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x-Level Newbie RAW novel - Chapter (138)
138화. 고인물이 전황을 흔드는 법 (1)
“인간, 너, 대체…… 정체가 뭐냐?”
카라칼이 다시 한번 되물었다.
여전히 동공은 떨리고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었다.
상대가 어떻게…….
대체 어떻게 서리 칼날 부족의…….
“혼이 담긴 정수에 대해 알고 있나. 이게 궁금하다?”
“그, 그렇다.”
혼이 담긴 정수.
말 그대로 서리 칼날 부족의 조상들의 가호가 담긴 보석이다.
뭐, 아이스 트롤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렇다는 거고.
실제로는 전투에 미친 전투광들이 치고받고 싸우다가 죽었을 때 흘러나온 마력을 모아 둔 결정체였다.
‘여기선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야겠군.’
진혁이 적당한 시나리오 한 편을 즉석에서 뽑아냈다.
어디 보자.
장르는…… ‘중세 판타지’로 하면 되려나?
[Lv1 ‘희미한 체취’가 발동됩니다.]진혁의 몸에서 풍기는 체취가 점점 흐릿해졌다.
“이건 설마!”
카라칼이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단순히 체취를 감추는 스킬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다.
스킬에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마력 때문에 놀란 것이지.
‘예상대로군.’
진혁의 입꼬리는 위로 올라갔다.
역시 ‘영웅’ 등급 정도가 되면, 그 스킬이 가진 원류에 대해서도 눈치챌 수밖에 없다.
“제국……에 소속되어 있던 거였나.”
카라칼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런가.’
만약 그렇다면 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상대가 갖고 있는 터무니없는 강함도.
서리 칼날 부족의 정수에 관해서 알고 있는 것도.
모두, 막대한 세력과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제국의 일원이라는 가설이 붙는다면 앞뒤가 맞았다.
“그래. 그곳에서 왔어. 요 며칠 간 적당히 플레이어들 틈에 섞여 있었지.”
‘희미한 체취’는 정신 병동을 공략할 당시 제국에 소속된 왕국 중 하나인 ‘칼라디움 왕국’에서 받은 것이다.
제국의 암살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스킬인 데다 5층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탓에 스킬 자체에 제국 특유의 마력이 배어 있었다.
카라칼은 바로 그 점을 인지한 것이다.
물론, 그것마저 진혁이 예상해 둔 거였지만.
“족장의 자리를 이으면서 선대 족장의 지식 또한 계승했을 테니, 너도 알고 있겠지.”
진혁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우리 제국은 강하다. 당연히 황실에서 직접 보내 온 나도 그에 걸맞은 실력을 갖고 있고.”
어째서 플레이어들과 함께 있는지, 왜 탑의 중층부가 아닌 하층부로 내려왔는지에 대해선 설명해줄 필요가 없다.
오히려 적당히 숨기고 있는 편이 상대의 확신을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할 테니까.
게다가.
복사의 첫 번째 조건.
-1. 카라칼과의 대결에서 상대를 승복시킵시오.
이 문장에 물리적으로 찍어 눌러야 한다는 말은 없다.
다시 말해 어떤 식으로든 상대의 의지를 꺾어 놓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술을 마시는 두 번째 조건이야 이번 일이 모두 다 끝날 즘에나 가능할 테니, 우선은 이걸로 충분해.’
그리고 그 예상을 뒷받침하듯.
카라칼의 몸에서 풍겨 오던 투기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창끝이 아래로 향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우리에게 무얼 원하는 거냐?”
체념과 동시에 약간의 기대를 담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말을 끝으로…….
[첫 번째 복사 조건이 완료되었습니다.]진혁의 눈앞에 푸른색 상태창이 나타났다.
***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다.
이제 남은 건 쐐기를 박는 것뿐이겠지.
“내가 원하는 건 전쟁이다.”
진혁이 짧게 말했다.
그러자 카라칼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전……쟁이라고?”
“그래. 희멀건 뱀파이어들과 귀찮은 마인 놈들. 이번에 싹 다 정리해야지.”
당분간 얼굴도 못 내밀 만큼 치명타를 입혀 줄 생각이었다.
놈들은 은신처에 처박혀서 상처나 핥는 게 어울렸으니까.
“만약, 너와 손을 잡는다면 우리가 놈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많은 걸 약속할 순 없어. 나와 함께하면 많은 수의 부족원들을 잃게 될 거다.”
혈족과 마인들을 상대한다면 아무리 서리 칼날 부족이라 할지라도,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전사들의 절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 죽게 될지도 모른다.
“전사들은 언제든지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 문제는 비전투원들이지. 우리의 배신이 알려진다면…… 그리고 혹시 우리가 패배하게 된다면 부족 자체가 사라지게 될 수도 있다.”
“맞아. 분명,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
진혁은 부정하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엔 그런 것마저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대로 괜찮은 거냐? 진심으로 그저 목숨을 연명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냐는 이야기다.”
“괜찮을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부족의 맥이 끊기는 것보단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아니.”
진혁이 카라칼의 말을 잘랐다.
“그건 죽은 것만도 못한 삶이다.”
노예로 사는 삶 따위에 의미 따위가 있을 리가.
차라리 추하게 발버둥 치다 죽을지언정 맞서 싸우는 게 더욱 가치 있는 법이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카라칼이 쇳물을 삼키는 듯한 표정을 자아냈다.
뼈를 치는 말에, 꽉 쥔 주먹 사이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허면, 너와 함께한다면, 부족이 살아날 수 있는 건가?”
“아까도 말했다시피 많은 걸 약속해 줄 순 없어.”
그러나,
단 한 가지. 이것만큼은 약속해 줄 수 있다.
“명예와 긍지.”
그리고…….
“자유. 그걸 지킬 수 있게 해 주겠다.”
“……!”
그저 몇 개의 단어를 늘어놓은 것뿐.
하지만 세 단어가 갖는 의미는 감히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명예와 긍지…… 자유……라.”
카라칼이 천천히 그 말들을 곱씹었다.
탑의 저층에서야 강한 종족으로 취급받았지만 위에는 위가 있는 법.
트롤들은 언제나 더 강한 종족과 세력에 의해 이용만 당해 왔다.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쓰이며, 필요가 없어짐에 따라 그 즉시 처분당해 왔달까.
그저 강자들이 탑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쓰다 버리는 장기 말에 불과했다.
그것이 이들이 살아 온 삶이었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그 굴레를 끊어 주겠다고 하는 인간이 나타났다.
고작, 1시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만남이다. 누군가를 신뢰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인 게 당연했다.
헌데 왜일까?
카라칼은 그 말에 실린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근! 두근! 두근!
카라칼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희망을 잃은 채 굴종만 해 오던 삶이 처음으로 달라질 수 있다고 믿었기에.
오랫동안 말라 비틀어져 그 기능을 잃어버린 심장이 고동쳤다.
“처음 봤을 때부터…… 흥미로운 인간이라 생각했다.”
단순히 말뿐인 허풍쟁이들과는 다르다.
진혁이 하는 말에는 묘한 매력이 있었고.
그 매력을 뒷받침하는 실력 또한 있었다.
“네가 플레이어든 아니면 제국에서 온 자이든 신경 쓰지 않겠다.”
이것이 잘못된 선택이라 하더라도.
이것으로 인해 더 비참한 말로를 걷게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카라칼이 결정했다.
“더 이상 노예로 살아가지 않겠다.”
서리 칼날 부족은 싸우겠다고.
“크오오오!”
“오오오!”
“전투다! 무기를 들어라!”
“자유를! 적들에게 죽음을!”
거대한 함성이 호숫가를 따라 울려 퍼졌다.
이제 반격의 시작이다.
***
‘담수호’와는 거리가 제법 떨어진 지점.
하얀 눈이 검게 물든 곳엔 여러 명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베르티온과 오필리아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마인 협회에서 온 호센벨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다들 얼굴 표정이 좋지 못한 건 일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은 탓이겠지.
바로 그때.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나 강했단 말이냐? 그 강진혁이란 인간이?”
베르티온과 오필리아 역시 아름답기는 했으나, 이 남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어깨까지 오는 은발에, 루비처럼 새빨간 눈동자.
하얀 피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가히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만에 하나 길거리에서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누구라도 한 번쯤 되돌아 볼 법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 남자가 대단한 건 단순히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6명의 위대한 가주를 직속으로 섬기는 자들만 얻을 수 있는 칭호, ‘검은 날개’.
그리고 남자, 미하엘은 그 일익(一翼)을 맡고 있는 순수 혈통이었다.
움찔하고.
베르티온과 오필리아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토록 고고하던 두 혈족마저 감히 눈조차 마주치지 못할 만큼 미하엘의 위치는 절대적이었다.
“예. 분하지만, 저희 둘이 덤벼야 겨우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던 오필리아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반면, 베르티온은 즉각 반박했다.
“오필리아! 그게 무슨……! 아닙니다. 확실히 조금 성가시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방심해서 그랬을 뿐.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준다면 틀림없이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을 겁니다.”
“호오.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
“예.”
베르티온이 어금니를 갈며 전의를 불태웠다.
“나도 귀여운 수하를 위해 그렇게 해 주고 싶긴 하다만, 이미 본래의 계획과 크게 어그러진 이상 쓸데없는 곳에 수를 낭비할 여유가 없다.”
“예? 약간 밀리긴 했습니다만, 아직까진 저희가 훨씬 더…….”
“아니.”
미하엘의 시선이 저 먼 하늘로 향했다.
그러자 나머지도 고개를 치켜들었다.
정신을 집중하자 거의 점이라고 해도 좋을 작은 기계들이 날아다는 게 보였다. 미하엘이 아니었다면 눈치채기 힘들었을 것이다.
“재밌구나. 쥐새끼들을 통해 이쪽을 염탐한다라…….”
“서, 설마, 놈들이 이곳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모양이다. 아무래도 숲의 중요 거점에 대해서 모조리 파악해 둔 듯싶군. 머리가 조금 돌아가는 놈이면 언젠간 이곳을 발견할 거라 생각했지만,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르구나.”
미하엘이 빙그레 웃었다.
모처럼 재미난 놀거리가 생겼다는 듯한 천진난만한 미소였다.
“부하들을 시켜 당장 저 드론들을 격추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드론을 조종하는 놈까지 생포해 오도록 하죠.”
이번엔 호센벨트가 나섰다.
저런 식의 능력은 사용자의 일정 범위 내에서만 효력이 발휘할 터.
다시 말해 저 드론 근처에 적들 또한 함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미하엘은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희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이 넓은 숲에서 정확히 우리가 있는 곳을 파악한 놈들이 저토록 허술하게 자신들이 있는 곳을 노출시킨다는 게?”
“……함정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겠지.”
그리고 이렇게 시선을 분산시키는 이유는…….
“아이스 트롤 쪽을 노릴 생각이군.”
그래. 그것밖엔 없다.
별동대로 이쪽의 시선을 묶는 사이 다른 쪽은 아이스 트롤들이 있는 담수호로 향했을 터.
아마도 강진혁이란 놈은 서리 칼날 부족의 족장인 카라칼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니면 혹은…….
‘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혈족들이 트롤들을 심하게 대한 걸 생각하면 후자의 확률이 좀 더 높았다.
‘놈들의 창끝을 이쪽으로 돌리게 만들 생각인가.’
3종족의 연합 중 하나를 와해시킬 수 있다면, 인간들의 승률은 조금이나마 올라가리라.
게다가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걸 봤을 때 숨겨둔 수가 더 있을 거다.
엘리스 외에도 뒤를 봐 주는 세력이 더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었고.
‘재밌군.’
상황을 종합해 보면, 상대 또한 나름대로 승리를 위한 대비책을 갖춰 뒀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이러한 뒷배경을 들키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
“나를 너무 우습게 봤구나.”
미하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간치곤 나름대로 머리를 쓴 건 인정하는 바이나, 단지 그뿐이다.
수많은 전장을 경험하고 사지를 넘어온 건.
그리고 마지막까지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설명해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