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23
이후의 세계 (3)
회의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오늘은 서기관이 동석하지 않는 비공식 회의인 것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난 뒤, 클레이오가 입을 열었다.
“솔직한 의견을 묻는 거라면, 나는 첼레스테스의 방안에 전적으로 찬성이야. 왕세자나 그의 측근에 의해 직접적인 국왕 살해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단 가설을 일부러 공표할 필요는 없다고 봐. 그게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말은 지금은 넣어 둬.”
수도 전투의 날.
하늘이 어두워진 순간 의회 로비에 모여 있던 아서의 수뇌부는, 필리프를 구금하고 있던 멜키오르 측에서 그를 살해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이야기는 아니었다.
“지금 정세에선 선왕이 살해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치적 부담이 커. 거기다 알비온의 국왕이 두 세대에 이어 형제 살해를 감행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인식까지 굳이 심어줄 필요는 없으니까.
아슬란이 필리프를 살해했고, 아서는 침략자로 나타난 그를 물리쳤다는 구도를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다고 봐.
더해서, 당장 대관식을 안 할 거라면 국왕 대리 임명식이라도 정식으로 하는 편이 좋을 거야.
멜키오르의 평판이 온존하고 있는 채니까, 그에게서 국왕 대리의 권한을 정식으로 물려받는 걸 보여준다면 아서의 계승에 대해서는 말을 얹을 자가 없을 거다.”
오랜만에 길게 말을 해서 목이 아픈 클레이오는 따듯한 물로 입을 축였다.
짝.
첼은 박수를 쳐 무거워진 회의실 분위기를 환기했다.
“클레이오 너라면 나와 의견이 같을 거라고 생각했어. 역시 말이 통하는 사람이 오니 좋군. 우리 국왕 대리께선 어찌나 요령 좋게 이 충신의 간언을 회피하시는지.”
아서는 통솔력과 무력이 뛰어나고 시민들의 강한 지지를 등에 업었으나, 왕실 일원으로서의 정통성은 약했다.
아슬란과 멜키오르를 지지했던 귀족들 중 국내에 잔류한 이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국외 추방할 것도 아니니, 그들이 무엇을 계기로 다시 뭉치게 될지 몰랐다.
그렇다면 명분이나 구실이 될 만한 일들의 싹을 밟아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멜키오르는 끝까지 ‘대외적으로는’ 어떠한 부정적인 행보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가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든, 수도의 모든 인간을 멸절의 제물로 삼으려 했든 말이다.
페텐카도, 첼레스테스도 수도의 혼란과 필리프의 사망을 모두 아슬란의 소행으로 해 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시가지의 파괴는 모두 아슬란과 그의 군사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아슬란의 이형이 룬데인 곳곳에서 나타난 건 시민들뿐 아니라 외교관과 기자들까지, 목격자가 무수했다.
여러 기사들이 힘겹게 상대했던 이형들의 본체와 결전을 벌이고 승리한 이가 아서인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 뒤의 상황이 문제였다.
왕의 홀 폭발의 여파가 가신 후, 코티지 정원에서 목 없는 사체를 찾아 은밀하게 수습한 이는 아레미스 한과 함께 궁성으로 돌입했던 페텐카였다.
사체가 있으므로 제기된 질문:
누가 필리프 리오그난을 살해했는가?
빈사의 상태로 엘레네의 코티지에 거하는 멜키오르 리오그난: ‘내가 했다.’
에테르 그릇이 금이 간 채 국왕 시해 혐의로 북문 지하의 구금실에 구류된 태서턴 트리스테인: ‘그분께는 죄가 없으십니다.’
선왕 살해자, 혹은 살해의 유일한 목격자로 추정되는 아슬란은 죽어 사체조차 남지 않았다.
필리프의 시신은 룬데인 군사병원 병원장이자 마법단 단장인 타디우스 예츠켈이 검시했다.
‘목이 잘린 단면이 매우 깨끗합니다. 이토록 날카로운 검기에 의한 베기는 상급 검사, 그중에서도 소드마스터에 이른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필리프의 몸에 남은 증거는 멜키오르가 아니라 태서턴이나 아슬란을 범인이라 가리켰다.
하지만 선왕의 왕의 언약은 그의 죽음 후 승계 없이 유실되어 버려, 아슬란과 태서턴 중 어느 쪽이 살해자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됐다.
입을 무겁게 다물고 있던 아서는 그제야 측근들에게 말했다.
‘내가 왕의 홀로 갔을 때 선왕의 목을 들고 있던 멜키오르는 소드마스터 이상의 수준으로 검을 다룰 수 있었어. 태서턴의 에테르를 자신의 것처럼 끌어 썼지.’
그러나 증거가 없었다.
아서가 왕의 홀로 갔을 때 필리프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아슬란과 공모했던 멜키오르가 필리프의 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반드시 살해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서의 허리에 남겨진 상처는 치유력과 클레이오의 마법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분석][추적][재생]의 마법도 끝나버린 싸움을 복기해 주진 못했다.
그래서 아서는 멜키오르의 검술 실력에 대해 주장하는 대신에 클레이오가 증언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결정을 미루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클레이오는, 아서는 별로 바라지 않고 첼은 상당히 바라는 방향으로 발언을 이어갔다.
“멜키오르의 문제라면… 글쎄, 잠에서 거의 깨어나지도 못하고 혼자서는 스푼도 못 쥐게 됐다며. 그런 인간이 눈이 먼 채로 강대한 검기를 휘둘렀다는 말은 신빙성이 떨어지다 못해, 차라리 모함처럼 들리지 않을까.
태서턴이 했더라도 마찬가지이지. 그는 멜키오르의 수족이니까.
왕세자를 사랑하던 자들의 심장이 모두 식지 않았는데, 그에게 반역 혐의를 제기하면 역풍이 불 거야. 그러니 국왕 대리직을 네가 멜키오르에게 물려받는 형식으로 하고, 필리프 왕의 살해자는 아슬란인 것으로 해 두는 편이 좋다는 게 내 의견이다.”
아서는 여전히 꽤 다정한 목소리로 가만가만하게 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레이?”
클레이오는 여전히 짙푸르고 맑은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늘 없이 밝은 여름 바다의 색을.
아서는 [종언]의 식이 폐하고 멜키오르가 세상을 소멸시키기 전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에게 멸망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걸로 좋았다.
그 자신이 지나친 각성 상태에서 이어 붙이고 덧씌웠던 모든 과도한 상징들은 식어 떨어져 나갔다. 클레이오는 단정하고 단순한 결론을 받아들였다.
이제 과거는 여기에서 끝나야 한다.
너는 미래이니까.
“그래.”
친우의 단호한 답을 들은 아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조금 웃어 보였다.
회의의 막바지에 이르러 안건에 대해 찬반 거수를 했다.
결국엔 아서만이 멜키오르의 혐의에 대해 공표해야 한다는 의견을 고수했다.
첼과 클레이오, 안젤리움 자매에 더해 이시엘까지도 다수파 쪽으로 의견을 바꾸었다.
“키시온 영지의 일, 마석으로 폭발을 일으키려던 음모에 대해 전 왕세자의 책임을 묻고 싶지만 그리한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지금 알비온에 필요한 것은 재판이 아니라 복구라 생각됩니다.”
아서는 이제껏 버티던 것이 이상할 정도로 순순히 그 회의의 내용을 받아들였다.
“알겠어. 이 결과를 들으면 세르게프 후작이 정말 좋아하겠군.”
“이미 수습 다 된 일을 안 엎어도 된다고 기뻐하는 거겠지. 일전엔 날 보더니, 에테르 감응력이 없더라도 역시 젊은 시절에 검을 배웠어야 하는가 따위의 소리까지 하던데? 페텐카 세르게프가 그렇게 약하게 구는 건 난생처음 봤어.”
똑. 똑똑.
그 순간, 약간 빠른 리듬으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아서가 허락하자 서둘러 들어온 이는 제레미 툴민이었다.
“실례합니다, 전하. 내무보안국 불법 연행과 고문 피해자 유족 건입니다. 줄곧 탄원서를 올리던 대표자가 직접 궁으로 찾아왔습니다. 일단 파마 궁의 응접실로 안내했습니다만 약속은 없었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카스틸리엔 연합국 외무부 장관과의 면담이 오늘이었지? 얼마나 시간을 뺄 수 있지?”
“이십오 분입니다.”
아서는 낡은 손목시계를 힐끗 살폈다.
“좋아. 지금 바로 만나보지. 그래도 저녁 시간은 엄수할 수 있을까?”
“확답은 못 드립니다. 일단 가시죠.”
양손으로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한 아서는 레티샤와 첼의 야유를 받으며 바람같이 회의실을 나섰다.
회의실 밖 복도에선 툴민의 새 보좌관 브라이언트가 클리퍼드 외무성 장관의 전언을 가지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카스틸리엔 연합국의 여왕에 관련하여 미리 숙지해야 하는 긴급 정보가 있다고 합니다.”
“가면서 보지.”
클레이오는 새로이 아서에게 손을 보태기 시작한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본래는 왕세자 일파에 가까웠으나 그의 직무 태만과 난리를 겪고서 자연스레 아서 휘하로 들어온 에드윈 클리퍼드 백작과 브라이언트 자작의 장남인 폴 브라이언트는 이전까지는 주위에서 본 적 없는 새 얼굴이었다.
‘중도파까지 다 끌어왔으면 세력 정리는 거의 된 모양이야.’
아서는 더 이상 명목상이 아닌 사실상의 국왕이었고, 그가 대신과 의원들에게 끌어내는 충성 역시 겉보기로만 그럴듯한 시늉이 아니었다.
국왕 대리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아서의 세력은 이전보다 확연히 외연이 확장되었다.
머잖아 아서는 알비온의 유일한 왕이 될 것이다.
신의의 결말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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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 리피, 레티샤, 셋은 클레이오를 데려다주는 겸 아세르 저택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아서를 기다리느라 식사 시간을 느지막이 미루고 있었는데, 국왕 대리는 역시 아쉽게도 빠져나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까 궁성에서 달려온 왕실 시종이 건넨 아서의 친필 메모엔 ‘나도 가엘 요리 먹고 싶은데, 못 갈 거 같아. 저녁 먼저 먹어!’라는 문구와 자기 자신을 그려놓은 듯, 눈썹을 축 늘어뜨린 표정 스케치가 붙어 있었다.
아서가 오지 못했으니 이시엘 역시 자리하지 못했다.
첼은 ‘엘은 집에 가면 보니까 괜찮아’라며 의연하게 굴었지만, 약간 짜증을 담아 아서의 메모지를 꽉꽉 접으며 ‘근데 아서 이 자식은 어디서 귀여운 척이야?’라고 투덜댔다.
오늘 저녁이 순전히 만족스러웠던 건 안젤리움 자매뿐이었다.
이날의 메뉴는 세서미 오일을 조금 넣어 증기로 찐 장립종 쌀과 매운 배추절임을 기름진 돼지고기와 함께 끓인 요리였다.
곁들이로는 소금으로 간을 하고, 새우와 달걀을 새우 껍질 스톡에 섞어 오븐에 중탕한 푸딩이 나왔다.
매운 배추찜과 함께 곁들이기에 최고의 조합으로, 클레이오를 제외한 모두 이제껏 먹어본 적 없는 이국적인 음식이었다.
이미 세 그릇째인 스튜를 찹찹 비우며 레티샤가 감탄했다.
“그 매운 배추절임을 일 년 묵혀서 끓이면 이런 새콤달콤한 깊은 맛이 된다고? 정말 말도 안 돼. 프란에게 성분 분석 시켜야 해.”
“근데 이거 재와 강의 도시에서 먹었던, 은색 봉투에 든 야채 절임이랑 비슷하지 않아?”
“또 좀 트리스테인 음식 같기도 하고. 가엘은 정말 음식 잘한다. 너무 맛있어.”
“그러게.”
이제는 공적인 장소에선 제법 엄숙하게 굴게 된 리피도, 식탁 앞에선 여전히 레티샤와 마찬가지로 맛있음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거듭된 리필 요청에 아예 스튜 냄비를 통째로 들고 나온 가엘이 공을 클레이오에게로 돌렸다.
“다 도련님의 지도로 만든 음식인데요. 맛있게 드십시오.”
“그래도 만든 사람은 가엘이잖아. 최고, 완전 최고. 수도 제일의 요리사!”
“괜찮으시면 손님들은 여기 최상품 세 개의 호수를 식사에 곁들이시면 좋을 겁니다.”
칭찬에 기분 좋아진 가엘이 인맥을 통해 구해 둔 고향 술을 꺼내놓자 첼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지방과 짠맛이 녹진하게 녹아들어서, 세 개의 호수에 곁들이기 좋은 맛이네. 그렇지만 레이, 넌 아직 술 못 마시잖아.”
한참 스튜를 쌀과 함께 떠먹고 있던 클레이오는 세 개의 호수 병과 첼의 얼굴을 불안정하게 번갈아 보다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으니까 너라도 마셔.”
첼은 크게 손을 내저으며 와하하 웃어젖혔다.
“됐네, 됐어. 이 첼레스테스 님은, 비루먹고 불쌍한 친구가 맞은편에서 그런 간절한 눈으로 쳐다보는데 혼자 술병을 딸 만큼 인의 없는 사람이 아니란다.”
레티샤는 첼에게 가 있던 세 개의 호수 병을 낚아챘다.
“그런 거야? 난 인의 없는데. 마셔 봐도 돼?”
그리고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경쾌하게 뚜껑을 땄다.
소란 속에서 리피와 레티샤의 얼굴이 발그레해지도록 취한 뒤, 식사가 끝났다.
매운 냄새가 싫다고 캬오옼거리며 도망갔던 베헤못은 디저트와 식후주를 먹을 때가 되니 어슬렁어슬렁 배털을 살랑이며 응접실로 들어왔다.
후식으로는 꽃향기 진한 바닐라 빈을 듬뿍 넣은 바닐라 아이스크림, 아몬드와 크림 향기가 감도는 숙성 포트와인에, 말린 체리와 아몬드가 듬뿍 들어간 얇은 비스킷을 먹었다.
오독, 한 입 깨물면 고소한 견과류 향이 배어 나오고, 두 입째 깨물면 농축된 체리 과육이 탄력 있게 씹히는 비스킷은 포트와인의 훌륭한 친구였다.
물론 클레이오의 앞에는 크리스털 잔 대신에 홍차 잔이 놓여 있었지만 말이다.
고양이에게 번갈아 비스킷을 먹이고, 털에 묻은 부스러기를 빗으로 빗어주던 쌍둥이들은 저들끼리 속닥거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클레이오가 늘어져 있던 카우치 채로 그를 들어 올렸다.
“레이 전보다 쪼끔 더 무거워지긴 했다.”
“근데 무게 앞자리는 아직 안 바뀐 듯해.”
클레이오는 이제는 익숙해진 봉변에 굳이 저항하지 않고 머리만 짚었다.
자기가 바벨도 아닌데 중량 치는 데 쓰는 건 뭐란 말인가.
그 꼴을 보며 첼은 딱 한 마디만 했다.
“너희 완전 인간 저울이구나.”
그런 다음 그녀는, 클레이오가 매달린 카우치를 서로 들었다 놨다 하는 쌍둥이를 전혀 말리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자기 몫의 아이스크림만 우아하게 떠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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