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16
파국, 금기, 비극 (2)
클레이오는, 원시의 들판에 망연히 앉은 멜키오르와 간신히 상체만을 튼 태서턴이 일어난 일을 모두 똑바로 보았음을 알았다.
“아, 그으읏― 아아. 아아아.”
태서턴은 말이 되지 못할 곡소리를 터트렸다.
이 모든 비극은 여덟 세상 전에, 신성을 입어 태어났던 인류에 의해 배태되었다. 에라토가 신격을 유지했다면 겪지 않았을지도 모를 긴 고난의 세월.
에라토는 교훈을 남겼다.
그녀의 자매들은 다시는 자신의 피로 피조물을 빚지 않았다.
그리하여 신의 피를 이어받고 신물에 의해 사망한 남빛 눈의 사내는, 다음 세상까지 이어서 태어나는 유일한 인간이 되었다.
그 엄청난 반복과 끝없는 환생은 남자가 저지른 원죄의 증명이었다.
감히 멜키오르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바닥에 머리를 쿵, 쿵 찧던 태서턴은 그대로 절명했다.
에테르 그릇이 모두 깨지고 전신은 만신창이가 된 채로.
그의 심장은 자신의 죄를 견디지 못하고, 억겁의 시간에 짓눌려 터져버렸다.
그건 속죄는 아니었다.
세계 전체의 명운을 가르는 사건에 개인은 책임의 능력이 없으므로.
클레이오가 펼쳐놓은 「현현」의 바깥에서, 세상을 부스러트리던 푸른 에테르가 주춤 멈춰 섰다.
멜키오르는 머뭇거리는 멸망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마법사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을 움푹 꺼지고, 희미하게 광택이 남았던 머리카락은 새하얗게 새어버렸다.
반지가 끼인 왼손을 한 번 휘둘러 초원의 밤을 걷어버린 클레이오가 말했다.
“당신은 한때 세계를 창설하고 인간의 숭앙을 받던 신들의 하나였다. 당신은 에라토라 불리었고, 저기 아르모리크 공은 여신의 정원 밖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세계에서 에라토를 죽인 자였다.”
사랑이라는 저주, 정념이라는 원한.
인간이 신성을 얻은 만큼, 신도 불완전성을 얻었다. 그것은 두 존재 모두에게 지극한 비극이 되었다.
“저 살해가 그의 칭호인 ‘신살자’의 연원이었던 거지. 아홉 번째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당신은 무수한 생애를 반복해왔다. 당신의 기억이 어긋나고 혼돈스러운 것은 그 생애가 추산조차 할 수 없으리만치 길었기 때문이야.
에라토, 스스로는 이름을 잊은 옛 신. 당신 역시 한때는 인간의 운명을 직조하는 베틀 앞에 앉아 있었지. 당신이 조성한 세계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당신의 자매들은 당신이 한 것처럼 세상을 만들어 갔다.
당신은 여기 아홉 번째 세계가 쓰인 원고를 편집된 부분마저 불러일으켜 읽었음에도, 어쩌면 가장 중요했을 구절은 읽지 못했군.”
배경은 뒤집히듯 반전된다.
이제 그들은 부피가 없는 까마득한 백지 위에 도달해 있었다.
이 역시 클레이오가 도래시킨, ‘편집자 권한’이 실행된 직후의 공백을 모사한 공간이었다.
클레이오는 자신이 기억하는 원고, 실제로는 지워진 레지나와의 대화까지 모두 기록된 페이지를 「현현」을 통해 물질화하여 멜키오르 앞에 내어놓았다.
색인과 주석을 포함한 모든 요소가 저항 없이 드러났다.
멜키오르가 억지로 펼쳐야 했던 원본과 다르게, 클레이오가 만든 사본은 유순히 한 장씩 넘어갔다.
여기는 진실로 마지막 세계.
생명이 남아 있는 최후의 피난처.
세상의 모든 기억이 수렴하는 방주.
“당신이 시작이었고 끝이다. 이 뒤에는, 바라던 것처럼 아무것도 없지. 지금의 세상이 멸망하면 아홉 세계와, 신들이 창설한 창조물 모두가 기억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더 이상의 반복은 없을 테니까.”
하얗게 바랜 남자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그러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나는 ‘멜키오르’로 살았던 두 번째 생애부터는 내가 한 어떤 일도 죄라고 여겨본 적이 없다. 반복은 선이나 악의 가치판단을 허물어버리니까. 하나, 그대는 이제 와 여기가 마지막이고, 최종적인 삶이라 하는구나.”
조용한 읊조림이었다.
연극과 연설의 특성이 모조리 제거된 술회는 「이격」을 넘어 클레이오의 갈비뼈 안쪽을 우릿하게 긁었다.
한때 클레이오는, 멜키오르가 이 세상이 마지막 세상인 것을 알면 어떻게 굴지 궁금해했었다.
후련해 할까?
아서를 죽여 당장 끝을 내려 들까?
그의 응답은 클레이오의 어떤 예상과도 들어맞지 않았다.
멜키오르는 그저 월계수의 홀을 놓았다.
그를 움직이던 의지와 분노가 함께 잠잠해졌다.
“더 이상 반복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강제를 통해서는 읽어낼 수 없었던 것 또한 인과인가? 이토록 간결한 종말이 도래해 있었거늘.”
멜키오르가 고개를 숙이자 명주실처럼 흰 머리카락이 힘없이 그의 이마를 덮었다.
바닥에 모로 놓인 뮈토스의 홀이 저 홀로 빛을 내고, 두 사람이 선 자리는 신의 정원으로 바뀐다.
물가의 보석함 옆에 펼쳐진 진짜 팔림프세스트의 페이지에는 조약돌이 몇 개 괴여 있었다.
멜키오르의 지문이 묻은 고운 색돌들이었다.
그건 세상의 구조에 대해 간파한 자가 수정과 개변의 손길을 차단하기 위해 쓴 수였다.
클레이오는 자신의 판단 착오에 씁쓸함을 느꼈다.
이 장이 끝나지 않는 것은 여신의 뜻이 아니었다. 멜키오르의 방해 때문에 일어난 지연이었다.
상상 이상으로, 칼리오페는 약해진 신이었다.
클레이오는 물가에 놓인 원고 위의 조약돌을 치웠다.
멜키오르가 오래 눌러 놓았던 페이지는 움푹 찍힌 자국이 남은 채 그다음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그 위에는 아직 쓰인 문장이 없다.
오히려 이미 쓰인 행들이 제멋대로 앞뒤가 뒤섞이다, 하얗게 타올라 사라지고 있었다.
멜키오르가 일으킨 소멸은 속도만 느려졌을 뿐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클레이오는 어떻게든 삭제를 저지해보려 책장을 짚는다.
그때, 그의 눈앞에 이제껏 본 적 없던 새로운 고지가 떠올랐다.
[―가 ‘고유 스킬’ 책임 편집 권한하에 놓입니다.어긋난 수정으로 인해 이탈한 전개를 정정하고, 편집의 방향을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손등에 찍힌 직사각형 위로, 조금 더 작은 프레임이 새로이 새겨졌다.
성흔이 갱신되었다. 그는 ‘책임 편집’의 권한을 획득했다.
클레이오는 스스럼없이 펜을 들었다.
편집은 그의 능력이었다. 혼란스런 텍스트에 질서를 부여하는 기술이었다.
사각. 사각사각.
흩어져가던 글자들은 되돌리기 기호 안으로 포착되어 다시 자리를 잡는다.
망연한 스러짐이 중지된다.
지표를 잃어가던 데르니에 대륙은 기존의 면적을 회복한다.
해안선이 수복되고, 모래무지가 되어 무너지던 방파제와 항구는 단단한 몸체를 되찾는다.
멸망에 연루되어 소멸한 자들의 육신에 숨이 붙고, 영혼이 다시 결착된다.
종말이 돌이켜진다.
이야기가 움직인다.
세계가 다음 세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달려 나간다.
멜키오르는 클레이오의 손 위에서 역사가 다시 쓰이는 것을 바라본다.
이 세계의 역사, 두 번 쓰일 수 있는 역사가.
눈이 먼 자에게는 표면의 텍스트뿐 아니라 저면의 텍스트 역시 함께 읽혔다.
그의 읽기는 시각을 통한 것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의 대리인조차도 알지 못하는 과거의 세부가 금빛 글자로 펼쳐졌다.
간파의 구조시는 멜키오르에게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주었다.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는, 과도한 정보를.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세상에 신의 힘을 타고난 것은 일방적인 저주가 아니라, 소극적인 자비의 표현이었다.
미약한 힘을 가진 신이 세상에 개입할 때마다 의도와 결과는 더욱 크게 어긋났다. 실패는 중첩되어 걷잡을 수 없어졌다.
선의는 왜곡되고, 은총은 엄밀하지가 못하며, 악을 생성하지 않으려는 시도는 인간에 의해 좌절된다. 신의 뜻은 그녀의 대리인에게마저 곡해되고, 강제력은 반동을 일으킨다.
그것이 진실이다.
에라토만 실패한 것이 아니다. 모든 여신은 실패했다.
결함투성이의 신들. 서사를 제어하지 못하는 신. 도구에 의해 손을 베이는 신. 생명을 지탱하고자 하나 언젠가는 통치의 인정을 잃고야 마는 신. 자신의 피조물에 의해 영원히 배신당하는 신.
멜키오르가 읽어야 했던 텍스트는, 마침내 읽히게 되었다.
그는 알고자 하는 것을 다 알았다.
자신은 에라토도 이솔트도 아니다.
여기 이곳, 최종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은 한낱 인간인 멜키오르 리오그난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생명이므로 금기를 저버릴 수 있다. 피조물은 창조자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는 존재이기에.
그러나 절망하지도, 자신의 저항이 헛되다고 여기지도, 후회하지도 않았다.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자신은 그렇게 할 것이다.
그 끝에 진실이 규명되었다.
멜키오르가 무엇을 보는지 알지 못한 채 교정에만 몰두하던 클레이오는, 힘이 너무 들어가 굳어진 손가락을 풀고 펜대를 놓았다.
책장은 잉크를 말리듯 사르르 흔들리다, 다시 정원의 보석함 안으로 감겨 들어갔다.
“그대는 세계를 정서할 권한을 가졌구나. 내가 몹시도 희구했던 힘을.”
멜키오르의 표현엔 과장도 위악도 섞이지 않고 담백하기만 했다.
그 힘없고 조용한 말이 클레이오의 마지막 방어벽, 정신적인 저항을 무너트렸다.
신의 정원에 든 멜키오르는 아마도 원고를 다시 쓰거나 없애거나 태우려 시도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어서, 그저 펼쳐놓을 수만 있었던 것이리라.
저토록 끔직한 일을 벌인 자이다.
세계 전체의 소멸을 기도한 자이다.
그러나, 하지만.
신의 뜻을 헤아리고자 분투하는 삶은, 클레이오에게는 한 번만으로도 너무나 버거웠다.
그저 산다 하더라도 수천, 수만 번의 반복은 그 자체가 벗어날 길 없는 형벌이다. 에라토는 제 피조물을 사랑한 대가로 긴 옥고를 치렀다.
존재의 전후와 맥락을 알면서도 멜키오르를 증오할 수만은 없었다.
그토록 애를 써 거부해왔던 이해, 결코 가지지 않으려 했던 연민이 만조의 밀물처럼 클레이오의 정신을 침수시켰다.
멜키오르는 너무나 많은, 이제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세계에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진실로, 저자의 손에 묻은 피야말로 대양조차도 씻어내지 못 하리라.
“다음은 없고, 나는 실패했군. 진실 뒤에 남은 것은 고통뿐인가.”
멜키오르는 성흔을 거둔 지 오래였다.
형벌 같은 고통은 이제 그의 안에서만 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멜키오르의 안면에 떠오른 안온한 만족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반쯤 투명해진 몸의 윤곽은 그를 유령처럼 보이게 했다. 머리끝 역시 바스러져, 길었던 머리채가 귓가까지 짧아졌다.
이르게 내린 서리같이 덧없게 빛나는 존재는 해가 떠오르면 사라질 것처럼 연약했다.
한때는 절대적인 존재로 보였던 자가 강고했던 주권을 잃었다.
‘멜키오르 리오그난’은 실패한 인간의 미래였다.
신의 의지에 맞선 자, 은총을 벗어나려던 자가 겪는 일을 미리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그의 말이 맞다.
그는 종말이고, 거울상이다.
클레이오는 멜키오르의 생애가 읽도록 하는, 어쩌면 다른 누군가에게도 닥칠 수 있는 결말이 두려워졌다.
그리고는 슬픔에 휩싸였다.
클레이오는 자신의 알량한 슬픔이 경멸스럽다.
이제껏 멜키오르를 상대하는 동안엔 한 치의 운신할 여지조차 없었다. 그와 대치할 때마다 한계의 한계를 돌파해야 했고, 최선을 다해도 한 발을 앞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패배했기에 동정이 비집고 들 자리가 생긴 거라면, 너무나도 저열하지 않은가.
이것은 지독히도 기만적인 행위이다.
클레이오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몇 번이고 놓칠뻔한 공작의 완드를 가까스로 들어 올렸다.
다 쉬어빠져 철판을 긁는 듯한 진언 영창은 지옥의 바닥에서 끌어올린 울음소리 같았다.
클레이오 아세르는 그 누구의 강제도 없이 자발적으로, 여덟 서클에 걸친 [경감]을 펼쳤다.
세상에 흐르는 에테르의 맥을 온통 뒤흔드는, 그런 마법이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1)
멜키오르는 보이지 않는 눈을 감는다.
흰 속눈썹이 수난자의 조상 같은 그의 뺨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의 양 손등에 남겨진 성흔은 오래된 상처처럼 희미해지고, 눈을 감아도 떠도 끊임없이 떠돌던 문자들이 잠잠히 가라앉는다.
이능은 잠이 들었다.
아홉 생애 중 최초로 얻은 안식이었다.
완벽한 [경감]은 생각의 지평을 안정시켜 주었다.
거듭된 생애의 기억이 쌓인 그 내면의 도서관은 마침내 체계를 얻고, 뒤엉켰던 기억은 앞뒤를 맞추어 분류된다.
멜키오르는 과거를 돌이키기 위해 맨몸으로 늪 같은 기억의 바닥을 헤매지 않아도 되었다. 체계와 분류의 빛이 그에게 닿았으니.
그는 이솔트로 태어났던 자신이 처음 [경감]의 식을 정의했을 때를 어려움 없이 회상한다.
두 번째 생애, 다시 태어난 데 좌절해 호수 바닥으로 걸어 들어가 죽으려던 자신을 말리지 못한 시녀들은 어머니에게 매질을 당했다. 이솔트는 죄 없는 처녀들을 위하여 [경감] 마법식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정립했다.
반복과 세월을 거듭하고 겹쳐진 후에, 이 연민의 마법은 다시 영점으로 돌아온다.
멜키오르는 굳어가는 혀를 어렵게 움직인다. 발음은 이제 흐릿하게 뭉개지고, 단어는 끊기지 않아야 할 곳에서 음절이 부러졌다.
“그, 그대는 이것, 이 종언의 구절인 것을 알고있지 않나. 자비로운 끝이나 죄 사함이 가능한 것이라 여기나?”
“끝은 제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신께서 정하는 것이지. 그녀는 가능한 한 이 세계가 다수의 행복 속에서 오래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그건 마치, 다시 태어나지 못할 이, 이들, 의 생명을 빼앗고 핏물을 범람시킨 죄업을 돌려 비난하는 것처럼 들리는군.”
“제게 죄를 사할 능력이 없듯 비난할 권한도 없습니다. 그저 지켜보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한 일을, 혹은 하지 않은 것으로 된 일을. 죽은 사람들과 산 사람을. 멸망시키지 못한 세계를.”
멸망은 돌이켜져서 없게 되었다.
마지막 세계에 온 신의 사자가 그리했다.
정작 신의 사자는, 괴로움과 망설임에 젖어 있었다.
저자가 권고를 들어준 것인지 아닌지, 신이 원하는 전개가 이것이었는지 어떤지 클레이오는 모른다.
독단의 대가는 두려우나, 멸망을 돌이킬 다른 방법이 없기에 제멋대로 세계를 편집했다.
이야기는 붕괴할까? 역사는 정합성을 잃나?
하지만 현실의 사건은 명확한 인과나 앞뒤가 들어맞는 개연성을 제공하지 않는다. 진짜 삶은 일반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구조를 가진다.
이를테면 저기 태서턴이 한 일은 어떠한가. 돌이킴에 휘말려선, 죽지도 못하고 다시 숨 쉬게 된 자가 먼 옛날 저지른 일은 이 끔찍한 비탄의 연원이 되지 않았는가.
세계사를 결정지은 사건들 대부분은 어이없고 황당한 방식으로, 상상이 불가능한 과정을 거쳐 그냥 일어나 버린 것이다.
“그, 러면 나는, 풀려난 것이로구나. 대적자의 쓰임이 다, 했으니, 나의 의무는 면제되었을 터. 이제 역사는 더, 더 이상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못하겠지.”
클레이오는 답하지 않았다.
고요 속에서 「현현」이 걷혔다.
모든 마석이 부스러져 모래로 화하고, 푸른 에테르마저 적막하게 꺼진 왕의 홀은 천 년의 세월을 한 번 더 겪은 듯 무참한 폐허가 되어 있었다.
둥글게 뚫린 천장 위로 새벽의 박명만이 고요히 내려앉았다.
빛을 등진 마법사가 고통 속에 혼절한 저의 왕을 보살피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그 뒤로, 멜키오르의 멀어버린 눈동자 표면에 홀의 벽 한 면에 걸린 세 왕자의 초상화가 비쳤다.
프레임이 반쯤 타버렸는데도 용케 형체를 유지하는 화폭이, 그의 무뎌진 감각에 간신히 감지되었다.
죽은 것과 다르지 않은 자, 죽은 자, 산 자의 형상은 저 모든 일들 뒤에도 남았다. 무사 여신들의 가호를 받는 예술은, 개별적 인간들보다는 불멸에 가깝다.
대개의 회화는 그것이 모사하는 대상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게 마련이지만, 저 초상화에게는 세월이 더 압축적으로 흐른 셈이 되었다.
이제 산 자는 한 명이다.
‘죽은 것과 다르지 않은 자’는 세상만큼이나 오래된 직감을 느끼며 등을 떤다.
멜키오르가 공유한 고통으로 인해 정신을 잃은 아서는, 결국에, 이번에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멸망도, 돌이킴도.
이 소외는 앎 이상으로 아서의 영혼을 부식시킬 것이다.
멜키오르는 생각한다. 그는 어쩌면 제가 심은 마지막 종자가 피울 꽃을 목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파종을 때가 지났으니 언젠가는 수확의 시기가 올 터이다.
아마도.
그는 더 이상 확언하지도 자만하지도 않는다.
이 세상의 왕은 그의 손을 떠난 뿌리이다. 오로지 신의 정원에서 자라날 작물이다.
신의 뜻과 후에 예비된 바를 그는 짐작하지 않으려 한다.
이제 세계는 그에게 온통 낯설고 신비한 것이기에.
다시는 맞이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아침의 빛이 남겨진 자 모두에게 공평히 비추어졌다.
그 빛 속에서 아서의 눈꺼풀이 떨리기 시작했다.
간절하게 아서를 부르는 클레이오의 머리 위로, 멜키오르는 보지 못하는 고지의 문자가 떠올랐다.
[― 5장을 끝으로, 1부가 완결됩니다.] [―‘고유 스킬’ 책임 편집 권한(1/1)이 장전됩니다.]1) 『개역한글성서』, 「요한계시록」 21: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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