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71
오페라극장 살인사건 (3)
“아무튼 성장기가 좋네요. 키가 커서 전보다 옷태가 나요. 돈 말곤 별생각 안하고 사는 거 아는데, 눈매 땜에 우수에 젖어 보이는 점도 좋아요. 점점 아세르 준남작님을 닮아가니 광내는 보람이 있군요.”
“레이디께서 제 부친에게 다소 불순한 흥미를 품고 있는 건 알겠지만 그걸 굳이 아들인 제게 말을 해야 할까요.”
“불수운? 불순요? 난 순백의 백합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미남을 애호하는 것뿐이거든요? 당신도 이제 살만 좀 붙으면 그럭저럭 합격점인데, 어째 내내 불쌍한 꼴인 건지!”
이 몸의 연비가 페라리 수준인 건 자신 탓이 아닌데 핀잔을 들으니 클레이오는 할 말이 없었다.
실크 장갑을 낀 고운 손이 공연히 클레이오의 팔목만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늘 생각하는데 이 레이디는 미의식이 이상한 것만큼이나 힘이 세단 말야.’
“지금 저 보기보다 힘세다고 생각했죠? 이거 보세요, 도련님이 너무 약한 거예요. 성적표 보니 검 하나 제대로 못 쥐고 말이죠!”
“저한테 그렇게 말하는 레이디 디오네는 검을 들 수 있습니까?”
“당연하죠. 전에 당신이 해먹은 내 양산 손잡이 안에 든 게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오늘 지참한 것도 엄브렐라 소드에요. 뭐, 마수를 창으로 꿸 수야 없지만 사람이 상대라면 잠시간 빈틈을 만들 정돈 돼요.”
클레이오는 괜스레 디오네에게 찍 소릴 냈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 그녀조차 저 가냘픈 팔로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니.
“제가 레이디 디오네의 능력을 미처 다 몰라봤군요.”
“알아 모시도록 해요. 여차하면 내가 지켜줄게요!”
“거 참 든든합니다. 가능하면 레이디까지 싸워야 할 일은 없는 게 제일 좋겠습니다만.”
“뭐 솔직히, 아무리 무도한 살인마라도 수천 명이 들어찬 극장 한가운데서 일을 치진 않을 거 아녜요.”
티켓을 부탁하며 디오네에겐 일의 전말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녀 역시 깜짝 놀라 협조를 약속했다. 아예 경시청장과 면담을 잡아줄까도 물었지만 그 제안은 클레이오가 거절했다.
기묘한 붉은 에테르든, 마법적 살인이든경찰의 대응 범위를 넘어선 사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제대로 증거만 잡으면 수도방위대 기사단에게 수사를 의뢰할 수도 있지. 사람을 조사할 권한은 없지만 마법 사건을 조사할 권한은 있으니까.’
클레이오는 지난 여름 이후 수도방위대와 학교에 연관된 각종 법령과 규정을 읽는 데 취미를 붙였다.
대체복무 규정을 몰라 개 같은 뻘짓을 한 이후 생긴 버릇이었다.
“아참, 제가 전화로 부탁드렸던 물건은 완성됐다고 하셨죠?”
“아! 맞아요, 여기 있어요.”
살짝 내려왔던 실크 장갑을 쭉 끌어올린 디오네가 진주로 손잡이를 엮은 핸드백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건넸다.
봉투 안의 청구서를 클레이오가 확인하는 동안 책장 한구석에 무해하게 놓여 있던 나무상자를 집어다 주었다.
“리볼버의 실린더는 마광석 철로 제가 직접 제작했고, 은 탄환들은 날짜 맞추느라 우리 세공사들을 풀로 돌렸어요. 야간근무까지 불사했으니 꼭 알아주세요.”
상자 안에는 총열이 얇은 리볼버와 마석 은으로 도금한 탄환 60발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갓 세공되어서 그런지 반짝반짝했다.
“이런, 실례를 끼쳤습니다.”
“그래서 청구서에 야간근무수당 항목 있는 거예요.”
상세 항목을 읽어보니 하루 8시간 이상 근무에 대해서는 세공사들에게 추가 수당이 지급되었다.
그레이어 영애는 남들보다 양심적인 사업장 운영자인 게 분명했다. 아직까지 알비온은 주 6일, 하루 12시간 노동제를 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야간근무수당 항목은 두 배로 지급하겠습니다.”
코트 주머니에서 수표책을 꺼낸 클레이오는 야간근무수당 항목을 두 배로 계산해 총액을 적고 사인했다.
수표를 받아 챙기며 디오네가 베시시 미소 지었다.
“역시 당신은 세상의 이치를 안단 말이죠. 이다음에 당신이 맡긴 일이라고 하면 세공사들은 앞다퉈 맡으려 할 거예요. 이번에도 가외근무 덕에 아이들에게 새 옷을 해줄 수 있다고 좋아들 했거든요.”
디오네는 직공들과 개인적인 이야길 나눌 만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급에서 정성이 나오는 법이니까요.”
“내참. 평생 제 손으로는 1디나르 한 장 벌어본 적 없는 도련님이, 주급 받는 사람들 생리는 어쩜 그리 잘 파악하는지.”
클레이오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월급쟁이 노릇은 물리도록 해봤던 과거를 디오네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으니까.
마침 때맞춰 사용인이 이시엘의 도착을 알렸다.
디오네는 마지막으로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며 모피를 여민 카메오를 정돈하고, 클레이오의 잔머리도 넘겨주었다.
클레이오는 캔튼 부인이 찾아온 커다란 피크닉 바구니에, 리볼버 상자를 넣고 뚜껑을 닫아 집어 들었다. 제법 묵직했다.
두 사람은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복도로 나섰다.
클레이오는, 이시엘과 디오네가 한 자리에 모이면 내심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이시엘은 아마 교복을 입고 올 겁니다. 그 애의 복장에 대해선 절대 잔소리를 하시면 안 됩니다.”
옷차림을 일종의 연설문처럼 여기는 디오네가, 공연장에 가면서도 교복을 입을 이시엘에게 혹여 말을 얹을까 염려가 되었다.
“물론 저보다 훨씬 에티켓에 대해 잘 아시겠지만, 이시엘에겐 그 복장의 이유가 있으니 아무 소리 말아 주십시오.”
“알고 있어요. 어떻게 제가 키시온 영애의 검은 프록코트를 타박하겠어요? 그녀의 웅변에 말을 얹는 건 주제넘은 짓이죠.”
평소와는 180도 다른 반응에 클레이오는 얼이 빠졌다.
“…아니, 이시엘은 그렇게 존중하시는 분이 왜 저는 그렇게 쥐 잡듯 잡는 겁니까?”
“하, 도련님이랑 키시온 영애가 같아요? 그분은 반드시 영지를 물려받아 국경을 지키고자 하는 충정을 지니신 분이지만, 당신은 아니잖아요.”
“저기요, 레이디 디오네. 제가 편한 건 알겠지만 조금 사람 마음을 생각해서 말을 가려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사람 마음 모르는 건 누군데 저에게 그런 얘길 들먹이나요? 으흥, 천 년은 이르네요.”
클레이오가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디오네는 경쾌한 몸놀림으로 응접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센터피스 앞에 이시엘이 서 있었다.
평소와 똑같이 단정한 교복 차림, 기품 있게 검을 비끄러맨 모습이었다.
디오네에게 신신당부를 해놓은 주제에 염치도 없이, 아주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고개를 휘저은 클레이오는 드레스에 대한 헛된 생각을 얼른 날려 보냈다.
날씬하고 탄력 있는 사지를 온통 무채색인 정장으로 감싼 채여도, 이시엘에게는 그 이상의 장식이 필요치 않았다.
장미로 태우는 불처럼 화려한 붉은 머리가 귓가를 장식하고, 페리도트보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저토록 선명하니 무엇을 더 더할 필요가 있을까.
디오네에겐 디오네의 투쟁이, 이시엘에겐 이시엘의 전장이 있다. 항상 임전 태세인 것이 이시엘의 긍지 아닌가.
“기다려 주셔서 고마워요. 키시온 영애. 먼 곳 까지 걸음하게 한 점 사과드려요.”
“아닙니다. 레이디의 후의로 공연을 관람할 수 있게 되었는데 먼 걸음이라니요.”
“양해해주시다니, 마음씨도 넓으셔! 못아, 너도 일어나렴!”
“에웅….”
응접실 바닥에 발깔개처럼 널브러져 있던 베헤못은 디오네의 부름에 미적미적 일어나 몸을 부르르 털었다.
이시엘과 디오네 모두 사부작사부작 그루밍을 시작한 베헤못의 모습에서 눈을 못 뗐다.
엄청나게 아름다운 두 사람이 오로지 늙다리 뚱묘 하나만을 열렬히 쳐다보는 광경은, 무슨 부조리극의 한 장면 같았다.
거대비만묘는 미인들의 시선을 즐기며 털을 싹싹 골랐다. 오후에 먹여준 마데이라가 흡족했는지 관대한 표정이었다.
“꺼어어억― 웅냣.”
‘저거, 저거 아까 마신 술도 다 안 깨서 비틀대잖아. 어이구.’
“우리 못이, 단장 다 했으면 이제 누나랑 오페라 보러 가자. 반 년간 고대했던 야!”
“먘, 에옥?(됐고, 가면 술 있나?)”
“에카르라트 산 로제 샴페인도 미리 극장으로 보내 놨으니, 공연 보면서 마실 수 있을 거야! 네게도 몇 방울 축여 줄게!”
게슴츠레하던 베헤못의 눈이 일순 초록초롱 별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아오, 저 알콜중독묘를 믿어도 되나.’
아서와 친구들은 지금 붉은 에테르를 추적하기 위해 눈 하나라도 아쉬운 처지였다.
그렇다면 에테르에 민감한 베헤못은 최고의 용병이었다.
가기 귀찮다는 걸 달래느라, 집에 돌아오자마자 비장의 20년산 마데이라를 땄던 것이다.
클레이오의 꾸질해진 표정을 딱 눈치 챈 베헤못은 입을 쭈욱 늘리며 얄밉게 웃었다.
“에오우우웅(들었지? 알아 모셔라).”
클레이오는 가지고 내려온 피크닉 바구니를 열었다. 알았으니 얼른 들어와 달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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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극장의 2층 계단참 앞에서 경비가 일행을 막아섰다.
“실례합니다만, 혹시 그 바구니에 든 게… 동물입니까?”
커다란 피크닉 바구니를 낑낑 안고 가던 클레이오가 뚝 멈춰 섰다. 바구니에 다 안 담겨 뽀족 빠져나온 검은 꼬리가 살랑 움직였다.
“객석에는 애완동물을 들일 수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에게 맡겨주시겠습니까? 공연 동안 돌보아 주겠습니다.”
“객석에 애완동물을 들일 수 없다니요? 로열오페라 운영 수칙 어디에도 그러한 내용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걸요.”
“아니, 그게….”
디오네의 말투는 온화했지만 태도는 단호했다. 그녀라면 극장 운영 수칙을 정말로 읽어 봤을 것이다. 정론으로 따지면 경비가 할 말이 없을 수밖에.
‘그야 규정이 있을 리가. 누가 오페라 공연장에 애완동물을 데리고 올 생각을 하겠냐고… 아니다, 다 내 죄다.’
“여기 클레이오 경에게는 궁성 안까지 애완동물과 동행 가능한 수도방위장 수여자의 권리가 있는데, 불가하다니요. 로열 오페라의 권위가 왕실의 그것보다 높다는 뜻인가요?”
레이디의 기세와 그녀가 들이미는 묵직한 이름에 경비가 움찔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잘 하는 짓이 아닌 건 알았지만 지금은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베헤못을 안 데려 들어가고 몰래 풀어 놓으면 분명 어디 숨어들어가서 퍼 자거나 술이나 훔쳐 먹을 테니까.’
대충 일이 잘 풀릴 것 같자, 디오네가 클레이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자, 자연스럽게 고양이 바구닌 한 손에 끼고 내게 한 팔을 내줘요. 당연한 권리를 찾는 태도로 날 에스코트 해 들어가요.”
“저… 그건 무립니다. 한 손으론 베헤못 못 듭니다.”
“아이그, 진짜! 내가 환장을 한다.”
두 사람의 속닥거림을 캐치한 이시엘이 슬며시 클레이오의 손에서 고양이 바구니를 빼내어 들었다.
그리고는 호위하듯 두 사람의 뒤를 가리고 섰다.
그 차갑고 서늘한 기색에 경비는 더 말을 못 붙였다.
클레이오는 어설프게 팔을 내밀어 디오네를 에스코트했다.
방금의 실랑이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 뒤통수가 뜨끔거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세 사람과 한 고양이는 경비의 제지를 벗어나 2층 박스석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늑한 발코니 박스석은 붉은 벨벳을 씌운 호화로운 의자가 놓였다.
몇 분 후.
아세르 집안의 성이 동판에 새겨진 좌석에 앉아 클레이오는 생각했다.
‘고양이 손을 빌리려던 거였지, 갑질을 하고 싶던 건 아니었는데… 이미 쏟아진 물이지만. 휴.’
베헤못은 좁은 바구니에서 쏜살 같이 튀어 나와 클레이오의 무릎을 짓뭉개고 있었다.
클레이오는 어두운 데선 희게 보이는 케이프 코트에 검은 고양이털을 잔뜩 묻히고서 부끄러움을 곱씹었다.
물론 부끄러움은 그만의 몫으로, 디오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레이, 레이. 저기 반대편에 빈 좌석 보여요?”
디오네는 재미있는 거라도 발견했단 듯, 부채 너머에서 소곤소곤 속삭였다.
무대를 기준으로 오른편에 위치한 좌석에서 맞은편인 왼편의 박스석은 잘 보였다.
“인기 공연이라더니 왜 자리가 비었죠?”
“저긴 왕실 전용 좌석이에요. 쥴레이카 왕비가 오페라의 열렬한 팬이라 시즌이 되면 꼬박꼬박 모습을 비추는데, 게하임이 극장의 스타가 된 후로는 영 안 나타나시네요. 출신 모를 천것의 노래는 안 들으시겠다 이거죠 뭐.”
“왕비님 한 분께서 불참한다고 자릴 저리 다 비우게 되나요?”
“그야~ 왕족과 왕족이 초대한 손님을 위한 자리니까요. 열 번에 한 번 정돈 왕비님의 유일한 아들이 자릴 채워주시기도 하는데, 그분 역시도 지금은 동남 수비군의 동계 훈련에 참여 중이시라고 하네요.”
왕비의 유일한 아들은 2왕자 아슬란이다.
“…지금 2왕자가 수도에 없다는 뜻입니까?”
“확실하게요.”
그러면 추측의 앞뒤가 안 맞게 된다.
클레이오는 무심코 왼쪽 편에 앉은 이시엘을 돌아봤다. 표정을 보니 그녀 역시 같은 의문을 품은 모양이었다.
붉은 에테르는 2왕자와 관계있는 사안이라 생각했는데….
‘아냐. 어머니가 제국의 공주인 왕자께서 직접 더러운 일을 벌이겠어? 본인이 알든 모르든 실무자급에서 처리하고 있는 거겠지. 일단 더 살펴보자.’
클레이오는 「지각」을 켰다. 동반되는 현기증을 버티며 온 정신을 다해 집중했다.
확장된 감각이 극장 안을 채운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르듯 스치고 지나갔다.
객석 전체와 교향악단원까지 낱낱이 살폈다.
‘어디 보자. 에테르 감응력 5레벨 이상인 사람이… 있네? 두 명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