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6
신수(神授)의 왕권 (2)
왕실 자문위원회는 귀족원 건물에서도 가장 전망이 좋은 회의실에서 열렸다.
왕세자 집무실과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는데도, 꾸며놓은 모양새는 천차만별이었다.
붉은 비단으로 벽을 대고, 금으로 장식한 회의실 가운데에는 커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타원형 탁자의 넓은 면에는 한 면당 10석씩, 양면 합쳐 총 스무 개의 위원석이 준비되어 있었다.
스무 명의 왕실 자문위원은 귀족원에서 10명, 평민원에서 10명을 뽑았다.
평민원, 귀족원에 더불어 3분의 1의 의결권을 가진 국왕의 선택에 객관성을 더하기 위해 존재하는 위원회라고, 원고엔 쓰여 있었다.
‘하여간, 묘한 나라라니까. 징세권이 대부분 의회로 넘어갔으니 완전히 근대 국가인가 하면 아직도 국왕의 정치적 권한이 남아있고.’
테이블의 좁은 면, 가장 안쪽 상석에 우단을 씌우고 금으로 사자를 조각한 의자가 왕의 자리였다.
다만 멜키오르 왕세자는 아직 왕이 아니었으므로, 상석 오른편에 놓인 의자에 따로 앉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왕의 보좌가 멜키오르를 위해 준비된 것임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멜키오르에게 딱 맞춤한 연극무대 같이 생겼잖아.’
의회 시종의 안내를 받은 클레이오는 임시 참석자를 위해 준비된 벽 쪽의 벤치에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테이블 왼편의 첫 번째 의자, 평민원 의장의 지정석이 가장 먼저 주인을 찾았다.
“비튼 의장, 오늘도 걸음을 서둘러 주셨군요.”
“평안하셨습니까, 왕세자 저하. 위원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다리가 불편한 탓에 의자 옆으로 지팡이를 걸쳐 놓은 반백의 남자가 바로 그 벤자민 비튼인 모양이었다.
수수한 외모였지만 강직함과 청렴함이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저 사람이 16년째 평민원 의장을 차지하고 있는 정치가랬지. 철강 산업에서 3대째 부를 쌓은 비튼 회사의 차남이기도 하고… 나중엔 아서를 지지해 줄 사람이지.’
평민원 의장이 금수저인 건 당연했다.
말이 좋아 평민원이지, 100석의 선출직 의원직 역시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날름 차지했다.
재산만으로 따지자면 귀족원을 채운 100명의 귀족들이 평민 부르주아보다 더 부유하지는 않았다.
영지에서 나오는 지대가 줄어들고, 상업 활동으로 얻는 수익이 더 커지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중앙정부에 납세하는 세금의 규모는 부르주아나 귀족이나 비슷했기에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다 들었다.
클레이오가 그간 신문을 열심히 읽으며 알게 된 알비온의 정세를 되짚어보는 동안, 회의 시작 시간도 한참 지나버렸다.
왕실 자문위원회 위원장이자 귀족원의 의장인 크뤼엘 공작은 정시를 상당히 지나서야 느긋하게 나타났다.
그런 주제에 오자마자 뻔뻔하게 공격적 안건을 꺼내들었다.
“오레일스의 기차역 건설 시공기간이 늘어지고 있습니다. 원래 산출했던 금액보다 투입 자금이 크게 상승했어요. 과연 티플라움 광산을 위한 교통 설비에 그 정도 투자를 할 가치가 있습니까?”
클레이오는 귀를 바짝 세우고 회의 내용을 열심히 들었다.
‘알비온에서, 왕실 토지로부터 난 산물과 세금은 왕실의 것이랬지. 크뤼엘은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거고.’
왕실 토지로부터의 수익은 왕족의 품위유지비 정도인 금액이었기에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규모의 자금이 아니었지만….
‘대륙 유일의 티플라움 광산이 왕실 게 되면 왕실과 귀족원 간의 균형이 뒤흔들리지. 크뤼엘은 멜키오르가 그 광산의 권리를 독점하는 게 맘에 안 들 테고.’
어떻게든 숟가락을 들이밀려는 발버둥이 분명했다.
“옳습니다. 아직 티플라움의 가공의 난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국영 철도회사의 자원을 일찍부터 지나치게 투자하고 있습니다.”
크뤼엘과 마찬가지로 아슬란 파인 램즈데일 백작이 대머리를 번뜩이며 찬동했다.
그 꼴을 냉담한 표정을 한 비튼 의원이 노려보았다.
“글쎄요, 크뤼엘 공작. 지난 분기 동남 수비군의 추가경비내역에 비하면, 기차역 건설기간 연장으로 인한 인건비 상승 정도는 큰 낭비가 아닌 것 같습니다. 도대체 강을 거슬러 오르는 증기선이 왜 필요합니까?”
“클로토 강 너머 카롤링거 왕국 폭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오. 군사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렇게나 혀를 놀리는군.”
크뤼엘 공작과 비튼 의장의 말싸움이 격해지자, 뒤편 책상에서 회의록을 속기하는 의회 서기의 손놀림도 덩달아 빨라졌다.
개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멜키오르는 희미한 미소를 띤 채 그들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말이 국왕자문위원회이지, 이 테이블 역시 귀족원과 평민원이 부딪치는 전장인 게 분명했다.
‘필리프 왕이 너무 오래 앓아서 귀족원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원고에도 쓰여 있긴 했지만… 국왕 대리를 앞에 두고도 개판이네. 쯧쯧.’
“자, 두 의장은 흥분을 좀 가라앉히세요.”
왕세자는 탁자를 짚고 일어나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저 가벼운 동작으로 보였지만 그의 진의는 따로 있었다.
급작스레 솟아오른 폭압적인 기운에 클레이오는 어깨를 움츠렸다.
멜키오르의 ‘고유 스킬’이 회의실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약속’의 「이해」가 자동적으로 발동되었다.
[고유 스킬: ‘□□□의 매혹’] [―사용자에게 강력한 매력을 부여합니다. 사랑과 찬탄을 얻도록 합니다.―사용자의 음성에 강한 설득력을 입힙니다.
사용자: 멜키오르 리오그난]
그와 동시에, 타인의 스킬을 무력화 시키는 ‘약속’의 「이격」 기능 역시 최대치로 발현되었다.
왼손 검지의 ‘약속’이 과부하를 일으키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손을 감싸 쥔 클레이오는 아픔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거의 만능으로 보였던 ‘약속’조차도 멜키오르의 능력 앞에서는 한계를 드러냈다.
“에테르 활성화 상태를 유지시킬 수 있다면 티플라움은 우리 알비온의 미래를 바꿀 광물입니다.”
멜키오르가 입을 떼는 순간 소란을 피우던 의원들 모두가 어린 양떼처럼 잠잠해졌다.
“이제까지의 투자는 결코 과하지 않습니다. 여기, 광산국에서 올린 서류가 있습니다. 사본을 각자 자리에 놓아두었으니 확인해 보시면 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무미건조한 정보 전달일 뿐인데도 멜키오르의 음성을 입고 나오는 말은 시처럼 감미롭게 들렸다.
“과연, 그렇군요.”
방금 전까지 날을 세운 것이 무색하게, 순순한 태도가 된 크뤼엘 공작은 얌전히 제자리에 앉았다.
제 몫의 광산국 서류를 들여다보는 태도가 학생 마냥 공손했다.
스무 명의 의원들은 제각기 앞에 놓인 보고서를 사락사락 넘기기 시작했다. 멜키오르의 말이, 신의 말씀이나 되는 것처럼 복종하여.
벽에 바짝 붙어 앉아 진땀을 흘리는 클레이오만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장난이 아니잖아. 저런 스킬을 가지고 설득하는데 누가 안 넘어가.’
전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이곳이 왕정제 국가가 아니고,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이 존재하는 시대였다면 그 누구도 멜키오르의 지위를 넘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왕위 따위에 연연할 필요 없이, 선출된 국가수반이 되었을 테니.
‘…혹은 독재자나.’
회의를 시작할 때만 해도 멜키오르를 엿 먹여야겠다는 의지가 충만했던 크뤼엘 백작이, ‘과연 멜키오르 왕세자님께서는, 훌륭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란 말로 회의를 끝맺었다.
멜키오르를 마주한 자들은 쉽게 이지를 잃었고 자신의 뜻과 의지를 관철하지 못했다.
왕세자가 휘두르는 두려운 권능에 그야말로 심장이 졸아 붙은 클레이오였다.
‘나한테 안 먹히는 스킬인 걸 알면서도 불러다 이 꼴을 보여주는 건, 일종의 위력 과시인가? 아니면 내 정체를 떠보는 걸까? 어느 쪽이든 멜키오르 이 자식도 음험함으로는 아슬란에게 안 뒤지네. 후.’
회의가 마무리되자 서기가 이어 말했다.
“이후, 최근 출몰했던 마수를 처치한 마법사 클레이오 아세르의 증언이 있겠습니다. 므네모시네의 문 경비 방안 수립을 위한 참고 증언입니다.”
클레이오는 미적미적 테이블 앞으로 가서 섰다.
위원들이 넋을 뺀 상태이니, 마수가 얼마나 거대하고 위협적인 생물이었는가를 묘사하는 클레이오의 말은 서기만 성실하게 받아 적었다.
증언을 마친 뒤, 훈장을 수여받도록 되어 있는 ‘왕의 홀’로 걸어서 이동했다.
왕실 시종이 클레이오를 안내하겠다고 했지만, 왕세자가 손을 살래살래 저으며 직접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
죽상이 된 클레이오는 거절도 못한 채 왕세자 뒤를 따르는 신세가 됐다.
왕성과 의회는 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왕세자는 자주 걸어서 움직이는 것인지 종종 마주치는 의원이나, 직원, 서기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주며 인사를 했다.
“에밀리 양, 오늘도 수고가 많아요.”
“감사합니다, 저하.”
왕세자를 뒤따르던 클레이오는 미심쩍은 마음에 「이해」를 돌려 보았다.
놀랍게도 그건 고유 스킬 따위가 아니었다. 멜키오르는 정말로 젊은 속기사 하나의 이름까지 전부 외우고 있는 거였다.
‘왕세자는 기억력도 엄청나네. 검사로서 에테르 레벨도 4레벨은 됐지? 하, 정말 인재는 인재야.’
지난 번 원고에서도 ‘그 사건’이 벌어지지만 않았다면, 멜키오르는 뛰어난 군주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멜키오르를 선택하지 않아.’
이전 세상에선 한 번도 신을 믿어본 적 없는 ‘정진’이지만, 이 세계에는 신이 실재함을 안다. 이 모든 말씀을 쓴 자, 문자로 세계를 창설한 저자가.
그러므로 이곳에서 서사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곧 신의 선택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한 운명은 이치와 합당함을 넘어서는 위력을 가진다.
‘악인으로 추락하든 영웅으로 추앙받든, 세계는 그 인물의 운명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게 되니까.’
에서 멜키오르에게 주어진 역할은 세자위를 남기고 사라지는 것.
이 원고에 다른 해석, 다른 읽기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 세상을 이루는 근본텍스트는 독자에 의해 새로이 쓰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으므로.
그 가운데, 멜키오르가 가진 지나치게 생생한 매력과 과도한 ‘고유 스킬’에 직면한 클레이오는 마음은 복잡해졌다.
여덟 번이나 같은 인물의 생을 살아냈다면, 그가 본래는 어디에서 왔고 누구인지 탐색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작품 외적인 문제는 제쳐 놓고, 그저 한 명의 등장인물로서도 멜키오르는 문제적 인물이었다.
‘여덟 회차를 거치며 여기까지 복잡성을 발전시켜버린 인물이, 과연 작가의 뜻대로 알맞은 때에 퇴장해 줄까? 꺼져 준다 치더라도, 그 방식이 작가가 원하는 형태일까?’
전혀 아닐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 건 클레이오 자신일 게 분명했다.
절로 깊은 한숨이 새나왔다.
이 인물이 자신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못한 의구심마저 품고 있으니, 앞날이 영 순탄할 것 같지가 않았다.
“클레이오?”
“네, 네! 저하!”
“혹시 부상이 덜 나았거나, 피곤한 거냐?”
“아닙니다….”
“걸음이 느려져서 쉬어가는 게 어떨까 했다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훈장 수여식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어떻게 지체를 하겠습니까.”
“사람이 하는 일인데 너무 어렵게 여기지 않아도 좋아. 너는 아서 또래답지 않게 나이 지긋한 중신 같은 어투를 쓰는구나.”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누가 봐도 소년 영웅에게 다감히 말을 거는 왕세자의 자애로운 모습으로 비치겠지만, 그가 미소 아래에 품고 있는 것은 집요한 탐색의 의도뿐이다.
한 번도 「이격」을 끄지 않았음에도 산채로 머리가 열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팔에 소름이 돋았다.
‘통로는 왜 이렇게 긴 거야.’
어색한 동행은 한참만에야 끝났다.
그나마 일반 출입 통로가 아니라, 뒤편의 내부 통로로 와 거리를 줄였다고 멜키오르가 알려주었다.
리오그난 왕가의 대관식이 이뤄진다는 ‘왕의 홀’은 막연한 상상과는 다르게 아주 투박한 양식의 홀이었다.
알비온의 궁성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부분으로, 천 년의 세월이 지나며 바닥은 사람의 걸음에 닳았고 벽의 부조는 부스러졌다.
여기에서 십여 년 전 아서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어린 그가 왕관의 권리를 외친 곳이며, 언젠가 가 끝을 맺을 장소.
원고를 하도 여러 번 읽었더니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왕의 홀’에 묘한 감상을 품게 될 지경이었다.
“왕의 홀엔 처음 와 보지?”
“그렇습니다.”
“어떤가?”
“음, 생각보다… 소박하군요.”
“하하하, 대관의 장소이다 보니 모르는 사람들은 화려한 모습을 상상하기 쉽지. 여기엔 여전히 사진사도, 신문의 삽화가도 출입할 수 없으니 말이다. 왜 그런지 아나?”
“정복왕 레오니드 1세 전하의 석관이 안치된, 신성한 장소라서 입니다.”
“과연. 성적이 우수하다더니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아는구나.”
기특한 막냇동생을 칭찬하듯 멜키오르는 다정히 등을 두드려 주었다. 얼음송곳으로 등을 찌르는 기분이 되어 솜털만 쭈뼛 섰다.
‘아니, 살 길을 찾다 보니 원고를 샅샅이 읽어야 해서지… 됐다. 해명은 뭐 하러 하겠어.’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리던 클레이오를 왕실 의전관이 구해주었다.
“왕세자 저하, 마법사 클레이오 아세르 님. 수여식 준비가 끝났습니다. 마법사님께서는 지금부터 제 지시에 따라 단의 앞쪽, 검은 돌로 표시된 자리에 서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