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x-Level Newbie RAW novel - Chapter (120)
120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1)
“빌어먹을. 말해라. 뭘 하면 되는 거냐?”
“음. 특별한 건 없고. 그냥 내가 마을에서 떠날 때까지 이걸 입으면 돼.”
진혁이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굉장히 부담스럽게 생긴 코스튬을 꺼냈다.
홍대에서 보더라도 가까운 경찰서나 군부대에 신고할 만큼 경악스러운 코스튬이었다.
당연히, 고귀하고 점잖은 엘프로선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랄 수밖에.
“뭐, 뭐냐? 그 끔찍한 옷은?”
“어허. 끔찍하다니.”
감히 신성한 고인물 룩을 보고 어디서 그런 막말을 하는 거냐?
치렁치렁하게 웨이브가 들어가 있는 금색 가발에, 보기만 해도 테스토스테론 냄새가 물씬 풍기는 붉은 콧수염. 그리고 핑크빛 미니스커트와 꽃무늬 요술봉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이 정도면 어느 곳에 내놔도 고인물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해 주는 룩이다.
다시 봐도 명품이네. 명품이야.
“우, 웃기지 마라! 내가 이딴 걸 입을 것 같으냐!”
“음? 네 입으로 그랬잖아. 만약 진다면 찍소리 하지 않고 내 말에 복종하겠다고.”
“그거야 그렇지만…….”
“그럼, 얌전히 입어. 실력에서 밀렸는데, 신의까지 잃어버리면 그건 너무 추하니까.”
“…….”
테슬론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인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모든 걸 다 잃은 와중에 약속까지 어겼다는 불명예까지 입을 수는 없는 법.
결국.
“부탁이다. 제발 하루 빨리 마을에서 떠나다오.”
테슬론은 모든 걸 체념한 눈으로 진혁에게 애걸했다.
“가능하면 느긋하게 있을 생각이지만, 너 하는 거 봐서 하루나 이틀 정도는 당겨 줄 수는 있지.”
어차피 이 치욕은 엘프 사이에서 길이길이 회자될 테지만.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들으면, 최대한 짧게 줄여 줄 수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모든 건 테슬론이 하는 행동거지에 달려 있는 거고.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걸로 콧대 높은 엘프 녀석의 참교육은 완벽하게 끝난 셈이다.
잠시 뒤, 엄청난 차림새를 한 테슬론이 엘프들을 진두지휘했다.
“……무화과 열매들을 차곡차곡 마을로 이송해라. 중앙에 있는 광장부터 채우되 공간이 부족할 경우 창고까지 사용하면 된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으나, 얼굴은 나라를 잃은 것만 같아 보였다.
키득키득!
엘프들 사이에서도 연신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제나 얼음 같던 레인저들의 대장이 저런 꼴을 하게 될 줄을 그 누가 상상이라도 해 봤겠는가?
“누가 지금 함부로 웃어! 감히, 테슬론 님을 비웃은 거면…… 푸웁!”
심지어 테슬론의 친위대라 할 수 있는 1계급 레인저들도 웃음을 참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아주 좋아.’
진혁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누군가를 길들이는 데 저것만한 게 없다.
그러고 보니 나중에 엘리스나 천유성도 저런 식으로 조련하면 꽤 효율적이겠는데?
잠시 고민하던 진혁이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무리겠지.
두 녀석 다 죽으면 죽었지, 저런 꼴을 하겠다고는 하지 않을 거다.
“허허. 의외로 짓궂은 취미가 있으시군요. 설마, 테슬론이 저렇게 얌전해질 거라곤 예상하지 못 했습니다.”
진혁의 옆에 서 있던 펜하임이 말을 걸었다.
“장난치곤 살짝 심했나요?”
하기야 장로 입장에선 보기 씁쓸한 풍경이 아닐 수 없을 거다.
마을을 수호하는 최고 레인저가 저런 꼴을 하고 있으니.
하지만, 의외로 펜하임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아닙니다. 저 녀석도 언젠가 한 번 자기보다 높은 벽을 느껴 봐야 하긴 했으니까요. 오히려 이번 기회에 진혁 님을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호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그래도 성숙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엘프가 장로를 맡고 있어서 다행이다.
6층도 이만하면 아주 글러먹은 동네는 아니었구나.
“그럼, 더 심하게 굴려도 괜찮겠네요.”
“허허허. 이참에 아주 제대로 버릇을 길들여 주십시오.”
펜하임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둘이 대화를 이어가고 있을 바로 그때였다.
“자…… 장로님. 큰일…… 큰일 났습니다.”
다급한 고함 소리와 함께 한 엘프가 늪지로 달려왔다.
상처투성이인 모습.
피로 젖은 머리카락의 끝에선 붉은 핏방울이 연신 떨어졌다.
한쪽 팔마저 사라진 게, 한 눈에 봐도 심각해 보이는 중상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
펜하임이 기함했다.
몇몇 엘프들이 빠르게 달려가 상처 입은 엘프를 부축했다.
“루시온이잖아!”
“어, 어떡해! 팔이. 완전히…….”
“대체 누구야! 누가 이런 끔찍한 한 짓을 한 거냐고!”
“허억. 허억. 헉…….”
루시온이라 불린 엘프는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에도 엘프는 자신이 해야 할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고자 했다.
“인간……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쿨럭! 컥! 수가 셀 수 없이 많…….”
그걸로 끝이다.
루시온은 채 마지막 말을 완성하지 못한 채 그대로 숨을 거뒀다.
주위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것이 동료의 죽음에 대한 슬픔 때문인지.
아니면 앞으로 더 많은 동료들이 죽어야 하는 비극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누군가 적의를 갖고 이곳에 왔고.
그 적의가 이곳을 완전히 휩쓸어버릴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거라는 것뿐이다.
***
퍼억!
“으아아악!”
번뜩이는 섬광이 스쳐 지나가자, 엘프의 등에서 붉은 핏줄기가 솟구쳤다.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일격에 즉사라는 것쯤은.
“쯧. 힘도 없는 놈들이 더럽게 날래구만.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겠어.”
2m에 이르는 체구를 지닌 남자가 짧게 혀를 찼다.
중화 길드에 소속된 랭커이자, 이번 임무에 편성된 세 명뿐인 S급 플레이어 중 하나인 ‘텐챠오’였다.
“어쩔 수 없지. 죽이는 것보다 생포가 주목적이니. 전투 능력이 있는 레인저들이야 죽이더라도 나머지는 가능하면 사로잡아야 한다.”
또 다른 랭커인 리커창도 한 마디 거들었다.
이미 몇 차례 사냥을 했는지, 자기 키를 훌쩍 넘는 창은 붉게 물들어 있는 상태였다.
“어차피 숲 주위로 넓게 독을 펼쳐 뒀으니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할 거예요. 사냥은 느긋하게 제 맛인 법. 지금부터 천천히 즐기도록 해 보죠.”
마지막으로 긴 흑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자가 두 사람 곁에 다가왔다.
쉬에화.
중화 길드 내에서도 독공을 잘 다루기로 손꼽히는 고수였다.
하나같이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은 실력자들.
게다가 이들이 데리고 온 중화 길드의 플레이어 숫자만 해도 무려 500이 넘었다.
고작 엘프 마을 하나 점령하겠다는 것치곤 지나치게 많은 병력이다.
그럼에도.
여기 있는 모두는 손속에 조금의 사정조차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실패하면 이번엔 우리가 죽는다.
-반드시 명을 따라야 해.
-개죽음 따위는 사절이다. 그것이 고작 엘프들 따위에게 연민을 갖는 이유라면 더욱더.
이미 남궁천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해 있었고.
실패란 곧 죽음을 뜻하는 말로 직결되었다.
죽느냐 사느냐.
두 가지 선택지 중에 골라야 한다면, 당연히 선택해야 할 건 하나뿐이다.
“해가 지기 전에 엘프들이 있는 마을까지 진격한다.”
리커창이 명령을 내렸다.
“존명.”
“알겠습니다.”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았다.
동시에 엘프들이 있는 숲을 향해 서서히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
“이, 이럴 수가…….”
펜하임과 엘프들이 마을 외곽에 도착했을 땐 이미 상황이 종료된 뒤였다.
매캐하게 올라오는 연기와 불타는 집들.
지옥이 있다면…… 이런 광경일까?
끝까지 항전하다 목숨을 잃은 레인저들의 시신들과.
본보기로 처형된 건지, 개중에는 무기를 쥐지 않은 어린 엘프나 여성 엘프들의 시신도 보였다.
“이런 끔찍한 짓을 하다니…….”
“신과 정령께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절대. 절대로!”
“크으윽!”
엘프들이 분노에 찬 얼굴로 이를 갈았다.
너무나 참혹한 광경에 할 말을 잃어버린 이도 있었다.
“형제…… 자매들의 시신을 어서 수습하게. 언제까지 차가운 땅 위에 놓아 둘 순 없는 법 아닌가? 그리고 테슬론은 레인저들을 이끌고 즉시 마을 중앙으로 가 주고. 그쪽은 결계로 인해 보호받고 있는 터라, 그리 쉽게 뚫리지는 않겠지만. 안심할 수 없을 것 같아.”
펜하임이 목이 잠긴 어투로 엘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테슬론이 고개를 끄덕인 뒤, 레인저들을 이끌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래.
슬퍼하는 건 이후의 일이다.
지금 당장은 우선시해야 할 일들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1시간여가 흐르고.
남은 엘프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을 때였다.
부스럭.
갑자기 풀숲에서 다수의 인기척이 들렸다.
모습을 드러낸 건 서른 명 정도의 인간.
“흐음. 뭐야 이건? 남아 있는 놈들이 또 있었나?”
바로, 중화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이었다.
“이야. 이것 봐라? 이거 다 어디 짱박혀 있나 했더니. 죄다 여기 모여 있었나 보네?”
“일일이 찾아다는 수고를 덜게 됐군.”
“어이. 나중에 공대장님들한테 똑똑히 알려 드려. 우리 소대가 세운 공이다. 이거.”
플레이어들이 낄낄댔다.
흥분되는 거겠지.
그동안 억압받고 눈치 받느라 좀이 쑤셨을 텐데, 모처럼 마음껏 피를 볼 수 있었으니까.
실제로 한 차례 광란의 사냥 끝에 짭짤한 아이템들도 쏠쏠하게 긁어 모은 데다 획득한 포로의 수도 제법 됐다.
“…….”
“…….”
동공이 풀려 있는 엘프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일렬로 도열해 있었다.
트라우마가 얼마나 심했는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엘프들이 한 명도 없었다.
“어이, 거기 귀 긴 놈들. 나는 기왕이면 목숨을 걸고 반항을 했으면 좋겠어. 추격도 나쁘진 않는데, 너무 해서 질렸거든.”
“푸하하! 맞는 말이야. 엘프들 중에선 쓸 만한 놈들이 하나도 없는 건지. 영 싱겁더라고.”
“그래도 꼴에 책임감은 있는지. 자기 가족은 건드리지 말라고 질질 짜는 꼴이 아주 가관이었는데. 기억 나냐? 그 덩치 큰 엘프 놈?”
“아아. 당연하지. 자기는 죽어도 아내와 자식은 살려 달라고 하던가 뭐라던가. 당연히 본보기로 모두 죽여 버렸지만.”
“숫자야 넘칠 정도로 많으니까. 적당히 솎아내는 것쯤은 위에서도 뭐라 하지 않을 테고. 완전히 우리 세상이야.”
“덕분에 아주 재밌었지.”
무용담을 떠드는 듯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고.
으득……!
그 말을 듣고만 있어야 했던 실비아는 속으로 피눈물을 삼켰다.
‘복……수하고 싶어.’
지금 당장이라도.
화살을 쏘아 저 증오스러운 인간의 심장을 꿰뚫고 싶었다.
검을 뽑아든 채 응징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리야.’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전투에 특화된 상위 레인저들조차도 죽거나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아무리 발악해 봤자 수모를 당하다 저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 냉혹한 현실을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분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과.
이 상황에서조차 당당하게 나설 수 없는 나약함이.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도와……주세요. ……제발.”
실비아는 그녀가 알고 있는 유일한 이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실비아가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테슬론조차 범접하지 못했던 능력을 지닌 이 남자라면…….
반드시.
이 상황을 바꿔 주리라 믿으며.
어느새 진혁이 실비아의 곁에 서 있었다.
“그 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진혁이 고저 없는 말투로 그녀의 요청에 회답했다.
동시에.
[고유 능력…….]붉게 물든 단검 위로.
[……‘검의 무덤’이 발현됩니다.]칠흑 같은 강기가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