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96
산맥의 북쪽 (1)
클레이오는 그저 웃었다.
영혼을 판별하는 증명된 방법이 없는 한, 그때까지 자신은 기디온 아세르의 차남이다.
“기억에 문제가 좀 생겼다고 해서 친동생의 존재를 부정하시니 당황스럽군요. 말씀대로 저는 부친의 자녀이고, 형님의 동생입니다.”
“친동생이라니. 네가 나를 핏줄로 여기긴 하던가? 너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잖아. 그러니 그리 주제넘게 수도상인조합의 신년회를 휩쓸고 다니고.”
클레이오는 블라드가 화내는 포인트를 살짝 알 것 같았다.
‘그동안은 움츠려 살던 동생이 나대니, 아버지 마음이 변할까봐 이참에 동생 쪽을 눌러 놓으려는 건가 보군.’
잘못 짚어도 한참을 잘못짚었다.
종합상사의 경영자라니, 그런 죽도록 일해야 하는 자리 따위 줘도 안 가지고 싶단 게 클레이오의 본심이었다.
클레이오는 자신의 어깨를 짚은 블라드의 손을 가볍게 밀어냈다.
“저는 그저 마법사고 제 영역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작은 재주로 이름을 알리고 나니, 모든 초대장을 거절할 수 없어 예의를 차린 것뿐입니다. 원치 않으신다면 앞으로는 자중하겠습니다.”
“거짓말을 제법 태연하게 잘하는구나. 오로지 학문에 매진할 사람치고는 일을 너무 많이 벌이지 않았어?”
“그건….”
기디온이야 클레이오 자신의 사업에 대해 대체로 파악하고 있겠지만, 블라드는 어디까지 아는지 몰라 클레이오는 말을 아꼈다.
“부동산이나 마도구를 건드리는 건 상정 가능한 영역이었지만, 출판업에까지 진출하려는 건 아버지께도 신선한 놀라움을 줬나 보더라고. 상사의 조사부장도 ‘작은 도련님’께서 세상의 흐름을 잘 읽는다며 감탄을 하더군.”
기껏 조심스레 진행한 게 무색하게 그냥 다 알았다. 아세르 상사의 조사부가 조사한 내역은 후계자에게도 그대로 공유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책이 나오지도 않았는데미리 판매고를 긍정적으로 예측하는 건 넘겨짚기 같군요. 그리고 원고는 마법서입니다. 세간에 마법에 대한 오해가 만연하기에, 대중의 인식을 개선해보려는 취지로 발간하는 겁니다.”
클레이오는 일관되게 자신의 주장을 펴나갔지만, 바로 그 일관된 침착함이 블라드의 역린을 거슬렀다.
“정말로 달변이 되었구나, 클레이오. 그래, 이렇게 놀라운 성과를 내주었으니 아버지는 널 수도방위대 학교에 집어넣은 걸 아주 성공한 투자라고 여기시는 거야. 하지만 본래 그런 도박은 안 하는 분이신 걸 기억하도록 해.”
“형님….”
“너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어.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도 이렇게 장성한 널 봤다면 기뻐하셨겠지.”
블라드의 말끝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미움과 질시의 대상을 앞에 놓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클레이오에게 블라드의 행동은 좀 이상하게 여겨졌다.
텔마가 죽은 것은 이미 18년 전의 일이었다. 어머니를 잃게 한 죄를 클레이오에게 묻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거 설마, 재산만이 문제가 아니라… 한참 어린 동생이랑 아버지 정 가지고 다투려는 거야?’
평생 아버지라는 존재를 가져본 적도 없는 ‘정진’으로선 아예 상상이 불가능한 감정이었다.
‘내년이면 서른 살인 놈이 애비가 동생 편애한다고 난리를 치다니. 내참.’
클레이오는 에테르 쓰기도 아까워서 「지각」을 껐다. 다시금 자세가 흐느적 무너졌다. 그는 급격히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그에겐 아버지의 관심보다 저택이 더 중요하다는 걸 형이란 놈이 몰라서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만에 하나 호적 파여서 아세르가 차남이 아니게 되더라도, 작위 받을 때 성 하나 만들면 그만이지. 그때는 김씨나 이씨로 만들어야겠다.’
김이야 원래 성이고, 이씨는 ‘정진’의 어머니 성씨였다.
상원에 들 수 있는 가장 낮은 작위는 남작이고, 귀족의 정식 명칭에는 형식이 있어서, 성과 영지의 이름이 동시에 들어갔다.
알비온 중부의 풍요로운 땅엔 모두 기존의 통치자가 있었다. 원탁의 기사의 후예가 아닌 한, 구 귀족들의 영지는 대개 중부지역이었다.
압살롬 2세의 시대에 귀족이 된 자들은 운이 좋을 경우에만 대가 끊긴 구귀족의 땅을 차지했고, 대개는 브룬넨 군주국으로부터 얻어낸 영토에 영지를 하사받았다.
그 이후 드물게 새 세습작위를 하사받은 사람들은 왕실 소유의 택지 중 별 가치 없는 땅을 ‘영지’로 받는 형식이었다.
형식상의 영지에는 보통 주민이 없었기에, 작위를 받는 이가 이름을 새로이 붙일 수 있었다.
‘그럼 영지명은 종로나 사당이라고 이름 바꿔 볼까.’
바론 킴 오브 사당이나 바론 리 오브 종로 같은 타이틀을 생각해보다 저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을 짓고만 클레이오였다.
자신을 비웃는 거라 생각했는지, 클레이오의 몸을 휙 밀친 블라드는 몇 걸음 물러서 팔짱을 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입가엔 미소가 돌아왔고, 목소리에서도 노기가 씻은 듯 지워졌다.
“어쨌거나 말이지, 무슨 일이 일어났든 나는 지금의 네가 싫지는 않아. 클레이오, 아니 레이. 네 친구들은 널 레이라고 부른다지?”
클레이오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아서와 첼이 그의 인생에 나타나기 전에, 이 애에게는 가족끼리 부르는 애칭조차 없었던 모양이다.
‘이러니 애가 버티지를 못하지. 기억 없어도 이자식이 제 동생을 음험하게 괴롭혀댔단 건 잘 알겠다.’
블라드 아세르는 ‘클레이오 아세르’의 명이 짧아지게 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 것 같았다. 곱게 봐주려야 곱게 봐줄 구석이 없는 놈이었다.
“그냥 부르던 대로 해 주십시오.”
“아니, 어떻게 그렇게 해. 널 클레이오라고 부르기엔 너무 어색하다고. 이 애칭은 입에 붙고 좋은걸. 나도 이제 널 그렇게 부르지. 하하, 앞으로도 잘해보자고, 레이.”
“피곤하실 텐데 쉬시지요. 저도 내일 이르게 실습 장소로 출발해야 해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어이, 이 마석은 넣어두도록 해. 이걸 도로 들고 가면 내 입장이 어떻게 되겠어.”
“그럼 호의는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아버님께도 인사 전하겠습니다.”
이미 미움은 받았고, 실컷 드잡이질까지 한 마당이다. 마석을 받으나 안 받으나 블라드의 의심은 지워지지 않을 것 같기에, 클레이오는 그냥 챙길 걸 챙겼다.
마석 루비만으로 채워져 묵직한 상자를 들어 올린 클레이오는 캔튼 부인을 불렀다.
“부인, 2층의 중앙 객실에 형님의 잠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그럼 좋은 밤 되시길.”
클레이오는 블라드 아세르에게 저택의 가장 좋은 객실을 내준 걸로 ‘형제’의 의무는 다했다고 여기며 자리를 끝내버렸다.
***
다음 날.
블라드가 괜스레 들쑤시고 간 여파로 클레이오는 늦잠을 자고 말았다. 그 탓에 예약했던 기차를 놓쳤다.
곧바로 다음 기차를 탔으나, 클레이오가 트리스테인 영지의 주도 모롤트에 도착했을 땐, 이미 시내 바깥 통행금지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러면 공작저로는 이동할 수가 없었다.
휘휘 돌아가는 지선이기는 해도 모롤트까진 선로가 깔려 있었지만, 공작저는 험준한 산속에 위치해 마차나 도보로만 진입이 가능했던 탓이다.
일반적으로는 영지의 주도에 우체국과 관청, 영주의 성이나 저택이 자리하게 마련인데, 트리스테인 영지는 독특하게도 외곽의 산중에 공작저가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트리스테인 영지는 핀토스 산맥의 북서쪽 가지에 위치한 험준한 지역이었다.
영지 전체가 척박한 산지였고, 연중 다섯 달 이상 얼어 있는 제카브르 내해가 영지 최북단의 깎아지른 절벽 너머로 맞물려 있었다.
주민의 대부분이 목재 벌목, 마석 채취, 약초와 버섯 채집, 사냥에 종사했다. 마수가 나타나기 전에도 위협적인 산짐승이 출몰하는 지역이라 인구는 적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서 일행은 마을의 단 하나뿐인 여관에서 하루를 묵어가게 되었다.
날도 춥고, 도로 양옆으론 겨우내 내린 눈이 쌍둥이들 키 높이로 쌓인 터라 저녁 역시 여관 1층의 펍에서 해결하게 된 참이었다.
오후 6시도 안 되었는데, 창밖은 벌써 한밤중처럼 깜깜했다. 펍 안은 썰렁할 만큼 한산했다.
날도 시리게 춥고, 마수도 나온다는데, 굳이 술집까지 나와 있을 사람이 많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펍 안은 마치 네 사람이 전세를 놓은 것 같았다.
높은 테이블 앞에 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던 리피가 말했다.
“마수가 준동하기 시작해서, 그저께부턴 오후 5시 이후 주도의 성벽 바깥으로 나갈 수 없대. 기차만 다니고.”
“아무튼, 레이 네가 하도 안 나타나니, 또 어디 아파서 쓰러졌나 거꾸러졌나 걱정했잖아.”
“전화를 걸려고 했더니, 마침 중앙역 전화회선이 전부 교체 중이고.”
클레이오는 지각자답게 얌전히 사과만 했다.
“늦어서 미안하다 얘들아. 괜한 걱정을 시킨 데다가, 하루를 불편하게 보내게 했네.”
“난 걱정 안 했는데, 두 주종 사이에 끼여 마구 갈렸다고. 이시엘은 안절부절못하지, 아서 저놈은 아예 너네 저택까지 달려갈 기색이지.”
바에 술을 받으러 갔던 첼이 실실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녀는 아예 쟁반을 빌려 날라 온 술 다섯 잔을 요령 좋게 테이블에 올려놨다.
“참, 여긴 특이하게 후불제더라고? 먹고 나가면서 계산하면 된다네.”
“사과의 의미로 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 먹고 싶은 거 다 주문해 놔.”
“와아아!”
“레이, 인심 쓰네!”
먹는 걸 좋아하는 두 쌍둥이가 환호성을 올렸다.
“내가 언젠 인색하게 굴었던 것처럼 그러냐.”
“에이, 아서랑 첼이랑은 밖에 나가도 우리랑은 펍에 처음 오는 거잖아!”
“이전까진 너희가 나이가 안 돼서 펍은 오면 안 됐던 거지.”
“히히, 이제 나도 리피도 생일이 지났지. 열네 살이다.”
“펍 와도 되고!”
“맥주도 마셔도 되지!”
알비온 왕국에서는 열네 살이 암묵적인 음주 규제 연령인 것 같았다.
드디어 나이의 제약에서 풀려난 두 쌍둥이는 첼이 내려놓은 에일 잔을 끌어당겨 호쾌하게 쭉 들이켰다.
“와, 이거 맛있어!”
“캐러멜 향 나는 거 같아!”
“맥주는 이런 거구나!”
“아니 맥주가 다 이런 맛은 아니고, 이건 스트롱 에일.”
“알려줘서 고마워, 첼. 앞으로도 또 마셔 봐야지!”
“수도에선 이렇게 진한 맛의 스트롱 에일은 잘 팔지 않으니까 여기서 많이 마시고 가.”
“앗, 그거 좋은걸!”
두 쌍둥이는 단숨에 잔의 절반씩을 비우고는 뺨이 살짝 발그레해져 재잘거렸다.
자신 몫의 잔을 살살 비우던 클레이오는, 스카치 에일과 비슷한 맥주의 짙은 호박색과 몰트 향, 달콤한 뒷맛을 음미하다가 덜컥 걱정이 됐다.
‘어라 이거, 못해도 8도는 될 거 같은데? 애들이 마셔도 되나?’
“리피, 레티샤. 술 처음 마시는 거면 조금만 마셔. 취할지도 모르잖아.”
빈 잔을 탕, 탕 내려놓은 두 쌍둥이는 일제히 입을 비죽였다.
“맨날 술 달고 사는 레이가 우릴 말리다니….”
“이상해, 앞뒤가 안 맞아.”
…그렇게 반격하면 실로 할 말이 없어지는 클레이오였다. 그런 그의 등을 첼이 툭툭 쳤다.
“넌 얘들한테 말로 못 이기니까 그만하고 그냥 음식이나 팍팍 시켜. 일단 뭐든 먹기 시작하면 쟤들도 조용해질 거야.”
“좋은 팁 고맙다, 첼. 근데 여긴 뭐가 맛있대? 메뉴판은 없는데 어떻게 주문하지?”
“뭘 고민해. 아까 물어보니까 어차피 메뉴는 스튜 두 가지, 구이 세 가지에 감자튀김뿐이래. 구이 중에서 새끼돼지 통구이가 오래 걸리고, 스튜는 그 뒤에 내준대.”
술을 주문하는 그 짧은 새 벌써 메뉴 파악이 끝난 첼이었다. 결정을 내릴 것도 없었다. 클레이오는 양손을 펼쳐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다 주세요’의 포즈를 취했다.
“그럼 전부 다 시키면 되겠네.”
쌍둥이들이 환호했다.
“좋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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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테인 공작저까지 타고 갈 마차를 수배하고서 뒤늦게 펍으로 돌아온 아서는, 코트에 쌓인 눈을 털지도 않은 채 마구 웃어댔다.
“으하하하하하. 그래서 전 메뉴를 다 주문했다고? 지금은 얼마나 나온 거냐?”
식탁에는 뜨끈한 양고기 완자 꼬치구이와 감자튀김이 올라와 있었다.
향신료와 불에 그슬린 지방의 강렬한 냄새가 절로 식욕을 돌게 했다. 미트볼은 양도 많았다. 쟁반처럼 거대한 놋쇠 그릇에 산더미처럼 쌓인 모양새였다.
“이제 메뉴 두 개 나온 거!”
“몇 개 시켰는데?”
“여섯 개!”
“그럼 이거의 세 배나 나오는 거야? 휘유.”
“왜, 다 먹을 수 있어!”
“누가 못 먹는대? 나도 얼른 먹어야지! 냄새 끝내주네. 야아, 레이 덕에 호사를 다 해 본다!”
막 에일 잔을 받아든 아서는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이렇게, 정말로 신이 나서 크게 웃을 때에는 빼족한 송곳니가 살짝 드러나서 어린 짐승같이 보였다.
‘대체로 날 놀릴 때 저렇게 신나한다는 점이 어이가 없긴 하다만.’
두 번째로 다 비운 잔을 내려놓은 클레이오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래 웃어라, 실컷 웃어. 인생에서 그렇게 웃을 수 있을 때가 안 길다.”
꼬치를 척 집어 들고 포크를 이용해 양고기 미트볼을 쭉쭉 끌어내리던 쌍둥이들이 부우우 야유했다.
“레이 또 노인네 같은 소리 지껄여.”
“레이는 진짜로 늙으면 어쩌려고 벌써부터 이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