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69
지금 시간 (6)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어. 어쨌든 아서와는 무기를 맞댄 시간보다는 변론을 펼친 시간이 더 길었으니까. 안 그래?”
아서는 입을 비죽이며 그냥 클레이오를 쳐다보기만 했다. 클레이오는 보내준다고 하면서도 태도가 영 상쾌하지 않은 아서를 마주보며 픽 웃었다.
이제껏 그가 모든 언어를 신처럼 명료하게 이해해야 했던 것은, 그가 빠짐이나 남김없이 세상 전부의 법과 판결의 언어를 알아야 해서였다. ‘약속’의 「이해」는 최후의 판결을 위하여 필요한 기능이었다.
법정이 연극을 닮은 것은 필연적이고, 연극이 경연을 벌이듯 법정의 서사도 원고와 피고의 것이 경합을 벌인다.
결코 합치될 수 없는 주장을 대표했던 아서와 클레이오는 기나긴 공방 끝에 세상의 끝을 보았고, 끝나지 않는 미래를 보았다.
두 사람은 스스로의 운명과 생명, 과거와 미래 전체를 걸고서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다 했다.
신과 인간을 대리하던 이들은 역사의 법정에 서서 치열하게 겨루었고, 마침내 역사는 판결을 내렸다.
친애 어린 설득으로 시작하여 종래에는 비통한 격돌까지 실행한 뒤에야 얻을 수 있는 종류의 화평이 클레이오와 아서 사이에 있었다.
짧은 평화가.
이젠 정말 시간이 없었다.
클레이오는 최후의 [책임 편집자 권한]을 발동시켰다.
곧, 예의 너덜너덜한 원고 더미가 눈앞에 떠올랐다. 클레이오는 마지막 장까지 채워진 팔림프세스트를 고르게 모아 정렬했다. 여신들은 펜을 놓치거나 놓았고, 사람이 쓴 결말을 인정했다.
세상은 한 권의 책이지만, 원고는 결코 책의 등가물이 아니기 때문에 저자의 일이 끝나면 편집자의 일이 시작된다. 목차를 뽑고 이야기를 전달하기 쉽게 정렬하고 단행본으로 엮는다.
아서와 레지나가 지켜보는 가운데 클레이오는 마지막 작업을 마쳤다. 그는 마침내 제 손에 놓인 한 권의 책을 미래의 초고가 소장된 수중 도서관의 가장 위, 책장의 마지막 칸에 꽂았다.
엉망진창으로 완성되었을지언정 완성은 완성이다. 이것이 지난 세기의, 이제는 끝나가는 역사이다.
물속에서 젖은 두 손을 꺼낸 클레이오는 여신과 왕을 돌아보며 후련하게 웃었다.
“이전의 이야기는 완결되었으니 새 세기에는 새 이야기가 시작되겠지. 균열이 사라진 뒤 신화로 변모한 과거의 역사가 차곡차곡 쌓인 단단한 대지야말로, 새 이야기에 걸맞은 원고용지이고.”
이제 여기서 쓰일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이다.
이루어야 할 소명을 모두 완수한 클레이오는 망설임 없이 문을 향해 돌아섰다.
필요한 것은 마법식이 아니라 아홉 서클이 지닌 막대한 에테르뿐이었다. 클레이오는 [경감]을, [치유]를, [광원]을 제멋대로 겹쳐 쌓아서 그저 환하고 따스하고 살랑거리기만 하는 마법을 펼쳤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으며 그랜드 마스터가 되어서야 스스로도 소진을 조정할 수 있게 된 신성을 덧씌워서. 그의 마법은 본래부터도 제 몸을 불태워 일으키는 여신의 신성과 닮은 것이었으니.
하나의 마법식이 룬데인 전체를 감싸고 펼쳐질 때마다 클레이오의 외견이 조금씩 붕괴했다.
갈색의 머리카락이 짧게 뜯겨나가고, 왼쪽 눈동자의 녹색 빛이 검게 잦아든다. 너무 창백해서 회색으로 보이던 피부에 옅은 밀빛의 생기가 더해진다.
므네모시네의 문이 완전히 개방되었을 때 클레이오 아세르는 동시에 김정진이었다. 두 사람의 형상은 뒤섞여서 하나가 되었다.
텔마의 아이이며 이명화의 아이인 그는 두 세계에 함께 걸쳐진 존재이고, 손실된 육신의 부분들을 양측 세계의 에테르가 채웠다.
그는 여덟 번째 세계의 존재이면서 아홉 번째 세계의 존재. 하지만 그 둘 어느 쪽에도 온전하게 속하지 않은 중간자로서 신과 같은 권능을 발휘했다. 9세계에서는 8세계의 에테르를 이끌어 썼듯, 8세계의 마지막 순간엔 9세계의 에테르를 끌어 쓸 것이다.
그는 클리오의 권능과 어머니의 신성을 모두 함께 받아, 고난의 세월 속에서 발전시켜, 최초에 그에게 ‘약속’을 준 역사의 여신 이상의 존재로 거듭났다.
갈색의 머리카락 안쪽은 차가운 광택이 도는 검은 머리, 오른 눈은 여전한 헤이즐, 왼쪽 눈은 검은빛이 되었는데도 아서는 제 친우의 얼굴이 낯설지가 않다.
저 얼굴은 그가 대관 일식 가운데 보았던 모습이며, 실지로는 클레이오의 영혼에 잠재되어 있던 형상일 터였다.
영혼의 기억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선천적인 외견뿐만이 아니다. 김정진이 가졌던 모든 상처가 클레이오의 몸 위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그의 내력, 그가 겪은 고통의 기억들을 증거하며.
비록 아버지를 가진 인간의 육신은 과거에서 죽었으나, 이제 그는 순수하게 기억과 에테르로 빚어진 존재이므로.
이곳에서의 우정과 신성을 남기신 어머니의 기억과 인간으로 죽었던 동생을의 추억을 함께 간직한 자이므로.
레지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클레이오의 어깨를 짚는다. 클레이오는 기꺼이 그녀를 제 쪽으로 기대게 한다.
제게 남은 마지막 힘을, 8레벨 마법사인 클레이오가 세계를 건너가도록 하는 데 쓰기 위해 잠들었던 클리오였다.
그러나 클레이오는 스스로 세계를 건너갈 힘을 얻었잖은가.
클리오는 자신의 모든 부탁을 다 들어준 천사에게 기억과 전승, 명성과 불멸의 여신으로서 최후의 축복을 내리려 한다.
“이 모습이야말로 네 영혼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이로구나. 미래에도 너는 너의 영혼이 가진 그대로의 외견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거란다. 너를 기다리는 이들이 너를 다시 알아볼 수 있도록, 내가 축복한다.”
축복이 실행되자 여신은 차츰차츰 키를 낮추어서, 아주 조그만 어린아이의 모습이 되었다. 여신의 흰 옷자락에 폭 감싸인 자수정빛 눈의 어린애였다.
클레이오는 조금 힘들어하면서도 어떻게든 클리오를 안아 올렸다. 이렇게 작고 어린 애까지 못 들면 끝장이라는 각오로 했다.
“고마워.”
“천만에.”
“봐, 아서. 가끔은 여신들도 좋은 일을 해. 들었지? 나는 다음에 올 때에도 이 모습을 하고 있을 거래. 이런, 눈도 못 깜빡일 줄 알았다면 프란에게 순간 초상 기계를 가져오라고 할걸.”
“그런 거 없어도, 안 까먹어.”
“하긴. 너 기억력 좋지.”
낯설면서도 익숙한 웃음소릴 내던 클레이오는 서서히 제 날개를 펼쳤다. 역사의 천사로서, 구원의 임무를 맡은 이로서.
그와 영혼이 이어진 신수는 잽싸게 날개의 속깃에 푹 파묻혔다.
정말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던 아서가 말했다. 여전히 낮게 긁히는 목소리였다.
“기억할게, 정진.”
그럼에도 그들 사이에 신의 제약은 아무것도 없어서, 이름은 가린 데 없이 들리고 발음됐다.
클레이오이며 김정진인 이는, 자신의 이름을 아서가 말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정진.’
그건 존재를 온전하게 수용하는 부름이었다. 이름을 알고 부르는 것은 최상급의 맹세이다.
“응.”
그 기꺼운 대답을 들은 아서는 친구의 또 다른 이름을 불렀다.
“레이.”
“그래, 아서.”
“꼭.”
“다녀올게.”
클레이오는 완전히 활성화된 므네모시네의 문 앞에 섰다. 김정진은 클리오 여신의 가벼운 몸을 단단히 고쳐 안았다.
파멸해가는 세계가 자신들의 창조자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시간을 완전히 멈출 힘이 없어 직면한 파국에 슬퍼하던 그녀를. 그러니 그가 클리오를 대신하여, 그 일을 해주리라.
김정진은 결코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현재의 세계가 지속되기를 원하여 유일한 방도인 일시적 귀환을 택한 것뿐이었다.
그는 아홉 번째 세계를 위하여, 여덟 번째 세계에 닥친 처참한 멸망을 멈추어놓기 위하여 돌아간다. 마스터 클락을 부수는 것은 오직 클리오의 소망이었지만, 그 사랑에 대한 공감이 다음 세계를 존속시키는 화해의 악수가 된다.
아서는 미동조차 않고 그의 앞에 선 자를 응시한다. 유정하여서, 진정으로 이 시대에 속하기 위하여 떠나는 역사의 천사를.
정진의 입술이 벌어지고 성대가 떨림을 전한다. 그 음성은 선고이다. 연민을 알기에, 이 다정한 별리를 일으킬 자의.
“[내 날개는 날 준비가 되어 있고
나는 기꺼이 되돌아가고 싶다]1)”
천 한 가지 흰빛으로 산란하는 날개는 마지막 세계의 하늘을 덮는다.
진언을 그친 정진은 빛 속에서, 이어져야 마땅하나 그가 침묵 속에 은폐한 문장을 생각한다.
내가 여기에 그냥 머무른다면, 그래서 이 세계가 대가를 치르며 침몰한다면, 그건 결코 나의 기쁨이 될 수 없으니.
내 행복과 너희의 절멸을 어떻게 등가의 가치로 놓을 수 있을까.
그 순간 그는 역사의 천사이기를 멈춘다. 신의 사자를 초과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무지개가 그의 날개를 휘감으며 하늘과 물 위로 드리운다.
아서는 보았다.
클레이오가 떠난 자리, 물에 비친 무지개는 아주 잠시간 문 속으로 엿보이는 세계와 이편을 둥글게 이어주다가, 서서히 사그라졌다.
그 이어짐은 더 이상 균열을 전이시키지 않았다. 이루어진 그들의 약속이었다.
이윽고 므네모시네의 문이 완전히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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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 질문은 답하기 어렵다.
실제로 기록자 본인과 프란 화이트는 1899년 12월 31일 정오의 3분 전, 므네모시네의 문에서 일어난 일을 실제로 목격하지 못했다.
그때엔 모든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브리스텔에선 비슷한 시각 깨어난 첼레스테스 탕페트 드 네쥬가 병실을 부수었다.
병실을 벗어난 첼레스테스 경은 스텔라 방벽 가동 중엔 허가를 얻어 비행해야 함에도 그 협의를 무시하고 이륙을 감행했다.
그를 만류하던 키시온 백작이 어째서 항공기에 동승하게 되었는지, 그 내막은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한때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서로를 적대하며 싸웠던 그들이 친우의 전송을 위해 화해한 것이라는 추측은 있었지만, 본인들에게서 확답을 얻은 적은 없었다.
어쨌든 첼레스테스 경과 키시온 백작이 므네모시네의 문에 당도한 시각은 12시 7분 경이었다. 그들은 흐린 보랏빛 잔광만 남은 므네모시네의 문과 한 줄기 무지개를 마주했을 뿐이었다.
신수의 힘을 빌린 프란이 브리스텔로 도착해 스텔라 방벽을 고치다가 그 소식을 들은 건 오후 12시 22분경이었다. 그는 오후 1시 47분에 방벽의 수리를 완료할 때까지 아세르 공작에 관해 개인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다시는.
눈으로 보았다 한들, 목격자들의 진술은 모두 엇갈리므로, 어쩌면 진실은 늘 그렇게 다채로운 형태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맞이한 1900년은 신으로부터 승인받은 단 한 종류의 정전만이 남겨진 세상이 아니기에 기록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나, 그럼에도 남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신들과 서사시의 시대가 종언을 맞이하고 신성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났다. 여신들의 노래가 멈추고 므네모시네의 자녀들이 신이자 인간으로서 살았던 수천, 수백 년의 세월이 종결되었다.
므네모시네의 문을 감싼 호숫가 근처에 세워진 백색의 신전 한가운데엔, 구름 한 조각을 품은 라리마가 놓여 있다.
언젠가 보석은 빛나게 될 예정이다. 그리하여 천상과 수면이 만나고 모든 세계의 기억이 이곳에서 하나가 될 때, 남은 이들은 인간의 아이로 다시 태어난 역사의 천사를 찾게 될 것이다.
더 이상은 역사의 이름을 가지지 않고, 신의 대리인도 아니게 된 한 사람을.
1) 「천사의 인사」, 게르하르트 숄렘, 『발터 벤야민: 화재경보』에서 재인용, 미카엘 뢰비 지음, 양창렬 옮김, 2017년, 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