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95
재쇄를 향해! (4)
“아니, 이렇게 일을 하는 경우는 없소. 지급 기한이 있으니 그에 맞춰서 어음을….”
“충분히 감당이 가능해서 하는 일입니다. 나머지 금액도 협의를 통해 작업 도중에도 분할 지급이 가능하니,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내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요?”
“저는 프란의 친구고, 바틀비 씨 역시 프란의 벗이시잖습니까. 저는 그 친구의 꿈이 이런 방식으로 좌초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너무 개인적이고 유치한 이유인가요?”
“…그렇지 않소. 모든 동기는 사적인 곳에서 출발하고, 사소한 것이 세상을 바꾼다고… 로베르 선생이 말하곤 했지.”
‘깃발’을 이십 년간 이끌었으나 멜키오르에 의해 모함 속에 죽게 된 로베르를 떠올리는지, 바틀비의 눈가가 약간 젖어들고 있었다.
클레이오의 손을 꽉 쥔, 나이든 인쇄공의 손이 뜨거웠다.
이런 감동의 순간에는 정말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모르게 된다. 클레이오는 어색하게 눈만 도록도록 굴렸다.
이건 선의 같은 게 아니었다. 클레이오에게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이 인쇄소가 망했다가는 프란과의 접점도 없어지겠지. 바틀비 씨는 생계에 쫓겨 지금처럼 활동을 열심히 할 수도 없을 거 아냐. 게다가 이런 식으로 인쇄소들이 망해 나가면, 나중에 프란이 뭐라도 써서 세상 사람을 설득할 때 인쇄는 어디서 해주냔 말야.’
디오네만이 사르르 입가를 올리며 ‘어머, 이 양반 보래. 갖다 붙이는 말은 잘하시네.’라는 뜻을 표정으로 전하고 있었다.
***
일의 진행은 순풍에 돛단 듯했다.
마리아 젠틸레 교수는 클레이오가 평생 만나본 저자 중,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성실하고 부지런한 저자였다.
‘아직 타자기도 상용화 안 된 시대인데도 이 주일 만에 초고를 거의 완벽한 상태로 완성하다니. 이쪽도 다른 의미로 대마법사이시다.’
마리아 교수가 써 보낸 원고지는 마치, 그녀의 실제 목소리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교수의 다정한 어조로 짜인 흐름에, 마법의 기초 개념과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강약을 주며 엮여 있었다.
처음 원고를 의뢰할 때 열다섯 살 정도 학생에게 말을 하듯이 써 달라고 했더니, 알비온의 저작 전통과는 맞지 않는지라 난색을 표했던 마리아 교수였다.
하지만 한 번 감을 잡으니 금세 정리가 된 모양이었다.
‘기본적으론 강의록이니까, 말하듯 쓰기에 최적화된 뼈대였던 거야.’
교수가 넘겨준 원도는 오와 열이 딱 맞는 정갈한 글씨로 쓰여 있어서, 필경사를 고용해 정서(淨書)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원고 상태를 확인한 클레이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마광석 동을 흩뿌려 가공한 종이 위에 [현상] 마법을 사용해 원고를 복제하는 것이었다.
그 후 원본은 금고에 넣어두고서, 사본을 일주일에 걸쳐 검토했다.
‘엉덩이가 의자에 들러붙겠다. 한 번씩 일어나기나 하면서 보란 말이다, 나중에 아프다고 골골대지 말고.’
라는 베헤못의 핀잔과 뒷발가격을 당할 때에나 가끔 일어나 허리를 펴고, 그 외의 시간은 모조리 원고에 쏟아부었다.
‘확실히 오랜만에 글을 오래 들여다봤더니, 머리도 아프고 허리도 당기는구나. 휴.’
후회해봤자 이미 쏟아진 물이었고, 이미 사인한 계약서였다.
우둑우둑 소리가 나는 등을 편 클레이오는, 최종적으로 챕터 네 개의 순서를 조정하고, 편집에 고려할 사항을 정리해 그레이어 상회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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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교수의 사인을 받은 계약서는 여기 있습니다. 편집은 저희에게 완전히 일임하신다고 합니다. 출판사 등록증은 여기요.”
응접실에서 디오네와 함께 기다리고 있던 그레이어가의 비서 레비는, 클레이오의 안색을 보고 안절부절못하며 얼른 짐을 받아들었다.
디오네와 여러 사업을 함께 진행 중인 어린 마법사는 종이봉투 하나 들 힘도 없어 보였다.
‘이 애는 몸도 약하면서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벌이나, 아이고.’
디오네는 클레이오와 관련한 사항은 모조리 철저하게 함구하지만, 비서로서 그녀의 개인적 재무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레비로선 이 비실비실한 소년의 이재가 보통이 아님을 알았다.
‘참 생긴 거랑은 다르단 말이지. 이 두 사람 다.’
레비와 클레이오는 구면이었기에 인사는 생략하고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일처리가 무척 빠릅니다만, 너무 무리하신 것 아닙니까?”
“곧 실습을 떠나야 해서, 그전에 대략의 구성과 초교 편집은 마무리하고 싶었습니다. 날씨가 따듯해지기 전에 발간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 봄이 되면 확실히 책이 좀 덜 팔리죠. 어쩌면 그런 걸 다 아십니까.”
“그쵸, 레비 씨. 도련님의 맹한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니까요. 속엔 뭐가 들어앉아 있는지 몰라요. 암튼 교열자는 레비 씨가 잘 아는 어학 전공자로 모셔 두었어요.”
“급한 일정인데 잘 처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래요, 레이. 급행료를 두 배로 얹어준다면 일하겠단 사람도 많고, 좋은 인력도 잘 구해지는 거죠. 사람 부릴 줄 안다니까.”
“아니, 그건 누구라도 똑같지 않겠습니까. 사람에게 쓰는 비용 아껴서 되는 일이 없어요.”
그건 기디온 아세르의 전적만 봐도 명확한 일이었고,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그전의 직장 생활에서 반면교사를 통해 배운 사항이기도 했다.
‘어느 재주꾼을 데려와 봐라. 입금 제대로 안 되면 퍼포먼스가 나오는지.’
피곤한 와중에도 일이 톱니바퀴 돌 듯 착착 해결되어 가자, 클레이오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톱니바퀴를 부드럽게 굴리는 제1의 재료는 역시 돈이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철저한 배금주의자인줄 몰랐는데, 앞으로도 더 돈을 숭배하게 될 것 같네.’
“그러면 원고를 제가 먼저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전해 듣기만 해도 몹시 흥미로운 내용일 것 같습니다.”
클레이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비가 선량한 얼굴에 흥미를 가득 띠고서 원고 봉투를 뜯었다.
“발행인은 여기 레비 씨 명의로 등록했어요. 그것 때문에 서류 준비할 것도 많아져서 편집, 제작 항목에 명의 비용도 넣어 놨어요. 확인해 봐요.”
“레이디께서 어련히 잘 챙겨주셨을까요. 비용이나 경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필요하면 모두 쓰신 뒤 영수증을 모아주세요. 제가 없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요. 실습은 내일 떠난댔죠? 이럴 때가 아니지. 창고에 발열 부츠가 하나 남았는데, 이건 선물로 줄 테니까 가져가요.”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디오네가 창고로 내려간 사이, 레비는 엄청난 속도로 원고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레비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전 마법서라면 딱딱한 이론서나, 흥미위주의 삼류 기고문만 보았는데, 이런 식으로 원고를 구성할 수도 있었군요. 위치 선정을 탁월하게 하셨네요.”
“젠틸레 교수님의 강의가 워낙 좋았던 덕이죠.”
“디오네 씨가 말하길, 수도방위대 학교에 다녔어도 그 강의록을 발굴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마 클레이오 씨밖에 없을 거라고 하던걸요.”
“과찬이십니다. 아무래도 처음 마법을 배우면, 워낙 제베디 교수님의 수업이 강렬해서, 상대적으로 젠틸레 교수님의 수업이 덜 인상에 남아 미처 떠올리지 못하는 것뿐이지요. 저는 우연히 때를 잘 맞춘 거고요.”
클레이오는 사실만을 말했을 뿐인데, 어쩐지 자신을 바라보는 레비 비서의 얼굴이 묘하게 열렬해진 것 같아 움찔 물러나 앉았다.
“과연, 듣던 대로 겸손하시기도 하십니다. 대단한 안목을 가지고도 전혀 드러내려 하질 않으시는군요. 발행인 명의도 그렇고….”
‘아니 그건 괜히 남들 입에 이름 오르내리게 안 하려는 거지. 괜히 멜키오르나 아슬란 주의 끌까 봐 뭣하기도 하고, 아오.’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어 입술만 달싹이는 클레이오의 표정이 살살 상해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레비는 자신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수도의 영웅인 클레이오 아세르는 유명인인 동시에, 여전히 신비에 감싸인 인물이었다.
공적인 장소에는 거의 나서지 않고, 자신의 공을 드러내거나 자랑하는 일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남의 눈에 자신의 탁월함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는 소심한 성격이거나 담이 작아 그런가 했는데, 담이 작기는… 저 어린 나이에 이미 어른처럼 침착하고 기운이 진중한데. 참으로 알기 어려운 사람이야.’
“어쨌든, 제 짧은 식견으로 판단해도 된다면, 이 원고는 대단히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오랜만에 책 만드는 일을 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바쁘신 와중에 일을 맡아주셔서 제가 더 감사할 따름이지요.”
원고를 양손으로 잘 정리해 쥔 레비는 지적인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였고, 클레이오는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은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그래도 저렇게 의욕이 넘치니 일은 잘해주겠지. 이제 돌아가서 짐이나 싸야겠어.’
트리스테인 영지로 출발하는 날이 벌써 내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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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네가 안긴, 안쪽에 털을 대고 미끄러지지 않게 바닥을 처리한 부츠를 들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났는지 퇴근길의 사무원부터 가게의 점원들까지, 대로변의 신문 가판대에 와글와글 몰려 있었다.
클레이오 역시 붙들린 듯 걸음을 멈추었다. 쭉 깔린 여러 종의 석간 위에서 강렬한 표제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아직 수도에서 먼 지역의 일이다보니, 신문들의 논조는 절박하기보다 흥미위주였다.
‘룬데인 사람들이야 고작 바르그 한 마리 봤을 뿐이니, 마수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감이 덜 잡혔을 거고. 그러니 학생들 실습도 중지를 안 시킨 거겠지.’
산짐승들이 민가를 습격하고, 날씨가 이상하더라니, 역시 마수의 준동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당장 내일 북쪽으로 출발해야 하는 클레이오로선 너무나도 안 반가운 속보였다.
물론 시기가 좀 빠를 뿐, 진행 형태는 지난 원고와 같았다.
마수들은 산맥 깊숙한 곳과 황량한 황야의 가장자리에 부스러진 마석의 형태로 묻혀 있다가, 므네모시네의 문이 열린 후에 마수로 깨어나게 된다.
‘그나마 사람이 캐서 가공해 가지고 다니던 건 문제가 없었지만… 가루가 돼서 사람 손 안 닿은 채 천 년간 땅의 기운 먹은 것들이 다 마수로 깨어난댔지.’
마수의 깨어남은 데르니에 대륙 전체의 위기였다. 인적 드문 벽지뿐 아니라, 나중에는 룬데인 한복판에서도 마수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기사와 마법사들이 마수가 되기 전에 씨앗을 미리 없애려 노력했으나, 부스러져있는 마석들은 에테르 감응력이 있어도 찾아내는 게 불가능했다.
다행히 마수들에게는 생식력이 없어서, 몇 년 고생하면 다 잡혀서 없어졌다.
데르니에 대륙에선, 알비온 왕국이 가장 먼저 마수 전수퇴치에 성공한 국가였다.
‘원래도 대비가 잘 되어있는 나라긴 했지만, 그것들을 싹 잡아 족치면서 아서가 전 대륙의 네임드 영웅이 된 거잖아. 꼭 필요한 전개란 건 알겠지만… 아, 싫다 정말.’
클레이오는 주머니의 잔돈을 모두 긁어 가게 주인에게 건넨 뒤, 나와 있던 신문을 쓸어 담았다.
“거기 부터 해서 까지 나와 있는 건 전부 한 부씩 주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손님! 마수들이 튀어나와 걱정이 많지요!”
“그러네요. 크게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기사들이 활약하고 있으니 금세 잡힐 겁니다!”
“그러면 좋겠네요.”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자신이 마법을 쓸 일도 어린애들이 마수 잡는다고 애를 쓸 일도 없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는 클레이오였다.
‘원고 진행상 절대 그렇게 안 될 것 같지만. 후우우우. 나라가 뒤집혔으니 수도방위대 마법단도 바쁠 거고, 에즈라 부단장에게는 실습 다녀온 뒤 들르는 수밖에 없겠군.’
마차를 잡아 집으로 돌아온 클레이오는, 외출복도 갈아입지 않고 침실에 들어앉아 신문을 읽었다.
여러 종의 일간지 중에서도 가 가장 눈길을 끌었다.
점잖은 정론지인 에서, 이례적으로 삽화를 5단 면적으로 인쇄한 전면 기사를 냈다.
장검을 쥐고 단신으로 마수 앞으로 뛰어드는 아슬란의 모습이 장렬한 화풍으로 묘사돼 있었다.
이 시대의 신문 인쇄는 모두 흑백이었다. 지면 위에서는 검은 머리도 검은 눈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슬란의 활약상은 대단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신문은 특별히 거짓을 전달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7레벨 검사라더니, 마수 하난 정말 잘 잡네.’
클레이오는 집중해 기사 내용을 한 줄, 한 줄 모두 읽었다.
특별히 아부하는 문투가 아니었는데도, 아슬란의 냉담함은 침착함으로, 냉혹함은 결단력으로 바꿔 쓰여 있었다.
심지어는 그의 오만하고 엄격한 성정조차도, 크뤼엘 기사단을 이끌고 마수를 저지하는 왕자다운 위엄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장 마수를 한 마리라도 더 잡아주는 거야 고맙지만, 아슬란이 나선다는 소식은 왠지 불안한데.’
그때였다.
늘 차분한 캔튼 부인이 다소 난처한 기색으로 침실에 들어섰다.
“도련님, 바쁘신 와중 죄송하지만 잠시만 응접실로 내려와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네. 무슨 일인가요?”
“지금 큰 도련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바로 작은 도련님을 뵈어야겠다고 하셔서, 급히 말을 전합니다.”
“…네? 연락도 없이 말입니까?”
이른바 자신의 ‘형’, 기디온 아세르의 장남이자 아세르 상단의 후계자인 블라드 아세르는, 가을의 마수 소동 이후 편지 한 장 보낸 적 없었다.
갑자기 왜 찾아왔는지, 의도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신년의 전화 통화도 기디온하고만 했지, 내겐 별 관심도 없어 보이더니, 왜?’
“크라테르 제후국과의 대규모 거래를 마치고 들른 길이라, 연락을 넣지 못했다고 합니다.”
갑자기 나타난 블라드가 당장 클레이오를 봐야겠다고 어찌나 고집을 부렸는지, 캔튼 부인의 관자놀이에 살짝 식은땀마저 맺힌 것 같았다.
그걸 보니 클레이오는 영 마음이 안 좋았다. 클레이오에겐 항상 다정하고 친절한 캔튼 부인을, 블라드가 제 기분에 따라 막 대한 정황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어쩐지. 그 살가운 태도는 아버지나 어려운 거래 상대 앞에서만 보이는 거였나 보군.’
클레이오는 전혀 놀랍지 않았다. 블라드 아세르의 이상할 정도로 싹싹한 성격은 묘하게 미심쩍었고, 앞뒤가 다를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캔튼 부인.”
신문을 접어둔 클레이오는 아래층의 응접실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클레이오, 아세르
“우리 동생, 어디 잘 지냈어?”
활짝 웃으며 팔을 벌린 블라드가 클레이오를 휙 끌어안았다가 아무렇게나 놓아 주었다.
무작스런 손길에 이리저리 휘청대던 클레이오는 센터피스 위를 짚으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지난번에는 사실상 초면이라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는데, 두 번째로 보니 분명해졌다.
‘시작부터 기선제압이네. 저랑 언제 봤다고 이런담.’
“형님도 잘 지내신 것 같군요. 안색이 밝습니다.”
클레이오는 네 낯짝이 참으로 빤질거리는구나, 라는 뜻을 듬뿍 담아 빈정거렸지만, 다 알아들은 눈치인데도 블라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굴었다.
“하하! 나야 언제나 건강하지. 아무렴 너 같겠냐.”
“올해는 유독 추웠는데 감기도 비껴갔다니 다행입니다. 아버님은 건강하신지요.”
“늘 그렇듯 겨울에는 지내기를 좀 불편해하시지. 콜포스는 바닷가라 룬데인보단 훨씬 따듯하니까 낫지만, 수도의 볼 일은 어지간하면 내가 처리하고 있어.”
“네, 수고가 많으십니다.”
기디온 아세르는 본래 룬데인 출신이었다. 무역업을 하며 기반을 콜포스로 옮겨서 그렇지, 결혼 전까진 평생 산 곳인데 춥다고 일하러 못 오겠는가.
큰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주려고 해 둔 안배이겠거니 여기는 클레이오였다.
‘근데 이제 와서 그런 자랑을 나에게 왜 하지?’
캔튼 부인이 내놓은 차는, 두 사람 모두 손도 대지 않은 채 식어갔다.
기디온의 눈이 미치는 곳이 아니니 굳이 우애가 좋은 척 흉내 낼 필요도 없다 여기는 듯, 블라드의 태도가 아주 불량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클레이오 역시 굳이 예의나 사교성을 꾸며내지 않았다.
대충 다리를 꼬고 앉은 클레이오 앞으로 블라드가 화려한 실크로 싼 상자 하나를 턱 내밀었다.
사람 머리통 하나는 들어갈 크기라 안에 뭐가 들었는지 짐작도 안 갔다.
“네가 그리 추위를 탄다며? 아버지가 걱정이 많으시더라고. 마침 마석 루비와 최신식 에테르 전지를 교환하려는 크라테르 제후국의 기술담당관이 룬데인에 와 있다는 걸 알고는 날 급행열차 태워 보내시지 뭐야.”
“그래서요?”
“그분이 늘 그렇듯 세세한 지시 사항을 내려준 건 아니지만, 이번에는 알기가 쉽지. 이걸 네게 전하라는 거다.”
블라드는 거침없이 상자의 걸쇠를 풀었다.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모두 한 종류의 마석이었다.
[비둘기의 루비:열의 마석.
*비고: 극상품]
약속의 메시지가 무수한 면을 드러낸 보석들의 표면을 밝혔다. 엄청나게 선명한 빛깔의 붉은 루비였다.
클레이오도 아는 마석이었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 제베디 교수가 빌려준 팔찌에도 손톱만한 마석 루비가 박혀 있었지.’
그렇게 조그만 크기도 [방한] 마법식과 엮어 놓으니 제법 따듯했는데, 이 분량의 마석 루비면 커다란 발열장판을 몇 장이고 거뜬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충분히 혹하는 보물이었지만 클레이오는 움찔대는 자신의 두 손을 무릎 위로 얌전히 돌려놓았다.
‘이거 대뜸 먹었다가 무슨 후환이 있을 줄 알고.’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 한 가지만은 두 세계 전체에 통용되는 대원칙으로써, 저자가 자신에게 안겨준 능력들조차도 세상을 유지하라고 부여한 것 아닌가.
‘신이 그렇게 행하는데, 하물며 이 성격 나빠 보이는 인간이 주는 거야 말해 뭐해.’
마석에는 손 하나 대지 않는 클레이오를, 블라드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해부하는 듯한 시선을 태연히 무시하며 클레이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비록 마석의 시세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개인적으로 쓸 보온장구를 개비하거나, 학생의 실험용으로 낭비하기엔 너무나 고급인데다가 양도 지나칩니다. 제가 받기에 적절치 않을 것 같습니다.”
“가족끼리 뭘 빼고 그래. 아버지가 말수는 적으셔도 네 걱정을 얼마나 하는데. 아버지가 마음에 두신 일이면 내 일이기도 하지.”
눈을 가늘게 뜬 클레이오는, 블라드가 짓고 있는 가식적인 미소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싸늘한 눈빛을 살폈다.
블라드는 지금 이 순간에도 클레이오의 말과 행동을 철저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가족 좋아하시네.’
같은 부모 아래서 태어난다고 모든 2촌 관계가 서로를 아끼지는 않는다는 걸, ‘정진’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남보다 못한 형제도 널렸다.
‘아서네 집안이 콩가루라고 욕할 게 아니었네.’
“형님께서 어떤 오해를 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님께 추위를 호소하거나, 마석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널 무척이나 아끼는 가정교사가 꼬박꼬박 편지를 보내고 있거든. 레이디 품에 안겨 징징대기라도 했나, 걱정이 들지 뭐냐. 아버님께서도 심려가 크셨고. 네가 콜포스에 있을 때보다야 수도로 온 뒤 훨씬 지내기가 나아 보이니 굳이 부르지도 못하고, 마음만 졸이고 계시지. 그 뜻을 담은 선물이니 거절하면 안 돼.”
클레이오가 생각하기에, 애를 먼 기숙학교에 처박아놓고 돈으로만 바르기나 하는 부친이, 막내아들 생각하며 베갯잇을 눈물로 적실 것 같진 않았지만, 굳이 반박하기도 귀찮아 대충 얼버무렸다.
“아버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실 줄은 몰랐군요. 좀 더 자주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어떻게 해오고 어떻게 변했든, 아버지는 항상 네게 무른 데다, 너를 특별히 애틋해 하시지. 갈비뼈 사이에 붉은 심장 대신 납으로 만든 모형이 들었을 거란 말을 듣는 분인데 말이야.”
클레이오는 블라드의 말에서 이상하게 걸리는 부분을 찾아냈다.
“형님께서는 저희 형제의 아버지를 무슨 남의 부모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그분은 내 아버지면서 너의 아버지이지만, 과연 그분이 너와 내게 과연 같은 아버지였겠어?”
“아버지께서 공평하지 않은 부모였다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하지만 그분께서 일군 사업은 형님의 것이 될 텐데, 왜 그렇게 날을 세우십니까.”
“클레이오 너는 모르겠지만, 그분은 본인이 필요한 일이라도 결코 청탁을 안 하시지. 젊은 시절 권위와 재력이 부족할 때 그런 일은 신물 나도록 겪으셨으니까.”
기디온은 빈민가에서 태어나 당대에 자신의 수완만으로 대단한 사업가가 되었으니, 젊은 시절에는 고생이 많기야 했을 것이다.
‘근데 그게 내 탓이야? 왜 나한테 시비야?’
“그런데 아버지는 오로지 너를 그 학교에 들여보내려고 콧대만 높은 기사단장이니, 마법사니 하는 작자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호의를 보여야 했지.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었다고 생각해?”
이제 블라드가 내비치고 있는 감정은 노골적으로 적의에 가까워졌다. 만일 정말로 클레이오가 그의 소심하고 어린 남동생이었다면 눈물이라도 흘리며 도망가고 싶을 것 같은 기세였다.
블라드 아세르는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젊은이에다 말투만은 친근한데도, 묘하게 사람을 억누르는 구석이 있는 자였다.
‘하긴. 알비온 제일의 상사를 물려받을 후계자라면, 이 정도는 해야 사업을 안 말아먹겠지.’
아마도 그는, 아세르의 왕국을 이어받고 지키기 위하여 길러졌을 것이다.
유약한 막내에게도 엄격하게 구는 기디온이니, 총명하고 담대한 첫째에겐 더더욱 가혹한 교육을 했을 거라 짐작이 됐다.
‘근데 이놈 하는 꼴 보니 남이 아니었을 때도 ‘클레이오’에 대한 처우가, 지금보다 딱히 좋았을 것 같지도 않군.’
장남의 입장에서는 어머니를 앗아간 데다, 저보다 편하게 사는 것 같은 동생이기에, 미움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기디온이야 부친으로서 자식을 돌볼 의무라도 가졌지, 형제에겐 그 정도의 책임도 없으니까.
‘게다가 원래 첫째들은 부모들이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서, 집안 사정이 좀 피었을 때 태어난 둘째보다 성격이 현실적인 경우가 많잖아.’
그런 블라드 앞에 항상 움츠려 있던 동생이 갑자기 떨쳐 일어나 사람들 입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아버지까지 관심과 애정을 보내니 속이 꼬인 게 분명했다.
‘더해서 극상품 마석 루비 한 상자면, 안면몰수 할 금액이긴 하겠네. 지금은 겨우 마석이지만, 후에는 아버지가 다른 거 더 떼어준다고 할까봐 미리 싹을 자르려는 거 아닌가?’
클레이오는 걱정이 들었다.
다른 사업이야 알 바 아니었지만 이 저택만은 자신이 가져야 했다. 나중에 딴소리하지 않도록 못을 박아둘 필요가 있었다.
늘 그렇듯 소파에 기력 없이 늘어져 있던 클레이오가 허리를 똑바르게 세워 앉았다. 마음을 다잡고 ‘약속’의 「지각」을 켰다.
그럴 때의 클레이오는 결코 블라드가 알던 ‘클레이오’와 같지 않다.
블라드는 에테르 감응자가 아니지만, 자신의 동생의 모습을 입은 상대에게서 격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언제 형님이 저를 동생으로 여기시긴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뭐야, 기억을 잃었다더니 온통 다 잊은 건 아닌가 봐?”
블라드는 여전히 웃는 낯을 한 채, 클레이오의 얼굴을 후려치려는 것처럼 휙 손을 뻗어왔다. 폭력을 사용하며 기쁨을 느끼거나 흥분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필요하다면 방법의 하나로서 사용하는 데 주저가 없는 태도였다.
억센 손이 상당한 위력을 품고 다가왔다. 클레이오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블라드를 직시할 뿐이었다.
「지각」을 켠 클레이오는 에테르 감응자도 아닌 이에게 얻어맞을 만큼 무력하지 않았다.
단지 피하는 꼴을 보이기 싫어, 마지막 순간까지 버틴 거였다.
‘싸움은 원래 기싸움이 반이지. 내가 완력은 저놈보다 약하겠지만 눈은 좋으니까.’
클레이오의 손위 형제는 어린 동생의 머리카락 끝만을 스치고서 주먹을 비껴냈다. 정말로 때리려던 작정은 아니었던 거다.
여차하면 마법 방어막을 쓸 생각으로 에테르를 끌어올리던 클레이오는, 곧 힘의 흐름을 멈춰놓았다.
‘날 시험했군. 생각보다 성격이 더 나쁜데?’
마법을 쓸 수 있다지만 몸은 연약하기 그지없는 어린 동생 상대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들다니.
‘정진’은 속으로 혀를 쯧쯧 차고 말았다.
“너는 네가 가지고 있던 모든 침울한 버릇과 습관을 끝내 다 없앴구나.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사람의 움직임에 겁먹어 움찔대지 않고, 남의 눈치를 보거나 울지도 않으니. 아버지께서 자랑스러워하실 만도 해.”
클레이오는 대답하는 대신 그의 ‘형제’를 감정 없이 응시했다. 미움조차도 서리지 않은 그 표정이 블라드의 화에 불을 지르는 것을 모르고.
본인은 알지 못했지만, 그럴 때의 클레이오는 기디온 아세르와 몹시도 흡사해 보였다.
“하지만 인간의 천성이라는 것이 마음먹는다고 갑자기 고쳐지는 것이던가?”
블라드는 들었던 손을 내려 클레이오의 어깨를 짚었다. 힘을 세게 주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너는 내 동생이 아니야. 그 애는, 죄가 없지만 취약한 영혼을 가진 애였지.”
클레이오의 창백하고 오연한 얼굴 아래에 숨겨진 것을 파헤치듯 블라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네 영혼은 굳건하고, 너는 그 연약한 몸으로도 두려움을 모르잖나. 너는 내가 알던 나의 동생과는 비슷한 점이 없어.”
“무슨 말씀이신지. 요즘 유행이라는 강령술 같은 데에 취미라도 붙이신 겁니까? 제가 저 자신이 아니면 누구란 말입니까?”
‘이 자식. 감 좋은 건 알겠지만, 얻다대고 되도 않는 협박을 하려고 들어.’
“그러게, 클레이오. 너는 누굴까? 어릴 적부터 어딘가 잘못 끼워진 사람처럼 세상 모든 것을 낯설고 어색해하던 것과 달리, 물에 빠졌다 깨어난 넌 진짜 기디온 아세르의 아들 같아서 참 이상하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