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63
Ibid (3)1)
“인간의 몸이란 건 칠십 년 넘게 쓰면 고장이 나게 마련이지.”
“말이나 못 하면 얄밉지나 않다.”
“에잉. 원망을 하려거든 본묘가 아니라 그 골골거리는 몸뚱이를 원망해야지. 이 아둔한 식사 시종 놈이. 억울하면 골골대지나 말든가.”
“이 리오그네스는 돈이 있어도 못 구하는 건데, 조금만 더 맛보게 해줘.”
“네놈이 하는 거 봐서.”
클레이오를 단단히 단속한 베헤못은 부엌 테이블 위에 올라앉아 물그릇을 찹찹 핥았다. 고양이의 발그레한 혀끝에서 샴페인의 기포가 바르르 일었다.
그 오랜 반복의 세월 동안 베헤못은 천천히 자라나, 이제는 머리가 커다랗고 몸이 뚠뚠한 검은 고양이가 됐다.
클레이오는 잔을 들지 않은 손으로 베헤못의 반드르르한 잔등을 쓰다듬었다.
자신은 베헤못에게 좋은 술을 내어줄 수 있기 때문에 삶을 그치지 않고 계속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머니 여신의 권능을 입어 태어난 존재, 결코 기억을 잃지 않는 신수 덕분에. 그들 사이에는 기나긴 세월과 함께 공유하는 기억이 있었다.
열어놓은 부엌문 바깥으로 뒷마당의 라일락 향기가 끼쳤다. 집에 처음 입주할 때 심었던 묘목은 크게 자라나 뒷마당의 삼분의 일 즈음을 덮는 거목이 됐다.
자디잔 꽃잎이 테라코타 포석 위를 수북이 덮고, 라일락 나무 반대편에 심은 상아색 장미가 부드럽게 한들거렸다.
장미 나무 곁으론 갓 핀 수국이 연홍빛으로 생생해 어제 내린 비의 흔적을 드러내고, 야트막한 담장을 휘감은 덩굴에서 신부의 머리 장식처럼 고운 재스민꽃이 흰빛을 반사했다.
수십 년간 정원을 꼼꼼히 가꿔온 보람이 있어서 클레이오가 사는 작은 집의 정원은 봄부터 가을까지 새로이 피어나고 지는 꽃들로 아름다움이 겨웠다.
수없이 많은 반복 끝에 얻은 작은 기쁨이었다.
따르릉. 달칵.
작은 삼층집의 정적을 깨며 누군가 정문에 자전거를 댔다. 키가 작고 머리가 회색빛인 소년은 날쌔게 1층 부엌으로 달려들어 온다.
“왔니, 토니?”
“왔죠!”
토니는 프란과 베아트리체의 손자였다. 그는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는 당장 식탁 의자 하나를 끌어다 텔레비전 앞에 붙어 앉았다.
“벌써 시작했어요? 젠장, 자전거 체인이 또 빠져버려 가지고!”
“그거 프란이 물려준 자전거 아니니? 물건도 걔의 뜻을 따르나 보네. 겨우 격하시킨 왕실의 행사 같은 걸 보고 싶어 하는 줄 알면 너희들 할아버지는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텔레비전에선 왕의 홀에서 대주교의 축복을 받는 아서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담비 털 망토 같은 건 이미 애저녁에 넣어둔, 간소한 예복 차림이었다.
국제연합의 설립 이후 알비온에서 리오그난은 통치자가 아닌 상징에 불과하게 된 지 오래였다.
“가족 간에도 정치적 입장은 강요할 수 없는 거라고요. 근데 골든 주빌리 방송 따윌 보고 있으면 엄마도 한 소리 할 거라, 아무튼 왔어요.”
머잖아 두 번째 손님이 역시나 구르듯 부엌으로 달려왔다. 계단을 오르다 제풀에 넘어지기 일쑤인 저 성급한 애들 때문에 클레이오는 남들처럼 2층에 응접실을 두지 않고 1층의 전면 퇴창 앞 다이닝룸을 응접실처럼 썼다.
초록빛 단발머리를 찰랑이는 리버티는 선명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정도로 뭐. 애초에 우리 집은 텔레비전이 없어! 앗! 나도 샴페인! 와, 이거 설마 리오그네스예요? 클레이오 최고.”
“하여간 리버티 이 새끼 진상, 술 먹을 기회라면 지나치는 법이 없지.”
“토니, 네가 술이 약한 게 내 탓은 아니잖아. 재미없는 체질 물려준 할아버지랑 너네 아버지를 원망해.”
리버티 역시 프란의 다섯 손자 중 하나로 토니와는 사촌지간이다. 토니와 리버티는 둘 다 클레이오가 사는 스콜라 지구 외곽의 신규 공영 주택 단지에서 태어나 자랐다. 클레이오는 그들이 처음 강보에 싸여 고물거리던 시절부터 봐온 이웃이었다.
클레이오는 마법국 관료로 임용되는 바로 그해에, 부친이 상속해준 아세르 저택을 항공대 기숙사로 기부했다. 그리고서 여기 공영 주택 단지로 옮겨 와 평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캔튼 부인은 은퇴한 뒤 수도에서 가장 멋진 티룸을 차렸고, 미라는 초창기 장거리 자동차 경주의 스타가 됐다.
프란과 베아트리체의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종종 손이 부족할 때, 저녁 무렵엔 몇 시간씩 애들을 봐줬다.
베아트리체가 주말이면 툭툭 차려내는 풍성한 포리고식 저녁 식사 자리엔 항상 클레이오의 지정석이 있었다.
그는 매년 아이들의 생일을 챙겨주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프란의 빼족한 눈매를 닮은 아이, 베아트리체의 밀 빛으로 풍성한 금발을 물려받은 아이들이 자라 또 아이들을 낳고, 그 애들이 그려준 비뚤비뚤한 초상화와 답례 카드가 응접실의 선반에 쌓여갔다.
클레이오는 그 모든 기념품을 아주 소중하게 보관했다.
새로운 친구들에게는 한결같이 이름을 묻고 간직하듯 기억했다. 같은 배우자와 다시 결혼하는 부부 사이에도 아이들은 꼭 같이 태어나지 않았다.
그다음에 그 애들을 똑같은 이름과 모습으로 만날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기에 클레이오는 늘 아이들이 애틋했다. 그들의 영혼을 판별할 수 없었기에 오히려 진실된 애정을 품을 수 있었다.
“뭐야, 리버티. 넌 카토 지구에서 오면서 학교에서 온 나보다 더 늦었네.”
“커튼콜이 길어져서 어쩔 수 없었단 말야! 기립박수 11분. 낮 공연 완전 전설됨.”
“연극 ? 그거 되게 자주 올리는 거 아닌가? 난 4학년 때 학교에서 본 거 같은데.”
“야 아마추어 극단에서 봉사로 올려주는 거랑 이게 같아? 오늘은 ‘기사 1’역으로 아모스 템플이 나왔단 말야! 그 역은 이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무조건 아모스 템플이 해야 해. 정의와 헌신의 기사! 하아, 아모스는 그 얼굴로 왜 정치를 한다고 나서서 얼굴을 낭비할까….”
아모스 템플은 수도방위대 기사단이 국제 연합군으로의 통합되기 전, 마지막으로 수도방위대 기사 단장직을 맡았던 스웨인 템플의 손자였다.
또한 스웨인은 ‘기사 1’의 모델이라는 것이 연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미시즈 모르간의 연극 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이름이 없었다. 그들은 시민 7, 기사 1, 병사 3 등으로 등장했다. 인물들은 개인인 동시에 동시대를 이루는 대표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시즈 모르간이 운명하고도 수십 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그녀의 공연은 세계 곳곳에서 상연되었다.
찬란한 사후의 명성. 예술은 사람보다 오래 살고, 불타지 않는 원고 위에 설립된 세상에선 더더욱 그러했다.
클레이오가 초연만 서른한 번 보았던 연극은 사실상 불멸했다.
리버티가 따다다 쏟아내는 연극 감상을 듣는 동안, 골든 주빌리의 식순도 거의 끝났다.
어느새 텔레비전에서는 신녀들의 찬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기의 전환 이후 여신의 신도는 급격히 줄어서 합창단원 대부분은 노인이었다.
그들 앞을 지나쳐 밖으로 나온 아서 왕이 찬찬히 한 손을 들어 모여든 관광객과 군중에게 인사하는 장면이 방송국 카메라에 가깝게 잡혔다.
리버티가 캬아, 하고 감탄했다.
“아서 왕은 할배 다 됐는데도 잘생겼단 말이지.”
“얼씨구. 팬레터라도 쓰지 그랬어.”
“에이. 오늘 급행으로 편질 보내도 아서 왕이 아니라 아서 리오그난이 받을 테니까 그만둘래.”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함성 위로 겹쳐졌다.
[알비온의 마지막 왕인 아서 리오그난이 왕의 홀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그가 국왕으로서 행하는 마지막 공무가 끝났습니다.]자유 알비온 방송의 설립자 베아트리체 마로와 그의 동료들의 뜻에 따라 알비온의 모든 방송은 왕과 귀족에 대한 경칭을 쓰지 않고 이름으로만 그들을 지칭했다.
클레이오는 이제 나이가 들어 백발이 된 아서의 머리카락과 역시 푸른 빛이 침체되어 밝게 뜬 노인의 눈을 브라운관 너머로 들여다본다.
는 불멸한다. 그렇다면 아서는 불멸하는가?
아서보다 길게 살아본 적이 없는 클레이오에게는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반복된 모든 생애에서 아서와 함께한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생애에서 일정 정도는 연루가 됐다.
아서는 훌륭한 정치가이자 사회운동가였다. 합리적이고 유능했다. 사익을 추구하지 않고 공익을 위해 헌신했다. 가지고 태어난 권리는 대체로 모두 내려놓게 되었다. 때로는 가열찬 공격 속에서, 민중의 요구에 의해서, 혹은 스스로.
언젠가 그가 말한, 가능한 많은 이들이 선택의 자유를 가진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서.
그 흐름에 순응하고 사는 일은 의외로 괜찮았다. 특히나 지금, 이 마지막 생애는 정말로 좋았다. 세상은 이렇게 계속되었으면 했다.
노르스름한 석양이 노인의 바짝 마른 발등 위를 찬찬히 기어오르고, 고양이는 또다시 꺼져가는 친구의 숨결을 느끼며 그의 무릎 위에 커다란 몸을 웅크렸다.
클레이오는 리버티와 토니의 말소리를 들으며 잠들 듯 숨을 거둔다.
조는 것처럼 보이는 노인의 표정은 다시 없이 안온했다. 그의 모든 생애에서 가장 평화로운 임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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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또다시 눈을 뜬다.
클레이오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해 일시적인 혼란을 느낀다. 밤이 아니라 낮이고, 물속이 아니라 나무 그늘 아래다. 그는 축축한 몸과 젊어서 무겁지 않은 사지를 움직거려 본다.
이제는 시작점마저 얼크러진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그저 늦게 정신을 차린 것일까.
툭.
풀잎이 묻어서 꼬질꼬질한 수건 한 장이 클레이오 앞으로 떨어졌다. 클레이오는 그걸 집어 들어 얼굴을 닦고서 찬찬히 몸을 일으켰다. 수건을 던져주었던 소년은 깨어난 클레이오 앞 풀숲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 물고기 되게 못 잡는다. 개울에 빠지기나 하고. 낚시해본 적 없지.”
새파란 청록빛 눈에 예기와 호기심을 담고, 씻지 않아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아무렇게나 기른 수염 아래에 왕가의 얼굴을 숨긴 그 애가 클레이오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클레이오는 아주 오래 잊고 있었던 심장의 둔통을, 정서를 정으로 깨는 것 같은 감각을 느낀다.
대답은 고려를 통하지 않고, 마음에서 곧장 흘러나왔다.
“아니. 해본 적 있어. 아주 오래전에.”
“해봤다는 게 실력이 그래? 수영도 옳게 못 하면서 낚싯대에 휘둘려갖고.”
아서는 클레이오가 서투른 낚시 실력이 부끄러워 둘러대는 거라 여기는지 낄낄거리면서 낚시 용품을 거뒀다.
클레이오 역시 함께 웃었다.
그러자 금발의 소년이 물었다.
“야 근데 넌 이름이 뭐냐? 나는 레오야.”
언제 다시 만나도 아서는 항상 그에게 새롭게 이름을 물었다.
클레이오는 처음에는 슬픔에 차서, 나중에는 담담하게, 아서만은 기억의 주박에 얽매지 않았다는 데 미미한 기쁨을 느끼며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곤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의 이름은 클레이오 아세르입니다.
이번에도 그래야만 했는데.
이상하게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여기는 우리가 모두 열일곱 살이었던 오월의 나무 그늘 아래이고, 물가로 뻗은 나뭇등걸에는 소박하게 깎은 잔과 교수 기숙사에서 훔쳐낸 와인 병이 놓여 있었다.
그 최초의 풍경 가운데 불시착한 클레이오는 온통 마음이 뒤흔들렸다. 족히 천 년 정도는 입에 담아본 적 없던 호칭이 제멋대로 혀 위를 굴렀다.
“난, 레이.”
1) ‘같은 자리에서(ibidem)’의 약어. 동일한 문헌을 연속해 재인용할 때 출처를 표시하는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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