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97
산맥의 북쪽 (2)
“그만들 하고 식사들 하자. 음식 다 식겠다.”
“앗, 식으면 아까워.”
“얼른 먹어야지.”
쌍둥이들을 정리한 이시엘이 마지막으로 빈 의자를 채웠다. 늦게 온 클레이오가 어디 다치거나 아픈 구석은 없는지 살피는 눈치였다.
자기 몫의 양고기 미트볼을 후후 불어 덥석덥석 잘도 먹던 아서도 그제야 웃음을 그쳤다.
“아무튼 늦은 건 너무 신경 안 써도 돼, 레이. 어차피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오늘까진 공작저로 마차가 못 들어간댔어.”
“내일 정오에 공작저에서 호위기사들이 내려오면, 식료품과 생필품 실은 수송단을 꾸려 함께 공작저로 출발한다고 한다. 주민들 말로는, 산짐승들이 출몰하고 길도 험하니, 겨울엔 함께 이동한다는 규칙이 있다더군.”
“단독행동하면 마차 안 빌려준다잖아. 절대 안 그런다고 맹세까지 했다니까. 언 물가에 어린애 내놓은 양 마차 주인이 어찌나 걱정을 하던지.”
“우리가 수도방위대 학교에서 파견된 걸 아는데도 그래?”
“여긴 너무 벽지라 실습생 자체를 처음 받는 모양이더라고.”
“아….”
클레이오는 테이블에 앉은 아이들을 쭉 둘러보았다. 누군지 모를 마차 주인의 심정도 납득이 갔다.
청소년도 아니고 어린이에 가까운 안젤리움 쌍둥이, 역시 얼굴에 어린 티가 안 가신 첼과 이시엘, 금발의 애송이와 비실비실한 남학생 하나 조합이니, 제정신 박힌 어른이라면 누구든 산길로 내보내기 위험하다고 여길 만한 멤버였다.
‘이 애들 레벨을 합치면 이미 두 자릿수인 건 상상도 못 하겠지.’
손으로 감자튀김을 집어 먹던 첼이 툴툴거렸다.
“거참. 마수가 아니라도 겨울 보내기 쉬운 동네가 아니네. 물자를 올리기도 어렵고 사람이 드나들기도 힘든데, 공작저는 왜 그런 데 있는 거람?”
이 와중에도 미트볼을 깔끔하게 썰어 먹고 있던 이시엘이 시리처럼 답변했다.
“트리스테인 공작저 역시 왕의 홀처럼 레오니드 1세 폐하 치세에 중건되었다. 정복왕의 기사였던 초대 트리스테인 공작이 마수 모롤트를 무찌른 자리에 공작저를 지어 올렸다는 전승이 있다.”
“역시 우리 이시엘! 수석다운 설명! 근데 마수 이미 죽였다면서 왜 공작저는 안 옮긴 거래?”
“초대 트리스테인 공작은 북의 영토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고, 성채는 이미 왕비 이솔트에 의해 축복을 받은 상태였기에, 그 맹세를 되새기는 의미에서 천 년 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지.”
“그리고 저렇게 좋은 핑계로 독특한 체계의 기사단도 운영하고 있는 거고. 거긴 수도방위대 출신이 거의 없어. 보통 평민들 중에서 종자를 뽑고, 아주 전통적인 방식으로 시간을 들여 기사를 길러내거든.”
아서가 제법 예리한 분석을 덧붙였다. 입가에 맥주 거품을 묻힌 채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면 더 진지하게 느껴졌겠지만, 이제 와서 새삼 아서의 그런 꼴을 지적할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이런… 학교 출신들과 달리 꽤 배타적이겠는데?”
“뭐 어쩌겠어, 이미 왔는데! 트리스테인 공자가 허가를 내줬으니, 우릴 쫓아내진 않겠지.”
지난 원고에서도 트리스테인 기사단원들은 수도에서 온 아서 일행을 차갑게 적대했다. 개국 공신의 기사단과 영지를 홀대하는 중앙 귀족들에게 반감이 큰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아서의 주인공 파워에 감화돼, 우호적인 관계로 돌아서긴 하지. 멜키오르의 검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이들이지만… 그건 태서턴 트리스테인을 설득하지 않는 한 못 바꿀 부분 같군.’
이번 원고에서도 태서턴은 열렬하고 맹목적인 충성을 멜키오르에게 바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놓고 아서의 전력은 안 되더라도, 앞으로의 전개에서 북쪽을 든든하게 지켜줄 분들이니 좋게좋게 지내고 가야 해.’
미트볼 다음은 구운 쇠고기가 나왔고, 연이어서 두 명의 주방 보조가 새끼돼지 통구이를 식탁에 올렸다.
“여기 통구이 시켰었죠!”
“네!”
“오, 저게 새끼돼지 통구이야? 엄청나군!”
“껍질 완전 바삭바삭해 보여.”
“맛있겠다!”
갈색으로 노릇노릇 잘 구워진 통구이의 표면에선 여전히 지글지글 기름이 끓었고, 사방으로 고소한 냄새를 풀풀 풍겼다.
“그런데 이거 주문받을 때 통구이는 한 시간 넘게 걸린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게 빨리 나왔네?”
휘이이이―
그 순간이었다.
펍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벽난로가 훈훈하게 데워둔 실내로 차가운 공기와 밤의 눈보라가 들이쳤다.
낡고 지저분한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아이들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로브 아래, 흑백이 얼룩덜룩 섞인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턱과 입매가 사각으로 단단했고, 풍기는 기세 또한 범상치 않았다.
큰 키에 장대한 체격을 가졌는데도 남자의 걸음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고, 풍성한 로브가 검을 요령 좋게 감추어주었다.
클레이오는 바짝 긴장한 채, 언제든 서클을 열 태세를 마쳤다.
‘이 자는 강해.’
남자의 로브 위에서 차가운 눈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불을 등진 남자는 어두운 실루엣으로 우뚝 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학생들, 그 돼지 통구이는 내가 아까 주문한 메뉴 같아. 밖에 일 좀 보고 오는 동안 잘못 가져다준 게 아닐까 싶으네.”
클레이오는 어이가 없어서 절로 입이 다 벌어졌다.
‘아니, 저렇게 의미심장하게 등장해서… 돼지 통구이 얘기나 하냐고… 뭔데.’
“아, 그런가요?”
넉살 좋은 첼이 직원을 불러 어찌된 일인지 물어보려는 때,
챙그랑.
문을 등지고 있던 아서가, 뒤를 돌아보던 자세 그대로 포크를 떨어뜨렸다.
소년은 어찌나 놀랐는지,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로브를 쓴 남자 역시 아서를 보더니 급하게 후드를 젖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어라?”
“어?”
“아서?”
“네….”
허우대 멀쩡한 중년 남자와 번듯한 청년이 얼빠진 얼굴로 입만 뻐끔대고 있었다. 너무 놀라면 앞뒤를 따질 경황이 없어지는, 딱 그런 상황처럼 보였다.
한 박자 늦게 아서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아니, 말도 없이 사라지더니, 도대체 왜 이런 데서 나타나는 겁니까?!”
“그러는 넌 왜 여기 있냐? 간다는 학교는 때려 쳤어?”
“때려치우긴 뭘 때려치워요! 자알~ 다닙니다. 여긴 실습 온 거예요.”
“이런 애들까지 마수가 나오는 험지로 내몰다니, 수도방위대 학교도 갈 데까지 갔군!”
클레이오 역시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거렸다.
‘그래서 저건 도대체 누군데?’
그 와중에 두 쌍둥이는 이상한 부분에서 뾰족거리며 끼어들었다.
“헐, 실습지 배정은 마수 나오기 전에 된 거예요. 수도방위대 학교는 천재지변이 일어난대도 절대 학사일정을 취소하지 않는걸요.”
“게다가 마수 잡는 거 우리가 도울 수 있으면 좋잖아요!”
리피와 레티샤의 말을 들은 남자는 엄청나게 무서운 표정으로 얼굴을 구기더니, 주먹을 쥐어 자신의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답답해서 숨이 안 쉬어진다는 태도였다.
“그 학교는 아직도 그런다냐? 아이고 개잡놈들. 요런 애기들이 고사리손으로 무슨 마수를 잡는다고. 집에서 맛있는 것 먹고, 일찍 자야할 나이에 이 한데 나와가지고!”
생판 처음 보는 남에게 어린애 취급을 당하자, 검사로서의 자존심이 있는 쌍둥이들이 바짝 튕겨 일어섰다.
“애기 아니거든요.”
“고사리손 아니거든요.”
“아서, 이 아저씨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으아… 다들 진정들 해. 그러니까… 이분이 내 검술 스승님이셔. 미에츠 선생님, 제 친구들입니다. 이 두 사람도 동급생이고, 전에 말한 리피 안젤리움과 레티샤 안젤리움입니다.”
“너희들이 그 안젤리움 쌍둥이들이었냐. 난 더 큰 애들인 줄 알았지, 내참. 아서, 너는 편지에 좀 제대로 적을 것이지.”
“다 적었다구요. 제대로 안 읽은 건 스승님이죠!”
이 난리통에도 고요한 태도를 유지하던 이시엘이 어느새 미에츠 선생이라는 자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스승님을 뵙습니다.”
오른손은 심장 위에, 왼손은 검집 위에 댄 이시엘의 자세는 흠잡을 데 없이 우아했다. 그것은 상대에게 경의를 표하는 예였다.
삐죽삐죽 뻗친 머리를 벅벅 긁던 미에츠가 화급히 이시엘을 만류했다.
“야, 야. 넌 또 그걸 하고. 어색하게 왜 그러냐, 이시엘!”
이쯤 오니, 클레이오는 중대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되었다.
‘아서의 저 날티 나는 말투가 어디서 왔나 했더니, 저 스승이란 작자랑 판박이네.’
.
.
.
두 마리 새끼돼지 통구이였던 것의 잔해만 놓인 테이블은, 이미 잔 하나 놓을 데 없이 접시로 가득 찼다.
“그래서, 쪽지 하나만 남긴 채 키시온 자작령을 나가가지고 대륙을 떠돌았다고요? 반년이나요?”
“허 참, 야 내가 무슨 집나간 아들네미도 아니고, 제자란 놈이 스승을 그렇게 닦아세우는 법이 어딨냐.”
“아서 님은 스승님이 걱정되어서 그리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심려가 적지 않았습니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만….”
“이제 너희 둘 다 중급 검사잖아. 수도 학교에 가면 나보다 훌륭한 선생이 있을 텐데, 왜 이렇게 연연을 해, 연연을.”
미에츠 선생은 키시온 자작가에서 이시엘을 가르치기 위해 초빙했던 검사였다.
‘슐리만 키시온은 변경의 영주로선 우수해도 기사로서는 평범했으니까. 검에 엄청난 자질을 가진 딸을 위해 스승을 새로 모셨다고 했었지.’
미에츠의 과거나 내력에 대해서는 원고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아니, 이름조차도 지금 처음 알았지. 원고에선 그저 스승님, 스승님 이렇게만 부르니.’
어린 아서를 가엽게 여겨 제자로 거두어준 스승. 원고에서 그를 추억하는 두 주종의 어조가 애틋해 이런 캐릭터일 줄은 상상도 못 한 클레이오였다.
‘하고 있는 꼬락서니만 봐선 동네 불량배나 다름이 없는데 말이야.’
아서와의 첫 만남을 생각하면 이 미에츠라는 작자에게도 무슨 반전이 있을지 모른다. 클레이오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부러 강해 보이려고 하는 놈들은 별 볼일 없는 자투리들이지만, 강한데도 그걸 드러내지 않으려는 자들에겐 복잡한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약속’의 「이해」는 에테르를 돋워 올린 자의 레벨만 파악하게 해 주었기에, 아직 미에츠의 레벨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확한 메시지가 없어도 미에츠가 품은 결기 자체는 심상치가 않았다.
‘어쨌든이 시대 최고의 기사가 될 두 사람을 길러낸 스승이잖아.’
앞으로의 진행에서 강한 기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거기에 아서에게 호의적이기까지 하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스승님을 기다리십니다. 그 오두막도 아직 깨끗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언제든 돌아오셔도 됩니다.”
“야아, 십 년이나 있었던 거길 뭐 하러 내가 또 기어들어 가냐! 나도 이제 늙어서, 노후 준비해야 한다고. 크게 한탕 하러 왔더니만, 너넬 마주치다니.”
“…한탕, 말입니까? 역시 저희 영지에 머무르실 때 보수가 너무 적지 않았는가, 아버님께서도 늘 염려하셨습니다.”
이시엘이 침울하게 고개를 숙이자, 붉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사르르 이마로 드리웠다. 그 꼴을 보던 아서가 잔을 벌컥벌컥 비우고는 우다다 말을 쏟았다.
“이제 와서 뭔 소리래? 이시엘네 아버지가 돈을 준대도 싫대, 땅도 주고, 과수원도 주고 한대도 스승님이 한사코 거절하며 안 받았잖아요.”
“얘 아서야, 키시온 군영의 사령관이자, 자작님이 갑옷도 오래된 거 닦아 쓰고, 옷도 기워 입고 사는 거 뻔히 아는데, 거기서 큰돈 받으면 내가 인간으로서 양심이 없는 것 아니냐.”
“그럼 이 산골짝에선 어디 돈 나올 구석 있어요?”
“마수가 출몰하잖아.”
“마수는 남쪽에서도 나오고 있는데, 왜 하필 여기람? 아니, 타박하는 건 아니고, 만나서 나야 좋지만. 크뤼엘 공작이나 찾아가지 그랬어요.”
콱.
자신 몫의 에일 잔을 확 비운 미에츠가 아서의 머리를 아프게 쥐어박았다. 아주 전광석화 같은 속도였다.
“이 자식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런 놈 밑에서 일하겠냐? 그리고 거창한 지원을 받는 콧대 높은 크뤼엘 기사단이, 어, 그 검은머리 왕자님까지 끼고 있는데 용병이 왜 필요해.”
“그럼 여긴 용병이 필요하대요? 트리스테인 기사단 있는데?”
“그래, 트리스테인 공자가 소속 없는 기사를 모집한단 포고를 냈더라. 마침 내가 크라테르 제후국서 돌아오던 날 소식을 들었지. 며칠 있음 요 역 앞 광장이 바글바글해질걸?”
“그 사람들 고용할 비용은 어디서 나옵니까? 중앙 정부에선 결코 지원을 하지 않을 텐데요.”
“아서 요놈, 다 자랐나 했더니 여전히 생각이 모자라구나. 여긴 부유한 영지다. 기사단을 건사하면서 중앙의 지원이 필요 없을 만큼 말이다.”
미에츠의 말투는 껄렁했지만 담고 있는 통찰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세 사람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클레이오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미에츠 쪽으로 돌아갔다.
‘…그래, 역시. 아서의 스승이 평범한 사람일 리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