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27
니네베 호수의 성 (2)
식사 후의 설거지는 클레이오가 자청했다. 손에 물을 묻힌 건 아니고, [세정] 마법으로 순식간에 칼이며 냄비까지 새것처럼 깨끗하게 씻었다.
그 뒤엔 역시 클레이오가 지참해 온 애플 위스키를 좀 마시고, 모닥불을 피워 마시멜로와 사과를 구웠다.
최근 생산 과정의 혁신으로 대량 유통이 시작된 사각형의 푹신한 마시멜로는 쌍둥이들의 입맛을 확 사로잡았다.
녹은 마시멜로를 초콜릿과 비스킷에 끼우는 레시피를 제시한 클레이오는 헹가래를 당할 뻔했다.
“이런 건 또 어디서 알았대!”
“캠핑은커녕 침실 밖도 잘 안 나오는 네가!”
“책에서 읽었어, 책에서.”
그 말은 참말이었다.
이전 생애에서 외주로 청소년 도서 편집할 때 읽어 본 레시피였다. 실제론 이런 그림으로 그린 듯한 물가에 불을 피워 놓고 마시멜로를 굽는 한가로운 일 따위 해봤을 리가 없잖은가.
거기다, 다시 살게 된 이세계가 설탕과 버터와 카카오 모두 안정적으로 수급되는 곳일 가능성은 또 얼마나 낮았냔 말이다.
마시멜로를 다 먹고 나자, 뚜껑을 닿는 형식의 무쇠솥 안에 설탕과 시나몬, 버터를 친 사과도 노릇노릇 익어 향긋한 냄새를 풍겼다.
그렇게 밤이 깊었다.
위스키를 몇 잔 마신 아서는 좋은 목청으로 유행가를 쭉쭉 뽑아냈다.
잠자코 장단을 맞춰 주던 첼은, 아서 메들리가 다섯 곡째에 이르자 ‘그건 이제 지난 시즌의 곡이야. 국왕 대리가 되더니 최신 유행곡조차 파악을 못 하게 됐군!’이라며 낄낄댔다.
아서는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내가 요즘 바빴던 이유의 3할 정도는 선거법 개정안 직권 통과 때문이란 걸 좀 참작해 주겠어?”
“덕분에 언약은 아서 네가 내게 건 것만 소멸됐지. 나도 풀려나게, 너 빨리 대관식 하라고.”
“으, 왕의 홀을 사람 손으로 다시 짓는데 그게 하루 이틀 만에 되겠냐.”
“비겁한 변명이군.”
역시나 취해서 동작이 커진 첼이 아서를 손가락질하다가, 그 기세 그대로 일어나 이번 시즌 최고 히트곡이라는 ‘성스러운 도시’와 ‘나의 참나리꽃’을 멋지게 불러주었다.
유행에 밝은 고모 덕에 신곡 레코드를 이미 들어봤던 쌍둥이들은 술기운에 발그레해진 얼굴로 열렬히 박수를 보냈다.
“첼, 네가 원곡 가수보다 더 잘 부르네.”
“최고임!”
“아무려면.”
첼은 동전을 달라는 듯 모자를 벗어 내미는 제스처를 취했다. 레티샤는 물가의 어여쁜 자갈을 몇 개 집어 첼의 손 위에 올려주었다.
자갈을 금화처럼 살피던 첼은 새끼손톱만 한 부스러기 광석을 매의 눈으로 찾아냈다.
“킴벌라이트다. 이게 남아있었네. 노래의 값으로는 과한걸.”
클레이오도 첼의 길쭉한 손가락 위를 내려다보았다.
빛나는 먼지 같은 자그마한 다이아몬드 파편이 박힌 킴벌라이트는, 에테르 반응이 없는 순수한 광물이었다.
골렘의 핵을 삼을 수도 없고, 항공기의 엔진에 쓸 수도 없지만 아름다운 것.
“그만큼 멋진 노래였다는 뜻이다. 잘 들었다, 첼. 네 목소리도 그 광석처럼 반짝이는 것 같았다.”
좀처럼 간드러진 말을 하지 않는 이시엘의 칭찬에 첼은 밤을 다 밝힐 듯 환하게 웃었다.
“정말? 그럼 이건 그레이어 상회에 가져가서 가공해볼까.”
“어디어디, 나도 보여줘!”
“이쁘다.”
소란 속에서 밤이 깊어갔다.
자신에게 몸을 꼭 붙인 채 잠든 베헤못을 왼손으로 쓰다듬고, 남은 손으로는 애플 위스키를 마시던 클레이오도 긴장 없는 미소를 지었다.
서서히 기세가 사그라지는 모닥불이 마법사의 날카로운 얼굴에 부드러운 불빛의 여운을 준다.
아무런 계산도, 의도도 들어가지 않은 클레이오의 웃음은 늘 그렇게 희미하고, 감정의 온도는 미지근해 보인다.
아서는 안다. 지금은 좋은 때였다. 훗날이 되어도 잊히지 않을 그런 순간이다.
담담한 평온. 사소한 기쁨. 모닥불의 온기. 바람이 물결을 성글게 훑는 소리. 고양이의 도롱거림. 열에 달구어져 바짝 달콤해진 사과와 초콜릿의 향기.
우리 삶의 가장 부드럽고 달콤한 부분은 이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친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는 잘 알았다.
어머니가 황폐했던 밭을 개간한 다음 해 첫 수확물을 두 팔 가득 캐냈을 때나, 이시엘이 눈을 굴려 만든 키 큰 아빠 눈사람이 녹지 않게 하려고 선대 키시온 자작이 밤마다 차가운 물을 다시 뿌리던 겨울밤같이.
아서는 여상하게 중얼거렸다.
“놀러 오니까 정말 좋은데, 결국 테르게스티는 못 가서 아쉽다.”
“하긴. 아서 넌 테르게스티 여행을 해보고 싶다고 했었지. 박람회 갈 때. 그래,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가자, 왜 안 되겠어?”
첼이 깔랑거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흐음, 그랜드 투어는 유행이 한참 지났는데. 국왕 대리께서 국사를 팽개치고 옛 유행을 되살려 보려고?”
“그야 나는 한 번도 유행에 앞서가 본 적은 없는걸. 또, 국사를 팽개칠 필요까지도 없지. 평민원으로 권한이 더 이양되면 죽을 만큼 야근하던 일도 훨 줄어들 텐데. 국왕도 혹서기 여름 궁전 행차는 있잖아. 앞으론 의회 휴정 중엔 나도 쉴 거라고.”
“설마 그걸 노리고 법안을 낸 거야?”
“글쎄, 어떨까요?”
“캬하학. 아서 방금은 꽤 얄미웠음! 페텐카 세르게프 흉내 낸 거 맞지!”
.
.
.
휴가 이틀째, 클레이오의 하루는 느지막이 시작됐다.
천막 아래 간이 침상을 놓은 잠자리가 불편할 만도 한데,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깊이 잤다.
그가 자는 동안 아이들은 모두 일어나 이른 아침을 먹은 후 호수 주변을 몇 바퀴씩 뛰고 아침 훈련까지 마쳤다.
그뿐 아니라 아서와 쌍둥이들은 멱을 감으러 들어가 니네베 성 주변을 몇 바퀴씩 돌고 있었다. 그즈음에야 클레이오는 미적미적 일어난 거였다.
첼과 함께 물가를 노닐던 이시엘은 클레이오가 막사 밖으로 나오자 가까이 와서는, 불가에 놔둔 주철 머그에다 따듯한 밀크티를 한껏 채워 내밀었다.
“물가라 오전 나절엔 쌀쌀한 기운이 있다. 이걸로 목을 축여라. 넉넉하게 끓여 뒀으니 더 마셔도 좋다.”
“고마워, 이시엘.”
어젯밤 스튜를 끓였던 화덕에는, 밀크티로 가득 찬 주전자가 올라와 있었다.
올스파이스와 갈색 설탕을 넣어 끓인 차는 달콤하고 고소하며 향긋했다.
클레이오는 아서가 조립해놓은 간이 의자에 편안히 드러누워서, 오전의 창백한 빛에 빛나는 니네베 호수의 성을 바라보았다.
모포를 덮은 무릎 위에는 반쯤 읽다 만, 레오니드와 이솔트 여왕의 야사에 대한 책이 엎어진 채였다.
모든 일이 일단락되고 나서, 소일거리 겸 읽기 시작한 책의 마지막 권이었다.
니네베 호수에 대한 창작물로서, 별 신빙성은 없는 잡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오래된 전승들, 신화의 구조는 세대를 거쳐 내려오며 단순화되고, 직독 따위는 불가능한 불확실성 속에 안착한다.
어찌 보자면, 천 년 전의 구술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으리라. 이솔트와 레오니드, 랑슬로의 비극, 혹은 갈레스의 혈통에 관한 이야기는.
여행을 위한 짐을 싸면서 이 책이 눈에 들어온 건, 역시 여행 장소 때문이었다.
여기 니네베 호수는 결국 이 세상에서 클레이오의 읽기가 시작된 장소였다.
오래된 옛이야기, 갈라진 전승, 통합되지 않는 이본들.
진실로 이곳은 클레이오에게 미지의 세계이고 그는 활자의 희미한 빛으로 눈앞만을 더듬어가는 미약한 존재이다.
한 모금씩 찔끔찔끔 마시다 보니 밀크티는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그 무렵엔 해가 정오에 가깝게 높이 오르고, 물가의 자갈들은 따듯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클레이오는 빈 잔을 내려놓고, 모포를 걷어낸 뒤 일어났다. 여전히 잠에서 덜 깬 베헤못은 의자의 그늘에서 게으른 몸짓으로 꾸벅꾸벅 졸았다.
‘복원, 해보자.’
클레이오가 마법 준비에 한참 시간을 들이고 있던 건 이미 뇌리에 새겨진 [복원] 마법식을 떠올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언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이전 세계에서 온 문장들, ‘약속’이 기억시켜준 고전들 대신에 새로운 문장을 써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클레이오에겐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드물게 생긴 충동이었다.
‘안 돼도 얼마든 다시 시도하면 되는 마법이니까.’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되는 절체절명의 마법만 써온 그에게, 불발이 나도 새로 시도하면 그만인 복원은 새롭게 느껴졌다.
전후 처음으로 공작의 완드를 현현시킨 클레이오는 공작의 꼬리깃이 만들어내는 흐름을 감지했다. 「지각」을 안 켜도 충분히 느껴지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그는 제 심장을 감싸고도는 충만한 에테르를 일으키며 말했다. 낮은 목소리였다.
“[어쩌면 우리는 돌아갈 수도, 돌이킬 수도 있을 것이다.]”
솨아아아아아―
니네베 호수의 성을 감싸며 떠오른 [복원]의 마법식엔 낮이라 거의 보이지도 않을 빛이 들어오다 꺼질 듯 흐려졌다.
진언의 위력은 미약했다.
클레이오는 마법이 발동되지 않은 줄 알고 마법식을 다시 열려다가 성의 끄트머리로부터 희미한 백금빛 윤곽이 천천히 생성되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종이가 가장자리로부터 타오르듯.
이 지리멸렬한 진언에 의해서 마법이 발동된 건 마법의 부실한 연결고리를 그저 무시무시한 유량의 에테르로 뒤덮어서였다.
그 꼬락서니에 대한 마법 시전자의 반응은 이랬다.
“그래도 되긴 되네.”
증축되었다 떨어진 부분이 울퉁불퉁하고, 외벽 역시 닳아 낡았던 성벽은 천천히 복원되어 어제 처음 채석장에서 깎아낸 돌들로 짜낸 것처럼 희어졌다.
한데 복원된 성의 형태가, 이전에 클레이오가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물에 비친 윤곽이 너무나도 희어서, 마치 이전 세계의 타지마할 같은 인상을 주는 성이었다.
죽음에 바쳐진, 시간을 견뎌내는 기념비처럼.
잠에서 깨어선 미적거리던 친구가 갑작스레 성을 복원해버리자, 일행 모두가 놀라 클레이오에게로 모여들었다.
먼저 물 밖으로 빠져나온 아서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감탄했다.
“와아, 멋진데. 전에 그림으로 본 거랑 느낌이 다르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증축한 건축가가 측량해 남긴 도면과는 확실히 다를 거야. 최초의 형태로 복원된 것 같거든.”
“근데 예쁘긴 하다. 어때? 맘에 들어?”
“그럭저럭. 근데 내 맘에 들고 안 들고가 중요하냐? 시조의 유산인데 이렇게 대충해도 돼?”
“어차피 몇 번이고 증축해서 원래 모습도 아니었다면서. 원형으로 돌아가면 더 멋지지.”
뒤이어 도달한 첼은 팔짱을 낀 채 건물을 올려다보다가, 아서의 감개무량해 하는 말투에 질색했다.
“으, 아서 니가 복원한 것도 아니면서 뭔 뿌듯한 표정이야.”
“멋지니까 그렇지!”
“아, 그래, 그렇지. 고생했어, 레이. 이걸로 여기 놀러 온 면피는 확실히 됐겠어.”
“이게 몇 분이면 되는 거였어?! 대마법사 최고임!”
“최고네!”
“그럼 들어가서 탐험해 볼까?”
“확실히, 복원된 성을 탐사하고 기록해야 할 필요도 있으니 좋은 의견이다.”
“이시엘도 좋다니깐, 됐네! 햐, 오늘 밤엔 성에서 자겠음!”
“그러면 성을 다 둘러본 다음엔 낚시해서, 성의 부엌에서 요리해 먹을까나? 어때?”
“어어, 첼, 낚싯대 가져왔어?”
“챙겨왔지.”
“첼은 천재야.”
“유희의 대가라고 불러 줘.”
그렇게 여름휴가 겸 니네베 성 복구 임무는 즐겁게 끝을 맺었다.
***
니네베 성 방문으로부터 몇 주 후.
클레이오는 국왕 대리 집무실을 향해 휙휙 나아가며 생각했다.
‘어쩐지 첼레스테스가 말을 돌린다 싶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국왕 대리 집무실에 들이닥친 클레이오는, 집무실이 빈틈을 타 탕! 하고 아서 앞의 책상을 한 손으로 짚었다.
그런 다음 오늘 아침 집으로 날아온 아서의 편지를, 잘못 나온 세금고지서라도 된 양 세차게 흔들었다.
“야, 이러려고 니네베 호수 얘기를 꺼낸 거였냐? 어?”
9월의 국왕 대리 임명식 날 있을 작위 수여식에서, 지난 전쟁에 공훈을 쌓은 이들 여럿이 작위를 받게 되었다는 소식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클레이오 자신 역시 작위를 받게 될 거라곤 생각했지만, 아서가 통지로 보내온 건 남작위 따위가 아니라 무려 공작 작위였다.
상상도 못 한 결과였다.
공작위는 오로지 왕실의 방계 가문이거나, 알비온에 복속된 타국의 왕족들에게나 걸맞은 자리였다.
그뿐만인가?
아세르 공작에게 주어질 영지는, 무려 니네베 호수였다.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다.
그렇게 펄펄 날뛰는 클레이오를 슬며시 제지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샌가 집무실에 들어온 제레미 툴민이었다.
“이미 상원 전체가 이 안건으로 인해 초토화됐습니다. 아서 전하께서 뜻을 꺾으면 그 자체가 일종의 패배가 될 시점입니다. 그러니 저희는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겁니다.”
제레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일 아침에 나올 가인쇄판 를 클레이오 앞에 놓아주었다.
1면에 실린 니네베 궁전 복원에 대한 기사는, 클레이오가 궁전을 고대의 형태로 복원한 공로자라며 치켜세우고 있었다.
이미 ‘아세르 공작’ 작위 수여 발표의 밑 작업이 진행 중이고, 발표는 초읽기인 모양이었다.
클레이오는 기가 차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 처리가 정말 빠르고 정확하십니다.”
“파마 궁에서 일하던 때에 역량을 갈고 닦을 수 있었던 덕입니다.”
툴민이 클레이오의 분노에서 김을 좀 빼주자 아서는 애교스럽게 웃으며, 날름 끼어들었다.
“니네베 호수엔 정말로 레이 널 데리고 갈 예정이 아니었어. 그냥 복원만 하려고 했는데, 복원도 네가 했지. 그러니 더더욱 명분이 살잖아. 그렇게 영지와 격을 맞추려면 공작위가 맞다고, 의전관들이 다 그러더라고.”
“이게 어디서 잔머리만 늘어 가지고.”
아서는 클레이오가 책상 위로 냅다 던진 편지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별 동요 없는 평범한 몸짓이었다.
“잘 봐봐, 내가 제안한 이 공작위는 단승 작위야. 이번에 처음으로 상원에 도입되는 자리지. 이건 세습 귀족이 아니라도 상원에 의석을 얻을 수 있는 선례가 될 거야. 자식이 물려받지 못하니, 드높은 작위라도 괜찮은 거지. 아니, 오히려 높을수록 좋고. 그래야 이다음 필요한 사람들에겐 남작위 정도 줘서 상원으로 올려도 반발이 적을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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