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7
편집자 권한 (1)
고양이가 밥에 집중한 동안, 다른 단서가 더 있을까 싶어 침실 안을 뒤져보았다.
클레이오는 가진 물건이 거의 없었다. 교과서, 필기구, 교복 외엔 잠옷과 수수한 평상복 몇 벌이 끝이었다.
‘그래서 더 호텔방처럼 느껴졌나 보군.’
텅텅 빈 책상 서랍엔 학생수첩과, ‘플라타 은행’에서 발행한 수표책 한 권만 덜렁 들었다.
‘사람 눈도 못 마주본다는 애한테 아무 것도 안 챙겨주고선 달랑 체크카드 하나 들려 보낸 격이잖아.’
다시 생각해도 이 집안 꼴은… 싶었지만 정황으로 판단할 때 분명 연결계좌 잔액은 상당할 것 같다.
통장을 오링 내면 그 대단한 갑부라는 아세르 준남작의 얼굴을 볼 수 있으려나?
‘류바 사감 말대로 은행을 가 봐야겠어.’
수표책 왼편의 뜯긴 부분을 살피니 한두 장쯤 쓴 것 같다.
사인 부분을 연필로 슬슬 칠해보자 펜 눌린 자국이 얼추 드러났다. 충분히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은 사인이었다.
‘당분간 이걸 쓰자.’
클레이오는 재킷 안주머니에 수표책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생 수첩을 폈다.
클레이오 아세르
데르니에력 1873년생
왕립 수도방위대 학교 1학년
2조 마법사 지망
에테르 레벨: 1레벨
수첩을 살피는 클레이오의 다리를 베헤못이 쓱 감싸 돌았다. 닭고기와 국물은 싹 먹어치운 뒤였다.
“야, 클레이오 아닌 클레이오야.”
“그냥 클레이오라고 불러줘. 아무튼 왜.”
“닭도 나쁘지 않지만 나는 스테이크가 먹고 싶다. 미디엄 레어에 마데이라 소스를 끼얹고, 와인도 곁들여서.”
“이 고양이가 뭐래. 고양이는 술 먹으면 안 되잖아.”
“본묘가 다른 고양이들과 같은 몸인 줄 아느냐? 어? 내 오늘 너를 많이 봐 주었으니 내일은 꼭 피처럼 붉은 부디갈라 와인과 구운 송아지 고기로 보답하거라.”
고기와 술 달라는 까탈스런 요청을 클레이오가 씹자, 베헤못이 이번엔 뒷발로 정강이를 깠다.
그것도 역시 아팠다.
‘지금 맞다이 뜨면 내가 고양이에게 지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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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삼십분 전까지 타고난 냥아치의 면모를 보이던 베헤못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귀엽게 앞발을 핥으며 이시엘 키시온의 무릎 위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 기만묘 자식.’
빛이 드는 거실. 안락의자에 앉은 미소녀. 미소녀의 무릎 위에 착 올라타고선 고로록거리는 고양이.
‘그땐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밝은 데서 보니 얘가 정말 예쁘긴 하구나.’
검술을 연마하느라 부드럽게 그을어 밀 빛이 도는 뺨은 잡티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목덜미 길이로 컬이 진 머리는 유월의 장미처럼 붉었고, 녹색 눈은 에메랄드를 빛에 비춘 것처럼 선명했다.
갸름한 턱에 오뚝한 콧날, 그 아래 작은 입술이 의지 굳게 꼭 다물려 있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울 수도 있는 광경이었다. 고양이가 한 세기는 산 노묘가 아니고, 미모의 소녀가 클레이오를 추궁하러 온 것만 아니었다면.
“회피할 생각은 마라, 클레이오 아세르. 서클의 범위로 볼 때 네 수준은 에테르 레벨2 이상이 분명하다. 그 사실을 왜 숨기지?!”
“정말로 몰라. 강에 빠진 뒤의 일은 기억 안 난다니까.”
‘야아 좀 쉬나 싶었더니 왜 갑자기 청문회야.’
방금 전 다짜고짜 클레이오의 방에 쳐들어온 이시엘은 치대는 고양이 때문에 움찔하는가 싶더니, 곧 본래의 목적을 되찾았다.
“그럼 네가 무의식중에 서클을 열었단 얘기인가.”
“그럴 가능성도 완전히 부정할 순 없겠지.”
클레이오가 이렇게 예쁜 소녀와 말을 나눠보는 건 생전 처음이었지만, 조금 술렁이던 마음은 그녀의 매서운 추궁 앞에서 완전히 사그라진 지 오래였다.
이시엘은 클레이오가 염두에 둔 갑부집 멍청한 아들의 평온한 생활을 뒤흔들려 들었다.
그러니 정색을 하게 되지 않겠는가?
표정을 굳힌 이시엘은 이제껏 부지런히 쓰다듬던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여전히 의자에 앉은 클레이오를 일어선 소녀가 차갑게 내려다봤다.
“기이한 일이지. 오늘 너는 한 순간도 검사인 내 기세에 밀리질 않았다.”
이시엘 키시온은 이제껏 알려져 있던 ‘클레이오 아세르’에 대한 평가를 떠올렸다.
수완가 아세르 준남작의 차남이 동기로 입학한단 소식은 교내에 금세 퍼졌다. 하지만 그는 그저 소심하고 숫기 없는 부정입학생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이 소년은 어떤가?
비쩍 마르고 힘없는 몸인 건 똑같았다. 그런데도 눈빛과 자세가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긴 세월을 살아온 사람처럼 침착한 눈빛. 똑바로 맞부딪쳐오는 시선. 동급생인 이시엘을 어린 소녀 대하듯 하는 태도.
‘이 애가 클레이오 아세르라고?’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강에 빠진 충격 때문에, 기억에 혼란이 와서….”
“내게 한 마디도 안 지는군. 기억에 혼란이 온다고 사람이 이렇게 뒤바뀔 수 있나?”
클레이오 입장에서도 환장할 노릇이었다.
‘클레이오 아세르’가 소심해빠진데다 우울한 성격이란 건 이제 잘 알았다. 하지만 연기자도 아닌 자신이 이미 죽은 아이의 성격을 흉내 낼 수는 없었다.
‘사람은 자신이 아닌 게 될 수 없어. 그런데 벌써 그걸로 시비를 털리다니.’
뭐, 그녀가 저렇게 과민하게 구는 데도 이유가 있긴 있었다.
이시엘은 정체불명의 마법식 설치 사건이, 3왕자 아서에게 해를 끼치려는 다른 왕자들의 음모가 아닌가 의심하는 것이다.
물론 아니었다.
그건 그냥 고문서 조각을 구한 학생들이 선생님들 몰래 소환마법을 시험해본다고 벌인 해프닝이었다.
일단 버티다보면 내막이 밝혀질 터. 그 이후엔 이시엘도 이쪽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잔말 말고 학장님께 가 에테르 레벨을 재어 보자. 네가 1레벨인 게 증명되면 어젯밤엔 내가 잘못 본 것이겠지.”
클레이오는 속으로 뜨끔함을 느꼈다.
‘에테르 레벨인지 뭔지 지금 재면 높게 나오겠지?’
‘약속’을 몸에서 분리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 사이에 몇 번 힘을 주어 봤지만 반지는 접착제로 붙인 듯 꽉 달라붙었다.
빙글거리는 고양이는 이쪽을 구경하며 화를 돋울 뿐이었다.
“에오오오오오우우웅(너 뭔 짓을 하고 다녔기에 이 예쁜 애가 날뛰나. 측정하면, 에테르 레벨은 못 속이는 거 미리 말해 준다).”
클레이오는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쌩쌩하게 머리를 굴렸다. 앞으로도 누워서 놀고먹기 위해선 괜히 눈에 띠면 곤란했다.
“난 몸이 안 좋아서 당분간은 쉬어야해. 왜 그런 요청에 응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클레이오 아세르. 측정에 응하지 않으면 널 정식으로 고발하겠다. 에테르 레벨 부정 등록으로.”
“증거가 없잖아.”
“증거는 내 목격이다.”
“위급 상황이라 그랬을지 모르지만, 기억 안 난다니까.”
아, 청문회. 무조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로 버티는 작자들이 왜 그러나 했는데, 같은 상황이 닥치니 똑같이 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 휠체어 타고 나올 차롄가.’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손깍지를 무릎에 얹은 클레이오는 초조해지려는 마음을 잘 숨겼다. 원고 내용은 똑똑히 기억난다.
‘일단 그 투신 이후 사흘 뒤에 주동자가 이시엘에게 접근해. 병결은 아직 4일 더 남았고.’
“그렇다면 측정은 내 병결이 끝난 뒤에 하지.”
“수작 부릴 생각 마라.”
“수작이 아니야. 지금 나는 아프고 힘들어. 무고한 이를 부당하게 핍박하는 일이 올바른 행동인가?”
클레이오는 이시엘이 공정과 정의를 추구하는 성격인 점을 노려 말을 돌렸다.
“…그 역시도 네 계획의 일환이 아니라 어찌 확신하지?”
“하우스 메이트와 사환에게 확인해 봐. 물에 빠지기 전 방에 틀어박혀 있던 내가 접촉한 학생, 아니 사람이 있긴 있는지.”
이시엘의 무표정에 살짝 금이 갔다. 벌써 모두 찾아보았겠지. 클레이오 아세르에겐 찾아올 친구가 전혀 없었다.
‘한 명도.’
“병결이 끝날 때까지 사건이 해결되지 않으면 네 소환에 응할게. 그렇지만 그전에 해결되면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마.”
이시엘을 올려다보는 클레이오 아세르는, 열일곱 살 소년답지 않게, 너무나도 지치고 피곤한 얼굴을 했다.
과로에 시달린 32세 직장인의 쉬고자 하는 염원을 열혈 십대 청소년이 깨부수려고 하니, 표정이 좋을 수가 있나.
창백한 이마에 어느새 식은땀이 맺힌 소년은 정말 아픈 것처럼 보였다.
이시엘은 더 이상 기세 좋게 클레이오를 몰아붙이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진짜로 열이 오르는지 으스스해진 등을 떨던 클레이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난 좀 봐줘.’
조금만 더 밀면 이시엘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을 때, 산통이 확 깨졌다.
쾅―!
누군가 현관을 부술 듯 닫고는 거실로 뛰쳐 들어왔기 때문이다.
“클레이오 아세르, 너 빨리 튀어나와봐.”
‘얘 친구 없다며. 오늘은 왜 이렇게 찾는 놈이 많아.’
“네가 강에 뛰어든 바람에 나만 얼마나 불려 다닌 줄 알아? 불쌍해서 그나마 잘해줬더니!”
몸집이 커다란 소년은 이시엘을 지나쳐, 곧바로 클레이오에게 달려들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앞뒤도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커다랗고 두꺼운 주먹이 그대로 클레이오의 코앞으로 날아왔다. 제대로 맞았다간 뼈가 부서질 것 같은 일격이었다.
“윽, [사람 살려!]”
이시엘이 소년을 만류하기도 전에, 금빛 반원과 그 안을 채운 복잡한 문양이 클레이오를 둘러싸고 펼쳐졌다.
소년의 주먹은 원의 경계에 부딪쳐 튕겨나갔다.
“으아아아악―!”
손등을 움켜쥔 소년의 비명이 크게 울렸다. 이시엘은 찬란한 금빛이 너울진 반원 너머로 클레이오를 노려봤다.
언제든 발도할 수 있게 연습용 검에 손을 올린 채였다.
‘와, 씨 어떡하지.’
마법에 일자무식인 클레이오라도 이번엔 알 수 있었다.
클레이오를 가운데에 두고 2미터 반경으로 펼쳐진 금빛 원. 이건 틀림없이 원고에서 보았던 마법사의 ‘서클’이었다.
서클은 마법사의 에테르 레벨에 비례한 크기로 펼쳐지는 원형의 장(場)이다. 서클 안에서 마법사는 일반적인 물리법칙을 벗어나는 ‘마법’을 실현할 수 있었다.
원고의 내용 중 서클에 관한 부분만 재빨리 되새겨봤다.
대단히 뛰어난 학생들만이 1학년 때부터 서클을 펼칠 수 있다고 했다. 이건 전교 꼴찌인 자신이 갑자기 모의고사 만점을 받은 격.
‘약속’이 반짝거리며 광채를 발했다. 아무래도 몸에 큰 위협이 닥치면 반사적으로 서클과 방어마법이 전개되는 모양이었다.
‘…현대 사람을 판타지 세계로 집어넣으려면 보험 하나 정돈 둬야 했겠지. 이시엘이 봤단 것도 이거겠군.’
물에 빠졌던 자신을, 무의식중에 발동된 마법이 구해낸 게 분명했다.
‘고맙지만, 지금은 곤란해. 어떻게 되돌릴 수 없나? 방법 없어?’
마법 따윈 모른다고 한참 잡아떼던 와중 현행범으로 잡힌 꼴이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을 찾기 위해 애쓰던 클레이오의 앞에 금빛 문자열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오른쪽 손등에서 뜨거운 열이 느껴졌다.
[―고유 스킬: ‘편집자 권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스킬 적용 시 저자가 편집자의 수정 권고를 받아들입니다.제약: 챕터 내에서, 세 번까지 사용 가능.]
정진은 속으로 외쳤다.
‘쓸게, 뭔지 모르지만 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