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93
재쇄를 향해! (2)
학교를 나온 클레이오는 전차 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역시, 공익적 목적 강조. 이게 제일 잘 먹힐 줄 알았어.’
마리아를 설득한 이야기 자체에는 거짓이 없었다.
정복왕이 에테르를 쓰는 기사였던 데다, 동서남북 주요 영지엔 기사단이 있으니,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는 굳건했다.
하지만 마법사는 대외 활동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아 보통 사람들은 마법사를 볼 기회가 적었다.
‘수도방위대학교 출신들이 정관계에 포진해 있으니 귀족이나 권력자들은 마법사에 관해 잘 알지만, 보통 사람들과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지.’
이 세계의 많은 기술이 마법에서 비롯되었고 마석 역시 각 분야에서 널리 활용되었다. 사회 곳곳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 꽤 큰데, 그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직업이 바로 마법사였다.
‘각 역의 시계를 정시로 조정하는 것부터가 말이야. 그것도 국가 소속 마법사들의 업무고. 근대적 교통과 통신의 근간이 마법사로부터 비롯된다면 엄청난 거잖아.’
본의는 아니었지만, 클레이오는 해당 직업군의 차세대 인재로 주목받는 입장이었다.
‘나야 방구석에서 놀고먹을 거라도, 소속된 직업군의 위상이 높아지는 거 자체는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지.’
게다가 프란이 마도 과학에서 손을 완전히 놓은 지금, 앞으로의 전개에서 마법의 역할은 불가피하게 확대될 것이다.
일이 그렇게까지 심각해지진 않았으면 하지만, 대비해 둬서 손해 볼 건 없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연유로 클레이오는 마리아를 설득하기 위해 꽤 공을 들였다.
일단은 돈 이야길 안 하는 방향으로 일의 물꼬를 텄다.
‘사명감 있는 학자 타입은 돈 이야기 꺼내면 오히려 식는 경우도 있으니까. 이 전략은 잘 먹혔지. 의욕이 충만해서 초고도 곧 보내준다고 하고.’
물론 계약금도, 인세도 절대 떼먹을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마리아 교수 스타일에는, 원고 인도를 받으면서 계약서와 계약금 이야길 넌지시 하는 편이 잘 맞을 것 같았다.
클레이오는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자금 규모를 어림잡아 계산해봤다.
인건비, 제작비, 물류비, 홍보비를 넉넉히 산정해도, 국채나 중장기로 예치해둔 예금 따위를 건드릴 필요 없이 해결될 것 같았다.
‘와, 돈이 좋긴 좋아. 뭐든 힘들게 앞뒤 따질 필요 없이 그냥 마음대로 할 수가 있잖아.’
클레이오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늘은 오랜만에 날이 맑고 기온이 따듯해 거리에 사람이 가득했다.
원단은 좋지만 디자인은 수수한 프록코트에, 눈에 띄지 않도록 모자를 눌러쓴 클레이오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늘 한적한 제온 지구의 우편취급소에 들러 사서함을 열었다. 프란에게서는 짧은 서신 한 통만 와 있었다.
편지는 짧았지만 담긴 내용은 묵직했다.
프란은 여전히 페셀른 시에 머무르며 오페라 가수 게하임이 당한 실험의 전말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는 페셀른 시의 운송조합원들에게 전적인 협조를 받아, 두 달도 안 돼 불탄 실험실 터로 추정되는 장소를 찾아냈다.
다만, 실험 주동자의 하수인인 ‘푀어’의 정체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라고 했다.
‘하여간, 프란의 행동력은 장난이 아니라니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만치 알아낸 것만도 대단한데, 그걸로는 모자라서 막 애가 닳았네.’
정작 클레이오는 일을 길게 보고 있었다. 그런 규모의 음모를 꾸미는 집단이라면 단시간의 조사로 털어낼 수 없을 것이다.
‘프란은 엄청나게 집요한 성격이니까, 어지간하면 지치진 않을 거야. 다행이지.’
오히려 예상보다 일의 진행이 빨라, 클레이오도 손 놓고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2월이 되기 전에 프란에게 보낼 마석 은 탄환을 더 주문 넣고, 그레이어 상회의 창고에서 쓸 만한 마도구도 더 찾아봐야겠어. 바쁘네. 후.’
클레이오가 서두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봄 학기는 4월부터 시작이지만, 1학년 2학기를 마치고 시작되는 겨울방학 중 2주가량은 현장 실습에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했다.
즉, 다음 달부터는 그가 룬데인에서 자리를 비우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수도에 있을 때처럼 원활하게 프란의 연락을 받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프다는 핑계 대고 수도 밖으로 한 걸음도 안 나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게 문제였다.
학교의 현장 실습은 지난 원고에서도 크게 다뤄지던 사건이었다.
‘앞으로 어떤 난리가 날 줄 모르는데, 아서만 어디 혼자 달랑 던져 놨다 어이없게 뒤지기라도 하면 그 무슨 불상사냐고. 그나마 실습 조를 학생들 요망대로 짜 줘서 다행이지.’
제베디는 학생들 간의 우애와 화합을 중시하여, 동무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의 요망을 세세하게 들어주는 편이었다.
좋은 동료는 좋은 선생보다 먼 길을 헤쳐나가기 좋은 상대라나 뭐라나.
‘선생의 교육관이야 내 알 바 아니지만, 아서 놈과 흩어져서 험지로 가는 위험은 덜었으니, 감사하다고 해야지 뭐.’
이제 어지간한 마법사나 기사는 아서를 해칠 수 없을 테지만, 클레이오의 걱정은 다른 데 있었다.
‘이번 겨울은 마수가 깨어나는 고비가 될 가능성이 높아.’
마수란 전설 속의 존재로만 여기며 천 년간 그 무서움을 알지 못했던 데르니에 대륙의 사람들은, 민가를 습격하고 선로를 뜯어내는 마수의 존재에 익숙해지게 될 것이다.
새로운 세기의 목전에.
‘원고에 보면 마수 바르그가 나오고, 첫 던전이 열린 바로 그 겨울부터 몬스터들이 깨어나기 시작했어. 원래라면 아서가 스무 살 되던 해 벌어질 일이었지만… 의 진행은 지난 원고보다 대략 2년 정도 빠르니까.’
아서와 친구들에게 배정된 실습지는 북부의 트리스테인 공작령이었다. 977기 최정예 학생들이다보니 제일 험준한 지역으로 보내진 것 같았다.
피할 길 없이, 지난 원고에서처럼 거물급 마수와 마주칠 거라는 예고였다. 실습지를 배정한 제베디는 상상도 못 한 일일 것이다.
‘그간의 패턴으로 볼 때 그 마수도 전보다 더 무시무시한 놈이 되어 있겠지. 으으으.’
클레이오가 집에 드러누워 놀면서도 에테르 순환만은 절대 빼먹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는 동인이었다.
‘마수가 튀어나오면 분명 원래 계획된 실습 기한 안에 일이 다 해결되지 않을 공산이 크고.’
클레이오는 걸음을 빨리했다.
프란에게 그간 신년회에서 알아낸 정보를 알리고, 수도를 몇 주간 비울지도 모른다는 소식도 전해야 했다.
바틀비 앤 부바르 인쇄소를 운영하는 존 바틀비에게 편지를 맡기면 왕실 우편국의 우편망 대신 인쇄물 배달편으로 전달을 해 주었다.
프란과 클레이오가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는, 마석 수정을 섞은 밀랍으로 봉인 해 지정자 외에는 열 수 없는 마법을 걸었다.
‘인쇄물 배달인 중에서 에테르 감응자가 있을 가능성이 낮지만, 왕실 우편국의 우편망을 이용하면 검열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
프란의 명줄을 튼튼하게 하려면, 보안을 조심해야 하는 처지였다.
곧 순환 전차가 클레이오가 서 있던 정류소에 도착했다. 이제는 전차 탑승에도 익숙해져 처음 아서, 이시엘과 탔을 때처럼 어리바리하지 않고 능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전차는 서안 행이었다. 바틀비 인쇄소에 들르기 전, 먼저 디오네와의 약속이 있었다.
세인트 리저벳 스퀘어 정류장에서 내린 클레이오는, 흰색과 붉은색 차양이 멋들어지게 쳐져 있고, 검은 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웨이터들이 서빙하고 있는 마로네 커피하우스를 어렵잖게 찾아낼 수 있었다.
디오네가 정한 약속 장소였다. 작년 말에 새로 열어, 수도의 명사들이 다 들른다는 카페에는 그녀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레이디는 오늘도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
밝은 비둘기색 투피스는 가늘게 잡은 핀턱과 싸개단추로만 장식되어 있었지만, 그 단정함이 디오네의 단아한 미모를 더 돋보이게 했다.
그녀는 카페 안에 들어찬 남녀의 시선을 한껏 끌어모으면서도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즐거움을 누리는 중이었다.
푸른빛 표지의 염가판 소설에 푹 빠진 디오네의 테이블 위에는 반쯤 빈 커피잔과 고소한 향이 나는 피그놀리 쿠키, 원통형 과자 안에 리코타 치즈와 피스타치오를 넣은 카놀리가 보였다.
‘과연… 저게 그 페드르 풍 디저트군.’
디저트의 이름은 식음료의 최신 트렌드에도 민감한 캔튼 부인이 알려 주었다. 요즘 룬데인에선 페드르 식의 커피와 디저트가 유행이라 했다.
그러니, 여기는 이른바 핫플레이스라는 것이다.
활기차고 화려한 공간에 쭈뼛쭈뼛 들어선 클레이오는 디오네의 독서를 급작스레 끊어놓지 않기 위해, 찬찬히 의자를 끌어내 앉았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레이디 디오네?”
“왔나요! 오래는요, 무슨. 미시즈 모르간의 신작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요.”
“다행입니다.”
“저자 선생님과의 만남은 잘 해결되었나요?”
“저자 선생님께 아주 긍정적 대답을 받았습니다. 물론 계약서에 사인을 받아야 완전히 정해진 거겠지만… 구두약속이라고 해서 어기실 분은 아닙니다.”
“이쯤 오면 말해 줘도 되잖아요. 그래서 도대체 누구에요?”
“마리아 젠틸레 교수님입니다.”
책을 탁, 덮은 디오네는 연극처럼 박수를 쳤다.
“이런, 등잔 밑이 어두웠네요!”
“1학년 마법 기초 강의록을 편집해서 단행본으로 발매하기로 한 겁니다. 그러니 원고 초고는 이미 있는 셈이죠.”
“어쩜, 난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학생일 땐 별생각 없었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니 알기 쉽게 잘 알려주는 강의였다 싶네요.”
“그렇지요? 거기에 추천사를 받고, 수업 시간에 종종 해주시곤 하는 비유나 재미난 에피소드만 좀 추가해서, 가능한 한 빠르게 발간하려고 합니다.”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도련님이 어쩜 그런 생각을 다 해냈대요?”
“다 레이디 디오네의 덕이지요.”
“하하, 뭐 그런 소리 들으면 기분이 나쁘진 않죠. 추천사는 누구에게 받을 생각인가요? 마스터 제베디?”
“아무래도 그분이 마법사 중 가장 명망이 있으시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으음, 괜찮긴 한데 책 분위기가 너무 고루해지지 않을까요? 아예 화제로 만들 거면 왕세자 저하의 추천사는 어때요? 앞 페이지에 초상화도 넣고. 그럼 책 판매에 엄청난 도움이 될 거 같은데.”
디오네의 농담에 클레이오는 웃지도 못했다.
추천사를 써달라고 한다면, 그 왕세자는 분명 클레이오에게 빚을 지우는 데 즐거워하며 진짜로 수락할 것 같다는 게 문제였다.
‘나중에 단행본 전량회수할 일 있나… 절대 안 돼.’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마십시오. 게다가 그분은 마법사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어머, 대담한 도련님이 또 이런 데선 소심하게 굴고 그래요. 문제 생기면 추천사는 재쇄부터 빼면 되지.”
아직 계약서도 안 썼는데 당연히 재쇄를 찍을 거라고 하는 디오네의 확신에, 클레이오는 약간 안심이 됐다.
‘돈이 엮인 일이라면 하다못해 경마마저 잘하는 사람이니까. 디오네가 싹수가 있어 보인다면, 아무튼 이 건은 망하진 않겠지.’
“저는 그 어떤 사안에서도 왕세자 저하와 가까이하고 싶지를 않네요.”
“아하하, 판권의 발행인란에 이름 한 번 들어가는 것 정도로 예민하게 굴긴.”
“그 이야기 말인데, 저는 발행인도 대리로 내세우고 싶습니다. 출판사 등록 자체를 레이디나 혹은 레비 씨에게 위임할 수 있을까요?”
“적절한 비용만 지불해 준다면 제가 못 해 드리는 일은 없지요. 하지만 왜죠?”
“책이 잘 팔리면 잘 팔리는 대로 대중의 주의를 끌 거고, 못 팔리면 못 팔리는 대로 돈을 낭비했다고 부친께 훈계를 들을 거 아닙니까.”
“어휴, 뭘 이제 와서 새삼… 그렇지만, 알았어요. 난 당신 파트너니까 요청대로 처리를 해 드리죠. 대신 홍보는 저한테 맡기세요. 일단은 원고가 완성되면 연재부터 해서 선예약을 받고…!”
“네… 레이디께서 하고 싶은 대로 모두 하십시오.”
책을 팔아치울 생각에 신이 난 디오네에게, 클레이오는 생각해두었던 사안을 간단히 정리해 전했다.
규정을 찾아보니 출판사 등록 자체는 150 디나르만 내면 자유롭게 가능했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원고를 교정교열할 사람은 레비 씨를 통해 알아본다고 했고, 양장본의 장정 디자인은 그레이어 공방에 경전 제작 일을 배운 직공이 있다고 해서 해결되었다. 목차 구성과 편집, 검토는 클레이오가 맡기로 했다.
‘디오네와 레비 씨가 제작진행과 홍보를 해 줄 거고, 나는 뭐…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거지….’
전직 편집자인 마법사는 이쪽 세상에도 흔한 인력이 아닐 테니 말이다. 어쩌다보니 또 자신이 적임자였다.
어느새 식은 커피를 쭉 들이켠 클레이오가 벗어둔 모자를 썼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레이디께서도 일 보십시오.”
“저도 이만 일어나야죠. 마차 부를 거면 같이 갈래요? 여기선 방향이 같잖아요.”
“아닙니다. 저는 동편에 다시 가봐야 해서요. 곧 해도 지는데, 들어가십시오.”
가방에 책을 챙겨 넣고 장갑의 헐거워진 단추를 채우던 디오네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어라, 저택에 바로 안 돌아가나요?”
“네.”
“그럼, 나도 같이 가요!”
“오늘 들를 곳은 인쇄소입니다. 잘못하면 레이디의 옷이 상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동행을 권하기가 어렵습니다.”
가방을 챙겨들고 웨이터가 가져온 코트를 다시 걸친 디오네는 당당하게 한 팔을 클레이오에게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하라는 뜻이었다.
“저에게 옷이 이거 한 벌 뿐이에요? 무슨 상관이람.”
“인쇄소는 왜 따라오시려는 겁니까?”
“나도 일이 돌아가는 꼴은 파악을 해야죠. 인쇄의뢰 하러 가는 거잖아요. 출판사 등록은 쉽지만, 인쇄 허가는 따로 얻어야 하는 걸 벌써 아는 거죠?”
“그건 그렇습니다만.”
역시 디오네는 자리 깔고 수정구를 봐야 했다. 용한 무당도 이런 용한 무당이 없었다.
“우리 도련님, 의외로 철두철미하잖아요. 새로 인쇄 허가를 받자면 최소한 일 년은 걸릴 테니, 인쇄물 제작 허가를 자체 보유한 인쇄소로 가는 게 빠를 거라고 생각한 거 아닌가요. 보니까 인쇄소도 아는 데가 있는 것 같고. 그렇담 사업 파트너로서 거래 업체를 검증해 볼 의무가 있죠.”
“그 외에도 제 개인적인 볼일이….”
“개인적 볼일 뭐요?”
이미 카페 안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데서 니네베 호수니, 페셀른 시니, 프란의 편지니 하는 소릴 꺼낼 수 있을 리가.
“내가 못 따라갈 이유를 삼 초 내에 대지 못하면, 에스코트나 잘해주는 걸로 알게요.”
“네, 제가 졌습니다. 가시죠.”
어깨를 늘어뜨린 클레이오는 순순히 디오네를 에스코트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