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x-Level Newbie RAW novel - Chapter (28)
28화 타락한 회랑의 주인 (2)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두 사람 앞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고대 그리스를 연상케 하는 장식들.
하지만, 신경 쓰이는 건 그깟 외관이 아니다.
‘이건…….’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릿! 저릿!
엄청난 마력이다.
마력을 차단해 주는 문이 있음에도 이 정도 압박감이라니.
힐끗 옆을 보자, 테레사는 아예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이, 이런 괴물을 저희 둘이서 상대해야 한다고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야 그럴 수밖에.
지금 피부를 찌르는 마력엔. 싸울 의지 자체를 짓밟아 버리는 격이 느껴졌으니까.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상대가 강하다는 건 어차피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 그거야 그렇지만…….”
“게다가 전투라는 게 반드시 강한 쪽이 이기는 건 아니에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략과 전술이 만들어졌다.
단순히 마력의 크기로 모든 승부가 결정됐다면…….
‘나 또한 결코 탑의 마지막 층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뭔가 계획이 있는 거예요?”
“딱 한 가지. 저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반드시 저를 믿어 주세요.”
짧게 내뱉은 진혁이 단검을 꺼냈다.
“네? 그게…… 무슨?”
테레사가 물었지만,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끼이이익…….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
눈부신 빛과 함께 장관이 펼쳐졌다.
황금으로 만든 바닥과 기둥.
붉은 휘장이 길게 내리깔린 곳엔 고고한 왕좌가 자리해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기다리느라 지쳤느니라.”
턱을 괴고 있던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진혁은 상대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몇 번을 봐도 놀라운 모습이군.’
허리까지 오는 긴 은발과 붉은 눈동자.
고혹적이다 못해 퇴폐미까지 느껴지는 몸.
과연, 불로불사의 축복을 받은 뱀파이어다운 외모다.
저 녀석 혼자만으로도 끔찍한데…….
진조의 옆으로 도열해 있는 혈족도 열둘이나 됐다.
하나같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놈들이다.
“사람들은 무사합니까?”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엘리스가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Lv?? 차원 단절이 해체됩니다.]베일이 벗겨지며, 포로로 잡혀 있던 사람들이 나타났다.
“으으읍!”
“읍! 읍! 으으으읍!”
재갈과 눈가리개로 감각이 차단된 채 묶여 있는 모습.
송천화를 비롯한 공격대부터.
김 반장과 짐꾼들까지.
대부분 무사해 보였다.
……다행이다.
[Lv2 ‘진실의 눈’이 발동됩니다.]진혁이 ‘진실의 눈’을 사용한 채 사람들을 훑었다.
스쳐지나가는 수십 개의 상태창들.
마력 소모가 극심했지만, 진혁은 무리해 가며 모두의 이름과 스테이터스를 확인했다.
찾아야 한다.
이중에서…….
‘그 녀석’을.
바로 그때.
“인질들이 무사한 걸 봤으니 이젠 내가 질문할 차례인가?”
기다리던 엘리스가 입을 열었다.
저건 말만 묻는다는 거지, 무조건 답하라는 일방적인 통보다.
거절하면 이 왕궁에 있는 인간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물어보세요. 사실 저도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판을 벌인 이유가 궁금하긴 합니다.”
“내가 그대를 이곳까지 초대한 건 바로 그대에게서 나오는 냄새 때문이었다.”
“냄새라고요?”
땀 냄새는 아니겠고.
뱀파이어를 자극할 수 있는 냄새라면…… 설마?
“그렇다. 네 몸에서 흘러나오는 혈향(血香)! 보통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감미로운 향이 나를 자극하였다.”
젠장.
길바닥에 널리고 널린 B형 남잔데, 갑자기 웬 감미로운 피 타령이야.
진혁이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많이 심란한 모양이구나.”
“그럼 피를 쪽쪽 빨아서 미라로 만들어 버린다는데, 심란해 하지 않을 사람도 있습니까?”
“나는 맛있는 걸 한꺼번에 먹어치우는 바보가 아니다. 적어도 60년은 생을 허락할 터이니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 말을 들으니 더더욱 안심이 안 되는데.
저거, 한 마디로 ‘평생 옆에 두면서 배고플 때마다 목에 빨대를 꽂겠다’는 말이잖아?
“호의는 감사하지만, 뱀파이어의 고급 도시락으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가학적인 취미는 다른 곳에서 알아봐라.
개중에는 좋아하는 놈도 있을 테니까.
“미안하지만, 선택하라고 말한 게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맨입으로 그러자는 건 아니고…… 피 대신 다른 걸 드리도록 하죠.”
“호오.”
맹랑한 제안이 흥미를 끈 걸까?
엘리스의 입에 걸려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우리에게 맛있는 피보다 귀중한 건 없다. 설령 무엇을 제안하든 내 마음은 변치 않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자유’라도 해도 말입니까?”
“……!?”
진혁의 말에 엘리스의 얼굴빛이 변했다.
동시에.
“감히!”
“여기서 그 단어를 꺼내다니!”
“찢어 죽여 버리겠다. 인간!”
엘리스의 좌우에 도열하고 있던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말에서 살기가 배어 나왔다.
그야 그럴 수밖에.
이들에게 있어 자유란 단순한 단어 그 이상을 의미했다.
끝없는 어둠 속에 유배되어 보낸 세월.
밤하늘을 비추는 별과 달의 아름다움도.
바람의 부드러운 촉감과 풀의 싱그러움도.
모두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네놈…… 지금 뱉은 그 말. 책임질 수 있어야 할 거다.”
“책임질 수 없다면, 애초에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진혁이 품에서 가면을 꺼냈다.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진 검은색 가면이었다.
미궁에서도 사용했었지만, 그때와는 형태가 살짝 달랐다.
오른쪽 뺨에 마력으로 새겨 놓은 룬 문자가 눈에 띄었다.
“그건…….”
엘리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역시. 알아보는군.
이 가면이 갖고 있는 의미를.
진혁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떡밥은 충분히 던져 놨으니 슬슬, 본론을 꺼낼 시간이다.
“제 이름은 강진혁.”
세뇌하자.
“탑에 있는 마인(魔人)들을 대표하여.”
현재 내가 연기해야 할 인물을.
그리고.
“지금부터 당신을 이곳에서 꺼내 드리겠습니다.”
그 인물이 갖고 있는 성격과 목표까지도.
***
마인(魔人).
돈이나 복수 혹은 개인의 신념 때문에, 인류를 등진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마인들은 플레이어들이 탑을 오르는 걸 방해했고.
심지어 미궁이나 유적에 있는 몬스터들과 손을 잡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시련의 탑이 현실로 도래한 이후. [코인농장]을 비롯한 수많은 악행은 각종 메스컴에서도 뜨겁게 다뤄지고 있기에, 마인들의 인지도는 여느 대형 길드에 못지 않았다.
“그들에 대해선 나도 들어본 적 있다. 헌데, 그대가 그들 중 하나라고?”
엘리스가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가면만으로는 확신을 주기에 부족하겠지.
그렇다면.
좀 더 알려주면 된다.
마인만이 알 수 있는 정보를.
“탑 27층에 있는 [신전]과도 이미 연락이 닿은 상태입니다. 이곳에 엘리스 님이 계시다는 사실도, 유적 전체를 감싸고 있는 봉인을 속일 수 있는 방법도 모두 그곳에서 알려줬죠.”
막힘없이 술술 나오는 말.
거기에 태연한 표정까지 곁들여진 건 덤이다.
“과연……. 신전에 관해서 알고 있는 거라면, 단순히 허언은 아니겠구나.”
“그럼, 제 말을 믿어 주시는 겁니까?”
“아니.”
엘리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는 우리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또 오랜 세월동안 불가능하다 여긴 걸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 하고 있지.”
아름다운 장미엔 가시 있는 법.
“무엇보다 말만 번지르르한 놈은 쉽게 믿을 수 없어.”
거절.
단순한 부탁이나 제안이었으면 서로 손 털고 나가면 그만이었겠지만.
여기서 거절은 곧 죽음이다.
엘리스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도열하고 있던 뱀파이어들이 몸을 달싹였다.
명령이 내려지는 즉시, 진혁은 생포하고 테레사는 죽일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쉽지 않네.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게 아니다, 이거지?
“말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한다면, 그땐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흐음?”
엘리스가 들어 올리던 손을 멈췄다.
“단순히 심증만으로 신전과 저희의 제안을 걷어차기엔, 부담이 되실 텐데요?”
“…….”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기회만 주신다면요.”
“좋다. 그대가 정말로 마인이라면…….”
엘리스의 시선이 진혁을 지나 그 뒤로 향했다.
“인간들을 죽이는 것 따위엔 거부감을 느끼지 못할 테지.”
말과 함께 푸른색 상태창이 나타났다.
[돌발 퀘스트]내용: 함께했던 동료를 죽이십시오.
보상: 엘리스의 신뢰
실패 시: 그 어떤 말로도 엘리스를 설득할 수 없게 됩니다.
죽이든가.
죽든가.
둘 중 하나뿐인 선택지.
그리고 진혁은…….
“알겠습니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단검을 움켜쥐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에 희열을 느끼면서.
***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예요!”
테레사가 배신감과 분노로 얼룩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묘했던 남자였다.
짐꾼이었지만, 보여 준 압도적인 무용.
신비롭고 어딘지 모르게 따뜻했던 인상.
그렇기에 믿으라고 했던 말을 되새기며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동료를 죽이라는 말에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순간.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상대의 정체가 정말로 마인 중 하나였다고.
“처음부터…… 저를 이용할 생각이었던 건가요?”
“그런 질문은 이제 와서 아무 의미 없는 것 아닌가요?”
진혁이 단검을 앞으로 뻗었다.
대화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이.
“쉽게 당하진 않을 거예요.”
테레사가 방패로 몸을 감쌌다.
방어 위주로 버티겠다는 건가.
“테레사 씨가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혼자서 암스테르담의 아웃브레이크를 막아낸 전설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그건 몬스터를 상대했을 때의 이야기고.
“인간을 대상으로 싸워 본 적…… 있으세요?”
탓!
진혁의 신형이 사라졌다.
“……!”
뒤!
테레사가 고개를 돌렸다.
카카칵!
방패에 전해지는 묵직한 충격.
단검이 철을 긁고 사라졌다.
‘빨라!’
게다가 이 움직임.
변칙적이다 못해 괴랄하다.
카캉! 카카카캉!
정신없이 몰아치는 공격에 테레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방어에만 집중하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엄청난 착각이었다.
이대로라면 5분? 아니, 3분도…….
입술을 질끈 깨문 바로 그 순간.
“아…….”
테레사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수를 잘못 읽었고.
그로 인해 대처가 어긋났다.
물론, 그 틈을 놓칠 진혁이 아니었다.
푸욱!
관절을 원활하게 움직이기 위해 비워 둔 틈.
단검이 갑주로 보호받지 못한 곳을 파고들었다.
테레사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동맥이 잘린 터라, 상처에선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치명상이다.
“아……으으…….”
신음하던 테레사가 결국 고꾸라졌다.
그리고 그대로 숨을 거뒀다.
‘하나로는 부족하겠지.’
단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낸 진혁이 몸을 돌렸다.
벌벌 떨고 있는 공격대.
진혁은 그중에서 열댓 명의 사람들 앞에 섰다.
‘진실의 눈’을 통해 확인해 뒀으니 틀림없다.
우드득!
진혁이 그 중에서 가장 앞쪽에 있는 남자의 재갈을 부수고 안대를 벗겨 냈다.
그러자 자유가 구속되어 있던 남자가 환호성을 터뜨렸다.
“구, 구조대……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 어라?”
감격에 겨워 있던 남자가 도중에 말끝을 흐렸다.
곧바로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반면.
진혁은 생긋 웃었다.
“안녕?”
오랜만에 보네.
이 빌어먹을 놈아.