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08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2)
[도약]에서 [가속]을 빼고 속도를 줄여, 33번 기점 부근의 바닥으로 내려서면서도 클레이오의 머릿속은 의문으로 가득했다.그가 아는 한 성 스텔라 기사단의 자원봉사자들은 모두, 연구원이나 마법사가 아닌 다른 생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눈으로 보아서 전지의 방전 상황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기능을 멈춘 정확한 지점을 찾아 올바른 방법으로 수복 중인 것일까?
그 답 역시 금세 나왔다.
선의를 가진 헛일이 될지도 모를 헌신을 유용하게 만들어주는 고리가, 그들 가운데 있었다.
토대만 남기고 부러져나간 플라타 은행의 석조 기둥 위에 올라서서, 확성 마도구를 들고 소리치는 사람이.
자원봉사자들을 능숙하게 지휘해 배치하는 인물은 바로 프란이었다.
효율적인 인력 분배, 완벽하고도 신속한 에테르 부족량 계산은 방벽의 원설계자이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프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혼잡스런 상황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지금 도착한 교대자는 그림자가 닿지 않게 최대한 앞쪽으로 붙어 서십시오. 현기증이 나는 분은 손을 떼셔야 합니다. 33f번은 완료됐습니다. 충전 자원자는 좌측으로 이동해 주십시오.”
클레이오가 「지각」을 돋워보자, 작업용 장갑에 가려진 프란의 손등 위에서 붉은 성흔이 빛나고 있는 게 감지됐다.
프란의 권능은 청자의 내면에 자취조차 없는 미덕과 악덕을, 0으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오로지 사람들이 어떤 가치에 납득되어 따르려 할 때에만 설득력을 얻는 힘이었다.
클레이오는 탄식한다.
자신이 무엇이라고, ‘인간의 방법’이라는 말을 냉소적으로 언급했단 말인가?
여기에는 진실로 단 한 번의 기회를 가지고, 단 한 번만 사는 삶을 지탱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철회를 모르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고귀함을 자신은 존경할 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 반 이상은 에테르 미감응자야.’
그들은 근처에 있는 티플라움 기계며 도구를 들고나와 제각기 그림자를 향해 휘둘렀다.
에테르 전지를 충전하는 동안 무방비가 되는 감응자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이웃이고 동료이고 친구이고 형제자매였다.
‘야야야, 티플라움, 그거 빛 내봐! 그림자 밀어내져.’
‘으악, 히익!’
‘아, 야단 부리지 말고! 팍 휘둘러 보라구!’
‘아이구! 언니, 거, 거거, 손 딱 대야 충전이 되지. 저그, 모자 안 쓴 게 걱정할 일이야?’
강에서 온 그림자들의 살상력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지만, 에테르 미감응자들이 어둠과 접촉하게 되면 부상을 막을 수가 없었다.
고여 있는 어둠은 재빨리 피해 내고, 빛을 내도록 가공된 티플라움이라면 뭐든지 휘둘러야 어둠의 전진을 간신히 막아낼 수 있는 정도였다.
이미 드러난 피부가 붉게 짓무르고 소매 깃이며 치마 끝, 바짓단이 잿빛으로 삭고 옷깃은 피투성이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대로 더 방치하면 사지가 말단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다. 위험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방벽을 충전 중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물러서지 않고 버티는 거였다.
모두가 1레벨인 봉사자들은 한 번에 충전할 수 있는 에테르 양이 미약했고 집중력도 낮았다. 평화 시에 하는 봉사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물러서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에 방벽은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봉사 끝에 수복되어, 티 없는 빛을 냈다.
“단순 방전된 33번 기점은 충전 완료됐습니다. 가까운 대피소는 오른편 짐멜 거리의 지하 얼음창고입니다. 충전을 마치신 분은 티플라움 물품을 든 분과 동행하여 신속하게 대피하십시오.”
처음에 완전 기능 정지된 것으로 파악되던 33번 기점의 에테르 전지는, 지금은 방전된 것이 하나도 없이 모두 에테르가 가득 차 있었다.
‘그 머시기 교수 책 보고 한 게 진짜 이게 된 거여?’
‘된 거요. 제대로 됐소.’
‘거참, 마법은, 그 뭐 대단한 사람만 쓰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럼 댁도 그 신문서 연재하던 그거 읽고 에테르 쓰는 거요?’
‘그렇소이다.’
‘오래 살고 볼 일이여.’
얼핏 보기에는 질서 없고 소란스러운 듯싶었지만, 결국에 어떻게든 손에 손을 더하며 전지의 에테르를 채워낸 사람들의 대화가 클레이오의 귓가에 걸렸다.
이 순간 그는, 도무지 경우에 맞지 않는 고양감을 느낀다.
마리아 교수님의 강의록을 편집하는 일은 사실 정말로 즐거웠다.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쌓아온 자신의 지식을, 가장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성실히 재구성한 결과물을 널리 알리는 일에 동참하는 건 클레이오에게도 큰 영광이었다.
그것만은 신의 뜻도 어떤 강제에 의해서 일어난 일도 아니었다. 도래할 미래에 대해서는 모르고 한 일이었다.
어떤 책들은 세계를 개변한다.
기술과 사상의 혁명을 촉발시키고, 전쟁을 일으키거나 멈추게 한다. 민족을 발명하는 동시에 한 종족을 멸절시킨다.
오로지 소수에게만 독점되었던 마법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간 일 역시, 세상을 추동하는 텍스트가 일으킨 사건이다.
이것이, 클레이오가 이 세상에 와서 한 출판의 결말이었다.
칼리오페의 세계에서 맞이한 1897년은 여전히 쓰기의 은세기였다. 세상의 모든 사상을 다스리는 지식의 왕관은 여전히 문자에게 씌워져 있기에.
그는 이곳에서 신의 힘을 빌려서 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일로도 역사를 바꿀 수 있었다.
한때 다른 이름을 가졌던 그가, 고독과 허망함만이 삶의 본령이라 여겼던 사내가 살고자 했던 시대는 바로 이 시대가 아니었을까?
상실의 두려움에 질려, 이격의 뒤편에 숨어서 초연한 척 굴려 들던 가장은 정에 쪼이듯 갈라진다.
이 세상에서 보기에 좋은 것은 소중한 친구들과 찬연한 여름과 더러움을 모르는 대기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클레이오는 전쟁과 침공을 지나오며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경화된 감정을 해소 없이 삼킨 채 그저 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끝이 나기만을 바랐다.
도통 진실되게 살아본 적이 없던 그는, 끝의 끝에 이르러서야, 속절없이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은 이 세계의 사람이 되었고, 이곳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종언]의 마법식이 지상을 뒤덮고 있는 순간에 깨닫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한 진실이다.그러나 너무 깊이 은폐되어 있어 발굴의 난항을 겪는 감정은, 오로지 지반과 토대가 붕괴한 뒤에만 해 아래서 명백한 형태를 노출한다.
클레이오는 생각한다.
정말이지 이 불완전하면서도 사랑스럽고, 있을 자리를 주면서 착취적 헌신을 요구하는 세계를 잃을 수가 없다고.
아서가 왕이 되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면 끝나거나 따위의 생각은 증발되어 버렸다.
그에게는 이 세계에 대한 실감과 애정이, 그리고 소실된 세계의 과거와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할, 물에 잠겨버린 시대에 대한 회상이.
그리고 이제는 멸망해버린, 여덟 무사이의 세계로부터 물려받은 과거가.
다음 신은 없다.
남겨진 세상은 여기까지, 이게 다였다.
인간으로서의 그와 신의 사자로서의 그는 모두 세계가 현재의 형태로 자리매김 한 데에 공과 과가 있다.
그런데도 운명론자의 비관주의에 매몰되어, 존재했던 모든 것을 허무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
한발 늦게 클레이오를 따라붙은 스웨인은 눈앞의 난맥상에 곧장 베그의 검을 뽑아 들었다.
“자원봉사자들을 지켜야하겠군요.”
“맞습니다, 스웨인 경.”
스으으읏― 파앗
진격의 원을 날려 가까운 곳의 그림자를 흩어버린 스웨인은 한숨을 돌리며 클레이오 쪽을 바라보았다. 호위 대상인 클레이오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없기에 보이는 행동이었다.
7레벨 검사의 검격 거리 한계로 인해, 스웨인은 어둠을 완전히 물릴 수는 없었다.
그의 마음을 헤아린 클레이오가 길게 꼬리깃을 늘어트린 공작의 완드를 휘둘렀다.
[광원]과 [증폭]의 식이 크게 뻗어나가, 33번 기점과 근처의 대피소인 얼음 창고까지의 거리를 전부 감싸 안았다.“[평온히 포용되지 말라, 저 안온한 밤에
사그라지는 빛에 대항해 분노하고 또 분노하여라]1)”
우리는 최후의 순간까지 저 어둠에 순응해서는 안 된다.
사아아아아아아앗―
마법은 멸망의 전조인 그늘의 한 부분을 희게 걷어냈다.
신발끈을 삭히던 그림자와 방벽을 꽉 붙든 팔목들을 갉작이던 암흑은 멀리로 물려졌다.
그 백금의 빛, 범람하는 에테르의 강물에 휘감긴 이들은 모두 알게 되는 것이다.
대마법사가 왔다.
사람들은 만면의 미소를 짓고서 환호성을 질렀다.
백안시되든 불길한 예언을 하든, 연원 모를 두려운 공격을 받고 있을 때엔 저 마법사는 가장 믿을 수 있는 방벽이었다.
그들에게는 스텔라만큼이나 바라 마지않던, 그러나 아무도 기대조차 않았던 원군이었다.
환호에 감싸인 클레이오는 뭐라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입술만 달삭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의지로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이곳까지 와 있었다.
자신이 무엇이라고 감사나 치하의 말을 하겠는가.
클레이오의 갈등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대피소로 향하던 사람들은 길목에 선 마법사의 어깨를 스스럼없이 두드리고 손을 붙들며 한껏 고양된 감정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들 중 누군가는 지금 뻗어온 손으로 클레이오를 헐뜯는 신문 기사를 더듬어 읽거나, 쓸데없이 잦은 대피 훈련에 대해 불평하는 편지를 관청에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단면의 존재가 아니고, 살아있으면 변하기 마련이다.
스웨인은 민간인들이 다치지 않도록 가볍게 팔만 뻗어 제지하고는 클레이오에게 바짝 붙어 섰다. 다행히 주변에서 살기가 느껴지는 사람은 없었다.
“이거 우리 언니가 고쳐놨어요. 언니도 마리아 교수님 책을 봤거든요!”
“나는 사실은 바깥양반이 그 삼색 버튼 달고 다니면서 스텔라 기사단이니 으스대는 거 웃기게 생각했는데, 마리아 머시기 책 보고 따라하니깐 이게 돼갖고요.”
지나가며 말을 건네던 사람들 중 하나인 어느 중년 부인은 한 손에 티플라움 등불을 꽉 쥐고 있었다.
부인은 상처가 났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처럼 나머지 한 손으로 머릿수건만 고쳐 썼다.
그녀의 손등은 그림자에 맞서다 짓물러 고름투성이였다. 클레이오는 재빨리 [치유] 마법을 걸었다.
제 마법의 효력을 살피던 마법사는 부인의 굽혀진 팔꿈치 뒤로,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기둥에서 내려섰던 프란의 얼굴을 봤다.
두 사람은 아주 가까이에 서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클레이오와 정면으로 딱 맞닥뜨린 프란은, 서로가 알고 지내던 기간을 통틀어 완전히 최초로, 변명 같은 걸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세르, 이건… 작금의 상황은… 내가 민간인을 선동해 교전 지역으로 이끌고 온 게 결코 아니다. 나는 그저 방벽의 일부에 손상이 간 것을 발견하고 단신으로 대피소를 이탈한 것뿐이다. 그 역시 대피 규정에는 맞지 않겠지만, 손을 놓고 두고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머릿수건을 다 고쳐쓴 부인이, 프란의 말에 쏙 끼어들었다.
“아이고, 우리 야학 선생님이 이래 말을 횡설수설하는 거는 처음 보네. 이 양반이 우리더러는 나오지 말라고 한 거 맞아요.
근데요 저기 저 보이죠? 기운 모자에다가 머리 하얗고 꼬장꼬장하게 떽떽대는 노인요. 에벤에셀 노인네는 요기 화이트 선생님이 튀어나오니까는 팍 따라붙어 갖고, 우리한테도 나오라 그러잖아.
이거 고쳐야 방벽을 제대로 쓴다면서? 별수 있나. 그래서 왔지.”
통통한 여인의 뺨은 프란만큼이나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건 비슷한 종류의 성취감에서 추동된 열정이었다.
내가 역사의 한구석을 바꾸었다는 강렬한 실감.
만일 클레이오의 「직독」이 날뛰는 중이었다면, 프란에게는 일생일대의 수치스러운 폭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동부에서 돌아온 지 몇 주 되지 않은 프란은, 스텔라 방벽이 시험 가동되는 걸 세 번 정도 봤을 즈음 방벽의 최종 기능을 간파해냈다.
원설계에서 없었던 기능은 제베디가 후에 추가한 부분으로, 마법식을 여러 지점에 분산시켜 놓아 총체적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게 해 두었긴 했다.
하지만 프란은 평소의 클레이오가 마법식을 자유자재로 결합하고 이중발진을 해대는 일에 익숙했기에 스텔라 방벽의 역방향 발진 목적이 광역 마법의 재현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프란은 ‘알아보는’ 일 이상을 할 수가 없었다.
방벽의 설계에 권리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도, 군사적 행동에 가담하지 않겠다고 택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눈앞에서 방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았으면 모르되, 하필이면 그가 대피한 피난소 근처의 방벽 구조물에서 쇼트가 났다. 공격이 계속되는 와중 재시동이 잦아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판단하자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여기 전쟁의 한복판에서, 왕자들이 벌이는 무익한 대결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그들의 터전이 무너지는 일을 도무지 좌시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포탄이 사방을 뒤흔드는 도중 대피소를 뛰쳐나왔을 때, 연약한 2레벨의 [방어] 마법만을 두른 채 33번 기점의 접촉 불량 회로를 수리해냈을 때, 프란은 생각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늦지 않았다고.
1) Dylan Thomas,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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