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9
망나니와 부정입학생 (1)
클레이오와 네보는 전세마차를 불러 템푸스강 서편으로 다리를 건너갔다.
마차 안에서 조금 띄워주자 네보는 전세마차 부르는 법, 합승마차 타는 법 등을 줄줄 알려줬다.
‘원고만 봐선 이런 소소한 생활팁을 알 수가 없단 말이지. 학교에 다니는 동안 세상을 좀 파악해 놔야, 백수 생활도 원만할 거 아냐.’
곧 요령을 익힌 클레이오가 마부에게 정확한 행선지를 알렸다.
플라타 은행의 가장 가까운 지점으로 가 달라고 하자 마부는 작은 석조건물 앞에 클레이오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서 5분 후,
플라타 은행 로얄 서커스 지점의 지점장 헨리 피스트는 반들반들한 정수리에 맺힌 땀을 닦았다.
“뭐? 아세르? 아버지, 아들? 어느 쪽이 내점했지?”
지점장 비서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들입니다.”
“지금은 첸트룸 선단에 동행하지 않았나?”
“첫째가 아니라 둘째입니다. 지점장님.”
“그 집에 둘째가 있었다고?”
“있는데다, 계좌조회를 요청하더군요.”
“본인은 맞아?”
“왕립수도방위대 학교 재학생인 그 클레이오 아세르 맞습니다.”
“뭐 때문에 조회를 요청한 거야.”
“출금할 거라고 합니다.”
“얼마를?”
“그걸 애매하게 말하더군요. 계좌 총 잔액은 40만 디나르입니다. 만일 오늘 모두 현금으로 출금 하면 당점에선 현금보유량이 부족합니다. 중앙 지점에….”
“내가 나감세. 왜 굳이 지점으로 방문했는지 알아보겠어.”
이유는, 학교와 가까워서일 뿐이지만 지점장이 그걸 알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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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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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 은행 로얄 서커스 지점의 응접실은 화려하고 쾌적했다.
푹신한 소파 곁에 시가 케이스와 브랜디 병이 늘어선 장소는 영화에서 보던 신사 클럽과 비슷해 보였다.
소파에 푹 파묻힌 클레이오는 그 편안함을 한껏 즐기는 중이었다.
‘물론 열일곱 살짜리 고갱님 모시라고 있는 응접실은 아닌 것 같지만. 이 술 한 잔 달라고 하면 이상하게 보려나?’
클레이오라고 처음부터 응접실에서 응대를 받은 건 아니었다. 창구에서 수표를 내밀고 서명한 순간, 일이 벌어졌다.
돈의 가치가 어느 정도 되는지 감이 없어, 수표에 금액을 쓰기 전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러자 창구 직원이 허둥대기 시작하는 거였다.
클레이오 역시 속으론 당황했었다.
‘갑자기 안으로 부르기까지 하고. 사인 위조 들킨 줄 알았네.’
물론 그런 문제는 아니었다.
수표와 연결된 클레이오의 계좌에는 40만 디나르가 들어 있었다. 은행에선 혹여라도 잔고를 전액 인출할까 봐 신경을 곤두세웠던 모양이었다.
브랜디에 입맛을 다시던 클레이오는, 지점장이 들어서는 걸 보며 화급히 대외용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클레이오 아세릅니다. 이렇게 지점장님이 손수 나와 주실 필요 없었는데 감사하군요.”
“아닙니다. 부친 대부터 오랜 세월 저희 플라타 은행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용건은 들었습니다. 인출 금액은 얼마를 생각하시는지요?”
“용돈이나 조금 인출할 생각이었는데, 일이 커졌군요. 그저 생활비로 쓸 정도면 됩니다.”
지점장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그러면, 1000디나르 정도면 될까요?”
“그렇게 처리해 주십시오.”
‘40만 디나르가 도대체 얼마나 되기에 저 난리지? 아무튼 작은 돈은 아닌가보군.’
“저희 직원이 오해를 해 괜히 고객님 시간을 빼앗았군요.”
“그렇지 않습니다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브랜디나 한 잔 내주실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요. 고객님들을 위해 갖춰 놓은 음료인걸요.”
지점장은 선선히 대답하고서 넉넉한 한 잔을 따라 건넸다.
“그럼 현금은 이쪽으로 갖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천천히 일 보십시오.”
막 변성기가 지난 소년의 목소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지만, 브랜디에 정신이 팔린 클레이오는 신경을 못 썼다.
마침내 브랜디가 가득 찬 잔이 손에 들어왔다.
잔을 쥔 소년은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 됐다. 목을 타고 자르르 흐르는 뜨끈한 감촉과 코를 스치는 향기로운 냄새. 너무 좋았다.
‘이거 무슨 이십오 년 됐단 아르마냑보다 더 맛있잖아.’
회사 다닐 적 해외학회 다녀오는 저자들이 간혹 술 선물을 회사로 가져왔었다.
술 마실 때 사장의 넋두리를 듣는 건 짜증났지만, 비싼 술은 넋두리를 참고 들어줄 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30대에 이른 정진의 사랑은 이성도 책도 아닌, 술이었다.
심지어 이 술은 상사의 염병도 없는 공짜 술.
‘횡재했네.’
클레이오는 브랜디를 천천히 비웠다.
콧속에 남은 여운을 즐기고 있을 때 지점장이 응접실까지 지폐를 가져다줬다. 클레이오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두툼한 봉투를 품에 갈무리했다.
“다음부터는 직접 방문하실 필요 없이 은행 사환을 부르시면 됩니다. 거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께도 안부 전해주십시오.”
“그러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지점장 인사는 동네 지점이라도 건물주나 받는 건데 여기 와서 별 경험을 다 해보는군. 이게 금수저의 맛인가.’
로비에서 기다리던 네보는 어른들을 달고 나온 클레이오를 보고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너 정말 귀한 집 자제였구나.”
“음, 나도 몰랐다. 그럼 이제 가자.”
네보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듯, 공손히 인사하는 지점장의 대머리를 힐끔거렸다.
클레이오는 느긋하게, 네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로비를 빠져나갔다. 그들을 배웅하던 헨리는 재빠르게 비서를 불렀다.
“클레이오 아세르가 수도에서 뭘 하려는 건지 정보 좀 모아 봐. 이제껏 활동이 없던 차남이 직접 나선 걸 보면 무슨 의도가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쟤도 아세르는 아세르야. 비실하니 어린 게 속은 완전 애늙은이네. 주의해서 나쁠 건 없지.”
술 한 잔 얻어먹었다고 이런 소릴 들은 걸 알았으면, 클레이오는 먹은 술을 도로 뱉고 싶었을 테지만 그의 귀에는 은행장의 말이 닿지 않았다.
***
‘이시엘이 다시 안 찾아오는 거 보면 마법식 사건은 해결된 거야. 역시 무조건 모르겠다, 아프다 버티는 게 답이었어.’
간식을 주워 먹으며 클레이오는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편집자 권한’과 저자의 목적에 대해서도 다소간 생각해 보았지만, 메일 이후로는 아무런 전언이 없다보니 의도를 추측할 요소가 부족했다.
‘원고 개정을 도와달라곤 했지만 원래 원고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가타부타 말도 없고 이쪽은 방치중이니….’
그렇다면 자신은 자신대로 나름의 앞날을 추구할 수밖에.
은행에 다녀온 뒤론, 주말 내내 먹고 자고 뒹굴었다. 뒹굴다 심심하면 고양이나 주무르고.
그다음엔 학교 수첩에 적힌 교칙을 꼼꼼히 읽었다.
첫 번째는 자퇴. 이건 보호자의 동의하에만 가능했다.
‘엄청난 기부금 썼단 아버지가 자퇴에 동의해줄 리는 없고. 어머니 이야긴 안 들리는 거 보면 없는가 봐?’
두 번째는 유급과 제적.
시험을 2회 연속 낙제하면 유급이고, 유급2회 누적 혹은 학기 당 출석일수 3분의 2를 못 채울 시엔 제적.
‘좋아, 이 기세로 가자.’
마지막으로 교과서도 한 번 훑어보긴 했다.
그러다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약속’이 있어도 처음 읽을 땐 원래랑 같은 속도로 밖엔 책을 못 읽잖아!’
몇 번을 시험해 봐도 똑같았다.
‘약속’의 「기억」은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은 책을 대상으로만 적용 가능했다. 읽지 않았던 책은, 원래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써서 내용을 익혀야 했다.
‘그런 짓을 왜 해? 하아암.’
교과서를 던져 둔 클레이오는 다시 침대에 벌렁 누웠다. 그 꼴을 보던 고양이가 역시 인간처럼 널브러져 있다 시비를 걸었다.
“멍청한 것아 이제야 책이란 걸 좀 들여다 볼 마음이 드냐?”
“아니. 난 멍청해서 공부 같은 거 안 해.”
“쯧쯧. 한심한 놈. 너 지난 시험 때도 낙제였는데, 계속 그러다간 학교를 잘린다.”
“아, 완전히 바라는 바야.”
그렇게 일요일 저녁이 저물었다.
***
마침내 월요일이 왔다.
느긋하게 1학년 강의동으로 갔다. 등교를 한다고 생활이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이미 자살시도 소문이 쫙 퍼졌는지 선생이고 학생이고 클레이오를 부푼 종기처럼 대했다.
즉, 강의실 뒷자리에서 퍼질러 자고 있어도 주의조차 듣지 않았단 이야기다. 수업 내내 자던 클레이오는 점심 종에 맞춰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엎드려 자니 등이 좀 쑤시긴 하군. 내일부턴 수업도 들어오지 말아야겠어.’
학교의 정규수업은 월-금요일 모두 오전 3시간이 다였다. 오후부터는 학생 개인 진로에 맞춰 연구나 수련을 한다는데, 이쪽이 그런 걸 할 리가 있나.
‘밥이나 먹어야지.’
사환에게 물어 강의동 식당 위치는 알아 뒀다. 워낙 느긋하게 움직였더니 식당 안엔 사람이 없었다.
‘오, 점심 메뉴도 3코스.’
식당 입구에 손으로 적은 메뉴가 보였다. 수프, 버터에 구운 생선요리, 졸인 베리와 크림.
멈춰 서 아래의 작은 글씨까지 잘 읽어보니 학생 식당 주제에 와인도 요청할 수 있었다.
‘여긴 미성년자도 술 마실 수 있나 보군?! 어쩐지 은행에서도 순순히 술을 주더니.’
클레이오의 처진 눈이 처음으로 번쩍 뜨였다. 이곳에 도착한 후 있었던 일 중, 계좌조회 다음으로 기쁜 일이었다.
‘앞으로 몇 년이나 금주해야 하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이미 망했을 그놈의 출판사 다닐 동안, 좋은 점은 딱 하나였다.
학술서 저자는 주로 교수들이었고, 교수들은 별별 비싸고 좋은 술을 다 알았다.
보통은 회사가 저자를 접대하지만, 사장의 인맥으로 꾸려가는 작은 회사에선 저자들이 사장을 좀 딱하게 여겼다.
그 결과 늘 술 선물만은 풍족하게 들어왔다.
정진의 월급으론 생각도 못 해본 술을, 선물이니, 명절 인사니 하며 자주 마시다보니 어느새 맛들이게 된 것이었다.
‘이건 노영신 교수가 박스로 사 오던 알자스 와인이랑 비슷하네. 신 맛 적고 안 달고 미네랄 맛도 나고. 아, 날씨 좋고 술이 술술 들어간다.’
트레이에 담긴 식사를 해치우며 한 잔, 두 잔 부탁해 마셨다. 퍼 잔 다음날에다 날씨도 좋으니 취기 하나 안 돌았다.
몸이 비실비실해져 주량까지 달라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청소년이라 간이 깨끗해서 그런지 술은 잘 받았다.
디저트까지 깔끔히 해치운 클레이오는 아예 술을 담은 유리병을 식당 아주머니로부터 받아왔다.
때는 오월.
창밖의 얕은 울타리를 따라 봉오리가 맺힌 여름장미가 아름답고, 바람은 시원하고, 해야 할 일은 없고, 와인은 맛있었다.
홀짝.
‘이게 사는 맛이지.’
그때, 식당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망중한에 젖은 클레이오를 깨웠다.
“아, 아줌마 남은 술 있는 거 아는데 왜 거짓말해요. 1학년 강의동 식당은 항상 술 남잖아요.”
“저리 꺼져, 이 자식아. 그건 그냥 반주로 한 잔씩 내라고 있는 거지! 어, 너 취해서 자빠져 있으라고 주는 게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