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90
1891 (1)
‘그래 주인공의 멘탈을 흔드는 장본인이 돼도, 서사에 엮이는 건 엮이는 거지. 젠장.’
아서는 ‘그자는 스킬을 안 써도 제 뜻을 이룰 방도를 백 개쯤 갖고 있다’고 멜키오르를 가리켜 말하곤 했는데, 사실이었다.
곧, 아서의 눈가에 감돌던 살기는 씻은 듯 사라졌다.
이게 개수작인 건 클레이오보다 아서 자신이 더 잘 아는 것이다. 저 짓을 평생 봐왔을 테니.
‘너네 막냇동생이 상황파악은 빠릿하게 되는 놈이라 다행이지, 만일 이거 때문에 비뚤어졌으면 그 대가는 세상 전체가 같이 감당해야 한다고.’
하여간 왕실은 인민의 적이고, 사회적 비용 상승의 주범이다.
누가 봐도 훌륭한 적폐 세력의 일원인 갑부집 둘째아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멜키오르는 여전히 우미한 얼굴을 온화하게 유지했다.
한숨을 감춘 클레이오는, 김이 다 빠진 탄산수로 목을 축이고서 최대한 또박또박한 소리로 대답을 돌려줬다.
“저하께서 기억된 세계를 몸소 파훼하고자 하신다니, 만민의 귀감이며 용기 있는 행동으로 칭송받을 것입니다. 수도를 위협하는 기이한 무리들을 손수 정벌하려 하시다니, 그 일에 제 미약한 능력을 보탤 수 있다면 오히려 영광입니다.”
마치 연극배우처럼 홀 안을 풍부하게 울리게 하는 멜키오르의 발성법을 따라할 수야 없었지만, 이 정도면 가까이서 듣고 있던 사람들이 알아서 남의 말을 옮겨 줄 만큼은 됐다.
‘다들 할 일 하는 척하지만, 귀 바짝 세운 게 뻔히 보인다.’
이런 게 바로 디오네가 말한 ‘폭풍’이라는 것일 테지.
‘뭐, 그래서. 바람이 거세다고 배 안 띄우면 그대로 다 같이 난파해서 죽는 건데.’
“늘 겸손이 과하군. 이전, 기억된 세계의 파훼에서 경의 인도가 큰 역할을 했다는 보고서를 봤네만.”
등 뒤에서 이시엘이 내뱉는 얕은 헛숨 소리가, 클레이오의 예리하게 돋워진 「지각」에 걸렸다.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히면 말도 안 나오게 된다. 돌아보지 않아도 두 사람은 이심전심이 되었다.
‘이시엘은 보고서에다 내막을 자세히 적지 않았어. 우리끼리 힘을 합쳤다고 잘 눙쳐 놨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클레이오의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멜키오르의 도발로 인해 분명해 진 게 있었다.
‘뭔가의 제약 때문인지 뭔지 몰라도, 첼이나 이시엘의 머리를 당장은 못 열어 보는 거야.’
고유 스킬을 쓸 수 있다면, 아이들의 반응을 떠보려고 이런 눈에 띄는 도발을 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그러한 추측은 클레이오에게 작은 여유를 선사했다. 이 인물과 마주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클레이오 본인은 「이격」을 켜 방어하고 있고, 어쩐 연유인지 그의 ‘간파의 구조시’ 스킬은 현재 사용이 어려운 것 같으니 이전처럼 바짝 졸아붙을 건 없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걸고서 클레이오는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겸손은 저하께서 보여주시는 태도를 이르는 것입니다. 므네모시네의 문 너머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데도 기사의 정신을 잊지 않고 봉사와 희생의 정신을 보이려 하시는 분께서, 그 일을 널리 알려 우러름을 받으려 하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깊으신 뜻에 그저 머리를 조아리게 됩니다.”
“그것이 그리 대단히 칭송받을 일은 아니지.”
클레이오는 양손을 공손히 붙잡고 예의 바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아슬란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에 크뤼엘 공작과 아슬란의 기척이 흔들렸다.
아서는 슬그머니 멜키오르의 뒤로 다가서 아슬란과 크뤼엘 공작의 시선을 차단했다. 왕세자를 앞에 놓고 다른 데까지 신경 쓸 정신적 자원이 없는 클레이오는, 그쪽의 실랑이까진 눈치채지 못했다.
“제가 아는 기억된 세계는 하나뿐이고, 그것은 너무나도 위험천만한 것이었기에 그리 속단을 하고 말았습니다. 저하께서 우매한 자에게 가르침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껏 자신을 낮춘 소리는 멜키오르에게 던져본 미끼였다.
‘솔직히, 던전이 전부 위험한 건 아니잖아. 뭐 이런 걸 만들어놨나 싶을 만큼 지독한 ‘영원한 겨울의 도시’ 같은 게 있는가 하면 ‘진주의 도시’는 쉬어가는 파트로 널널했지. 그리고 이 작자는 진주의 도시에만 들어갔어. 이미 던전이 열리는 순서를 아는 거겠지?’
오로지 대외 선전을 위해 들어가기에, ‘진주의 도시’를 제외한 다른 던전의 위험도는 너무 높았다.
‘게다가 지난 원고에서 안전하던 던전이라고 이번에도 그럴거란 보장이 없잖아. 저렇게 위험천만한 인물과 동행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커. 던전에 가려는 이유라도 좀 알았으면 좋겠는데.’
물론 멜키오르는 클레이오가 던진 미끼 따윈 물지 않았다.
“기사의 정신이라, 내가 무력에서는 그리 대단한 성취를 보지는 못했네만. 그러니 그대와 같은 뛰어난 에테르 감응자는 무게가 가볍지 않지.”
“제가 가진 것은 그저 작은 재능인지라, 물론 감사한 능력이나 서로 북돋워 주는 동료들이 없고서야 저 홀로 무언가를 이룩할 수 있을는지요.”
‘그래, 뭐… 이 자식 속을 어떻게 알아내겠어. 일이 닥쳐도 알 수 있을까 말까인데. 후.’
얼핏 듣기에는 서로를 높여주고 있으나, 그 아래엔 가시가 돋은 주고받음이 몇 차례 더 거듭되었다.
왕세자와 저 어린 마법사의 공방을 엿듣던 사람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외모를 보아서는 전혀 당찬 구석이 없는 클레이오가 그 왕세자를 상대로 조금의 긴장감 없이 나불대고 있으니, 그 광경이 기묘했던 것이다.
첼은 휘파람을 불려다 이시엘이 옆구리를 쿡 찌르는 걸 느끼고 참았다.
물론 스페쿨룸 공국의 2등 서기는 참지 않고, 【와, 저 비리비리한 애는 뭘 믿고 세자 저하께 저리 당돌히 굴지요?】같은 말을 하다 영사에게 발을 밟혔다.
마침내 멜키오르는 식후주가 담긴 잔을 쥐고서 천 개의 태양이 한 번에 빛을 내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경은 참으로 동료들과의 우애가 깊군.”
물론, 슬슬 멜키오르의 압박에도 익숙해진 클레이오에겐 생각보다 큰 타격을 안기지 않았다.
‘와, 이 자식. 할 말 없어지면 일단 얼굴로 어떻게 무마해 보려는 거냐… 어이없다.’
여신의 자녀를 조각한 조각상이 움직인 듯한 미소가 홀의 분위기를 얼려놓은 직후, 역시나 간이 배 밖에 나온 첼이 재빨리 왕세자와 마법사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희는 숙식을 같이하고 종일 수업과 연구를 함께 하니, 정이 붙지 않을 수 없지요. 저하께서 그러한 깊은 뜻을 품고 계셨다니, 알비온의 신민으로서 감읍한 마음을 느낍니다.”
이쯤 오니, 왕세자가 어린 학생들을 붙들고 더 할 만한 이야기는 없었다.
예의 바른 인사가 오간 뒤, 아서의 농담 섞인 재촉을 받고, 첼의 장난기 어린 신년 인사까지 끝난 후 멜키오르는 자연스레 벤자민 비튼 의장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시종들이 테이블을 정리하고 식후주로 그라빠와 리몬첼로를 내왔다. 술을 안 마시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레몬 셔벗이 제공되었다.
어느덧 홀의 가운데 걸린 거대한 괘종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려 했다. 샹들리에의 불이 어두워지자 홀을 채운 금빛이 더욱 영롱해졌다.
젊은 축인 초대객들부터 남녀가 짝지어 일어나 커튼을 모두 걷은 창가로 다가갔다. 창틀 위에는 푸릇한 겨우살이 가지가 금빛과 붉은빛 리본에 풍성하게 엮인 채 걸려 있었다.
연주되던 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의 소란이 커져갔다.
덕분에 구석진 위치의 테이블에서 작은 소리로 나누는 대화는, 남들에겐 잘 들리지 않을 터였다.
첼과 아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식후주를 원샷했고, 베헤못도 뒤질세라 따라놓은 술에 주둥이를 콕 처박고 찹찹거렸다.
그 꼬라지를 보니 클레이오도 약간 마음이 편해졌다. 전보다 덜 긴장했다곤 해도, 역시 멜키오르와 마주치면 기가 빨렸다.
클레이오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 축 늘어졌다.
“후우…. 십 년은 늙은 것 같네.”
그는 벌써 그릇을 다 비우고 눈을 빛내는 리피와 레티샤에게 두 스쿱의 셔벗을 공평하게 나누어 준 뒤 물만 조금 더 마셨다.
빈 잔을 내려놓은 아서가 드르륵 의자를 끌고서 클레이오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레이, 너는 지금도 충분히 어려 보이니까, 십 년쯤 늙어도 중년으로 보일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넌, 지금은 좀 입을 다물고 있어 주면 좋겠어. 난 그런 목소리가 좀 싫어지려고 하거든.”
“너무해… 원래 형제나 부자간엔 목소리가 닮는단 말야.”
“그거 말고 딴 거는 닮지 마.”
“어이 레이, 그건 하고 싶어도 아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걸?”
낄낄거리며 끼어든 첼에게, 은스푼을 쥐고서 깔끔하게 셔벗을 떠먹고 있던 쌍둥이가 가세했다.
“맞아. 저하는 너무너무 아름답잖아.”
“보다보면 눈이 타버리게 아름답지.”
“너흰 누구 편이냐, 내참!”
“다들 소리를 좀 낮추도록 해라. 홀이 시끄러워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지 않느냐.”
“이시엘 네 염려도 맞지만, 이제 곧 신년이니까!”
다 같이 창가에 모인 사람들이 손을 몸 앞에 교차해 맞잡고는 신년을 맞이하는 노래를 불렀다. 가사를 잘 모르는 클레이오는 대충 따라 부르는 척만 했다.
악단도 익히 알려진 전통 민요의 곡조를 흥겹게 편곡해 연주하며 사람들의 목소리를 엮어 주었다.
신년을 맞이하는 초세기가 시작되었다.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왕세자와 기사단장까지 창가로 다가간 판이니, 클레이오 역시도 더 미적대지 못하고 쌍둥이들에게 질질 끌려 창가로 향했다.
‘3, 2, 1…!’
펑―
퍼엉!
길게 난 내리닫이 창문틀 너머 무수한 불꽃이 산란했다.
신년을 맞이하는 불꽃놀이였다.
어느새 사람들에게 밀려, 함께 있었던 아서와 첼, 쌍둥이들이 사라지고 이시엘만이 곁에 남아 이리저리 밀리던 클레이오의 어깨를 잡아챘다.
무심한 손길이었지만 그 덕분에 클레이오는 페드르 왕국의 공녀가 멋지게 떨쳐입은 와이어 크리놀린과 치맛자락에 다리가 엉키지 않을 수 있었다.
“고마워, 이시엘. 네가 아니었으면 저분께 대단한 실례를 저지를 뻔했네.”
“그렇다. 평소엔 술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술을 안 먹어도 넌 매한가지구나. 그리 단련을 하라 일러도.”
“으, 으음. 올해부터는 정말로 할 테니까.”
“네가 잘도 그러겠다. 아침마다 못 일어나 고양이에게 얻어맞으면서도 침대를 안 나오려고 하는 주제에.”
“안 일어나 지는데 어쩌냐.”
“그래. 무리는 하지 마라. 그저 건강만 챙기고.”
그리고는 두 소년, 소녀는 소란 속에서 불꽃만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지속되는 빛의 산란이 이시엘의 옆얼굴을 갖가지 색으로 물들였다.
다이아몬드 티아라도, 수정과 진주의 베일도 쓰지 않지만 이시엘은 세상의 어떤 인물보다도 반짝이고 돋보였다.
그것은 강한 의지와 뜨거운 생명력의 빛이다.
본래의 인생에서도, 새로이 얻게 된 인생에서도 클레이오, 자신과는 연이 먼 미덕을 무장처럼 두른 소녀 앞에서 클레이오는 희미한 감상에 젖는다.
훗날 이 애가 얻게 될 칭호는 ‘불과 대적의 기사’. 군단을 이끌고, 주군의 뜻을 지상에서 실현할 자.
하지만 지금의 이시엘은 다정한 연인들 사이에 비실비실한 동급생과 고립되어, 난국을 타개할 방도를 찾으며 미간을 굳히고 서 있는 어린 학생일 따름이다.
빛의 축제는 끝났으며 새 빛이 다른 연도를 입고 돌아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빛이 없는 시간이었다.
일출이 오기 전 겨우살이 아래선, 그 어떤 키스도 비난받지 않는다.
손을 맞잡은 연인들, 혹은 정부들. 관습적이거나 비관습적인 관계를 맺은 이들은 오로지 이 밤에만 용인되는 키스를 거듭한다. 짧거나 긴, 얕거나 깊은.
미묘한 표정이 된 이시엘은 방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감싸고 있던 클레이오의 어깨를 슬며시 놓았다.
살짝 비틀거리던 클레이오는 정강이에 팍 부닥쳐오는 거대 털뭉치 덕에 넘어지는 신세를 면했다.
베헤못이었다.
“에오우우우우웅! 웅냣!(본묘의 아름다운 꼬리가 밟힐 뻔하지 않았느냐! 얼른 안아들어라!)”
“그래그래.”
클레이오가 낑낑대며 베헤못을 안아 들자, 소년의 빈약한 어깨에 가차 없이 앞발톱을 박아 넣은 고양이는 불꽃놀이를 더 잘 보겠답시고 긴 몸을 쭉쭉 늘렸다.
베헤못이 깃발처럼 꼬리를 흔들어댄 탓에, 놈을 발견한 쌍둥이들도 사람들을 헤치고 조르르 다가왔다.
“레이, 여기 있었네! 갑자기 사람들이 마구 끼어들어가지고!”
“아유, 참. 에테르를 써서 밀어낼 수도 없고 난감했다니까!”
마지막으로 클레이오를 찾아낸 첼이 아무렇게나 그의 머리를 흩트렸다.
진이 빠진 클레이오는 고작 그것도 못 버티고 휘청거렸다. 베헤못이 균형을 잃고 위쪽으로 쭈욱 늘어져 튕겨 나왔다.
그 탓에 클레이오가 받은 겨우살이 아래의 키스는, 고양이 주둥이가 뺨을 스치는 것이 되고 말았다.
두 쌍둥이가 팔짝팔짝 뛰었다.
“아앗! 나도 못이한테 뽀뽀할래!”
“나도나도!”
“캬아아아아옹!”
우악스레 달려드는 쌍둥이를 피해 베헤못은 화다닥 스탠드 위로 도망가 버렸다.
새로이 코르크를 딴 샴페인의 기포가 쿠페 잔 가장자리로 튀었다. 불꽃과 눈보라 속에 1891년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