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x-Level Newbie RAW novel - Chapter (135)
135화. ‘서리 칼날’ 부족 (1)
각 인원별로 역할이 배분됐다.
이태민과 유연화 그리고 테레사는 마인들과 혈족들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을 정탐하기 위해 떠났다.
그리고 천유성은 진혁으로부터 모종의 임무를 부여받은 채 탑 밖으로 나갔다.
잔뜩 불만을 터뜨리긴 했지만, 잠시뿐이었다.
백날 싫다고 하면 뭐 하겠나?
어차피 거절이란 선택지는 없는 것을.
마지막으로 진혁은 장은석을 포함한 단군 길드의 플레이어들과 함께 ‘담수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얗게 물든 시야와 거친 바람 속.
열댓 명의 남녀가 일렬로 늘어졌다.
“여기서부턴 발밑을 조심하세요. 크레바스가 있는 지형이라 반드시 제가 가는 길로만 따라오셔야 합니다.”
진혁이 선두에서 일행들을 이끌었다.
“쳇.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저렇게 재는 거야?”
진혁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걷던 장은석이 혀를 찼다.
짜증과 시기심으로 얼룩진 얼굴에선 상대에 대한 열등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길드를 꼽으라고 말하면 어김없이 후보로 등장하는 단군 길드.
그곳에서 당당하게 공대장의 자리를 따낸 게 자신 아니던가?
게다가 6층에서 90일을 보내는 동안, 길드의 입지는 더더욱 단단해졌고. 플레이어들의 영향력은 그 어느 직업보다 높아진 상태.
막말로 대형 길드의 간부급이면 국회의원이 부럽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 망할 놈은 대체 어째서!
‘나보다 더 많은 인정과 관심을 받는 거냐고!’
장은석의 입가가 미묘하게 뒤틀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공대원들의 선망 어린 시선을 받으며 걷고 있는 진혁의 모습이 보였다.
막말로 정보를 조금 더 많이 알고 있다 뿐이지, 그것만 아니었으면 당장이라도 쳐내 버렸을 거다.
“안 그러냐, 태호야? 어? 아니, 기껏해야 최초 클리어 몇 번 해 봤다고 다들 저놈을 왜 이렇게 빨아 주는 건데?”
장은석이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그러자 바로 옆에 있던 남자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태호.
이번 레이드의 부공대장 격인 플레이어였다.
장은석과는 과거 시련의 탑이 나타나기 전부터 함께해 온 절친한 사이랄까.
덕분에 모든 게 현실이 된 지금은 그때의 실력과 경험을 인정받아 단군 길드에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너무 그렇게 말하지 마라. 강진혁 플레이어님과 나머지 분들 아니었으면, 우리 전부 다 죽었을지도 몰랐어.”
두 사람의 차이점이라면, 장은석과 달리 이태호는 상대를 인정할 줄 안다는 점이었다.
열등감은 독이 될 뿐이란 걸 알았기에, 상대의 장점을 흡수하려고 노력하는 스타일이랄까?
만약 장은석보다 전투 센스가 뛰어났다면, 그를 제치고 공대장의 자리에 올랐을지도 몰랐다.
“젠장.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있어 봐. 저런 녀석 따위 내가 이번에 단번에 앞질러 줄 테니까. 불사조의 깃털을 손에 넣는 것도, 마인들을 박살내는 것도 모두 내 손으로 할 거다.”
장은석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래.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이번 레이드의 주인공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완벽하게 바람 소리에 묻혀 버렸을 거라 생각했던 대화마저.
‘이것 참 안타깝네…….’
이미 진혁은 모두 다 듣고 있는 중이었다.
안타깝다는 말은 진심이다.
마음엔 들지 않아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 기특해서 함께 데리고 와 줬는데.
방금 결정했다.
장은석을 얼마나 박박 굴려야 할지.
***
담수호(湛水湖).
7층에서 가장 추운 곳이며, 동시에 층계의 모든 마력이 집중되는 장소다.
강력한 기운이 모이는 곳답게, 이곳엔 규격 외의 몬스터들이 대거 서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힘의 균형에 의해 유지되던 생태계는 얼마 전 모두 무너져 버렸다.
다름 아닌, 아이스 트롤들에 의해서.
정확히는 ‘서리 칼날’이라 명명된 부족들에 의해서.
그리고 바로 현재. 담수호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선 수천 마리의 아이스 트롤들이 모여 있었다.
“……흐음.”
붉은색 모피로 만든 의자 위에 몸을 묻은 트롤이 깊은 침음성을 흘렸다.
푸른 피부에, 긴 엄니.
예리하게 빛나는 안광이 유독 눈에 띄었다.
적어도 이곳에 모여 있는 트롤들보다 1.5배 가까이 큰 덩치를 갖고 있는 놈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참다못한 트롤 하나가 입을 열었다.
어금니 하나가 부러진 트롤이었다.
“족장…… 이렇게 할 수는 없다. 아니,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두 개의 음절로 이루어진 하나의 단어.
한 종족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그 말에…….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트롤이 반응했다.
“알고 있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 나왔다.
어금니가 부러진 트롤이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꺼냈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짧은 대화에서 느껴지는 무거움.
서리 칼날 부족의 족장이자, 부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사라고 평가받는 ‘카라칼’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어쩔 수 없다고.
자신들이 마인들과 뱀파이어 혈족을 따르는 건 불가피한 일이라고.
그렇게 합리화를 해야만 했다.
물론, 이 결정은 그들이 원한 게 아니었다.
긍지와 명예.
그 두 개야말로 서리 칼날이란 이름을 지탱하는 기둥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가치들을 지키려다 부족의 모든 것들이 잿더미로 변할 위기에 처했다.
압도적인 데카서스가의 혈족들과 마인으로 구성된 연합은 일말의 자비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전사들이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강자와 싸우다 죽는 것이야말로 전사의 숙원.
목숨 따위는 아깝지 않다.
죽음은 친숙하고도 가까웠기에, 언제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문제는…….
아무 힘도 없는 아이들과 암컷들이다.
부족의 미래를 짊어진 소중한 동반자들.
그들을 모조리 잃어버린다면, 서리 칼날이라는 이름은 영원히 눈 속에 묻힌 채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 모든 걸 감수해야만 했기에.
카라칼은 명예와 긍지를 모두 포기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그 모든 짊을 떠안아야만 했다.
그게 부족을 이끄는 족장이 해야 할 의무였으니까.
“족장……!”
“반론은 허가하지 않겠다. 모든 전사들은 마지막으로 무기를 점검해라. 내일 혈족들이 이곳에 온다면, 그들을 따라 인간들을 칠 것이다.”
이걸로 끝이다.
명예와 뒤바꾼 생존이 결정됐다.
그런데 바로 그때.
대형 마수들조차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서리 칼날 부족의 영역에 누군가 다가왔다.
“뭐 이리 분위기가 축 처져 있어? 카지노에서 빤스까지 전부 날리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대기실도 아니고.”
진혁이었다.
***
“미, 미쳤어…….”
“제, 제정신이 아니야.”
“제길, 이게 꿈이야 생시야. 내가 왜 여길 와 가지곤…….”
단군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은 주체 없이 떨리는 몸을 가누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고작 열댓 명 남짓한 인원.
처음 진혁이 ‘담수호’에 가자고 했을 때만 해도 숨겨져 있는 히든 피스를 몰래 빼 오거나.
혹은 외각에 있는 경험치 두둑하고 보상이 좋은 몬스터 따위를 사냥하자는 목적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곳에 온 이유가 아이스 트롤들…….
그것도 하필이면 가장 포악하다고 알려진 ‘서리 칼날’ 부족을 만나기 위해서란 걸 들었을 땐 그야말로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이건 자살 행위다.
이 인원으로 수천이 넘는 트롤들의 안방으로 가자는 건 그냥 죽자는 말과 다름없었다.
“가, 강진혁 플레이어님. 제발 다시 한번 재고를…….”
이태호가 간곡히 진혁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대로 바위틈에 죽은 듯 숨어 있다가 기회를 봐 도망간다면, 아직 살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그러니 제발…….
제발 사고만 치지 마라.
모두들 간절한 눈빛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뭐 이리 분위기가 축 처져 있어? 카지노에서 빤스까지 전부 날리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대기실도 아니고.”
진혁이 모두의 손길을 뿌린 채 밖으로 나갔으니까.
환한 미소를 안면 가득 띠운 건 덤이었다.
“인간!”
“침입자인가!”
아이스 트롤들이 일제히 기함했다.
순식간에 창과 방패를 갖추는 모습.
과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정예 부족답다.
“…….”
카라칼 역시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혁은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척.
걸음은 곧 멈췄다. 정확히 카라칼과 정면으로 마주보는 지점에서.
그 이상은 겹겹이 둘러싼 호위 부대 때문에 갈 수 없었다.
“흐음. 네가 이 부족의 대장이냐?”
“그렇다. 내 이름은 카라칼. 서리 칼날 부족을 이끌고 있지.”
카라칼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리고 곧바로 되물었다.
“너희 인간들이 이곳까진 어쩐 일이냐? 설마, 그 정도 숫자를 데리고 우리와 싸우겠다는 건 아닐 테고.”
“숫자 차이라……. 단순히 질보다 양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머저리라면 너무 실망인데, 만약 그렇다면 기껏 쓸 만한 카드인지 확인해 보려고 이곳까지 온 내가 너무 바보 같잖아.”
“뭐……라고?”
카라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야 그럴 수밖에.
카라칼은 일족 최강의 전사라 칭송받으며, 사실상 7계층을 통일했다고 해도 무방했다.
이곳에 보스 몬스터가 있다면, 충분히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란 이야기다.
헌데 이런 무시라니……!
심지어 주위에 있던 다른 트롤들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네놈이…… 나를 시험하겠다고? 쓸 만한지 아닌지 말이냐?”
쿠쿠쿠쿠쿠!
형언할 수 없는 살기가 호수를 가득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저릿하고.
솜털이 쭈뼛쭈뼛 일어났다.
피부에 느껴지는 압박감이 상당하다.
흠…….
이상하네.
서리 칼날 부족장급이 이 정도로 강했던가?
“이 정도면 혈족들한테도 밀리지 않았을 것 같은데, 왜 꼬리를 만 건지 모르겠군.”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진심으로. 왜 이토록 강하면서 뱀파이어들에게 굴복하는 거지?
물론, 마인들 쪽에서도 기사 칭호를 갖고 있는 놈이 왔을 테고. 두 혈족도 만만치는 않았지만…….
글쎄. 수천에 이르는 병력과 유능한 리더 격인 카라칼이 있다면, 충분히 맞서 싸워 볼 만한 전력이었다.
“내가 고작 그 두 녀석이 두려워 굴복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호오.”
지금 저 녀석이 한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베르티온과 오필리아를 상대로도 밀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데카서스가에서 내려온 혈족이 두 녀석 말고 또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더 상위급에 해당하는 뱀파이어가.
‘재밌네.’
그래, 이 정도 난이도와 변수가 있어야 짜릿하지.
너무 모든 게 쉽게만 풀리면 이 세계를 즐기는 맛이 떨어진다.
두근! 두근! 두근!
진혁의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거대한 체스판에 있는 수많은 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원하는 대로 움직여 대국(大局)을 조율하는 것이야말로 판을 짜는 묘미.
물론, 그걸 성공시키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몇 가지 있다.
지금 눈앞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는 녀석도 그 중 하나랄까?
카라칼이 의자 옆에 놓여 있는 거대한 창을 집어 들었다.
“한꺼번에 오거라. 태생부터 비겁한 인간들 따위. 혼자서 전부 다 상대해 주마.”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뭐.”
“역시 그런 불명예스러운 짓거리는 아무리 너희라도 하지 못…… 응?”
카라칼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하지만, 진혁은 당연하다는 듯 했던 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왜? 비겁한 인간 맞고. 명예도 모르는 것도 맞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명예? 긍지?
그런 건 너네들이나 열심히 찾는 거고.
이쪽은 그런 것 따윈 없다.
“들으셨죠? 단군 길드 여러분. 저흰 아주 비겁한 놈들답게 공격하면 됩니다. 다들 연장 챙기세요.”
설마, 족장이라는 놈이.
한 말이 있는데. 이제 와서 꼬리를 말 거나 하진 않겠지.
우두둑!
진혁이 가볍게 손마디를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