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46
신명 재판 (1)
그러므로 아서는 아델라인과 베르너의 유일한 자녀와 마주하자, 기묘한 원인의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사람은 본래 시간을 돌릴 수 없는 게 당연한데도.
“프란시스, 너였구나.”
아서와 대면했을 때, 프란은 간이 역사의 나무 벤치에 기진맥진해 있었다. 그는 아서와 대면하자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첼이 보기엔, 극도로 피곤한 상태만 아니었다면 곧바로 곱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을 게 분명한 표정이었다.
심지어 오늘의 아서는 국왕처럼 처신하지도 않고, 그냥 수도방위대 학교의 동기처럼 프란의 이름을 불렀다.
‘아서 자식 겉만 멀쩡하지 않은 게 아니라 정신도 없는 거 같은데, 제길.’
첼은 저런 상태의 아서와 그런 아서를 상대하는 프란의 대화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돼도 논란이 일 것을 의식하고, 병사와 수행원들 모두를 역사 바깥으로 물렸다.
그녀는 부러 밝은 어조를 유지하며 짝, 박수를 쳐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플라이트 평원의 균열은 완전히 봉합됐습니다. 힘든 밤을 보냈으니 다들 홍차에 비스킷이라도 들고 눈을 붙여요. 폐하께서는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이쪽은 제가 살피죠.”
그리고는 낡은 간이 역사 입구를 등지고 문을 지켜 섰다.
첼이 판단한 그대로 프란은 거의 입술을 뗄 힘도 없는 상태였다.
지난 하루는 프란에게도 너무나 길었다. 소드마스터도 아닌데, 만 이틀 이상을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깨어 있었다.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 보자.
균열로 인하여 선로가 사라지고, 평원으로의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확정될 때까지 프란은 버텼다.
객차 내부 사람들도 동의한 일이었다. 굳이 이제 와서 아서 왕의 병사들에게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태가 급변하자 그런 시간 끌기는 모두 무용해졌다.
균열이 확장되는 동안에는 열차를 회차 지점으로 끌고 가 방향을 돌렸고, 균열이 진정된 뒤에는 오래 달려온 사람들을 쉬게 해주려고 동료들과 동분서주했다.
프란은 젊고 건장한 자들 위주로 남은 식량과 생필품을 옮기도록 하고, 기력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도와 임시로 역무원 숙소와 역에 딸린 자재 창고를 활용해 임시 숙소를 꾸렸다. 그나마 기후가 온화한 시기라 다행이었다.
자연히 차량의 문은 열 수밖에 없었고 병사들이 찾으려는 사람이 누구였든 간에, 그들은 성과를 얻지 못했다.
프란이 가까스로 제 몫의 일을 끝내고 나서 아서가 이 간이역으로 온 것이었다.
지쳐있기는 소드마스터도 마찬가지였다.
아서는 넋이 나간 듯, 총기가 바랜 모습이었다.
“안젤리움 자작에게 리피의 편지가 갔던 건 알았는데, 리피도 레이도 그리로 가지는 않았더라고. 레티샤는 펄펄 뛰면서 리피를 찾아보려 했지만 이제 그 둘은 더 이상 서로의 위치를 감지하지 못하니까. 잔상복원을 해봐도 레이의 외곽의 우편 도로부터는 더 추적이 안 돼.”
“혼잣말인가, 리오그난? 잔상복원은 또 무엇이고. 네가 뭐라 하든 대답은 하나다. 나 역시 아세르의 행선지는 모른다.”
아서는 흐르듯 본심이 새 나오던 입술을 잠그었다.
프란이 클레이오의 행방을 알든 모르든, 답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그의 의지에 반하여 답을 얻어내는 일은 불가능했다.
안경 너머의 회색 눈은 그저 냉담하고 완고했다. 과소한 부분도 과도한 부분도 없이 평소와 같았다. 분노나 슬픔의 기색은 전연 찾아보기 어려웠다. 부모의 부고를 들은 직후인데도.
분명히 병사들은 군용 포옹의 반구를 통하여 들어온 컨트리하우스의 현 상황을 프란에게도 전했다고 했다.
프란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살펴보던 아서는 깨닫는다.
그는 슬픔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밀한 슬픔을 아서와 공유할 뜻이 없는 거였다.
그 깊은 회색 눈 안에서 흔들리는 비통함은, 오로지 초인적인 자제심으로 갈무리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프란이 먼저 운을 뗐다.
“그보다 저 천여 명의 이주자들을 정착시킬 플라이트 평원의 임차권 문제를 얘기해봐야 할 것 같군. 평원은 모래무지가 됐고, 백작 내외는 함께 사망했으니 논의가 필요하다.”
“일단 기술적으로는 네가 플라이트 평원과 장원의 유일하고도 정당한 상속자야. 잘 알겠지만 이 상황에선 임차권이 아니라 소유권이 네게 주어지게 돼.”
“상속은 포기한다. 작위는 반납하겠다.”
“지금까지는 귀족의 작위 반납에 관한 전례나 규정이 없어. 그건 긴 법정 싸움이 될 거야.”
“안다.”
“그러면 수도를 떠난 사람들은… 이렇게 하자. 이 역사 부근은 왕실 직할령이니 활용할 수 있을 거야. 평원엔 관개 공사가 필요하지만, 역사부터 동쪽으로 뻗은 대지엔 지하수가 풍부해. 식수를 확보하는 것도 가능하고, 저 정도 인원이라면 농사를 지을 수도 있겠지. 건축 전문 마법사들을 불러서, 추워지기 전에 거주용 주택 단지를 지을 수 있어.”
마법사들이 건축에 임하면 공사 기간이 단축되는 건 사실이지만, 공급보다 수요가 월등한 고급 인력을 이런 외진 지방까지 끌어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엔 의무 복무 중인 마법사를 동원해야 하고, 그러려면 왕명이 내려져야 한다.
프란의 사나운 눈매가 조금 더 치켜 올라갔다.
“의회의 동의 없이 네가 그런 명령을 내리겠다고?”
평민원 의원들은 저 이주자들에게 심정적으로 원망을 품은 자들이 많았다. 그러니 국왕의 직권 명령이라도 내려야 일이 신속하게 진행될 것이다.
“다음 회기까지는 국왕의 직권 권한을 유지하기로 했으니까.”
“네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자, 행사 횟수가 제한적인 그 귀중한 권한을 왜 날 위해 허비하려 들지? 하이드-와이트 백작 내외가 균열 속에서 사망한 현재의 상황이, 네게 얼마만큼의 곤란을 야기할 수 있을지 이해를 못 하는 건가?”
프란이 아델라인이 긴밀히 연락하고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또한 백작마저 여기서 사망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아서에게 반기를 든 백작 내외가 균열로 사망했고 9레벨 기사인 왕이 그들의 구명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마음먹고 가공하면 흠 한 톨 없던 아서의 이미지에 상처를 낼 수 있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아서의 알려진 행보는 지나치게 올발랐다. 도덕성에 대한 기대가 큰 존재는 그만큼 흠집을 내기도 쉬웠다. 깨끗한 바탕 위에선 잉크 한 방울도 튀어 보이는 법이니까.
프란은 그런 종류의 술수를 선호하지 않았으나, 아서의 반대파들과 숨죽인 귀족들에게는 환호성을 지를 만한 재료였다. 일이 이렇게 흘러왔으니, 사태를 촉발한 키어 스미스 의원사무실 테러는 별로 중요한 기사거리조차 되지 못할 테니까.
“알지. 그렇지만 행정적 명령만으론 민심을 통제할 수는 없었던 탓에 저 사람들이 여기까지 내몰린 것이니, 내겐 책임이 있어.”
“권리를 내려놓는다는 건 책임을 내려놓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스스로 말하면서도 논리적 오류를 파악하고 있는 듯한데, 왜 그런 소릴 내게 하나?”
아서는 망설이듯 입가를 달싹거리다가 깊이 숨을 내쉬고는, 어렵게 대답했다.
“하이드-와이트 백작 내외는 나 때문에 죽었으니까.”
여차하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생각으로 바깥에서 귀를 곤두세우고 있던 첼은, 그만 쥐고 있던 바스타드 소드를 놓칠 뻔했다.
아서는 말 한마디로, 부모의 죽음 앞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프란과 담대한 항공대장을 놀라게 하는 업적을 이뤄낸 셈이다.
프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했다.
“왕이 곧 국가라 하더라도 그건 지나친 과대망상이다. 균열은 자연재해다. 왕의 신체가 곧 국가의 물리적 등가물이라는 오래된 관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인가.”
프란이 역정을 내자 아서는 오히려 불안이 잦아드는 듯 얼굴이 평온해졌다.
“그걸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군. 그래. 역시 프란 너는 사태를 정확하게 직관하는구나. 레이가 항상 널 엄청나게 높이 평가하던 건 다 이유가 있어서였겠지.”
아서의 입에서 먼저 클레이오가 언급되자 프란 역시 더 이상 에두르지 않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너는 아세르를 도주시켜 네 뜻을 거스르려 한 내게 복수심을 가졌나? 제왕으로서 자비를 베풀어 복종시키는 것으로 나를 처벌하려 하나?”
결국 프란은 선을 넘어 본질에 닿았다.
클레이오 아세르가 룬데인을 떠나도록 도운 것은 자신이다.
아서는 당장 프란을 입건하거나 북문 지하로 끌고 들어가는 행태를 보일 인간이 아니었다.
대체로 호인인 근육질의 검사로 행세하지만, 아서의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 안쪽에 숨겨진 것은 지독한 인내심과 예리한 지략이다. 그는 어떤 일격이 가장 효과적일지를 아는 자였다.
“아니. 오해하지 말아 줘, 프란. 내가 원망을 가진 대상은 오로지 신들이다. 선의를 가졌으되 전능하지 않고, 피조물들에게 자유를 주려 하나 자의적으로 제한을 두고야 마는 그들의 행태이다.”
프란의 미간에 팬 골이 깊어진다.
또였다. 또 신의 문제였다.
아세르 공작과 국왕 간의 대립, 그리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대관식의 정황은 프란도 알았다. 그러나 아서와 클레이오 사이에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항 이상의 사정이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필시, 신과 유관한 일이다.
실존을 부정할 수 없는 신. 기적을 보증하며, 신녀를 문에 붙박이도록 하는 신. 두 세계를 넘나들도록 하는 힘을 가졌다 주장하는 존재.
“기억해, 프란? 학창 시절에 나랑 한 이야기. ‘세상의 모든 일은 대가를 요구한다.’는 원칙 말이야.”
프란이 히드라의 독을 조사하기 위해 수도를 떠나기 전, 977기와 유급생으로 룬데인을 휘젓고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그래. 너는, 왕위를 유지하든 하야를 하든 피치자의 뜻에 따라 처신하겠다는 이야길 하는 3왕자였지.”
“기만적일지도 모르지만,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 왕조는 영원할 수 없을 것이며 통치가 오로지 왕의 권한이어서도 안 되지. 시대의 요구가 변했으니까. 그러나 알비온의 사람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왕을 살해하거나 그의 신성을 완전히 박탈할 수는 없을 거다. 지금 이대로라면.”
아서의 말은 맞았다. 그가 권한을 내려놓고 혈통권을 부정한다 하더라도, 아서 본인은 위대한 기사왕으로서 영예와 긍지의 상징처럼 기려질 것이다.
“사실이기에 더욱 끔찍하게 오만한 말이로군.”
“아니야. 그 뜻이 아니야. 이건 제왕의 오만한 선언이 아니라, 수인(囚人)의 한탄이라는 걸 너는 이해해야 해. 프란시스. 내 목은 베일 수 없는 것이란 걸 알아줘.”
“그게 무슨 말인가?”
스스슷 스읏—
아서는 팔을 뻗어 사자의 검을 실체화시켰다. 금빛 광채 가운데 빚어지는 신검은 결코 닳지 않는 날을 날카롭게 빛냈다.
손안에 꼭 맞는 검을 쥐고서 아서는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저 자신의 목줄기를 그었다.
[강화]를 두르지 않아 맨 것으로 드러난 피부와 혈관, 힘줄은 신검의 날을 견디지 못하고 갈려 끊어졌다.9레벨의 전무후무한 검기는 이 신물에 걸렸던, ‘리오그난의 인물은 벨 수 없다’는 원초적 제약마저 파훼해 버렸다.
————————————!
그리고는 무음의 진공이다.
그와 동시에 세상은 양감과 질감을 잃고, 검고 흰 명암으로 환원된다. 세상 전체의 빛이 완전히 꺼져 흑암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가, 다시 깜빡, 되돌아온다.
뜨거운 피가 튄 판별의 안경 너머에서 회색 눈이 크게 뜨였다. 왕의 피를 뒤집어쓴 채로 프란은 불멸의 실체를 목격한다.
후각을 완전히 압도하는 피비린내가 풍기는 가운데 꼿꼿이 선 아서는 망토 자락으로 목덜미를 닦아냈다.
피에 젖은 칼라 아래 드러난 강건한 목에는 그 어떤 상처도 없었다. 건강한 맥박이 뛰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의 생명과 세계는 연동되어 있어. 하나, 나는 불멸성을 가지고 있어도 세계는 불멸치 않지.”
프란은 부모의 죽음에 관해 들었을 때에도 보이지 않던 충격 반응을 보였다.
단단하지만 작은 몸이 경련했다. 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꽉 문 턱에선 하악이 두드러졌다.
그는 왕의 잘린 목이 눈앞에서 붙는 것을 보았다.
그는 관찰력이 좋았다. 이 설명 불가능한 기적에 마법은 개입하지 않았다. 여러 번 개량을 거듭한 판별의 안경은 사람이 벌이는 사기술이나 에테르로 가능한 일 상당수를 규명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가를 알았고, 스스로의 판단력을 신뢰했다.
아서는 죽지 않는 신체를 가진 자였다.
그리고 그 명제는 너무나 많은, 프란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실들의 근거가 됐다.
그러나 그는 제가 원치 않는다 해서 명료한 증거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프란시스, 내 사죄는 유효해. 내가 9레벨에 오르는 동안 에테르 그릇이 완전히 재구성되었고, 내 육신이 무너지는 사이 세계 역시 무너져 광범위한 균열이 일어났던 거다. 내 등줄기가 부서졌다 붙는 동안 평원 역시 반으로 갈렸던 거지. 나는 곧 세계이니까.
그러니까. 신의 지배를 벗어나기 전까지 ‘알비온의 왕’은 죽지 않는다. 그건 내가 통치의 권한을 다 내려놓거나, 세상의 모든 사람이 더 이상 왕을 원치 않는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 지독한 연계를 깨고, 나를 살다가 죽는 왕으로 만들기 위해 클레이오 아세르는 세계를 넘어가려 한 거다. 신들의 힘을 빌리는 의식을 통해서. 그게 대관식과 대관식 이후 한 달 동안 일어났던 일의 실체야.”
“더 상세히 설명해라. 아서 리오그난.”
그건 아서가 프란에게서 가장 듣고 싶던 소리였다.
왕은 사자의 검을 다시 팔 안으로 갈무리하고 역사의 벤치에 걸터앉았다. 밤을 새우는 이야기꾼들처럼 목을 가다듬고서 그는 말한다.
“‘이것은 참으로 긴 이야기. 신이 쓰는 인간의 서사시’이지. 너는 이 이야기를 반드시 들어야만 해.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넌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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