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65
지금 시간 (2)
문학의 영원성을 말하는 시는 속절없게도 전경화의 성흔을 흩어놓았다. 지상과 하늘을 찢어내는 돌풍이 시계탑을 부수었다.
관목의 호박을 매개로 현현했던 시공이 붕괴한다. 학교의 시계탑이 무너지며 시간이 멈춘다. 모든 것이 정지한다.
아서는 생각한다. 이 기획은 처음부터 좌초를 내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역사인데, 어찌 역사 없는 세계가 가능할까.
그럼에도 다른 역사를 써 보려 한 것이 그의 천 년이었고, 이제는 스러지는 순간들이다.
사물과 영혼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클레이오는 제가 일으킨 바람에 휩쓸리고, 아서의 왼쪽 이마 위로는 가려졌던 상처가 드러난다.
우리의 육신은 처참하게 망가졌고 세계는 훼손됐지만, 이건 진짜이고, 우리는 이곳에서부터 이야기를 새로 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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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프란 화이트(구 프란시스 가브리엘 하이드-와이트)가 1899년 12월 31일 하루 동안 겪었던 일에 관하여 사실을 기술한 것이다. 문서의 내용은 직접 조사와 당사자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한다.
본 문건의 형식은 자유로운 산문이나 비밀유지협약에 따르는 정부 문서로 간주되며, 프란 화이트의 사후 70년 동안 공개가 불가하다.
이것은 그가 무고하고 연약한 여인의 얼굴을 한 신을 살해하지 못한 실패의 이야기이자, 그러므로 도달할 수 있었던 발전된 단계에 대한 증언이다.
작성자: 제레미 툴민 산업부 1등 서기(1899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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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12월 31일 자정.
하늘과 땅, 밤과 낮을 뒤바꿀 듯 격렬했던 전투가 일순간 멎었다.
므네모시네의 문 앞에서 격돌하던 아서 왕과 클레이오 아세르의 에테르는 브리스텔에서도 선명히 관측됐건만, 눈을 멀게 하는 광휘가 단번에 잦아들었다.
빛의 잔상을 주시하던 프란은 눈꺼풀이 닫혔다 올라가는 찰나, 이상한 기시감을 느낀다. 그는 이 파국의 풍경에 익숙함을 느낀다. 내내 선명의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그 시간이 몹시도 길었던 것만 같다.
그는 차가운 물을 들이켜며 생각을 바르게 정렬했다.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했다. 자신의 판단에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걸렸다. 지금 알비온의 최고 명령권자는 의전 서열에 따라 산업부 장관이었다.
아직까지 법안이 정비되지 않아 양원 의장은 최고 명령권자가 될 수 없었고, 산업부 장관보다 앞선 의전 서열을 가진 977기 인물들은 균열을 막아내는 전투에 투입된 후 현재까지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본래라면 본부에 예비로 남겨져야 할 병력이나, 키시온 백작조차 전대미문의 재난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검을 들고 나서야 했던 탓이다.
신군으로부터 국제에테르감응자연합의 회원까지 소속을 막론하고, 앞서 나가 싸운 기사들은 하나같이 만신창이였다.
생명에 지장이 갈 만큼 심각한 부상은 가까스로 치유해 놓았으나, 마법을 넉넉하게 쓸 형편이 아니었기에 모두가 깨어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치유 마법사들은 최선을 다했다. 예츠켈 단장과 퓌시스 마법감조차 에테르 소진에 시달리며 치유에 매달린 결과가 이 정도였다.
단장과 마법감 곁에서 끝없이 밀려드는 부상자들을 돌보던 치유마법사들 또한 자신들의 로브를 토해낸 핏물로 적시다가, 하나하나 병실 바닥이나 간이 침상에 처박히듯 쓰러졌다.
프란은 에테르 레벨이 낮아 전투에 나서지 않았기에, 비록 기진맥진하고 피로에 지치고 수면 부족이기는 하지만 판단과 운동 능력의 상실 없이 업무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는 비록 최전선에서 칼을 들고 단신으로 균열을 굳혀놓지는 못하더라도, 자원봉사 인력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스텔라 방벽의 기능을 최대한도로 끌어올려 환란의 여파를 막아내기 위해 분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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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2시.
산업부 1등 서기이자 현재 알비온을 통솔하는 명령권자의 임시 비서관이 된 제레미 툴민은, 브리스텔 스텔라 방벽 바깥까지 나갔다 돌아온 정찰병의 최신 보고를 장관에게 올렸다.
“므네모시네의 문 앞에서 에테르 반응이 소실된 지 두 시간째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장관님.”
그들은 규정을 알았다. 두 시간이 보고의 기본 단위였다. 당장은 균열이 멈추고 저 신화적인 대결이 중지된 것 같아도 언제 사태가 급변할지 모르기에, 프란은 상황을 정리하며 다시 전투에 나설 수 있는 인원을 정비하던 중이었다.
“지금 출격 가능한 항공대원이 있습니까?”
아서와 클레이오의 전투는 지평선을 휘어놓고 땅 아래와 공중을 모두 뒤엎는 것이었다. 보병이나 하급 기사를 보낼 순 없었다.
“데왈리 소위와 휘트너 소위가 회복됐습니다. 출격 가능합니다.”
“정찰기를 띄우십시오. 2인 1조로 나가게 하고 선명의 망원경을 지급하십시오.”
“괜찮겠습니까?
“균열은 멈춰 있을 때에도 특유의 에테르 흐름을 보여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일체의 파장이 사라졌습니다.”
프란은 자정 이후 첫 결과물을 출력한 균열예측기기의 데이터를 들여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균열의 유발 요인이 소거된 것처럼 말입니다.”
장관이 건조하게 발음하는 ‘유발 요인’이란 바로 클레이오 아세르였다.
제레미는 조금 놀라 몸을 굳혔다.
“그렇다는 건, 아서 전하와 아세르 공작의 대결이….”
“속단은 그만둡시다. 직접 가서 보면 알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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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2시 20분.
폐허가 되어 칠흑 같은 어둠에 감싸인 룬데인 상공을 저공비행하는 항공기에는, 경쾌한 음표 몇 개가 찌그러진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 앞서의 전투 이후 아직 외장까지 복원하지 못한 탓이었다.
조정석에 앉은 아이샤는 룬데인 서안을 뒤덮은 문명 이전의 어둠 속으로 고향의 노래를 흘려보냈다. 장례식에서 부르는 단조의 진혼곡이었다.
기체 간 통신과 기내에서의 소통을 위해 비행기 기판에 설치된 포옹의 반구 ‘파이’ 버전은 그 목소리를 아주 생생하게 뒷자리로도 보냈다.
좀 참아보려던 윌헬미나는 노래가 길어지자 결국 한마디했다.
“아이샤, 그 기분 잡치는 노래 좀 그만 부를 수 없니?”
“오페라 극장이고 궁전이고 다 부서져서 저 지랄염병이 났는데, 넌 그럼 마음이 아프지도 않아?”
“사람이 살았으면 된 거 아니니.”
“야아, 진짜 아무 감상이 없어? 내참, 그래도 춤을 췄단 애가 예술적 감수성이—.”
“춤은 배운 도둑질이라 밥벌이로 춰야 하니 춘 거고, 감수성 같은 건 됐으니 불 좀 밝혀 봐.”
“흥. 잘났어, 증말~.”
티격태격해도 두 사람은 척하면 착하고 손발이 맞았다. 아이샤가 조명탄을 여러 개 터트렸다. 순간의 빛이 비춰낸 지상의 모습은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윌헬미나는 지각 변동이 일어난 듯한 풍경에도 평정을 유지하며 선명의 망원경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침착한 성격의 윌헬미나조차도, 그다음에 나타난 걸 보고서는 얼빠진 소릴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꼭 깨물어야 했다.
그전까지는 분명 존재하지 않았던 압도적이고 깊은 물이, 므네모시네의 문을 감싸며 고여 있었다.
맹렬한 전투의 흔적만을 남겨 놓고, 문은 고요했다. 에테르도 생명의 기척도 없었다.
아이샤 역시 농담을 멈추고, 웃음기를 지웠다. 그녀는 기판에 이식된 포옹의 반구를 일반 통신 모드로 변경했다.
“아이샤 데왈리 소위, 본부에 보고합니다. 현재 므네모시네의 문 입구, 생체 반응은 전무. 확인되는 사체 없음. 이전에 관측되지 않던 깊은 호수가 므네모시네의 문 앞 4시 방향에서부터 12시 방향에 걸쳐 생성되었음을 보고합니다. 호수의 깊이는 측정 불가.”
추위로 장갑 안의 손이 곱는데도 아랑곳 않고 선명의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있던 윌헬미나가 아이샤에게 말했다.
“호수 내부, 수직 방향으로 석판 혹은 도서로 추정되는 직사각형 인공물이 다수, 긴 측면을 드러내며 적재되어 있음. 이거 추가 보고해.”
연속으로 터지는 조명탄은 검은 물 아래에서 도서관의 책장처럼 보이는 기이한 구조물을 비춰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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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3시.
아이샤 데왈리 소위의 보고 이후 2차 수색조가 꾸려졌다. 그사이 의식을 되찾은 스웨인 템플 경이 호위를 자원했다. 프란은 기사의 청을 받아들였다.
평소의 합리적인 처사와 다른 프란의 돌발 행동에 제레미는 당황했다.
“장관님께서 직접 현장에 나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도대체 호수 내의 인공물이 뭐라고 생각해서 이러시는 겁니까?”
“첸트룸 대륙에서만 관측되던 수중 도서관입니다. 형태뿐 아니라 없다가 갑자기 생겨나는 양상까지 일치합니다. 아세르 공작과 국왕 전하께서 돌연 사막에서 생겨났다던 그 도서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호수가 나타났다면 인과관계를 의심해볼 만하겠죠.”
프란과 977기가 함께한 세월은 짧지 않았다. 동남 전쟁 막바지에 클레이오가 친구들에게 모두 고백한 수중 도서관에 관한 이야기를 그 역시 알았다. 반복된 역사를 기재한, 그러나 정전이 되지 못한 석판의 수장고에 관해.
프란은 절박했다. 그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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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4시 20분.
땅이 얼어붙도록 추운 밤이었다.
두 명의 9레벨 감응자에 의해 지반이 갈라지고 강물이 진로를 바꾸어 얼어붙은 룬데인으로 진입하는 일은 아주 지난했다.
수송용 항공기를 이용해도 착륙 장소가 마땅치 않아 곧장 므네모시네의 문에 내리지 못하고 외곽에서 문 쪽으로 도보 이동을 해야 했다.
일행은 프란과 제레미 조합의 관료 둘, 항공대원 둘, 스웨인 경과 니네베 연대의 병사 셋이었다.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제레미는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면 자신이 기록해야 한다며, 남은 업무는 아레사 리드에게 일임하고 현장까지 따라나섰다.
현장에 당도해보니, 호수는 역시 도서관이 맞았다.
티플라움 전조등을 비추자 깊은 아래까지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호수와 수직으로 자리한 벽에 꽂힌 책들이 보였다.
손을 뻗어 물속의 책을 한 권 꺼내어 보자 문자를 해독하기도 전에 부스러져 사라져버렸다. 물 밖에서는 장서가 소멸하는 양상까지 첸트룸의 도서관과 일치했다.
에테르 감지 기계를 내려보냈으나 와이어의 길이에 한계가 있어 바닥까지 닿게 할 순 없었다. 다만 저 깊은 아래에서 지극히 희미한 에테르 반응이 측정됐다. 거리가 너무 멀어 한 사람의 것인지 두 사람의 것인지는 판별할 수 없었다.
한겨울의 새벽, 일출도 오지 않은 시간의 수색은 난항이었다. 수심이 너무 깊어 인력을 투입하기가 어려웠다. 뛰어난 기사인 스웨인 경에게조차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에테르는 물속에서 감응자를 지켜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프란은 무섭도록 진지한 눈으로, 티플라움 전조등을 반사하는 호수를 노려보았다.
므네모시네의 문에서 개방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데도 균열이 완전히 멈추었다면, 클레이오 아세르는 어떻게 된 것인가.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해 니네베 연대의 병사들에게 주변 일대를 수색하게 했으나, 신의 사자와 인간의 왕이 벌인 대결의 결말은, 이 멈춘 균열의 내막은 저기 깊은 물 아래에 가라앉아 있음을 알았다.
“물이 너무 깊나요?”
그런 프란의 어깨에 누군가가 가벼이 손을 올렸다. 상급 기사인 스웨인조차도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접근이었다.
민첩하게 자세를 바꾸며 리볼버를 뽑아 든 프란은 경계 태세를 올렸다.
이곳은 민간인 출입이 완전히 봉쇄된 구역이었고, 두 시간 전까지 천재지변 같은 전투가 벌어지던 현장이었다. 이 폐허에 여인이라니.
틀어 올렸다 흐트러진 분홍빛 머리카락을 나풀나풀 날리는 여인은 춥지도 않은지 얇은 드레스 한 장에 숄을 걸친 차림이었다.
여인은 그 끝에 아직도 날카롭게 베인 상처가 남은 손을 찬찬히 들어 보였다. 적의가 없음을 시인하듯.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있던 제레미는 뒤늦게야 놀라서 몸이 굳어졌다. 그런 그를 등 뒤로 보내고 스웨인 역시 발검했다. 프란은 고갯짓으로 기사를 잠시 저지했다.
프란은 일찍이 저 분홍빛 머리와 물빛 눈을 가진 이를 알았으나, 여기에 있는 존재는 프란이 아는 디오네 그레이어가 아니었다.
여인의 두 눈은 어둠을 밝히며 불타고, 모래무지와 폐허를 디딘 하얀 맨발은 더럽혀진 기색 없이 깨끗했다.
디오네는 얼마 전 콜포스로 사업체를 옮기며 이주했고, 호위로 에즈라 세르게프가 동행했다는 근황을 들었다.
룬데인-콜포스 간 선로가 유실되고 균열의 권역에 든 광역 룬데인의 도로망이 완전히 망가진 지금, 그녀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비논리적이었다.
부조리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디오네의 곁에는 무지갯빛 광채가 도는 뿔을 단 새하얀 짐승이, 주인을 지키듯 당당히 서 있었다.
일각수. 전설의 신수였다.
“이 애를 물 아래로 내려보내요. 신수는 깊은 물 아래에서도 헤엄칠 수 있으니까.”
“당신, 디오네 그레이어가 맞습니까?”
제게 정확히 겨누어진 총구를 바라보며 여인은 노래하듯 말했다.
“그게 지금 중요한가요?”
“정체 모를 존재에게 이 중차대한 수색을 맡길 순 없다. 디오네 그레이어가 아니라면 넌 무엇이지?”
프란의 위협적인 기세에 유니콘이 뒷발을 차며 푸르르 반응했다. 스스로 옅은 광채를 발하는 순백의 갈기가 세차게 휘날렸다.
여인은 사나운 신수의 몸을 도닥여 그것을 가만하게 복종시켰다.
“나는 칼리오페. 이 세상을 쓴 무력한 창조자이죠. 나를 증오하나요, 프란시스?”
기척도 없이 움직여 서로 간의 거리를 좁힌 여인은 가만히 프란시스의 총구를 당겨 자신의 심장 위로 가져다 댔다.
여신의 신체와 인간의 다부진 손이 총 위에서 맞닿았다. 데워진 총신으로 사람의 것처럼 팔딱거리는 심장의 움직임이 전해졌다.
“저 수중 도서관 아래엔 세상을 새로이 쓰려 한 왕이 있고, 또한 미래에 대한 답을 찾은 마법사가 있지요. 그들을 구한 다음에는, 그래요, 나를 죽여도 좋아요. 이 육신은 보통으로 연약하고, 심장이 멎으면 죽는 사람의 것이니까.”
프란의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총을 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아마도 당신은 나를 거창하고 계획적인 존재로 여겼던 것 같지만, 실상 나는 엉망진창에 임기응변인 창조자였지요. 그저 어떻게든 해나가야 한다는 절박함만 가진.
내 쌍둥이 자매 클리오 여신의 사자가 에테르의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때까지, 아서 왕이 시간을 가져가기 전까지 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던 불완전한 자이지요.
최초에 나는 독자였어요. 자매들이 쓴 세계를 읽고 또 읽은 뒤에, 독서의 연장으로서 이 마지막 세계를 썼죠. 그 쓰기는 서툴렀고, 나는 내내 실패해오기만 했지만.
결국 이 이야기는 내가 완성하지 못했어요. 대신 당신과 이 세상의 사람들이 완성하게 되겠지요.
나는 마지막 신이고 우리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요. 신이 쓰는 책장은 덮이기 마련. 지도 없는 여정과 예정 없는 역사는 당신들의 것이에요. 끝나지 않을 세계, 나의 잘못과 착오를 삶으로 개정한 세계는요.”
그 누구보다도 열렬히 신을 부정했으며, 그녀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하는 국면 뒤에는 신을 살해하기 위해 이념을 굽혔던 인간이 세상을 만든 여신의 얼굴을 응시한다.
그는 여신의 얼굴을 보았다. 사람의 얼굴을 한 여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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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새벽 한가운데.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뿔을 단 신수는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의 바닥에서, 격렬한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그 소용돌이 한복판에 한 조각 남은 호박 보석이 잔존했다. 유니콘은 천 년간 지속된 마법이 감싸고 있던 두 사람과 커다란 검은 고양이 한 마리를 찾아냈다.
물속에서 자유로이 유영하는 짐승은 대마법사가 복원해준 모습 그대로 날카롭게 잘 갈린 뿔을 보석에다 들이받았다.
쿵. 쿠구궁.
이미 소용돌이에 휩쓸려 있던 노란빛 보석 조각은 완전히 분쇄되어 사라지고, 클레이오와 아서는 물속으로 풀려나 흔들렸다. 커다란 검은 고양이만이 끝까지 마법사의 코트 자락에 매달려있는 게 보였다.
신수는 재바르게 몸을 놀려 사람과 고양이를 모두 갈기에 휘감아 등에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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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 10분.
푸드드드드―! 파합!
신의 피를 빌려 만들어진 신수는 호수 아래에서 클레이오 아세르와 아서 리오그난, 그리고 베헤못을 구명해 왔다.
프란은 판별의 안경을 고쳐 쓰고, 바닥에 눕혀진 두 사람에게 달라붙었다.
베헤못만 멀쩡하지, 아서와 클레이오는 전신이 상처로 엉망진창이었다. 숨은 쉬고 있었지만, 기도에는 물이 들어차고 가슴을 꿰뚫렸던 상처엔 아직까지 핏물이 샜다.
9레벨 감응자들의 초월적인 에테르가 두 사람의 생명을 간신히 붙들어놓고 있을 뿐, 부상이 심각했다.
클레이오와 아서 사이에서 아주 잠시 갈등하던 프란은, 어쩔 수 없이 아서에게 먼저 저의 미약한 치유 마법을 쏟아부었다. 그러다가 도중에 무언가를 깨달은 듯 갑작스레 움직임을 멈추었다. 집중이 깨지자 마법 역시 무산됐다.
아서는 생명을 위협하는 중상을 입었다. 그건 분명 왕과 마법사가 벌인 대결의 증거.
그런데도.
프란은 밝아오는 하늘, 온전하고 깨끗한 창공을 올려다봤다. 멸망의 기색은 없었다.
아서 리오그난의 생명과 이 세계의 안위 사이의 연계가 끊어진 것이다.
“세계의 운명이 아서 리오그난으로부터 독립되었다. 어째서지?”
그런 프란의 손등을 가볍게 누르는 감촉이 있었다. 프란은 그 미약한 힘을 가진 앙상한 손을 저도 모르게 맞잡았다.
세기의 마지막 아침, 클레이오 아세르가 눈을 떴다.
그는 사그라질 듯 희미한 목소리로 프란을 향해 말했다.
“프란. 천 년이 한순간이 됨을, 믿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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