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x-Level Newbie RAW novel - Chapter (197)
197화. 불멸의 대마도사 (1)
폐허로 변한 암스테르담 왕궁(王宮).
죽음의 냄새가 짙게 밴 이곳은 이제 리치가 지배하는 암궁(暗宮)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 이곳을 찾은 다섯 명의 남녀는 궁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바로 제갈천과 황보군악, 그리고 남궁현과 당소하였다.
무림에 소속된 이 넷은 ‘좀비 웨이브’가 메인 미션인 4층에서 마트를 거점으로 삼았다가 진혁에게 역공을 당해 박살이 났고.
그 일에 책임을 물어 여태까지 각자의 문파에서 수련을 거듭하며 오점을 회복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그 천박한 인간에게 당한 수모를 갚아줄 수 있겠네요.”
당소하가 어금니를 부러져라 갈았다.
감정이 쌓여 있는 건 나머지 셋도 마찬가지였다.
“장문인께서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셔서 다행이야.”
“누가 아니랍니까? 젠장. 그동안 좀이 쑤셔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한데, 맹에서는 어째서 사술로 움직이는 시체 따위에게 이번 일을 맡긴 거죠?”
황보군악의 질문에, 마지막 다섯 번째 인물이 입을 열었다.
짧은 단발머리에 어깨에 메고 있는 긴 장검이 눈에 띄는 여성이었다.
“그거야 쓸모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겠느냐? 그리고 위에서 어떤 일을 시키든 의문을 갖지 말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 생각을 갖고 있는 병사는 병사로서의 가치가 사라지는 법이니까.”
9파 중 하나인 ‘화산(華山)’의 후기지수.
설운검(雪雲劍)이란 별호를 가진 ‘백설린(白雪璘)’이었다.
백설린은 또한 무림의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절정의 벽을 깼고 초절정의 경지에 근접했다고 알려진 잠룡(潛龍)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황보군악이 말꼬리를 흐렸다.
아무리 그래도 고결한 정파의 일원이 리치와 거래를 하는 게 탐탁지 않은 듯싶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린 제국과 전쟁 중이다. 거기에 천마가 폐관을 끝냈다는 첩보가 들어온 상황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어.”
무림이 급하게 움직이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때문이다.
천마라는 양날의 검.
놈이 움직임에 따라서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무기가 될 수도 있을 테고.
반대로 놈의 검 끝이 무림에게로 향한다면 그 즉시 온 산천이 피로 물드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십만대산 인근에 위치한 곤륜이 마교의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긴 했지만,
천마나 암황. 심마사령(心魔司令)을 비롯한 마교의 칠대 고수들이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곤륜만으로 막아서는 건 불가능하겠지.
결국, 그런 변수들이 연쇄 작용을 일으키기 전에 최대한 제국의 영역을 갉아먹는 건 물론이거니와.
제국의 비호와 관심을 받는 플레이어들이 지원을 하지 못하게끔 탑 밖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었다.
백설린의 설명을 듣자, 나머지 사람들도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머리가 있는 이상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인지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궁의 중앙에 도착하자 마침내 14층을 지배하는 보스 몬스터의 모습이 나타났다.
리치.
검은색 왕관을 쓴 불멸의 마법사는 왕좌 위에서 모든 것을 오시하고 있었다.
광오하기 짝이 없는 마력이다.
심지어 상대가 훨씬 더 위층을 지배하는 무림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늦었군. 인간들은 찰나를 살면서 시간의 소중함조차 모르는 건가?”
리치가 입을 열었다.
푸른 안광은 다섯 명의 무림인들을 꿰뚫어보는 듯 날카로웠다.
“큭! 감히……!”
“사과하지. 우리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다.”
발끈한 제갈천이 움찔했지만, 한 발 먼저 백설린이 나섰다.
그러자 리치도 안광이 한층 누그러졌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라. 이미 대지 위의 모든 것들은 내 명령에 복종하고 있으니까. 성가신 놈들이 있다면 처리해 줄 수 있다.”
“탑 내부의 일이라 여기선 도움이 되질 못할 것 같군.”
백설린이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 문득 궁 내부에 있는 무언가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정확히는 완벽하게 구속이 되어 있는 한 사람에게.
“저 여자는 누구지?”
“유럽에 있는 수많은 놈들 중 유일하게 나를 즐겁게 해 줬던 인간이다. 꽤나 흥미로운 기운이 혼재되어 있어 특별히 살려 두고 있지.”
리치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파츠츠츠!
“으으…… 아…….”
검붉은 밧줄에 묶여 있는 여자가 가늘게 몸을 흐느꼈다.
실타래처럼 아름다운 금발에 초록빛을 머금은 눈동자.
백색 갑주는 피와 먼지로 더럽혀져 있었으나, 그 고결함까지 잃어버린 건 아니었다.
암스테르담의 성녀.
테레사다.
테레사는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최후까지 남아 항전했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조차 불살랐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들은 물거품으로 변해 버렸다.
아무리 발악을 해도 그녀의 검은 리치에게 닿지 않았기에.
그 결과 상상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그 모든 걸 힘없이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테레사는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움에 몸부림쳐야만 했다.
이제 과거 암스테르담을 구해냈던 성녀는 없다.
절망과 좌절에 빠진 채 울부짖는 소녀만이 있을 뿐.
리치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한층 더 짙어졌다.
“으아아아!”
빛과 어둠이 혼재되어 있는 인간의 몸 속.
그 흥미로운 소재 거리는, 뼛속까지 마법사인 리치로서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유혹이었다.
“더욱더 괴로움에 몸부림치거라.”
반드시 서로 다른 성향이 극도로 맞부딪쳤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 결과를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
한국, 미국, 일본, 인도, 러시아.
총 5개의 나라에서 유럽을 지원하기 위한 파병이 결정되었다.
리치는 마법계열 공격으로만 피해를 입힐 수 있었지만,
그 외의 언데드 몬스터에겐 나머지 공격도 어느 정도 통용되었기에 최대한 많은 수의 플레이어들이 레이드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국 팀은 총 셋.
문규호가 공대장을 맡고 있는 단군 길드의 공격대는 프랑스로.
공민우가 공대장을 맡고 있는 싸울아비 길드의 공격대는 이탈리아 일대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진혁은 개인적으로 선별한 몇몇 인원들을 데리고 테레사와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았던 장소로 향했다.
부우우웅!
군용 수송기가 구름 속을 가로질렀다.
탑 내부에 있는 유럽 쪽 게이트의 출구는 언데드들이 장악했을 확률이 높았다.
때문에 공격대는 전부 육로나 해상 혹은 공중을 선택해야만 했다.
“군대에서도 안 타 본 군용기를 여기서 타 보네.”
진혁이 안전벨트를 꼭 잡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 보자.
영화에서나 보던 각종 군용 장비들도 눈에 들어왔지만, 역시 눈앞에서 똥 씹은 얼굴로 구시렁대고 있는 천유성이 가장 눈에 띄었다.
햄버거엔 감자튀김이라고.
이제는 이 녀석이 없어서는 안 될 세트 메뉴같이 느껴졌다.
특히나 엘리스가 없는 지금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그래도 너무 불평만 하지 마. 테레사 씨가 이대로 죽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너라도 잠자리가 뒤숭숭할 거 아니야?”
“네놈이 내 잠자리가 걱정돼서 날 데리고 온 게 아닐 텐데?”
“아니야. 나는 정말로 네가 걱정해서 그런 거라니까? 날 못 믿는 거야?”
“널 믿으라고? 한밤중에 자고 있는 걸 급습해서 이곳까지 납치해 온 주제에. 지금 감히 믿음이라는 단어를 논하는 건가?”
철컹! 철그럭! 쾅! 콰앙!
천유성이 몸을 격하게 뒤틀었다.
하지만 룬어와 결계로 만든 쇠사슬이 천유성의 몸을 단단히 구속하고 있던 터라 손은 검까지 닿지 않았다.
누군지 몰라도 사슬 묶기 한번 기가 막히게 잘해 놨다.
나중에 예쁨 많이 받겠네.
“그래서 마취제는 특별히 약한 걸로 써 줬잖아. 게다가 사지로 가는데 너만큼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동료가 없어.”
이 말은 진심이다.
지옥으로 갈 때 검성만 한 전우는 존재하지 않을 거다.
여차하면 몸빵으로 쓰기에도 좋다는 게 가장 큰 이유긴 했지만.
“그걸 말이라고……!”
천유성이 더욱 발광하며 몸을 들썩였다.
그러는 사이.
진혁 옆에 앉아 있던 유연화와 이태민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오빠들은 이 상황에서 농담 따먹기가 나와? 진짜 여러 의미에서 존경스럽다. 존경스러워.”
“형들은 긴장도 안 되나 보네요. 하하. 그래서 더 믿음직스럽긴 한데…….”
두 사람의 입에서 자조 섞인 실소가 흘러나왔다.
살다 살다 사지로 걸어가는 와중에도 웃고 떠들 수 있는 인간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들도 과거에 나름대로 고인물 소리를 들었었지만…….
뭐랄까? 진혁 앞에서는 한없이 뉴비가 되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모두들 속으론 알고 있었다.
이렇게 실없는 소리를 하며 긴장감을 깨뜨리는 것도.
목숨이 걸린 긴박함 속에서도 지나치게 자신감을 보이는 것도.
모두 진혁이 자신들에게 희망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배려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있던 월영은 수송기의 입구 쪽에 앉은 채 불안한 듯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학이라고는 물레방아 돌아가는 걸 본 게 전부인 녀석이 갑자기 하늘을 날게 됐으니.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또 누구냐? 보니까 평범한 플레이어는 아닌 것 같은데?”
“아…… 쟤? 내가 키우고 있는 제자 중 하나야.”
첫 번째 제자는 지금 엘리스에게 열심히 교육을 받고 있는 안드리아고.
두 번째가 바로 저 녀석이다.
흑풍회에서 가장 잘 벼려진 암기라면 제자로 삼기에 더할 나위 없을 터.
앞으로 잘 키운 다음 요긴하게 사용할 생각이었다.
“호흡과 기척이 꽤나 수준급이던데…… 안됐군. 하필이면 너한테 걸려서 그 재능이 싹을 피우지도 못하겠구나.”
천유성이 혀를 찼다.
“야. 솔직히 나 정도면…….”
그런데 진혁이 그 말에 강하게 반박하려고 입을 열 찰나.
콰아아앙!
갑자기 엄청난 굉음과 함께 수송기의 동체 부분이 크게 흔들렸다.
단순히 난기류를 만난 수준이 아니다.
그것과는 다르다.
“다들 꽉 잡으십쇼!”
조종사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동시에.
퍼퍼펑! 콰아아앙!
창가 너머에서 집채만 한 화염이 폭발했다.
나란히 가던 수송기들이 송두리째 박살나기 시작한 것이다.
……적이다.
그것도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창밖을 가득 채운 가고일들이 수송기를 넘나들며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있었다.
아직 유럽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꽤나 남았는데…….
‘벌써 바다까지 장악한 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놈들이 바다로 기어 나왔다는 건 이미 내륙은 초토화가 되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한낱 미물들이여. 나의 영역에 온 걸 환영한다. 고생스럽게 먼 길을 온 보상으로 전부 바다 속에서 안식을 찾게 해 주겠다.]고막을 긁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하늘 저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오빠!”
“주군. 위험합니다!”
유연화와 월영이 반사적으로 안전벨트를 풀었다.
천유성도 어느새 검을 뽑은 채 전투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그러나 다들 근접전에 특화된 탓에 비행기 안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혀, 형! 제가…… 제가 어떻게든 막아 볼게요!”
유일하게 공중전이 가능했던 이태민이 ‘기계군주’를 사용해 드론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화기로 무장한 드론들이 수송기를 중심으로 방어 진형을 구축했다.
“키에에에!”
-위이이잉!
그렇게 각종 속성탄을 난사하며 수송기를 보호하려 했으나…….
‘망령의 재림’으로 인해 영향을 받은 가고일들은 평소보다 몇 배나 높은 물리 저항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고작 열 몇 기의 전투형 드론으로는 수백 마리가 넘는 가고일을 상대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빙하조형(氷河造形)…….]진혁이 끌어 모았던 마력을 한 번에 방출했다.
“손님 들어가신다.”
파츠츠츠츠!
차가운 냉기가 한 자리에 모여 하나의 형(形)을 구현했다.
하얀 달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구체.
“입 벌려라.”
[‘천년빙옥(千年氷玉)’이 개화합니다!]얼음 구체가 산산이 부서졌다.
수천, 수만 개로 잘게 부서진 파편들이 허공을 가득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피할 곳 따윈 없다.
이미 눈에 보이는 모든 하늘이 천년빙옥의 영역 아래 놓여 있었으니.
빠드드드…….
쩌저적!
공기 중의 수분이 모조리 얼어붙으며.
하늘을 날던 가고일 또한 하나도 남김없이 얼음 석상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