슬란은 이제 멜키오르를 이전처럼 단순한 증오의 대상으로 볼 수가 없었다.
독으로 붉어졌던 아슬란의 에테르가 은빛으로 정제되고, 불완전하게 지워졌던 모든 기억이 되돌아온다.
신의 펜 끝을 흉내 낸 쓰기에 의해서.
그 오랜 세월, 영혼의 핵을 파헤친 기억이 아슬란의 반듯한 이마 안에서 폭풍을 일으킨다.
급작스레 열린 서클이 아슬란의 주변으로 펼쳐졌다.
멜키오르는 제가 신의 힘을 복원해냈음을 절감했다.
이 방법은 옳았다.
역사의 다음 장이 주인공에 의해서만 넘겨지는 것이라면, 세상의 중심인 인물을 현재 상태에 붙들면 되는 일이었다.
멜키오르는 전선을 지지부진하게 유지하며 세상의 주의와 힘이 모두 국경에 모이도록 했다.
연후에는 아서를 국왕 대리의 직권 대행이란 애매한 위치에 밀어 넣은 뒤 버티고, 답답하게 미적거리고, 마뜩잖은 듯 드물게만 응답을 내보내며 미래의 도래를 유예시켰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고, 인내에는 결실이 있었다.
멜키오르가 믿던 조건은 한 가지였다.
자신은 아직 영웅의 생애에서 퇴장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므로 서사가 다음 분기에 다다르기 전까지, 자신은 결코 죽지 않으리라.
그는 물경 일만 번의 「존재정의」를 단행했다.
신이 써 내린 세계에는, 신의 흔적이 남는다.
멜키오르는 이제껏 저주라 여겼던 능력으로 다시 쓰임의 흔적을 읽고 또 읽었다.
신성력의 흔적을 간직한 신녀와 극한의 은총을 입은 마법사에게만 닿지 않을 뿐, 멜키오르의 힘은 누구에게든 가 닿았다.
자신이 죽든 세상이 이음매를 드러내든 둘 중 하나는 이뤄져야 했다.
그 대결에서는 멜키오르가 이겼다.
지독한 부하를 견디지 못한 세계는 가늘고 긴 틈을 벌렸다.
여기 신의 정원에 든 멜키오르는 제일 처음, 여신의 보석함에 보관되던 팔림프세스트에 「존재정의」를 강제했다.
낡고 닳아 부스러져가는 원고, 세상을 기록한 그 편파적인 일지는 완고하게 저의 본문을 내보이지 않으려 했지만 멜키오르는 성흔을 써 원고를 펼쳤다.
때로 문자열은 미끄러지고 녹아들며 읽히기를 거부했고, 그때마다 「존재정의」의 힘이 납 활자 틀처럼 흩어지는 낱자를 고정했다.
읽히고 또 읽힌 뒤에, 원고는 부분적으로 제 비밀을 드러냈다.
완전한 읽기는 아니었으나, 불완전하다 해서 무용하지는 않았다.
이 세상은 한 권의 책이고, 세계는 불탄 후에 복원되었다.
팔림프세스트에 쓰인 것이 세상이지만, 쓰인 것만이 다가 아니다.
낡아 썩어가는 원고 주변으로는 지워지거나 아직 쓰이지 않은 금빛 글자들이 영감(靈感)처럼 떠돌았다.
저 희미한 빛이 기록 시스템인가?
잠든 여신의 사념인가?
이제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버린 자매들의 염원일까?
멜키오르는 타인의 정신을 읽듯이, 그 모든 문자열을 읽고, 출처와 연원을 따라갔다.
첸트룸 대륙의 석판과 먼지가 되어가는 문서가 지시하는 것이야말로 멜키오르의 확신을 보증하는 전거이고 주석이다.
이제 그는 여신의 자매가 보내온 신의 사자, 세상이라는 원고를 편집하는 신의 대행자가 어떻게 실존하게 되었는지를 안다.
읽어서 아는 것이다.
그런 멜키오르의 앞에서 아슬란은 압도되지도 경도되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의 새 성흔을 쓸어보고는 입술을 뗀다.
목 안이 말라붙어 말끝은 건조하게 갈라졌다. 무덤에 파묻혔다가 다시 파내어진 뒤, 말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만 같았다.
“트로모스를 충동질한 것도 너였군.”
세상의 한구석을 뒤덮은 암흑으로 화했다가 심장이 터져 죽은 사내의 행동에는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구간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의 돌발 행동은 브룬넨 측에서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신의 힘이라면, 이 세상을 모형 정원처럼 뒤엎고 고르는 신의 힘이 개입한 것이라면.
혹은, 신을 흉내내는 자의 힘이.
멜키오르는 자신의 동맹자이자 혈연인 자에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세상은 한 권의 책이고, 트로모스 노트피어는 그저 잉크가 번지기 쉬운 낱장에 이름이 쓰였다는 우연 때문에 그리된 것뿐이지.
나는 그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고자 했을 뿐이란다.
인간의 악의가 어느 한구석으로 고여 들자 신은 그것을 한 번에 소거시키고자 했지. 그건 너무나도 순진한 행동이 아닌가?
나는 완고하게 읽히기를 거부하는 원고를 비틀어 열고, 펼쳐지려는 장을 거두어 붙이고, 신의 무정하고 가지런한 글줄에 먹을 부었다.
그자의 이름을 쓴 획이 먹에 파묻히는 동안 나는 낱장들이 흩날리지 않도록 펼치고만 있었을 따름이란다. 인간사의 비극이란 신에게는 그저 몇 구절의 문장에 불과하니.”
물론, 신의 편집자는 잉크가 마르도록 페이지를 누르고 있던 멜키오르의 손에서 끝내 낱장들을 소환해 가, 번진 잉크를 판면의 위계 속에 밀어 넣었다.
멜키오르는 정원으로 되돌아온 페이지들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던 것을 아슬란에게 말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을 묵시록의 판면으로 삼을 수 있는 거란다.
새로이 세상을 창조해낼 수는 없지만, 창조된 세상을 흑암의 먹으로 뒤덮을 수는 있을 터이니.
처음 한 번으로 되지 않는다면 두 번, 두 번이 아니 된다면 세 번 하면 되겠지.
다시 강에서 시작해 보자꾸나.
시간이 미래를 향해 흐르지 않기에, 저기 템푸스강 아래에는 다시 태어나기를 너무나 오래 기다린 영혼들이 있다.
그 기약 없는 기다림 속 그들은 얼마나 절실히 산 자들을 그리워했는가?
그들을 다시 빛 속으로 불러들여 제 갈 길을 가도록 하라.
그들이야말로 배신치 않는 너의 군사가 되어 작위적인 반복을 정지시키는 승리를 이뤄낼 것이다.
신은 인간이 할 일을, 인간의 바람과 욕망의 끈질김을 아직도 다 모르니, 그래서 신인 것이 아니겠나.”
마침내 제가 뜻하는 바를 모두 이룬 멜키오르가 스르르 손의 힘을 풀었다.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던 뮈토스의 홀은 어느 틈엔가 비췻빛 그림으로 되돌아가, 멜키오르의 흉진 손등과 팔목 위에 자리 잡았다.
솨아아
솨아아아아아아―
방향 없이 불어온 바람이 정원의 풀잎과 이파리를 뒤흔든다.
텅 빈 채 열린 궤는 울림통이 되고, 물결은 위태롭게 한쪽 기슭으로 몰려든다.
생기가 다 사라져 스러질 듯 바람에 휩쓸려가면서도 멜키오르는 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웃고 있었다.
순전하고도 순수하게, 기쁨에 넘쳐서.
바람은 폭풍이 되었고, 정원은 전체가 빛이 나는 이파리들로 화했다.
온갖 보석으로 빚어낸 듯 영롱하던 잎새들은 가장자리부터 한 잎씩 떨어져 나가더니, 종내 새하얗게 흩어졌다.
아슬란 리오그난, 이제는 카스틸리엔의 적자로 불리는 자는 백일몽에서 깨어났을 때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마침내 두터운 눈가림을 풀고 세계의 비의를 깨달았다.
그의 일생을 휘둘러왔던 오래된 충동과 예지는 더 이상 그에게 고통을 주지 않았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우는 것은 오래된 지식이다.
세계 전체를 읽어낸 멜키오르가 건넨 기억은 곧 이 세상에 마법을 가져온 이 ― 이솔트의 기억이었다.
처녀 여왕의 성 아래, 네니브 호수의 바닥에서 빛나던 금빛. 신이 계시한 시동의 식들.
모든 리오그난은 이솔트와 레오니드의 자손이다. 에테르 감응력이 핏줄을 타고 내려오듯, 마법의 재능 역시 피로 이어지는 것이다.
천 년도 흐리게 하지 못한 대마법사의 피를 이은 첫 번째 생애의 아슬란은 메이지 마스터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여기, 아홉 번째의 아슬란 리오그난 카스틸리엔은 검과 마법 양쪽에서 인간의 극의에 다다랐다.
스읏―
스스스슷―
패배하거나 실패하여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고, 죽을 때에도 기리는 이가 없었던 아홉 번의 생애는 지나갔다. 모든 것은 과거가 되었다.
더는 어둡지 않은 예배당 가운데 선 아슬란은, 여전히 뜨인 채인 쥴레이카 카스틸리엔의 눈을 감긴다.
얄팍한 눈꺼풀과 기다란 속눈썹이 손바닥 안쪽에서 눕는다.
이 아름다운 아몬드 모양 눈엔, 다시는 빛이 깃들 수 없으리라.
모든 것을 알고 난 뒤에도 그녀의 마지막 말만은 아슬란의 내면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나의 아드님이시여, 더 이상 망설이지 마소서.
내 태로 낳은 이 고귀한 존재가 대륙이 처음 맞이한 왕이자 황제가 된다면, 이 어미는 기쁠 것입니다.
그 기쁨은 구차한 삶과 비견할 수 없는 것이며, 최상의 행복보다도 지고한 것입니다. 아드님에게는 항상 진실된 신의 축복과 은총과 선택이 함께할 것임을 저는 압니다.
당신의 영광이 나의 삶입니다. 아, 나는 그 영예로운 광경이 보입니다. 아드님께서 왕관을 쓰고, 온 세상이 당신을 위하여 고개 숙이는 대관식의 광경이….〗’
불과 몇 분 전, 베일을 걷은 쥴레이카는 아슬란의 검을 뽑아 아들의 손에 쥐어 주고는, 날카로운 날에 가냘픈 목덜미를 가져다 댔었다.
마법으로 제련된 날카로운 검은 여인의 목을 쉽게도 갈랐다.
어머니는 그의 팔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1) 「The Ballad of Reading Gaol」, Oscar Wilde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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