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54
반딧불의 잔영 (2)
클레이오는 백작 내외가 어떻게 죽었는지 소상하게 알았다. 그는 편집자 권한을 쓸 수 없는 데 비통함을 느꼈다.
키시온 자작 때와 마찬가지였다. 시간을 되돌리는 힘을 가지고도 친구들의 부모는 누구 하나 구하질 못했다.
“클레이오 아세르, 너는 또 시간을 되돌리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는군. 그래서 그렇게 죄책감 어린 눈으로 날 보는 건가? 너도 아서 리오그난도 참으로 비슷한 인종이다. 내 부모의 사망은 너희의 책임일 수가 없는 일인데, 무의미하게 책임 소재를 확장하려 든다. 정신 차려라. 너희는 신이 아니므로, 그것은 너희의 죄가 될 수 없다.”
프란의 어조는 차갑지만 클레이오는 그 말에 담긴 본질적 위로를 이해해서, 거의 수치심이 들려고 한다.
“하이드-와이트 백작 부인은 그녀다운 방식으로 존엄을 지킨 것이고, 나는 그 의사를 존중하고 싶다. 그건 결코 너희의 죄가 될 수 없는, 그이의 선택이다.”
니네베 호수에서 깨어났을 때 모든 일은 다 끝나버린 뒤였다. 그제야 클레이오는 프란의 생을 지배해왔던 뒤늦음에 관해 생각하게 됐다.
먼 옛날 박람회의 밤에 아주 잔뜩 취해서야 겨우 입에 담을 수 있었던, 그의 인생에 새겨진 후회에 관해서.
그는 그 모든 일을 다 겪고, 심지어는 전향자의 오명을 받고도 아랑곳 않고, 자신이 선택한 방향을 향해 단단한 걸음을 옮긴다.
도무지 자신으로서는 따라 할 수도 따라갈 수도 없는 행보였다.
프란 또한 컵을 내려놓고서 진지하게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는 클레이오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를 므네모시네의 문과 같은 차원에서 격리하는 시험에 동참해 주겠나?”
“아마 안 될 거야.”
‘약속’은 벗을 수 없는 것이었다. 피부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붉게 닳아져도 실체 없는 반지는, 오로지 클레이오의 눈에만 보이는 가느다란 금속은 검지에서 빠져나오질 않았다.
“너 역시 아서 리오그난의 성흔에 대해 알잖나. 오래전 극장에서 펼쳤을 적엔 깨닫지 못했지만 그 공간은 독특하고 고유하며, 완전한 분리를 일으키더군.”
“하지만 그 안에서도 에테르는 쓸 수 있는데, 므네모시네의 문과의 연계가 끊길까?”
“너의 마법과 에테르는 전혀 통상적이지 않잖나. 세상의 갈라진 틈새로부터 이어진 거니까.”
“게다가… 그 성흔에 제한 시간이 있는 건 알지? 아서 본인도 반드시 함께 들어가야만 발동되잖아. 이 혼란스런 상황에서 아서가 세상을 떠나가 있는 게 가능할까? 분리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
“일단 해 보자. 시험을 해 보고 그 뒤에 논의를 이어보는 게 어떤가. 너의 격리 시험을 협상의 조건에 넣은 건 나였다. 부디 받아들이도록 해라. 여기서 논쟁만 벌이는 것이야말로 무용하다. 그 맹목적 광신을 내려두고, 좁아진 시야를 넓혀서 한 번만 재고해 봐라, 클레이오.”
클레이오는 습관적으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꽉 붙들고서 말했다.
프란이 제시하는 가능성은 이제까지의 들은 그 어떤 설득보다도 명확하고 분명해서, 클레이오를 동요시켰다.
파리하게 질린 클레이오를 보며 프란은 의식적으로 표정을 풀었다.
“수도를 떠날 적에 너는, 왕의 숲에서 세상의 시간을 되돌려 나를 살렸다 했지. 아서 역시 너의 되돌림에 대해 증언하더군. 한 명이 말한다면 불안정에서 기인한 착란일 수 있지만 두 명이 그리 말한다면 재평가할 만한 안건이 되지.
진실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했다. 나는 왕의 목이 잘렸다 붙는 것을 보고, 그의 생명이 끊이지 않게 됐음을 알고, 오로지 알비온에만 남은 므네모시네의 문이 하는 역할을 관찰하며, 문에 결합된 채로도 여전히 살아있는 대주교의 생체 반응을 수집했다. 그래. 증거로 증명된다면 신을 믿어야 할 수밖에.
나는 이 세상에 사람의 의지만으로는 변경키 어려운 조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네 말의 진실성을 의심했던 것을 사과한다.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는 살아있어서, 살아서 세상을 바꿀 기회를 얻은 것을 감사히 여긴다.”
식은 잔을 치우고 숯을 넣는 레인지에 주전자를 데워 다시 커피를 따라주는 프란은 선선한 태도였다.
어제 만났다 헤어진 친구처럼 담담한 기세엔, 옅은 친애마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따듯해진 잔을 양손으로 쥔 클레이오도 이제는 그 태도를 감지할 수 있었다.
프란은 제 몫의 커피를 마시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손등의 성흔을 툭 드러냈다.
최근에는 격하게 사용하여 평소에도 붉은빛이 가지런하게 감도는 나팔의 윤곽이 선명했다.
아마도 평생 썼던 것보다, 최근 몇 달간 쓴 일이 훨씬 많을 것이다.
“이 역시 여신으로부터 기인한 힘이라고 알려져 있지.”
“성흔…이니까.”
클레이오는 자신 역시 손등 위에 여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문장을 새긴 이로서 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신이 잠든 시대에 내게는 여전히 신의 힘이 있지. 설득과 선동의 힘이. 성흔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더군. 아주 강력한 권한으로, 인간의 의지를 추동하며, 시간을 개변하고, 새로운 공간을 조성할 수 있는 힘. 이걸 사람들은 성흔이라 부르지.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본 적은 없나? 어느 시점에 이르자 나는, 이 능력이 왜 성흔이라 불리는지 의문을 품게 되더군.
타인을 설득하는 말과 글의 힘은 어디까지나 나의 것인데, 왜 그것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숙고했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종인 적이 없고 양순한 신도였던 적도 없다. 그런데도 그 많은 추종자들 대신에 왜 내게 ‘신의 선택’이라 불리는 성흔이 내렸는지.
처음부터 다시 돌이켜보자. 나는 신에게 반하건만 어째서 신의 힘을 쓸 수 있는가? 애초에 이것은 신의 힘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가능성이었다면?”
“너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 저토록 명백하고 분명한 신의 힘이 여전히 세상에 끼치고 있는데.”
“그걸 명백하고 뚜렷하다고 느끼는 것이 너의 병증이다. 아서 리오그난이 주창했듯 신은 참으로 무력해졌다. 사자인 너를 희생해야만 겨우 세계를 지탱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가. 들어 봐라. 오히려 성흔이라는 것은 인간이 타고난 천품을 ‘성흔’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하고 확정하려는 제한이 아닌지.”
명명하는 것은 정의하는 것이며 한정하는 것이다.
프란은 이런 가설을 클레이오에게 들려주었다.
그의 타고난 설득력을 성흔으로서 명명하고 확정한다면 오히려 한계를 만들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특히 스승의 죽음과 엮인 죄책감과 연계시켜 그 힘을 축소하려 한 것이 아니었나, 그는 생각해본 것이다.
“이 힘이 나의 가능성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신이 이름을 부여하고 원천 역시 신에게 있는 것이라 규정하는 것이 바로 성흔의 역할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볼 수는 없겠나?
아서 리오그난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전경화 성흔은 그가 가진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능력을 구체화시킨 것이 아닌가.
그건 신의 힘인 동시에 그 자신의 힘이다. 그래서 나는 네게 분리의 실험을 권유하는 거다. 성흔이란 건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이제까지 복합적으로 활용할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인원수의 제한이 없는 전경화는 재난 상황에서 인력을 구명하는 데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아서 본인이 함께 넘어가야 한다는 문제 때문에 이제까지는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지만, 프란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려 들었다.
신이 제한했든 부여했든 인간에게 주어진 힘이므로 인간의 의지대로 쓰겠다는 뜻이다.
클레이오는 감화되고 놀라고 당황한다.
“저 바깥에서 날 어찌 부르든 상관없다. 진실은 하나고 본질도 하나다. 왕권에서 신수를 제하는 일은 토대를 허무는 작업이고, 그 과정에서 어떤 우회를 해야 한들, 내게 허락되었던 결벽을 모두 더럽혀야 한들 상관이 없다.
지금 여기에서 아서 리오그난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신과 대결할 수 없지. 그렇다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싸운다. 그 뒤에, 그리고 그런 다음에 내가 할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란시스 가브리엘 하이드-와이트는 이 세상에서 신의 힘을 몰아내는 순간부터, 아서를 실각시키려 할 것임을 천명했다.
다만, 그저 신의 지배하에서 인간의 해방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급 투쟁이 가능한 조건을 조성하기 위해 그 모든 오명을 뒤집어쓴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클레이오는 울고 있었다. 프란은 클레이오의 눈물을 닦아줄 의사가 없었다. 그는 여전하고도 일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하여 소수는, 저 높은 곳 신의 시점에서 발휘되는 힘은 다수를 영원히 압제할 수 없을 것이다. 권능을 잃은 신은 죽거나 죽임당할 터이므로. 그것이 바로 인류가 맞이할 해방의 단초이다. 나는 거기에서 내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신이 물러난 세상에서 인간의 역사를 쓸 것이라는 뜻. 아서가 패배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 자신의 길을 갈 것이라는 천명. 진정으로 두려움도, 희망도 없는 ― 낙관을 모르면서 끈질긴 의지.
이 순간 프란의 성흔은 제자리에서 찬연한 빛을 발한다. 언젠가 해방될 인류의 발 앞을 밝힐 작은 반딧불이의 빛이다.
이 강인함이야말로 인간의 것이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천 일이 남았다면 그 천 일 모두를 투쟁에 바칠 자. 천 년을 산다 해도 그 의지가 천 년의 첫해와 같을 자.
클레이오는 그 찬란함이 너무나 눈부셔서 차마 고개를 들 수조차 없다.
***
1899년이 이틀 남은 날, 빛의 축제가 열리지 않은 19세기의 마지막 주에,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후의 회의가 열렸다.
찢겨져 드러난 세계의 틈새 앞에서.
그건 므네모시네의 문 앞에서만 가능한 결정이었다.
대륙 곳곳에서 당도한 사자들이 회담의 참관인이 되었다. 먼 과거에 문이 닫혀버린 나라들로선, 이렇게밖에는 참여할 수 없게 된 사안이었다.
그건 참으로 대단한 부조리였다.
원치도 않았건만 졸지에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 알비온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자연적으로 결정으로부터 밀려난 타국의 사람들도 똑같이 생각했다.
아서와 클레이오는 각각 알비온 정부와 신군의 대표로서 서로를 마주했다.
“프란시스가 할 실험에 응해주겠다고 했지요, 아세르 공작.”
“그렇습니다. 하지만 서류에 명시한 대로 실험에서 가설을 증빙할 만한 유력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을 경우, 의식을 허가해줘야 할 겁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서는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프란과 연습해본 대로 전경화의 성흔을 펼쳤다.
아서, 프란, 클레이오와 멜키오르 그리고 태서턴. 이제는 서로의 입장이 달라져버린 안젤리움 쌍둥이. 첼과 이시엘 모두가 아서가 조성한 공간으로 옮겨갔다.
“오전의 균열이 일어날 차례이고, 균열의 양상은 매일 평균값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1시간 후 균열 바깥으로 나갔을 때 평소와 관측 결과가 다르다면 이 격리는 유의미한 효과가 있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클레이오는 순순히 실험에 응했다.
키시온 영지의 여름 별장에는 한창 철에 맞춘 꽃들이 피었고, 초대객들 모두를 위한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제 아서가 전경화를 다루는 능력은 매우 능숙해서, 손님을 환대하기 위해 준비된 어트랙션 파크 같았다.
외국의 사자들은 실험보다도 아서의 성흔에 놀라며 아공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한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자연스레 손님들을 응대하던 아서가 손목시계를 쳐다보자, 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따스한 봄빛을 벗어나 본래의 황량한 겨울 들판으로 돌아왔다.
스스스스슷― 스으으으읏.
균열은 조금도 잦아들지 않고 수도의 남은 구간을 모조리 집어삼키고 있었다.
다리마저 모래에 파묻혀 기울어진 원탁에서 귀한 자기와 꽂아놓은 꽃들이 엉망으로 뭉개져, 낙하했다.
아서와 클레이오는 망설일 새도 없이 각자 엄청난 양의 에테르를 발출시켰다.
첼, 이시엘, 리피, 레티샤. 기젤라와 릴리안, 아이샤와 카스퍼. 미에츠와 다리아, 아레미스, 라이사, 로탄과 심지어는 태서턴까지.
회담장에 가까이 있었든 멀리 있었든, 원탁에 앉을 자격이 되었든 아니었든, 그 모두가, 연합 소속의 외국인들마저 전부 제각기 나름의 능력을 최대한도로 뽑아내며 균열에 대응키 시작했다.
류는 익숙한 연합 기사들을 이끌며 알비온의 기사들을 보조했다.
아서의 이형들이 균열의 가장자리에 나누어져 서서 범위를 줄여나가고, 클레이오는 공작의 완드를 떨쳐 좁아진 균열 위로 무지막지한 에테르를 퍼부었다.
항공대원들은 소속과 무관하게 들판에 세워두었던 비행기를 이륙시켰고, 첼은 그들 모두의 비행을 수호했다. 뒷좌석에 탄 기사들은 연신 찬연한 진격의 원을 퍼트렸고, 균열은 이 협공 앞에서 주춤거리며 멈춰 섰다.
위기 앞에서 그들은 대립을 멈추고 모두가 한뜻의 동료였던 때처럼 서로의 손발이 되어 움직였다.
새로운 양상의 균열은 오후가 되기 전에 완전히 진압되었다. 아홉 이형을 거두어 다시 한 몸이 된 아서는 땀에 젖은 머리를 넘기며, 상기된 어조로 말했다.
“레이, 너는 메이지 마스터고 나는 그랜드 마스터야. 우리가 힘을 모은다면 균열을 무력화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사람들을 구하고, 세상을 유지하고, 너 역시 이곳에 계속 머무르도록 우리는 잘 해나 갈 수 있어.”
공작의 완드를 스르르 흩어놓은 클레이오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아니. 우리가 항상 모든 균열에 가장 가까이 있을 수는 없어. 실험은 실패다. 나를 격리해도 균열은 그대로이고, 오히려 자극받은 듯 더 거대하고 급격해졌잖아. 나도 처음부터 봐 왔으니 알 수 있어. 이 균열은 인간의 힘만으론 절대로 수습될 수 없는 거다. 인류에게 희망 고문을 해선 안 돼.”
“희망 없이 산다면 그게 어떻게 삶이겠어?”
“완전한 해결책이 있는데, 인류 전체의 생애를 저울에 올리고 확률 모를 모험을 하는 건 불가능해.”
“레이, 우리는 신의 요람을 나설 만큼 팔다리가 커졌어. 위험 없이 어떻게 진보를 이룩하지? 대속은 답이 아니고, 희생 역시 그래.”
클레이오는 회담과 전투 내내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서는, 분노했다. 찌푸려진 미간이 깊었다.
“아서, 아서… 너는 신의 가호 속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실패를 모른다. 보상 없는 고통을 모른다.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완전한 나락을, 후회를 모른다.
물론 그게 네 죄는 아니지. 신은 그것을 모르도록 너의 과거를 지웠고, 나를 보내서 네가 그러한 인간성을 유지하도록 했으니.”
기울어진 탁자 앞에 앉은 멜키오르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여전히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가 하려던 말을 클레이오가 대신해주었기에 입을 열지 않아도 되었다.
클레이오는 생각한다. 그래. 그거야말로 내 죄고, 나도 너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았어.
마법사는 아서가 죽지 않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죽는 것 역시 두렵다.
대부분의 결정은 그런 사적인 감정으로 방향이 정해진다. 인류는, 개인이 품기에는 너무 광대한 단위이다. 그의 그릇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작고 저열하다.
어찌 자신이 아가페 따윌 논할 수 있을까. 악의 처단을 말할 수 있을까.
그저 얕은 성취와 도취적 사랑에 경도되어 나날을 지내왔을 뿐인 자신이.
“아서. 그래. 이젠 알겠어. 나는 프로메테우스 같은 전향적인 존재가 아니었어. 차라리 그의 형제 에피메테우스에 가까웠겠지. 오로지 이야기를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예언의 성흔을 가졌다는 신비를 두르게 됐지. 그러나 내 예상은 어긋났고, 여신의 역사 전체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되었다.”
“레이, 그렇지만 저 신들조차도, 미리 미래를 보는 건 불가능했잖아. 우리가 여기에 다다를지는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서. 더 이상은 안 돼. 길을 터 줘. 날 므네모시네의 문으로 보내라.”
“레이.”
클레이오는 필사적이고 거대하게 느껴지는 한 발을 간신히 더 내디뎠다. 아서의 등 뒤로 수도방위대 학교의 입구가 보였다. 저기, 학교의 숲 한가운데에 세상의 근원과 이동의 문이 존재한다.
마법사는 실로 오랜 세월 만에 불길한 예언자 노릇을 자처하게 된다.
“너야말로 들어봐, 아서. 균열은 내가 돌아가지 않는 한 영원히 지속돼. 전경화의 성흔도 도움은 안 됐지. 상존하는 멸망과 사는 건 인간에겐 끔찍한 일이 될 거다.
종국에는 너를 숭앙했던 자들이 널 저주하게 될 거야. 인간은 연약하단 말이다. 인간들 전부가 냉엄한 실존과 자비 없는 역사에 직면해야 한다면, 인류는 너를 증오하게 될 거라고!
너로 인하여 살 수 있었던 자들이, 자신들이 겪는 존재론적 고통의 대가를 네게 물으려 들 거다.”
클레이오는 헐떡이며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혀에 맺히지 못하고 흩어진 말들은 이랬다.
그자들은 네게 고통의 대가를 묻지 못한다면 너를 원망하며 사적 복수심을 품을 것이며, 마침내 이 세계가 모두 부스러지면 그들조차 없게 될 것이다.
너는 실패의 대가로서 받은 세계의 죽음을 기약 없이, 홀로 지켜봐야만 한다.
“절대 그래서는 안 돼.”
콰아아아아앙—
원탁으로부터 시작되어 수도를 모두 뒤덮는 크기의 마법진이, 영역에 속한 모든 사람의 몸과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클레이오는 울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지면 교전 시 판단에 착오가 생긴다. 그는 반드시, 20세기가 도래하기 전에 므네모시네의 문에 닿아야 했다.
그건 아서도 마찬가지이리라. 신으로부터 환생했든, 본래부터 인간이었든 간에 아서의 환경을 이루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죽어 나가고, 마침내 너는 완벽하게 혼자가 된다.
클레이오는 꿈과 예언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했고, 사실상 그 세 가지가 마법사에겐 구분되지 않는 사항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그냥 단순히, 공작의 완드를 크게 휘둘러 제 에테르를 세상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퍼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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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은 잦아들었으나, 결렬된 회담은 결국 신군과 알비온군의 전투로 귀결되었다.
칼의 대화.
신화 같은 전사들의 대결로 표현되었던 분란이 이전의 태서턴-미에츠 전투라면, 이번엔 일부만이 남은 룬데인 주변의 지형을 모조리 평탄화하는 재해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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