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5
원고 속으로 (3)
아침나절엔 류바라는 사감 선생님이 의사와 함께 찾아와 정진을 깨웠다.
부스스 일어난 정진은 미리 생각해둔 대로 이름 외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일관했다.
콧수염을 기른 의사는 고풍스런 청진기를 정진에게 대어 본 뒤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당연하게도 이상 따윈 없었다. 원래도 병약한 소년이 물에 빠지며 충격을 받아 그렇게 된 것 같단 말만 했다.
‘만에 하나, 뭐라도 발견돼서 난리가 날까봐 걱정했는데 그런 일은 없군. 다행이야.’
완전히 안심해 웃음을 참는 정진을 두고, 자신의 이름을 류바라고 알려준 사감이 자꾸 말을 붙였다.
마음씨 좋게 생긴 중년 여성은 클레이오를 안쓰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소년의 마른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정말로 산책하다 실족한 게 맞는지 몇 번이나 물어봤다.
같은 질문을 단어만 바꿔서 세 번이나 듣고 나서야 정진 역시 눈치를 챘다.
‘어쩐지 이거 관심병사 보는 시선인데.’
감이 왔다. 아마도 클레이오 아세르는 자살을 시도했던 것 같다.
그 애의 시도는 성공했다. 그 결과로 여기에 있는 건 클레이오가 아니라 ‘김정진’이니까.
“콜포스에 계신 아세르 준남작껜 연락을 드렸지만, 답이 없으시구나.”
“그렇군요.”
“너무 마음 쓰지 말렴. 아무래도 무역량이 늘어나는 계절이라 사업이 바쁘신가보아. 네 부친께선 우리 알비온 제일의 사업가이시잖니. 중요한 일이 많은 걸 거야. 결코 널 등한시해선 아니란다. 알지?”
“그럼요, 선생님.”
여전히 졸음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던 정진의 귀가 번쩍 뜨였다. 이건 무척 중요한 정보였다.
나라 제일의 사업가인 아세르 준남작.
24포인트 궁서체로 머리에 박혀 오는 프로필이었다. 돈도 많고, 하급 귀족이지만 평민은 아니고.
‘이건 좀 대박인데.’
아무래도 이 애는 재능, 집안, 재력 중 재력이 되어서 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맞나 보다.
슬슬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붙잡느라 정진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걸 어떻게 생각했는지 류바의 낯이 더더욱 흐려졌다.
“하지만 이번 주에도 용돈은 송금했다고 아버님의 비서가 전해주더구나. 은행에 가 확인해보려무나.”
‘애가 자살시도를 했다는데 소식을 듣고도 돈만 턱 보냈다니, 집안 꼴 알만 하긴 하네.’
정진이 아세르 준남작의 얼굴도 모르는 남이 아니었다면, 비뚤어지고도 남을 대응이었다.
‘진짜 클레이오 아세르에게는 꽤 괴로운 일이었겠지.’
이름조차 없이 스쳐 지나가는 인물에게도 역시 주인공과 같은 삶과 고통이, 죽음과 위안이 있다. 그저 서술되지 않을 뿐.
‘실제 세상에서 내가 사라졌어도, 이 애가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아무도 슬퍼하지 않겠지.’
만들어진 이야기의 인물보다 더 나을 것 없는 진짜 삶. 세상을 이끄는 주요한 서사와는 동떨어진 여백에 자리한 인생.
정진은 우울한 생각을 털어버렸다.
‘물론, 돈을 안 보내는 것보단 낫지. 괜히 또 진지하게 이입했어. 나는 클레이오다. 클레이오 아세르.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돈 많은 집의 버린 자식이 되는 거 모든 대한민국 서민의 꿈인데.’
자신이 소유한 거대한 저택에서 멋진 야경을 쓸쓸히 내려다보며 ‘아버진 왜 날 사랑해주지 않으시지.’ 따위로 고민하며 비싼 와인을 따르는… 뭐 그런.
아무튼, 계좌에 얼마가 들어있는지 정돈 확인해봐야 할 것이다.
“몸이 좀 회복되면 외출을 해도 좋단다. 네 방친구인 네보에게 말해 둘 테니 내일이나 모레쯤 함께 다녀 오거라. 오늘부터 금요일까지 5일 간 병결을 내 놨으니 푹 쉬고. 그동안 식사는 가져다주도록 식당에 전해 놓을게.”
“고맙습니다, 선생님.”
“아유, 클레이오 네가 이렇게 눈을 쳐다봐주며 대답을 하는 건 처음이라 선생님은 참 기뻐.”
방을 나서며 류바 사감이 한 말에 클레이오는 내심 혀를 찼다.
‘얼마나 어두운 성격이었기에, 저렇게 잘해주려는 사감 선생 얼굴도 못 마주봤는지.’
***
십 년 간 밀린 잠을 하루 동안 다 몰아 자듯이 잤다. 월세, 대출이자 걱정을 놓으니 어떻게 그렇게 잠이 잘 오는지.
일어났을 땐 거의 한낮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사환이 와서 식사를 건네주고 침구를 교체할 때까지 클레이오는 계속 자고 있었다.
누군가 대신 그런 일을 해주는 건 아무래도 어색했다. 사환이 방을 정리하고 나가는 걸 기다렸다가,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편했다.
완전 좋았다.
인생에서 이런 호사를 누린 때가 없었다.
‘무슨 학교가 이래. 호텔보다 더 좋네.’
원래의 세상에 있을 땐, ‘죽겠다’란 말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한국 직장인이 말하는 ‘죽고 싶다’의 뜻은 그냥 일 안 하고 놀고먹고 싶단 뜻이란 말이 너무도 맞았다.
원고에서 본 바, 이 이곳의 학생이 되면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을 뿐이었다.
졸업 후의 군대 의무복무 규정.
물론 그 문제는 해결이 간단했다.
졸업을 못 하면 된다.
‘공부를 잘 하는 게 어렵지, 못하는 게 뭐가 어렵겠어.’
식사에 딸려 나온 마지막 청포도 알까지 똑똑 따먹은 클레이오는, 빈 식기만 담긴 트레이를 침실 밖으로 가져다 놓으려고 겨우 방을 벗어났다.
2인이 현관 하나를 같이 쓰는 기숙사는 복도를 가운데 두고 두 개의 침실이 마주보고 있는 형태였다.
침실 창은 울창한 숲이 펼쳐진 학교 교정 쪽으로 나 있었고 거실과 욕실은 복도 끝, 강변 방향에 자리했다.
클레이오가 나온 침실의 방문에는 ‘클레이오 아세르’ 반대쪽 침실의 방문엔 ‘네보 야르비’란 명패가 붙어있었다.
‘나중에 쟤랑 외출을 하라고 한 거 보니, 네보란 애가 클레이오 아세르 돌보기 담당인가 보군’
지금은 수업엘 갔는지 어쩐지 코빼기도 안 보였지만.
하우스 메이트와 마주칠 일이 없으니 욕실 쓰기도 편하고 좋기만 했다. 클레이오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욕조에 물을 받았다.
이쯤 되니, 저자 선생에게 감사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여긴 상하수도도 있고 얼마나 좋아. 소설 속에 들어갔는데 중세고, 침대도 없고, 영주쯤 돼도 돼지랑 말이랑 같이 짚 깔고 자야하고, 이러면 얼마나 비참했겠어.’
뜨신 물에 푹 담근 후의 개운함을 즐기며, 머리를 대충 털어 말렸다. 풀풀 날리는 머리는 엉켜서 빗이 잘 안 들어가기에 빗질은 생략하고 대충 골라 놓기만 했다.
세면대 거울 속에서 움직이는 건 다시 봐도 낯선 얼굴.
비쩍 곯아 뺨이 쓱 꺼지고, 낯짝은 목욕 후인데도 허옇다 못해 푸른 기가 돈다. 비적비적 자란 갈색 머리는 푸석할 뿐 아니라 끝부터 색이 바랬다.
비치된 욕실용 가운도 너무 커서 걸치니 손끝만 겨우 나왔다.
‘아버지가 갑부라더니 밥도 못 얻어먹고 다녔나.’
눈살을 찌푸리자 빛을 받은 다갈색 홍채에 풀색이 섞였다. 눈이 처지고 속눈썹이 흐늘흐늘 해서 안 그래도 맹한 인상이 더 흐릿해졌다.
‘이런 비실이가 낯짝도 만만하니 또래 애들이 괴롭혀 댔나?’
살면서 표정이 어둡단 소리는 종종 들었어도 얼굴이 만만 보여서 치일 일이 생길 줄이야.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오래 다닐 학교도 아닌데.’
일주일은 쉬라지 않는가. 말 잘 듣는 학생은 놀고먹으며 쉬어 줘야지.
욕실을 나오니 기숙사 거실의 넓은 창 밖으로 템푸스 강이 펼쳐졌다. 물을 싫어하는 정진은 조금 주춤 했지만, 곧 이국적 풍경에 이끌려 테라스로 다가갔다.
강 건너 웅장하게 늘어선 화강석의 왕성과 사암의 의회는 관광 엽서의 풍경처럼 보였다.
‘해외여행 가본 적도 없는데, 여기서 이렇게 기분을 내는군.’
템푸스강의 동서를 이으며 여덟 개나 되는 다리가 놓여 있었고, 널찍한 도로엔 전차와 합승마차가 어우러져 있었다.
소설의 세계관은 굳이 비견하자면 19세기 후반에 가까웠다. 노면전차와 전신이 존재하나, 비행기와 수소폭탄은 없던 시대. 왕과 수상, 과학과 마법이 공존하는 세계.
원고의 내용과 눈앞의 풍경을 대조하는 데 골몰하던 정진의 다리를, 무언가 길쭉하고 꿈틀거리는 것이 휘감듯 쓸고 지나갔다. 닿는 건 짐승의 털 같았다.
등줄기에 소름이 확 돋았다.
“윽, 깜짝이야.”
클레이오의 발치에 도사린 것은, 산짐승처럼 거대한 고양이였다.
새카맣고 털이 비단처럼 반질반질한 고양이가 항의를 하듯 마구 웨웅거렸다.
“무슨 고양이가 이렇게 커.”
주둥이 주변과 왼발, 그리고 아랫배 속살에만 흰 털이 나 크림을 훔쳐 먹다 흘린 것 같은 모습을 한 놈이었다.
반들반들 까만 눈에 흰 수염까지, 귀여울 법도 하건만 미묘하게 띠꺼워 보이는 표정을 짓는 게 기분 나빴다.
“웨우우웅―.”
항의는 계속 격해졌다. 하도 크게 울기에 클레이오는 허리를 숙여 고양이와 눈을 맞추었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났어.”
“웨에에에에옼!!!”
“내가 고양이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나, 참내.”
클레이오가 중얼거리는 순간, 왼손에 끼인 ‘약속’이 다시금 번뜩 광채를 발했다.
[―‘약속’의 기본 기능이 발휘됩니다.]동시에 고양이의 웨옼웨옥이 사람의 말로 바뀌어 들렸다.
“밥”
“?!”
“밥 줘라. 왜 오늘은 밥을 너만 먹느냐?”
“뭐야, 이 세계는 고양이들도 말을 해?”
클레이오의 얼빠진 중얼거림을 들은 거대비만묘가, 그의 뺨을 앞발로 세차게 후려쳤다. 몸을 숙이고 있다 급습을 당한 클레이오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이거 힘은 또 왜 이렇게 세고!’
손톱에 긁히진 않았지만, 크림 빛 털이 난 보송한 앞발에서 나온 힘이라곤 믿을 수 없는 강도의 펀치였다.
“무엄한 것! 나 고귀한 영묘를 어찌 하찮은 미물들과 같이 취급하느냐! 허다한 묘들이 있다 한들, 본묘만이 지성을 가진 존재이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