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94
재쇄를 향해! (3)
템푸스강 동편 하류의 아르크 거리에는 인쇄, 제본, 장정 업체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다.
마차에서 먼저 내린 클레이오는 문 옆에 서서, 디오네가 내리는 것을 도왔다. 골목이 좁고 바닥이 패여 있어서, 디오네를 붙잡는 데 온 신경을 쏟아야만 했다.
짐수레와 마차가 쉴 새 없이 오간 탓에 바닥이 바퀴 모양으로 패인 거리는, 이젠 클레이오에겐 익숙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거래하던 인쇄소들이 다 파주랑 일산으로 옮기기 전의 을지로 인쇄골목 느낌이기도 하고.’
이세계씩이나 와서 제법 갑부가 되고, 왕족과 연이 닿았다 해도 클레이오의 내면에 들어앉은 서민 ‘김정진’의 본성은 벗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로서는 금으로 도금한 커트러리가 열 몇 개씩 깔리고, 가지 긴 촛대와 샹들리에 아래에서 귀족적인 대화를 나누는 장소보다야 이런 곳이 훨씬 마음 편했다.
클레이오는 삐걱이는 뒷문을 요령 좋게 열고는, 바틀비 앤 부바르 인쇄소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공장과 사무실을 가르는 얇은 벽 너머로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사무실엔 장년의 남자가 홀로 앉아 있었다. 인쇄소의 대표인 존 바틀비였다.
“안녕하세요, 바틀비 씨.”
“아, 아세르 학생, 왔어.”
여전히 단단한 체격에 조금 벗어진 머리카락을 깔끔히 넘겨 붙인 바틀비는, 평소의 작업복이 아니라 주말에 교회에 갈 때나 입는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그는 외출할 때만 쓰는 지팡이를 책장 옆에 기대놓고는, 힘없이 의자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쥔 채였다.
인민의 깃발 스콜라 지부 지부장이자, 인쇄공 조합의 수도 조합장으로서, 늘 활기차고 빠릿한 바틀비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안색이 나쁘십니다.”
“하아… 학생과는 관계없는 일인데… 일단 앉아.”
“괜찮으시면,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게 말이지….”
창밖을 한 번 봤다, 손 한 번 내려다봤다, 한숨에 한숨을 내쉬는 바틀비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제껏 프란과 소식을 주고받느라 인쇄소를 드나들며 바틀비와는 꽤 친근해졌다.
이미 프란을 받아들인 사람이라 그런지, 그의 단 하나뿐인 학교 친구라고 신상을 알리자마자, 어린 조카를 대하듯 잘해주었다.
허리를 숙인 클레이오는 바틀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비록 제가 어린 학생이지만, 머리를 맞대면 수가 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이게 이야기가 길어… 헌데 그쪽의 처음 보는 아가씨는 뉘신가?”
클레이오와 디오네는 무언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바틀비의 곤란한 사정은 남들 앞에서 드러내놓고 할 얘기가 아닌 모양이었다.
클레이오는 얼른 디오네를 소개했다.
“그레이어 상회의 디오네 그레이어 씨입니다. 빠르게 작업을 진행해 줄 인쇄소를 찾고 있던 터라, 소개시켜드릴까 모셔오게 되었습니다.”
이미 두 사람은 반년 넘게 온갖 장소에서 호흡을 맞춰온 터였다. 심장을 얽은 에테르 계약서도 썼고, 셀 수 없을 만치 여러 번 춤도 추었다.
이 정도는 척하면 척이었다.
클레이오의 의도를 파악한 듯 디오네가 착착 장단을 맞추었다.
“인사가 늦었네요. 그레이어 상회에 손을 보태고 있는 디오네 그레이어에요.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귀족의 칭호 대신 그레이어 상회의 후계자 신분만을 강조한 디오네는, 자연스레 바틀비 씨에게 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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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 동안 바틀비의 경계심을 스르륵 풀어 헤친 디오네 덕에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늘 거래하던 사업체들이 내년도부터 달력과 일력 인쇄를 전면 취소하겠다고 하잖소. 베아투스 자치구의 은행가에서도 종이 소모품 제작 의뢰를 끊겠다고 하고.”
“일제히요?”
“그렇수다. 일방적인 통보라 담당자들을 만나 보았지만, 그저 설명도 없이 안 된다, 재계약은 없다로 일관하더이다.”
“아니, 그런 법이 어딨습니까.”
“내 말이 그 말이오. 우리 인쇄소는 숙련공이 많아 일 처리도 빠르고 정확한 만큼, 임금도 높단 말이지. 자식부터 조카며 사촌까지, 딸린 가족들이 다들 여럿인데 어찌할지 걱정이오.”
어느 한 군데 거래처에서 일을 끊는 거라면 몰라도, 신년 직전에 모든 거래처에서 거래를 중지하는 건 이상하게 느껴졌다.
‘듣기로 바틀비 씨는 아주 성실하고 바틀비 앤 부바르 인쇄소의 평도 좋다고 했어. 작업물 문제는 아닐 것 같은데.’
“바틀비 씨는 거래 중지의 이유를 아십니까?”
바틀비는 땀이 밴 앞이마를 손수건으로 닦고서는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클레이오는 그를 재촉하지 않고 조금 더 기다렸다.
드르륵.
의자에서 일어난 바틀비는 사무실 구석의 지류함 가장 아래 칸을 열었다.
“내 생각에 이유는 하나뿐이오. 이걸 우리가 인쇄했단 사실이 퍼진 게지.”
바틀비가 꺼내 보인 것은 얇은 두께의 팸플릿이었다. 폴리오 판1)* 인쇄물을 두 번 접지한 것으로, 표지 포함 16페이지짜리 소책자였다.
클레이오는 빠르게 팸플릿을 훑어보았다.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노조 가입을 촉구하는 내용이 단순한 문체로 쓰여 있었다.
하지만 문체가 단순하다고 해서 내용이 얕은 건 아니었다.
공부가 짧은 사람도 이해하기 쉽도록 노동자가 대의제 하에서 어떤 방식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를 차근차근 잘 설명해 둔 명문이었다.
비록 화려한 논리 전개나 예리한 분석이 들어 있지 않더라도, 클레이오는 이 글의 저자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깃발의 지부장 그만뒀다고 해서, 얌전히 탐정질만 하고 있을 놈은 아니었지.’
“바틀비 씨 이 소책자는 혹시 지브릴 블랑쉬가 쓴 겁니까?”
“…그렇소.”
그와 동시에 약속이 반짝이며 여린 빛을 냈다. 활판 인쇄 특유의 요철 위로 약속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몹시 희미한 빛이었지만, 빛은 빛이었다.
수만 장이 인쇄되었을 팸플릿에서 여전히 프란의 성흔 ‘프로파간다’의 효력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쯤 오면 뭐… 거의 기적이라고 해도 되겠군.’
프란이 작성한, 심장을 움직이는 문장들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위력을 발휘한 만큼이나, 반대 방향으로도 읽은 이의 심기를 거슬린 게 분명했다.
‘걔의 성흔은 동조자에겐 더 깊은 지지를 끌어내지만, 반대자들에겐 열렬한 반발을 끌어내네. 동전의 양면이군. 으으.’
그 때문에 바틀비 씨의 인쇄소와 인쇄공 조합 소속 사람들의 생계가 위험해지게 되었으니, 프란이 내막을 알게 되면 또 엄청난 죄책감과 책임감에 짓눌릴 게 분명했다.
‘안 돼. 걘 지금 조사할 게 많은데, 수도로 돌아오겠다고 하면 곤란해. 멜키오르의 성흔 하나가 막혀 있는 지금이 딱 활동하기 좋을 땐데.’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 대단하십니다. 아르크 거리로부터 퍼져 나간 민들레 씨앗이군요.”
“아세르 학생은 멋진 말을 할 줄 아는군. 그래, 민들레 씨앗처럼 멀리까지 퍼져 나갔소. 우리 인쇄공 조합만 해도, 조합 가입 문의가 확실히 늘어났지.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도 이런 위협을 당할 줄이야.”
바틀비는 ‘깃발’ 내에선 가장 온건파에 속했다.
지난 선거 때도 깃발의 급진파는 평민원 선거 자체를 보이콧했지만, 그는 11월당에 속한 게스톤 팔라흐 의원을 지지했다고 들었다.
“나는 유혈혁명을 바라지 않소. 그런데도 이런 보복을 하다니. 비겁자들, 빌어 처먹을 작자들.”
“계약서에 명시된 계약 기간은 어떻게 됐나요?”
“억지로 위약금을 받았소. 반환하려 했지만, 경비를 시켜 날 쫓아내더군. 은행에서도 송금을 거부하더이다.”
바틀비와 클레이오 사이의 대화를 듣던 디오네가 어느새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귀족가의 차남으로, 작위를 못 물려받는 자들이 은행가와 증권 거래소의 느끼한 콧수염들이 되지요. 그런 잰 체 하는 자들에게, 이 얇은 팸플릿이 퍽이나 위협적이었나 보네요.”
“이 열여섯 페이지는, 그 어떤 급진적 도서보다도 강렬하게 하급 사무원들이나 사환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테니까요.”
클레이오의 대답을 듣던 디오네는 얼굴에서 대외용 표정을 지웠다. 물이라면 얼어버렸을 듯, 차가운 빛으로 눈이 물들었다.
증권맨들의 사정이야 디오네는 알 것 없었다.
따지자면 그녀는 제조업과 소매업종의 사람이었고, 자리에 앉아 펜대만 굴리며 막대한 자금을 움직이는 자들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은 없었다.
“바틀비 씨는 훌륭한 일을 하신 겁니다. 제대로 하신 거예요. 본래 내세울 것 없는 이들의 거들먹거림이 더 뻣뻣한 법이고, 위협받는 짐승의 할큄이 더 거센 법이죠.”
“그렇지만 그 할큄 때문에 내가 죽게 생겼소. 당장 용지 대금에, 인쇄기도 두 대 수리해야 하고, 새 활자도 사야 하고, 직원들 월급도 줘야 하는데, 위약금으로 몇 달 정도야 버티겠지만 제일 큰 건이 끊겨서야….”
바틀비의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그런 식으로 담합해 일을 주지 않는다면, 당장 수도에서 새 계약을 따내기는 어려울 터였다.
클레이오는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둔 수표책을 의식하며 바틀비에게 물었다.
“제일 급한 결제 건이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용지 대금이오. 어음 지급 날짜가 돌아오고 있는데, 제때 금액을 입금해두지 않으면, 다음번 용지 공급 때 순위가 밀리게 되오.”
클레이오가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이자 디오네가 요령 좋게 추가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아, 모든 인쇄용지는 왕실 제지소에서 나오지요. 종이를 못 얻게 된다면, 일을 따와도 인쇄물을 만들 수 없을 테니, 그거 큰일이네요.”
“그레이어 양이 이 일을 잘 아는구려. 글쎄 말이오.”
“하지만 인쇄 허가 자체를 취소당한 건 아니죠?”
“그렇소, 그레이어 양. 나는 세금도 임금도 일 코루나 떼어먹은 적 없소. 저들도 내 인쇄 허가까진 손을 못 댄 모양이더군. 털어도 나오는 게 없으니.”
“바틀비 씨, 그러면, 일 이야길 좀 드려도 될까요? 여기 그레이어 씨는 그것 때문에 여기 온 것이니까요.”
“그래, 말해 보시오.”
세 사람은 그대로 선 채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책을 한 종 인쇄하려고 해요.”
“그레이어 양. 책이라면, 어떤 책을, 얼마나 말이오?”
사실은 디오네도 아직 책의 정확한 판형이나 부수에 대해선 듣지 못했다. 일 진행이, 완전히 콩 볶아먹듯 되고 있었다.
“그건 이쪽의 아세르 군이 자세히 설명해 줄 거예요.”
클레이오만 알아챌 수 있었지만 ‘클레이오 경’도 ‘도련님’도 ‘당신’도 아닌, ‘아세르 군’이라고 말하는 디오네의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진지한 상황에서 웃으면 안 되기에, 온 힘을 다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건 또 나중에 얼마나 이자를 붙여서 놀려 먹을지… 아니다, 그건 생각하지를 말자.’
클레이오는 디오네가 넘겨준 공을 얼른 받았다.
“약 300매 좌우의 4절판 양장본과, 그보다 글씨를 작게 조판하고, 삽화가 적게 들어가는 옥타보 판형 염가판 소프트 커버 도서 2종을 제작하려고 합니다.”
“허… 아니, 이 와중에 일을 가져다주니, 나로선 고마울 따름이지. 신의 선물 같소. 부수는 얼마나 생각 중이오?”
“양장본은 초판 천 부, 염가판은 양장본 출시 삼 개월 후에 반응을 봐서 부수를 정할 생각입니다.”
“장정이나 후가공은 어떻게 할 생각인지?”
“안 그래도 그 말씀 드리려 했습니다. 인쇄 조합에선 인쇄뿐 아니라, 장정과 가공 작업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다고 들었으니, 소개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할 수 있지. 이번 일의 여파로 흔들린 업체가 두어 군데 있소.”
“그러면 그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세부적인 제작 일정은 원고가 들어온 후 확정하겠습니다. 그 전에 정산해야 할 인쇄용지 대금이 얼마입니까?”
“팔천 디나르인데, 그건 왜….”
“그러면 계약금을 팔천 디나르로 하고, 먼저 현금으로 선지급하겠습니다.”
“!!!”
“괜찮지요, 그레이어 씨?”
“네, 그렇게 진행해 주세요.”
클레이오는 가벼운 손길로 품에서 아우렐 은행 수표책을 꺼내들었다.
소년의 희고 긴 손가락이, 펜을 쥐고서 아무렇지도 않게 금액을 적고 서명을 해나갔다.
수표를 받아든 존 바틀비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는 크기로 커졌다.
인쇄 용지 사이즈. 210×33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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