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45
모든 것이 끝났어도, 내게는 아직 (3)
어느새 베르너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 이런 집은 다시 지으면 되지 않소. 그래도 나가는 게….”
“그래요, 아직은 차고에 대어 둔 자동차를 타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가세요. 그러는 편이 수습은 편할 거거든.
하지만 난 안 가요. 내게는 끝을 결정할 자율성이 있는걸요.
다시 짓는다 한들 지금의 이곳,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담긴 장소는 아니겠죠. 애초에 이 모든 소장품 수집과 저택 건립에 얼마가 들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미 잊었겠지만, 우리는 세기의 결혼을 했어요. 그 액수의 결혼 지참금이 아니었다면 구현하지 못했을 별천지랍니다.
이건 오로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고, 이제는 두 번 있기 어려운 아카이브예요. 나는 나대로 원껏 고별을 할 테니, 빈털터리 백작은 일단 목숨이라도 건지시길.”
아델라인의 어조는 전혀 신랄하지 않아서 오히려 베르너의 신경을 긁었다. 그러나 그런 꾸짖음을 듣고도 백작은 화조차 내지 못했다. 다 큰 사내가 어린아이처럼 굵은 눈물방울을 떨구면서 울었다.
줄로 잘 다듬어진 매끄러운 손끝이 아델라인의 가운 자락을 간절하게 붙들었다.
“나는 그런 복잡한 계산은 모르오. 그냥 여기서 나갑시다, 아델라인. 제발.”
아델라인은 식은땀이 미끄러운, 이전엔 언제 마지막으로 잡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남편의 손을 자상하게 떼어냈다.
“아니요. 나는 여한 없이 살았어요. 내가 죽어도 연금과 배당금은 배우자와 자녀의 권리로 남겨지니 걱정할 것 없어요. 해외에서도 재산을 찾을 방법은 변호사가 알아봐 줄 테니까 얼른 가요. 당신의 충직한 집사가 기다리잖아요.”
백작을 기다리며 몸을 숨겼던 차고에서 뛰쳐나와 병사들과 함께 설득의 말을 늘어놓는 집사의 비통한 호소가, 덧문 바깥에서 들렸다.
‘부디, 제발 나와주십시오….’
선득하니 찬 기운이 도는 아름다운 비단에서 손끝이 떨어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베르너 닐스 하이드-와이트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본다.
그가 계관시인이 된 건 선대가 서거한 뒤, 당대의 유력한 후보로 여겨지던 두 시인 또한 결투로 사망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신사조에 속해 있던 베르너에게 기회가 온 건 바로 그 어처구니없는 결투 때문이었다. 경쟁자들의 죽음으로, 아무도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던 세 번째 후보 필리프가 계관시인의 자릴 차지했다.
후보를 다시 선정해야 한단 목소릴 잠재우고 베르너의 지위를 굳힌 건 선왕 필리프였다. 형제를 살해하고 등극한 새 왕은 즉위 초, 자신이 너그럽고 깨어 있는 인물로 보이길 원했다.
신사조는 감정을 중시하고 일상의 언어를 시어로 쓰는 범속함을 가졌다. 베르너는 그 일시적 유행을 대표하며, 그것 외에는 아무런 깊이 없는 시를 썼다. 화려한 것은 표면뿐 내면은 텅 빈.
그것이 그였다. 그의 인생이었다.
‘그러나 당신만은 달랐군, 아델라인.’
평생 혼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실제로는 함께하지 않은 배우자야말로, 일생에서 가져본 것 중 가장 존귀한 것임을, 베르너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야 깨닫는다.
병사들은 결국 대피한 모양인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사라졌다. 집사 역시 그들이 데려가 준 듯했다. 다행이었다.
희어서 아무것도 아닌 허무의 모래무지는, 플라이트 평원을 두 개로 나누어 놓고는, 마침내 컨트리하우스의 토대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베르너는 플라이트 평원의 풀이 눕는 소리를 들었다. 핏속에 샴페인이 흐르고 아름다운 것만을 눈에 담을 것처럼 처신해 왔지만, 그는 이 평원의 아이였다.
저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필시 들판을 불태운다. 모래가 서편에서 불어온다면 저택은 곧 파묻혀 사라질 것이다.
그는 아델라인의 손을 잡았다. 가운을 지은 실크처럼 사느랗게 차갑고 부드러운 손이다.
“하여간, 이 양반, 언제나 일을 꼬이게 한다니까. 바보 같은 인간.”
아델라인은 긴 한숨을 쉬고는 백작의 손을 대충 마주 잡아 주었다.
시인은 이 순간을 묘사할 적절한 시어를 찾지 못한다. 사실 그는 삶 내내 한 번도 일류였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영원한 시의 소재가 될 것이다.
그의 집사의 간략한 증언에 의해서, 오히려 사람들은 상상력의 드넓은 영역을 얻게 될 테니까.
‘대피할 시간은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백작님께서는 마님과 함께하시기를 원했습니다.’
아델라인과 베르너는 한날한시에 죽었다.
그들은 알비온에서 처음으로 균열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은 평생 한 번도 보편적인 의미로 서로를 사랑한 적이 없었지만, 그들의 이름은 죽음을 이기는 사랑이 실존하는 증거로써 기려지게 될 것이다.
그들의 기나긴 성 대신, 짧은 첫 번째 이름으로 호명되며.
정말이지 그건,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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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금실을 파훼당한 직후 에테르 그릇이 뒤흔들린 아서는 경감 마법도 듣지 않는 지독한 고열과 에테르 유수에 시달렸다.
아서가 침상에 붙박인 건 꼬박 32시간가량이었다. 클레이오가 수도를 떠난 저녁부터 다음 날 저녁, 그리고는 아침까지.
왕이 힘을 잃은 동안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클레이오 아세르의 탈출, 의원 사무실 테러, 수도와 플라이트 평원의 균열.
테러 사건이 벌어진 직후까지 뜨문뜨문 지시를 내리던 아서가 완전히 의식을 잃은 후로는 이시엘이 사령부를 지휘했다.
키시온 백작은 수도 전투 때처럼 경찰과 군대를 함께 통솔하여 테러 사건의 용의자들을 확보하고, 보고가 들어온 아세르 가문 화물 열차의 행방을 추적했다.
그럼에도 플라이트 평원에까진 기사들을 파견하지 못했다.
룬데인 전체가 다 뒤흔들리는 엄청난 균열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도무지 빼낼 수 있는 인력이 없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은 오히려 둘째 날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을 순간 도래했다.
지나치게 열이 올라 아서의 반응이 완전히 소실되었을 때였다.
아서의 침상을 지키던 타디우스가 사색이 되는 것과 동시에, 이른 조종이라도 울리듯 동시다발적인 균열이 룬데인을 죄어 왔다.
그 참상은 이전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으로, 알비온의 수도를 지도에서 사라지게 할 기세의 모래 폭풍이 불안하게 깜짝이는 스텔라 방벽을 두드려댔다.
세상의 종말이 다가온 듯했다.
모든 인력을 다 끌어모아도 대응이 불가능한, 압도적인 재앙.
그 폭풍 속에서 부하들의 이륙을 성흔으로 보조하던 첼은 오로지 조사 기록과 증언으로만 알 수 있던, 동남 전쟁 시절의 암흑을 떠올렸다.
한 도시를 집어삼킬 듯 기어올랐다는 그 죽음의 어둠. 그때에는 클레이오가 ‘낙원의 들판’으로 어둠을 막아내고 세상을 정화했다.
그가 해냈던, 그가 자신들을 위하여 했던 모든 일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이었는지, 첼은 지금에서야 실감하는 것이다.
이 하늘을 뒤덮은 하얀 모래의 그림자 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첼의 비행복 주머니에서 포옹의 반구가 소리를 냈다. 기사와 장교 모두 지참한 포옹의 반구를 통해 이시엘이 명령을 발신한 것이다.
‘06시 현재를 기점으로 1급 위기 상황을 발효한다. 절차에 따라 행동하기를 바란다.’
2급 위기 상황 이상이면 준전시 상황으로 수도방위대 학교 학생들까지 전원 소집되는데, 지금 이시엘이 내린 위기 상황 등급은 1급이었다. 수도가 침공당한 전쟁 때와 마찬가지란 뜻이었다.
그 상황에서, 리피 안젤리움의 실종을 가장 먼저 알아챈 이 역시 첼레스테스였다.
리피가 비상소집에 응하지 않는다는 다급한 연락을 받고 안젤리움의 타운하우스로 날아간 — 성흔을 이용해 지붕들을 뛰어넘었으므로, 거의 날아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 그녀는, 텅 빈 방과 남겨진 편지를 읽고서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서는 중태.
클레이오와 리피는 탈출했다.
평소라면 이시엘이 사령부를 지키고 아서가 현장에 나서거나, 아서가 사령부를 지키고 이시엘이 현장에 나설 수 있었는데 지금은 여의치가 않았다.
아이샤와 윌헬미나라는 항공대의 에이스를 파트너로 삼아 로사 페히테 교수와 미치슬라프 페히테 기사단장이 용맹이 용전을 벌이고 있으나 두 사람의 소드마스터로도 균열을 완전히 제거하는 건 불가능했다.
제베디 퓌시스는 클레이오의 의식 실패 이후로는 애초에 므네모시네의 문 앞, 스텔라 방벽의 구동부를 떠난 적도 없었다.
첼의 은빛 눈 안에서 평원이 무너지고 하늘과 땅의 경계가 뒤섞인다. 그 묵시론적 광경은 일종의 신의 분노처럼 느껴졌다.
항공대 대장이 상념에 잠겨 있던 건 다만 몇 분간이었다. 거주자 없는 안젤리움 타운하우스에서 사령부로 복귀하며 그녀는 추가적인 명령을 내렸다.
항공대원들은 전원 빠짐없이 기사를 싣고 균열 현장에 나가 있으니, 연습기를 모는 수습 비행대원 중에서라도 자원자를 받아 서남으로 보내란 명령이었다. 명령의 목표는 레티샤 안젤리움의 귀환이었다.
다행히 자원자가 있었다. 수도방위대 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학도군 이사벨라였다.
이륙 시엔 첼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대기마저 사납게 요동치는 도중 비행을 하는 건, 이사벨라에겐 목숨을 건 도전이었다.
그러나 기사이자 항공대원으로 살기로 작정한 그녀에겐 할 만한 일이었고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몇 시간 후, 이사벨라는 서남의 중간 기착지에 머무르던 레티샤를 무사히 수도로 실어왔다.
이미 구식이 된 CC-7 기체에서 뛰어내리며 레티샤가 머리를 흔들었다.
‘으악, 시발, 옛날에 프란 데리고 핀토스 산맥 넘을 때도 이랬겠지! 토할 만했음. 벨라? 너 운전 엄청 과격하게 한다!’
‘항공대 지망이라서요!’
‘아, 왜 꼭 저런 애들만 항공대에서 받나 몰라. 그래서 첼, 어디로 가면 되지?’
‘여기. 다. 전부. 소드마스터 레티샤가 필요하지.’
‘좋아!’
첼은 직접 항공기를 몰아 레티샤를 데리고 폭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레티샤는 서클을 펼쳐 가장 가까운 곳부터 차근차근 균열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어차피 수도 전체가 전방위적으로 공격받고 있었기에 어디에서 시작하든 상관없었다.
아침이 완전히 밝아올 때에는 곳곳에서 환호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균열이 잦아들고, 아서가 깨어났다.
레티샤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첼의 항공기 뒷좌석에서 그대로 뻗어버렸다. 그 밤의 균열은 소드마스터마저 기진맥진하게 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땀에 젖은 고글을 벗으며, 포옹의 반구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을 듣던 첼은 명확한 의구심을 가진다.
균열이 잦아들고 아서가 깨어난 것인가, 아니면 아서가 깨어나면서 균열이 잦아든 것인가?
기묘하게도 거기엔 이상한 상관관계가 느껴졌다.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일이나, 어째서인지 진실이라는 예감이 드는.
어쩌면, 아서의 생명은 이 세계와 조응하고 있는 것인가? 세계의 안위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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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는 아침에야 의식을 되찾았다.
9레벨이라는 전무후무한 레벨을 가진 기사로.
그를 진찰한 타디우스 예츠켈 마법단 단장은 놀라움에 눈물마저 흘렸다.
‘이것은 알비온의 축복입니다. 시련만큼의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경하드립니다, 전하.’
그러나 그 성취는 기쁨 속에 기려지지도, 당사자와 측근들을 들뜨게 하지도 못했다.
룬데인과 플라이트 평원을 잠식하는 균열의 소식 때문이었다.
그나마 수도방위대의 기사와 마법사들, 자원봉사자들 모두가 결사의 각오로 지켜낸 룬데인의 균열은 스텔라 방벽에 힘입어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아서는 일어난 그대로, 삐죽 선 머리와 초췌한 수염을 달고서 갑주를 갖춰 입은 뒤 검과 방패를 집어 들었다.
‘지금 당장 플라이트 장원으로 출발하겠어. 첼, 항공기를.’
‘알겠어.’
‘이후의 수습은 종전대로 키시온 백작에게 일임한다.’
‘명 받들겠습니다, 주군.’
아서가 깨어났단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달려온 첼 역시 신속하게 움직였다. 출격까지는 14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항공기를 파마궁 앞마당에 착륙시켜두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서가 첼레스테스의 항공기에 올라타 하이드-와이트 저택에 도달했을 땐 이미 순백의 모래가 모든 것을 삼켜버린 후였다.
9레벨 기사의 탈인간적인 감각으로 감지해도, 그곳 컨트리하우스에는 어떠한 생명 반응도 없었다. 정원의 나무 한 그루조차 살아있지 않은 공허한 죽음의 대지가 되어 있었다.
뒤늦게 내리꽂힌 무수한 진격의 원이 평원 일대를 안정화시킨 건, 컨트리하우스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군용 차량을 이용해 간신히 대피한 니네베 연대의 소대와 가지 않으려 했으나 병사들에게 제압당해 목숨을 건진 하이드-와이트 가문의 집사가 하이드-와이트 백작 내외의 최종적 목격자가 되었다.
최초의 9레벨 기사는 수도를 모두 덮을 면적의 검격 범위와 대마법사에 지지 않을 에테르 유량을 소유하게 되었음에도, 시간에만은 무력했다.
그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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