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x-Level Newbie RAW novel - Chapter (177)
177화.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
“뭔가요, 그 손은?”
메이레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긴 뭐야.
“한 세력을 이끄는 대표를 의심했으면 당연히 그에 따른 보상을 지불하셔야죠.”
“보, 보상을 해 달라고요?”
“폭언에 의한 정신적 치료비와 우리 정령들 PTSD 치료 받아야 되고요. 아, 명예훼손과 모욕죄도 같이 걸리겠네요. 특정성이랑 공연성 입증 되는 것 정도는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P,PT…… 특정……성? 그게 다 무슨 말이에요?”
“이쪽 세계로 치면 삼족을 멸할 정도로 큰 죄를 지었다…… 뭐, 이런 뜻입니다.”
“그럴 수가…….”
메이레나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설마 조금 전 일이 그 정도로 심각한 건지 몰랐다는 듯.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좋아.
역시 누군가를 흔들 땐 복잡한 전문 용어를 잔뜩 쓰는 게 제일이다.
솔직히 내가 해 놓고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상대는 오죽하겠는가.
진혁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정령계의 기둥 뿌리 하나 뽑겠다, 이런 뜻은 아니고 ‘물의 축복’ 한 번만 해 주면 그걸로 넘어가 드리겠습니다.”
‘물의 축복’.
물의 정령수들 중에서도 일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로, 축복을 받을 시 소환수의 성장 속도가 10%만큼 상승하는 효과가 있었다.
‘기한은 일주일간, 그것도 보유하고 있는 소환수 중 한 개체에만 적용되긴 하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지.’
어차피 5대 원소의 정령수보단 고구마 위주의 빌드업을 짜야 했으니까.
“그거면 되는 건가요?”
“원래는 안 되지만, 이번만은 특별히 이 정도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처 받은 정령들도 조금은 마음이 풀린 듯 보이네요. 그렇지 얘들아?”
“으…… 응. 응!”
“모, 몸도 마음도 따뜻해지는 것 같아.”
“상처가 다 치유되는 기분이야.”
5대 원소의 정령수들이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별로 어려운 요구 조건도 아니니…… 사과의 의미로 그 정도쯤은 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시 한번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
[메이레나가 고유 능력 ‘물의 축복’을 사용합니다.] [받은 축복을 소환수에게 적용 시 일주일 간 성장 속도가 10%만큼 증가합니다.]물방울을 본뜬 보석이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이게 바로 중상급 이상의 정령수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축복 중 하나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정확히 입금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진혁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플레이어들과 거주자들로 인해 북적이는 테이블 사이에 제국의 재상 ‘알프레드’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나마 차선책으로라도 뽑을 인재들을 선별하느라 아주 정신이 없는 모습이다.
수염 사이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게 안쓰러울 지경이었으니까.
진혁이 그런 알프레드의 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리고 스치듯 속삭였다.
“…….”
바로 지척에 있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그러자.
“……헉?”
알프레드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급격히 팽창하는 동공에선 경악과 공포의 감정이 가득 실려 있었다.
결코 나와서는 안 될.
제국 내부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는 기밀이 새어나왔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상대를 붙잡고 추궁하려 했다.
“자, 잠깐만……!”
하지만, 알프레드의 손은 맥없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이미 진혁은 연기처럼 사라진 뒤였다.
‘일주일 뒤, 제국으로 찾아가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
탑에서 나왔을 땐 노을이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정신없이 싸웠던 것과는 달리, 이쪽 세계는 너무나도 평온했다.
퇴근하는 직장인들과…….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다들 평화로워 보이네.”
어느새 가면을 벗은 엘리스가 진혁의 곁에 다가와 섰다.
그러다가 힐끗 진혁을 바라봤다.
“이들은 알까? 지금 유지되고 있는 일상이 언제든지 박살날 수 있다는 사실을?”
90일 동안 탑의 다음 층을 정복하지 못한다면 인류는 멸망한다.
아웃브레이크가 일어난다면 게이트가 열린 도시는 하루아침에 생지옥으로 변한다.
그것이 시련의 탑이 나타난 후,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현실이었다.
“내가 실패하지만 않으면 그렇게 될 일은 없어.”
“자신만만하네. 하긴, 그게 네가 가진 매력이긴 하지만.”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따라오기나 해. 이러다가 다른 애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겠어.”
이미 천유성이나 테레사는 약속 장소로 간 상태였다. 오랜만에 이태민과 유연화도 오기로 했으니, 최대한 서두르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실없는 소리가 아니야.”
엘리스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 또한 정면으로 진혁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너는 지독하게 이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행동은 언제나 더 많은 동족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설계되어 있어.”
악인을 처단하고 무고한 이들을 구한다.
수단과 방식이 다를 뿐, 그 대전제는 변하지 않았다.
강해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도 결국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함이었으니까.
“실제로 주위의 경쟁자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고 홀로 그 화살받이 역할을 자처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는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거겠지.”
“너무 확대 해석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저 마음에 안 드는 놈들에게 당한 만큼 갚아 주는 것뿐이야.”
“글쎄. 적어도 내가 보기엔 아니야.”
“그새 관심법이라도 배운 거냐?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충고하는 거야.”
엘리스 어깨를 으쓱했다.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존재는 없어. 언젠간 너 또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선택을 하게 될 날이 오겠지.”
현자라도 우둔한 선택을 하며.
성군이라도 망국의 길로 접어드는 판단을 내리는 법이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무결점의 존재란 신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무모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나 역시 그런 성격을 싫어하진 않아.”
엘리스는 지금 그런 진혁을 책망하는 게 아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있다고 나무라는 건 더더욱 아니었고.
단지.
“조금 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믿어 봐.”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홀로 왕좌에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고독한지 알았기에.
“왕관이라는 게 의외로 무거운 법이거든.”
수많은 적들 사이에서 가문을 지킨 가주로서.
맹약을 맺은 계약자로서.
그 짐을 나눠 들고 싶을 뿐이다.
“모기!”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던 고구마도 두 눈을 반짝 떴다.
힘차게 꼬리를 흔드는 걸 보니, 확실히 심장이 뭉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동료라…….’
진혁이 그 단어를 속으로 곱씹었다.
다가오는 모든 이들이 이해관계를 따지고, 언제든지 적으로 돌변할 수 있었던 게 지난날의 삶이었다.
탑을 오르기 위해선 그 누구도 믿어선 안 되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챙겨야만 했다.
그게 당연한 거였고, 그게 유일한 길이었다.
‘그래. 이런 기분이었구나.’
등을 맡기고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들이 함께 있다는 게.
아마…… 지금 약속 장소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엘리스나 고구마와 같이 동료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들일 것이다.
“그러니까. 길게 말하긴 했는데, 결국엔 조금 이따가 맛있는 것 좀 사 달라는 거 아니냐?”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면 이럴 땐 좀 차분하게 받아 줘라 제발 좀.”
“사람이 아니라 뱀파이어겠지.”
이게 이제는 자기 정체성도 잃어버리려고 한다.
“그래서 치즈 닭갈비에 김 가루 듬뿍 뿌리고 참기름 슥삭 넣어서 볶음밥까지 한 코스 요리 때문이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당연히 그것 때문이지……가 아니라. 야!”
“역시……. 식욕은 뱀파이어도 춤추게 한다더니.”
진혁이 혀를 찼다.
그러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엘리스가 이성의 끊을 놓아 버렸다.
“너 진짜로 xxx해서 xxx한 다음에 xxxx 당하고 싶냐? 오늘 날 잡아 볼래? 내가 적당히 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아주 xxx로 xxx 했을 거라고!”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땐 ‘고귀하다’라는 형용사가 붙을 정도로 그럭저럭 근엄한 분위기는 갖췄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슬럼가의 갱스터도 울고 갈 정도로 맛이 상해 버렸다.
‘……나 때문은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아마도 아닐 거다.
아마도…….
진혁이 알 수 없는 책임감을 느끼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연신 고함을 지르는 엘리스가 뒤따랐다.
***
약 1시간 뒤. 진혁과 엘리스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평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명동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둘은 명동에서도 맛집으로 알려진 중식당으로 들어갔다.
이미 안에는 테레사와 천유성을 비롯해 이태민과 유연화 그리고 검은 까마귀 길드를 맡겼던 김희웅도 있었다.
“오빠 여기야!”
“형! 오셨어요! 오. 엘리스 씨도 오셨네요.”
유연화와 이태민이 반겼다.
하긴, 두 사람은 무도회에 초대받지 못했으니 더 오랜만에 만나는 것처럼 느껴질 거다.
그만큼 더 반갑기도 했고.
“진혁 씨.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은……. 사기만 잔뜩 치고 온 놈이 무슨 놈의 고생이냐.”
테레사와 천유성도 각자만의 방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저 자식은 이번엔 얌전히 와 줘서 좋게 봐 주려고 했더니, 꼭 이상한 말을 덧붙인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마지막으로 김희웅도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검은 까마귀 길드도 관리를 좀 하긴 해야 할 텐데…….
저번에 들었을 땐 새로운 신규 인원이 잔뜩 몰려 있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 말은 사실인 듯싶었다.
김희웅의 눈 아래로 내려온 다크서클이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고생이 많나 보네. 내가 바빠서 일일이 신경 써 주질 못해 미안해.”
“아닙니다. 대표님은 그 자리에 계셔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덕분에 제가 이렇게 자리를 잡고 길드를 키워 나갈 수 있게 된걸요.”
김희웅은 진심을 다해 고개를 숙였다.
전 길드장이었던 신건수로부터 한 일에 대해서 인정받기는커녕 착취만 당했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 수 있었다.
그렇게 가벼운 인사가 오고가자 본격적인 뒤풀이가 시작되었다.
안주는 이 식당에서 제일 잘하는 두툼한 고기와 수타로 만든 면이 돋보이는 우육면(牛肉麵)과 바삭바삭한 맛이 일품인 꿔바로우였다.
거기에 소룡포와 고량주를 곁들이자 제법 근사한 식탁이 완성되었다.
“오오. 기품이 넘치는 요리로구나.”
엘리스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요즘 들어 현대 음식이 푹 빠져 있는 엘리스는, 한‧중‧일의 다양한 음식들을 마음껏 즐기는 취미를 만끽하고 있었다.
“미천한 계약자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는데, 드디어 그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된 건가.”
“뭐? 내 뒤치다꺼리를 해?”
“그래. ‘블러드 로드’가 아니었다면, 네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터. 고귀한 이 몸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식사 후에 친히 하문토록 하마.”
엘리스가 고개를 높게 치켜들었다.
하도 높게 치켜들어서 목만 보일 지경이다.
흐음.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겠다.
간만에 단단히 버릇을 좀 고쳐 줘야지.
진혁이 슬쩍 테이블 위에 준비한 음식을 올려 뒀다.
한참이나 이것저것 손을 대던 엘리스가 문득, 진혁이 올려둔 음식을 발견했다.
“이 회색빛깔이 도는 말랑말랑해 보이는 음식은 어떤 것이냐?”
“취두부라는 건데. 유명 BJ들이 너도나도 먹으려고 서로 먹으려고 난리인 음식이야.”
벌칙용이라는 말을 빠뜨리긴 했지만, 인기가 많은 건 사실이다.
비행기 특급 배송으로 하루라도 빨리 받으려고 난리였으니까.
“호오. 그렇게 유명한 음식이라고?”
“응. 거기에 이거 베라에서 사온 민트초코라는 건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후식이야. 취두부를 먹고 그 다음에 민트초코 한 입 먹으면 어우야. 다시는 다른 음식 못 먹을 거야.”
아마…… 영원히 말이지.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엘리스가 두 눈을 반짝이며 숟가락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